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정현(正顯) / 동강(桐崗) |
본관 | 제주 고씨[2] |
출생 | 1862년[3] 4월 7일 |
전라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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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0년 10월 26일[5]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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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고광순은 그의 셋째 형이다. 고영한 전 대법관은 그의 장증손자이다.
2. 생애
고광훈은 1862년 4월 7일 전라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11대손인 아버지 고정상(高鼎相, 1819 ~ 1872. 7. 25)[6]과 어머니 광산 김씨(1817 ~ 1879. 8. 19) 김경섭(金京燮)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고광훈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킨 형 고광순의 의병대에 입대했고, 의병 해산 후 자택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을사조약 이후 1907년 1월 24일에 녹진에서 봉기한 형의 참모부장을 맡았다. 그는 고광덕, 고광채, 윤영기, 박기덕 등을 참모로 삼고 각 부서를 맡아서 왜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각지의 의사들에게 격문을 발송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이때 남원의 양한규로부터 남원합동작전을 전개하자는 제의를 받고 2월에 남원으로 진격했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양한규 의병대가 적에 의해 궤멸된 것을 확인하고 남원성을 잠시 포위했다가 곧 퇴각했다. 그 후 대오를 정비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능주 사림의 일시 지원을 받은 뒤 1907년 4월 25일 윤영기와 함께 화순으로 진격해 점령하고 적 거주민들의 가옥을 불태웠다. 다음날 다시 동복(同福)으로 진군했지만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맞붙어 크게 패하고 병사들이 일시적으로 흩어졌다.
1907년 8월, 고광훈은 창평 제심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거사 게획을 세우고 9월 11일부터 형 고광순을 도독으로 삼고 박성덕(朴聖德), 고제량을 도총(都總) 및 선봉으로, 신덕균, 윤영기(尹永淇) 등을 참모로 정하고 9월 12일부터 행군을 시작했다. 곡성군 구룡산에 이르렀을 때 참모 신덕균의 제의를 받아들여 행로를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동복읍으로 이동시켰고 9월 14일 새벽 동복읍을 점거하고 적들을 궤산시켰다.
9월 17일, 김광순과 고광훈의 녹천 의진은 다시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군대를 주둔시키고 병사들을 훈련시켰으며, 인근 일대에 많은 장정들을 모집해 병사의 숫자가 1,000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10월 17일 적의 내습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또다른 일본군이 하동으로부터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녹천 의진은 붕괴되고 고광순과 고제량 등은 전사했으며, 고광훈은 체포된 뒤 광주에서 5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또 3년간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단지 1930년 10월 26일에 사망한 것만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고광훈에게 독립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