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21:13:11

강주룡

파일:강주룡.jpg
<colbgcolor=#0047a0> 출생 1901년
평안북도 강계군
사망 1932년 8월 13일
평양시 서성리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노동운동
2.2.1. 죽음의 고공농성
2.3. 사망
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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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901년경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가난에 쫓긴 가족과 함께 서간도 길림성 통화현으로 이주했는데 7년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농사를 지었고 20살 때 통화현에 살던 최전빈(崔全斌)과 결혼했다.[1] 그녀는 1931년 7월 5일 <동광>지와의 인터뷰에서 남편과의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의 고향은 平北 江界(평북 강계)입니다. 열 네 살까지는 집안이 걱정 없이 지냇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야 내 나히 열 네 살 쩍에 西間島(서간도)로 갓습니다. 거긔서 농사하면서 7년 동안 살앗는데 스므살 나든 해에 通化縣(통화현)에 잇는 崔全斌(최전빈)이라는 이에게 시집갓습니다. 남편은 그때 겨우 15세의 귀여운 도련님이엇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앗다기 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엿습니다. 첫눈에 아조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엇습니다. 부부의 誼(의)도 퍽 좋앗습니다. 洞里(동리)가 다 부러워 하엿답니다.
'乙密臺上의 滯空女(을밀대상의 체공녀), 女流鬪士 姜周龍 會見記(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23호 - 무호정인(無號亭人)

최전빈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1922년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백광운(白狂雲)이 이끄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1중대에 배속되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가서 6개월간 함께 지냈지만 최전빈이 "거치정 거려서 귀찬으니 집에 가 있으라"고 채근하자 남편의 속뜻이 정말 자신이 귀찮은 게 아니라 아내를 고생시키는 게 가엾고 미안해 그러는 걸 눈치채고 본가로 돌아갔다. 그러나 6개월 후 남편이 병으로 위급하다는 급보를 들은 그녀는 그 길로 남편의 집으로 달려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이는 등 필사적으로 간호했지만 1923년 10월 10일을 일기로 결국 남편은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

그 후 그녀는 시댁에 남편 최전빈의 죽음을 알렸는데 시댁에서는 그녀가 남편과 끝까지 함께 있지 않고 떨어져 살았기에 최전빈이 죽었다고 원망하며 그녀를 "남편 죽인 년"이라며 중국 경찰에 고발했다. 그녀는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 지내다가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시집에서는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친정으로 돌아오니 돌봐야 할 부모와 어린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1925년에 조선으로 귀국했다.

2.2. 노동운동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면에 잠시 정착했다가 이듬해 평양으로 가서 평양 선교리에 있던 평원고무공장에 취직했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고무 공업이 큰 타격을 입자 노동자들은 임금삭감이나 해고,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와 같은 악조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녀는 1930년 평양고무직공조합이 임금인하와 해고에 반대해 8월부터 9월 초까지 진행한 파업투쟁에 참여했다. 당시 2천여 명의 파업노동자들 중 3분의 2가 여성 노동자로 기혼 여성들이 많았다고 하니 이들이 임금인하·해고 반대뿐만 아니라 ‘산전 산후 3주간 휴양과 생활보장, 수유시간 자유' 같은 요구를 한 것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임금이 싼 고무신발공장에는 조선의 여성노 동자들이 많았는데 1929년 기준 공장노동자의 임금이 일본인 남성 2.32원, 일본인 여성 1.21원, 한국인 남성 1.00원, 한국인 여성 0.59원이었다고 하니 이들은 일본인 남성 노동자들의 고작 4분의 1 수준으로 임금을 받은 셈이다. 게다가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아기의 젖을 물리고 남자 감독관으로부터 몸 검사, 폭행, 성희롱을 받아 가며 하루 12시간 이상 심지어 15시간까지도 노동을 해야 했다.

고무공업계는 1930년 5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 고무공업자대회를 통해 임금 인하를 결의했다. 이에 8월 7일 5개 고무공장 노동자 1080명의 파업을 시작으로 9일에는 평양 시내 15개 고무공장에 근무하는 1800명이 동맹파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임금은 결국 10% 삭감되었다.

2.2.1. 죽음의 고공농성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조선인 사장은 임금 17% 삭감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49명은 5월 17일에 파업을 선언했으며 작년에 노동조합에 가담했던 그녀도 여기에 동참하여 맨 앞에 서서 파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공장 측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그들은 5월 28일에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나섰다. 이에 사장은 다음날 새벽 일제 경찰을 불러 49명의 노동자 전원을 정문 밖으로 내치고 해고를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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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5월 29일 새벽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정처없이 걸어가다가 무명천 밧줄을 타고 을밀대(乙密臺) 지붕 위에 가까스로 오른 뒤 날이 밝아오자 산책 나온 평양시민들을 향해 연설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고공농성이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賃金減下(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平壤(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賃金減下(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 나는 平元(평원) 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賃金減下(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끗까지 賃金減下(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 노동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여 나를 여기서 (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웅 우에 사닥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저 죽을 뿐입니다.
'乙密臺上의 滯空女(을밀대상의 체공녀), 女流鬪士 姜周龍 會見記(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23호 - 無號亭人

그렇게 그녀는 7시간 동안 고용주의 비인도성을 비판하고 노동생활의 참상을 고발하며 노동자들의 권익을 수호해야 한다고 호소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져 평양경찰서로 끌려갔지만 경찰서에서도 5월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에 76시간의 검속시간이 지나 풀려날 때까지 단식투쟁을 벌였고, 풀려난 후에는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했다. 신문들은 이 사건을 앞다퉈 기사로 실으면서 그녀에게 '여류투사 강 여사', '체공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후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파업을 지속했고 6월 7일 공장 측은 마침내 임금 인하를 철회하고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 중 절반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공장에 복직하지 못했고 6월 9일에 5월 4일 정달헌의 소개로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2.3. 사망

체포된 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6월 4일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출소 직후 평양 서성리 빈민굴[2]에서 신경쇠약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몸을 돌봤지만 악화되는 병세를 버티지 못하고 자택에서 1932년 8월 13일에 향년 31세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8월 15일 남녀 노동자 100여 명에 의해 장례를 치른 뒤 평양 서성대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강주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작 강주룡이 살았던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기념도 하지 않는다.

3. 대중매체

2018년 박서련의 소설 <체공녀 강주룡>이 출간되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며 창극으로도 만들어졌다. # 강주룡 역이 다인 1역인 것이 특징이며 음악은 판소리가 주축인데 반주는 건반, 기타와 베이스,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가 주도하는 퓨전 스타일. 국악기 연주자는 을 치는 고수가 유일하다. 2023년 3월 31일~4월 2일 공연이 진행되었다.


[1] 당시 15살로, 아내보다 5살이나 연하인 꼬마신랑이었다. [2] 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빈민굴이다. 당시 주거환경으로 보아 움막집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