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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fff> 江華 骨氏 강화 골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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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인천광역시 강화군 | ||
시조 | 골귀손(骨貴孫) | ||
집성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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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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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의 성씨로 현재는 사라졌다. 본관은 강화 단본.2. 역사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골씨는 경기도 강화도호부(現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평안도 영변대도호부(現 평안북도 영변군)의 연산(延山)으로 이주했다.《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에 의하면, 평안도 영변대도호부에 거주하던 유학(幼學) 골인서(骨仁瑞, 1524 ~ ?)는 1568년( 선조 1) 증광 진사시에 3등 27위로 입격했다. 당시 본관은 강화(江華)였고, 자는 언부(彦符)였다. 아버지는 계공랑(啓功郞)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 골귀손(骨貴孫)이었고, 위로 형 골인구(骨仁球), 골인구(骨仁璆), 골인수(骨仁琇)이 있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1 「앙엽기(盎葉記)」에 수록된 「 동국제성(東國諸姓)」을 보면, 이덕무가 1789년( 정조 13) 《 동국여지승람》을 수보하면서 한성부 호적을 일일이 검사한 뒤 당시 한성부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성씨를 모두 기록해놓았는데, 이 중에서도 골(骨)씨가 나타난다.
맞춤법 실수일 가능성이 있지만, 1905년 5월 18일, 'Mer Poon Na Dul'에서 거주하던 골점동( Kol, Chum Dong)씨가 하와이로 이민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말이라면 골씨가 대한제국 때까지도 있었을 수 있다.
1930년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는 집계되지 않았고,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서도 집계된 적 없다.
천방지축마골피에 포함되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참봉, 진사를 배출한 성씨로, 양반 가문에 속한다. 이를 통해 '천방지축마골피'의 허구성을 지적할 수 있다.
3. 인물
3.1. 실존인물
- 골귀손(骨貴孫): 강화 골씨의 시조. 역임 직위는 계공랑 기자전참봉.[2] 인구(仁璆), 인수(仁琇), 인서(仁瑞)라는 아들을 뒀다.
- 골인서(骨仁瑞): 위 인물의 막내아들. 1524년생으로 자는 언부(彦符), 거주지는 영변이다. 선조 1년(1568) 45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3등 27위로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