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08:02:25

강기찬

1. 제주도 출신 독립운동가, 강기찬2. 녕변군 출신 독립운동가, 강기찬

1. 제주도 출신 독립운동가, 강기찬

파일:강기찬.jpg
<colbgcolor=#0047a0> 출생 1903년 5월 28일
전라남도 제주시 건입동
사망 1955년 11월 25일
제주도 제주시 건입동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clearfix]
1903년 5월 28일 전라남도 제주목 건입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3월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27년 3월에 고병희(高秉禧), 조대수(趙大洙), 고영희(高永禧), 김형수(金炯洙), 임상국(任祥國) 등과 함께 아나키즘 연구에 필요한 문고(文庫)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들은 각자 월 3원씩 각출하여 사상 서적을 구입했고, 매달 1회 회합하여 공동으로 연구했다. 또한 동지를 모아 조직을 확대하였고 1927년 10월 소비조합을 결성해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후 강기찬은 1928년 4월경 독서회를 조직했다. 독서회 회원들은 공동 구입한 도서를 돌려 읽고 매일 30원씩 모아 공동 연구를 진척시키기로 결의했다. 또한 1929년 5월 5일 독서회의 운영을 위해 '우리계'란 조합을 결성했다. 우리계는 표면상 우의돈목(友誼敦睦), 애경상문(哀慶相問), 생활향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 계원은 도청, 은행, 금융조합, 학교 등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실업가와 도내의 유지들이 망라되었으며, 계원들은 매일 300원씩 회비를 은행에 예금하고 노자의 근(勤), 검(儉), 양(讓) 사상에 따라 생활하기로 했다. 이들은 1929년 9월 각 동리에 야학을 개설하여 무정부주의 사상과 배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강기찬은 1930년 7월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30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1931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55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강기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녕변군 출신 독립운동가, 강기찬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년 ?월 ?일
평안북도 녕변군
사망 1908년 ?월 ?일
평안북도 녕변군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clearfix]
평안북도 녕변군 출신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전반적인 생애는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다. 1908년 영변에서 동료 2명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총기와 탄약을 마련하기 위해 부일배로 조직된 자위단(自衛團) 단장을 습격해 무기와 탄약을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자위단이 그들을 공격하자 총격전을 벌이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다른 2명은 도주했다. 이후 강기찬은 관청으로 압송 도중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자위단원들에게 사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기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