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게오르기 보이테흐 (영어: Georgi Voyteh, 불가리아어: Георги Войтех) |
출생 | 미상 |
사망 | 1072년 |
반란 대상 | 미하일 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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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반란자.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2. 생애
불가리아 귀족으로, 1072년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 총독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의 심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불가리아인들의 추대로 반군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지난해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참패한 여파로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기에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그는 스코페를 본거지로 삼고 불가리아 제1제국의 옛 수도 프리즈렌을 점령한 뒤, 디오클레아(달마티아) 대공 미하일로에게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미하일로는 아들 콘스탄틴 보딘을 불가리아의 차르로 추대하라고 요구했고, 보이테흐는 흔쾌히 수락했다.1072년 가을 콘스탄틴 보딘이 프리즈렌에 도착하자, 그는 보딘을 불가리아의 차르로 선포하고 '페터르 3세'를 칭하게 하였다. 이후 보딘과 보이보다 페트릴로가 각각 니시와 카스토리아로 진격하는 동안, 그는 스코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스코페를 포위하자, 그는 오랫동안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로마 지휘관 미하일 사란테스와 협상한 뒤 도시를 그에게 넘겼다. 나중에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보딘에게 서둘러 스코페로 와달라고 요청했고, 보딘은 스코페로 달려갔지만 도중에 타오니오스에서 동로마군의 기습으로 사로잡혔다. 이로 인해 모든 게 탄로나면서, 그 역시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던 도중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