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상화무늬 전
측면의 모습. 두 마리의 사슴이 그려져 있다.
전돌 무늬 탁본. 사진 출처 : 한국의 옛 전돌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7세기~8세기 경 통일신라시대 전돌.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과거 안압지라고 불리던,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전돌 중 하나이다. 당시 월지에서는 수백여점의 전돌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전돌은 그 중 하나로, 당시 건물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연구 결과 제작 연대는 7세기~8세기 무렵으로 확인되었다.경주 월지에서는 최초 발굴조사 당시 무려 1만 5천여 점이 넘는 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불상, 숟가락, 청동거울, 벼루, 송곳, 가위, 건물의 목재 조각, 심지어 유람용 배까지 별의별 유물들이 다 나왔다. 이후 지속적으로 월지를 발굴하여 2008년 기준 금속공예품 1152점, 목제품 920점, 철제품 603점, 와전류 2만 4353점, 토기류 ,388점, 기타 2171점 등, 총 3만 2587점에 이르는 신라시대 유물들이 추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
월지에서 발견된 전돌들을 이은 모습 사진 출처
사진 출처: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안압지 출토 기와에서 보이는 다양한 동.식물 문양
월지에서는 바닥에 깔았던 전이 수백여 점 이상 다량 출토되어 당시 화려했던 신라 궁궐건축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월지에서 출토된 대부분 전은 윗면을 보상화로 장식하여 통일신라 초기에 이 문양이 매우 성행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제작된 보상화무늬 전의 측면에는 주로 용이나 두 마리의 사슴무늬가 표현되는데, 특히 월지에서는 사슴을 새긴 전이 많이 출토되어, 당시 사원을 제외한 궁궐건축에서 사슴무늬가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이 전의 윗면에는 중앙에 연판, 그 외측에는 커다란 보상화무늬를 두고 네 모서리에는 별개의 꽃잎을 장식하였으며, 특히 옆면의 사슴무늬는 양감이 적당하고 주위에 넝쿨무늬를 화려하게 배치하여 구도면에서 완벽한 균제감을 느낄 수 있다. 월지에서 다량 출토되므로 제작연대는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일본 정창원 소장 黃金瑠璃鈿背十二稜鏡1 | 일본 정창원 소장 黃金瑠璃鈿背十二稜鏡2 |
현재 일본 정창원에는 보상화무늬 칠보 문진 2점이 소장되었다. 기존에는 이 유물들이 중국 당나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일본 학계에 널리 알려졌으나, 실제 당나라의 문양과는 다른 면모가 많은데다 월지에서 쏟아져나오는 전돌의 보상화 무늬 형태와 거의 같음이 드러나 정창원 신라금, 정창원 신라 양탄자, 정창원 신라 유기그릇, 정창원 신라 숟가락, 정창원 신라 먹, 정창원 비파 등과 함께 신라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
3. 비슷한 유물들
3.1. 황룡사
보상화무늬 전(寶相華文塼, Brick with Floral Medallion Design) - 경주 황룡사터(皇龍寺地), 신라7~8세기, 너비 35cm 사진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인스타그램
측면의 모습. 사진 출처
경주시 황룡사터에서 발견된 보상화무늬 전의 모습. 월지와는 달리 측면에 사슴이 아닌 용이 그려져있다.
황룡사 바닥에 사용하였던 전(塼)으로 윗면에는 화려한 보상화무늬, 좁은 옆면에는 역동적인 용을 배치하였고, 윗면의 문양은 중앙에 연판, 그 바깥쪽에는 큼직한 보상화무늬를 두고 다시 바깥에는 돋을선으로 경계를 지워 당초무늬를 표현하여 완벽한 구도를 보인다. 옆면의 용무늬는 몸통이 심하게 틀어져 역동감을 자아내며, 그 주위에는 서기(瑞氣)를 적당히 배치하여 완벽한 균제감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한 점의 만다라를 덩굴무늬 액자에 넣은 듯 하며, 옆면에는 ‘황룡’을 상징하듯 역동적인 용무늬가 새겨져 있어 위의 월지 출토 보상화무늬 전의 두 마리 사슴무늬와 비교된다.
3.2. 동궁
바로 옆, 신라 임해전지(동궁)터에서 출토된 '조로2년(調露二年)'명 문자새김벽돌 보상화무늬 전. 사진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 왜 깨어진 전돌을 전시하고 있을까?
측면의 모습. 변의 길이 32.3 X 28.5cm, 두께 7.5cm.
동궁터에서 발견된 조로2년(調露二年)명 보상화 무늬벽돌로, 이보다 더 아름답고 깨어지지 않은 전돌도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경주박물관 소장 유물 100선'에 들어가 있다.
옆면에 "조로2년 한지벌부군약소사 3월3일 작강(調露二年 漢只伐部君若小舍 三月三日作康...)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조로 2년(調露 二年)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재위 시절로 680년에 해당한다. 낱카로운 기물로 흙이 마르기 전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데 그 뜻은 '조로 2년(680년)에 한지벌부 출신인 소사벼슬의 군약이 3월 3일에 만들었다'라는 내용이며, 명문에 보이는 한지벌부(漢只伐部)는 당시 신라 육부 중의 한 부였던 한지부(漢只部)이다.
중국 당나라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발해 상경성터 보상화무늬 전돌 사진 출처
링크 에 따르면 이 유물은 중국 당나라 보상화문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당나라의 것들은 굽는 기술과 더불어 거기에 새겨진 무늬가 신라의 보상화문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당나라로부터 유입된 것이지만 독창성이나 세련미에서 당나라의 유물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이 신라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4. 기타
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녹유 보상화문 전
경주시의 한 민가 터에서 발견된, 녹유가 발라진 신라 보상화무늬 전. 8세기 당시 이러한 전돌들이 경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복원된 월정교에 가 보면 바닥 타일이 이것으로 깔려있다.
기타 신라시대 보상화문전의 모습은 이 링크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