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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4년 4월 16일 |
전라남도
제주도 우면 법환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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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2년 7월 10일 |
본관 | 신천 강씨[2] |
부모 | 아버지 강성진, 어머니 윤봉희 |
형제자매 | 남동생 4명 |
학력 | 코코쿠상업학교 (졸업) |
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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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2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제주도 우면 법환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아버지 강성진(康性珍)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봉희(尹奉喜)[3] 사이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거주하였으며, 오사카 소재 코코쿠(興國)상업학교[4] 야간부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학업을 이어나갔다.그러던 1942년 7월경,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 나의 투쟁』을 숙독하고 자신도 한민족을 위한 독립투사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따라 그해 9월경 학우인 이영문(李永文)·강권우(康權佑)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이들과 함께 급우들에게 " 인도의 독립운동은 인도인 학생들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듯이 조선독립운동의 중심은 우리 학생들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같은 해 12월 중순 "우리들은 진정한 반도인(半島人)이며 개개인이 아닌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아 근로계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강권에 의하여 자유를 속박당하고 우리 민족은 더욱이 침략세력의 채찍질에 고통을 받는 피압박 형제들인 것입니다. …(중략)… 학교의 교육방침은 대개 간단·명확히 말해 본다면 훌륭한 일본인이며 천황에게 충성하고 황운(皇運)을 받들어 모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총의(總意)입니다. 우리들에게 반도를 위해 어떻게 하라는 문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말하자면 일본을 위해 일본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지 반도를 위한 조선적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우리들은 국어(國語)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권의 유지도 어렵습니다. 주권이 없는 민족의 고유 풍속, 언어의 구제사업은 희망이 없습니다."라는 원고를 작성·등사하여 친구들에게 전달하는 한편, 졸업기념 간담회에서 이를 낭독하여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계몽하려다 발각되어 같은 달 2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약 6개월 후인 1943년 5월 10일 검찰에 송치되어 오사카구치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직후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제주도로 돌아온 후, 1956년 재단법인 제주여자학원[5]이 설립되자 이 곳 서무과에 근무하기도 했으며 #, 그 밖에 제주도청년회 부회장, 수산업협동조합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1982년 7월 10일 별세하였으며 1995년에 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