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23:45:17

훌리오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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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프랑코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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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9 MLB 올스타전 로고.png 파일:1990 MLB 올스타전 로고.png 파일:1991 MLB 올스타전 로고.pn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89 1990 1991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8년 ~ 199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2루수 부문 실버 슬러거
루 휘태커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훌리오 프랑코
( 텍사스 레인저스)
로베르토 알로마
( 토론토 블루제이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지명타자 부문 실버 슬러거
폴 몰리터
( 토론토 블루제이스)
훌리오 프랑코
( 시카고 화이트삭스)
에드가 마르티네즈
( 시애틀 매리너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조지 브렛
( 캔자스시티 로열스)
훌리오 프랑코
( 텍사스 레인저스)
에드가 마르티네즈
( 시애틀 매리너스)

파일:MLB 로고.svg 1990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 MVP
보 잭슨
( 캔자스시티 로열스)
훌리오 프랑코
( 텍사스 레인저스)
칼 립켄 주니어
( 볼티모어 오리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5년 퍼시픽리그 1루수 베스트나인
1993~1994년
이시이 히로오
( 킨테츠 버팔로즈)
훌리오 프랑코
( 치바 롯데 마린즈)
1996년
가타오카 아츠시
(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8년 퍼시픽리그 2루수 베스트나인
1997년
고쿠보 히로키
( 다이에 호크스)
훌리오 프랑코
( 치바 롯데 마린즈)
1999년
가네코 마코토
( 닛폰햄 파이터즈)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15번
라몬 아빌레스
(1979~1981)
훌리오 프랑코
(1982)
스티브 젤츠
(1983~198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14번
데이브 프라이슬레벤
(1978)
<colbgcolor=#002B5C> 훌리오 프랑코
(1983~1988)
제리 브라운
(1989~1991)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14번
짐 앤더슨
(1984)
훌리오 프랑코
(1989~1993)
빌리 해처
(1995)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번호 14번
크레이그 그레벡
(1990~1994)
훌리오 프랑코
(1994)
데이브 마르티네즈
(1995~199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23번
제레미 버니츠
(1995)
훌리오 프랑코
(1996~1997)
데이비드 저스티스
(1997~1999)
밀워키 브루어스 등번호 25번
리키 보네스
(1992~1996)
훌리오 프랑코
(1997)
브라이언 뱅크스
(1998)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등번호 18번
팀 창단 훌리오 프랑코
(1999)
벤 그리브
(2001~200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4번
노장진
(1999)
프랑코
(2000)
리베라
(2001)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4번
퀼리보 베라스
(2000~2001)
훌리오 프랑코
(2001~2002)
맷 프랑코
(2002~2003)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23번
버나드 길키
(2001)
훌리오 프랑코
(2002)
자니 에스트라다
(2003~2005)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14번
데이브 마르티네즈
(2001)
훌리오 프랑코
(2003~2005)
마틴 프라도
(2006)
뉴욕 메츠 등번호 23번
이시이 카즈히사
(2005)
훌리오 프랑코
(2006~2007)
말론 앤더슨
(2007)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14번
윌리 아이바
(2006)
훌리오 프랑코
(2007)
마틴 프라도
(2008~2012)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1번
박현승
(2010~2015)
프랑코
(2016~2020)
정성종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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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ulio_Franco_Texas_Rangers.jpg
훌리오 프랑코
Julio Franco
본명 훌리오 세사르 로블레스 프랑코
Julio César Robles Franco
출생 1956년 8월 23일 ([age(1956-08-23)]세)[1][2]
도미니카 공화국 아토 마요르 주 아토 마요르 델 레이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디바인 프로비던스 고등학교
신체 185cm, 95kg
포지션 1루수, 2루수, 유격수, 우익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78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 PHI)
소속팀 부트 코퍼 킹스 (1978)[3]
필라델피아 필리스 (198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83~1988)
텍사스 레인저스 (1989~1993)

시카고 화이트삭스 (1994)
치바 롯데 마린즈 (199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6~1997)
밀워키 브루어스 (1997)
치바 롯데 마린즈 (1998)
티그레스 카피탈리노스 (1999)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1999)
삼성 라이온즈 (2000)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01~2005)
뉴욕 메츠 (2006~2007)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07)
티그레스 데 킨타나 로오 (2008)
포스워드 캣츠 (2014)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 (2015)
지도자 GCL 메츠 감독 (2009~2011)
카리베스 데 안소아테기 감독 (2010/11)
페리코스 데 푸에블라 감독 (2012~2013)
포스워드 캣츠 감독 (2014)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 감독 (2015)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6)[4]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6~2017)[5]
롯데 자이언츠 잔류군 타격코치 (2017)[6]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8~2019)
롯데 자이언츠 잔류군 총괄코치 (2020)
아세레로스 데 몽클로바 타격코치 (2022~)

1. 개요2. 선수 경력3. 롯데 자이언츠 코치행4. 이후5. 평가6. 기타7. 연도별 성적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야구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치고, 베이스를 뛸 수 있으면 됩니다."

도미니카 공화국 국적의 전 야구선수.

1988년부터 1991년까지 4년 연속 실버슬러거를 수상했고 1994년에도 실버슬러거를 수상했으며 블라디미르 게레로 알버트 푸홀스가 넘어서기 전까지 빅리그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선수로는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낸 선수였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2년 뛰면서 2년 모두 베스트나인을 수상했다. 또한 1루수로 뛴 1995년에는 골든글러브도 거머쥐었다.

철저하고 엄격한 자신만의 건강관리로 메이저리그 통산 2,527경기 출장 9,731타석 8,677타수 1,285득점 2,586안타 173홈런 1,194타점 281도루를 기록하는 등 많은 선수들에게 모범을 보여줬었다. NPB와 KBO 기록까지 합치면 무려 3000안타를 쳐냈다.

2. 선수 경력

2.1. 메이저 리그 시절

1978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자유계약으로 마이너 리그 팀에 입단해 프로 야구 생활을 시작했고, 1982년 4월 2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유격수로 선발출장해 4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대망의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1983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1루수 본 헤이스를 상대로 매니 트리요, 조지 부코비치, 제이 볼러, 제리 윌러드와 함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며[7], 그때부터 유격수에서 2루수로 포지션을 바꾸며 성공적인 안착을 하게 된다. 그 해에 신인왕 투표 순위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8]

파일:external/boxscorebrothers.weebly.com/2759293_orig.jpg
(1차 전성기였던 1990년대 초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의 타격 자세. 배트를 투수 방향으로 겨누는 듯한, 독특한 포즈를 취한 것으로 유명했다. 국내 선수 중에는 박진만이 유사한 타격폼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후에는 더욱 승승장구했다. 먼저 이듬해인 1990년 올스타전에서 결승타를 기록해 올스타전 MVP를 차지했고, 다음해인 1991년에는 .341의 타율로 아메리칸리그 타격왕에 등극한 것이다.

당시 그는 매년 2할 8푼~3할 중반대에 10~20홈런 20~30도루를 기대할 수 있는 성적을 발휘했고, 클리블랜드 말년인 1988년부터 실버슬러거를 시작으로 1989년 텍사스 레인저스에 이적한 이후 1992년까지 4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 실버슬러거 2루수 부문에 오르며 강타자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93~94년에는 2차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1993년의 경우 레인저스에서 46경기 연속 출루 대기록으로 텍사스 레인저스 팀 내에서 25년을 최다 출루 기록자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차지했다. [9] 1994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처음 시즌 20홈런을 때렸고, 아메리칸리그 실버슬러거 지명타자 부문을 차지했다.

다만 상복은 만년 약체였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5할은 찍지만 포시에는 못 올라가던 당시의 텍사스 레인저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좋지 못한 성적으로 인해, 2차 전성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MVP 후보에서는 1994년 당시 투표에서 8위에 그쳤다.

2.2. 일본프로야구 시절

1995년에는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의 여파로 메이저리그 시즌이 정상적으로 개막하지 못하자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해 일본프로야구에서 뛴다.

레인저스의 감독이었던 바비 발렌타인과 함께 1년을 뛰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지만[10] 이후 1998년에 다시 치바 롯데 마린즈와 계약했다.

이때 일본야구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로서 팀의 주장을 맡으며 주장에 걸맞은 실력으로 매우 대단히 활약하였다. 다만 이 해 치바 롯데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다연패인 18연패 기록을 세우며 침몰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 이후 나이가 너무 많아서 팀의 리빌딩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2루수 베스트나인을 수상하고도 재계약에 실패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뛸 때에도 그 이후의 삼성에서 뛸 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생활습관 관리 등으로 일본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2.3. 삼성 라이온즈

파일:external/news.nateimg.co.kr/2015102101002249900154541.jpg
이런 거물이 2000년 당시 KBO로 넘어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는데 심판들의 노골적인 견제[11]에도 불구하고 132경기에 출장해 타율 3할 2푼 7리(477타수 156안타) 22홈런 110타점 79득점 12도루의 호성적을 기록했지만, 당시 팀에서는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홈런이 생각보다 적어 보이는데, 당시에도 홈런이 적어 국내에서 프랑코 무용론이 불자 자청하여 기자들을 불러 모으고는 "내가 홈런을 '못' 치는 거라고 생각하나? 우리팀엔 이승엽, 김기태, 스미스 있으니까 칠 필요가 없는 거지 못 치는 게 아니다" 라고 말하고는 며칠 뒤 1경기 3홈런을 때려냈다.

삼성 시절에는 MLB 시절의 명성에 걸맞은 공격력과 더불어,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준수하고 안정적인 수비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내야수지만 삼성에서는 외야수로 뛰다 다시 내야수를 맡는 등 내•외야 전천후로 뛰게 되며 의도치 않게 대부분의 포지션을 맡았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코의 내외야를 가리지 않은 전천후 수비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본다면,
  • 그리고 내야수로 뛸 당시, 즉 5월 초중순에 내야진 부상 속출로 메이저리그 시절 2루수 경험을 살려 삼성에서도 2루수를 맡기도 하였다. 인해 선발 2루수로 활약했으며, 이후로도 가끔씩 2루수로 나왔다. 유격수 대수비를 본 적도 있다.
파일:external/file2.nocutnews.co.kr/20150811123431611238.jpg
2루 수비를 보는 프랑코. 주자는 로마이어이다.

재계약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코치를 거치지 않고 후배 선수들에게 타격 기술을 과외해 준 것 때문에 코치진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타격 기술 외에도 아래 언급한 자기관리에 대해 선수들에게 조언을 열심히 하면서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시어머니 같다는 평도 남겼다. 하지만, 당시 주장이였던 김기태는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재계약 거부에 대해 삼성에선 늙은 나이도 한 몫했다고 하지만[12], 그건 명백한 오판이었다.

삼성을 떠난 후, 팀이 개인적인 연습을 금지시켰었다는 점을 비난한 적이 있다.

2.4. 메이저 리그로 돌아간 후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2001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43세의 나이에 입단해 2005년 6월 28일 메이저 리그 역대 최고령 만루 홈런을 쳤으며 2007년 5월 4일에는 무려 랜디 존슨을 상대로 메이저 리그 역대 최고령 홈런을 쳤다.[13] 그리고 2008년 멕시칸 리그를 뛴후 49세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14] 즉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1950년대 출생 선수라는 뜻이다.[15]

은퇴 후 잠시 메츠 산하의 루키 팀의 감독직을 했고, 베네수엘라 윈터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술, 담배, 청량음료 등은 입에도 대지 않고 생과일 주스를 즐겨마시던 습관, 단백질 위주의 하루 7번 식사, 규칙적인 생활습관 등 실로 감탄할만한 자기관리로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아 많은 야구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게다가 젊은 시절에는 유격수, 2루수, 1루수로 차례대로 옮겨다니면서도 준수한 성적을 뽐내었는데[16], 후에 이러한 사례는 마이클 영이 이어가게 되었다.

성적으로만 봐도 훌륭한 통산 성적을 쌓았지만, 2013년 명예의전당 투표에서는 1.1% 득표에 그쳐서 한 방에 자격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꽤 저평가받은 선수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 통산 2,500안타를 달성하였고[17][18], 타격왕 타이틀과 5개의 실버슬러거를 갖고 있는 선수였다. 또한 경기나 사생활 등에서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으며, 오히려 오랜 선수생활 동안 철저한 몸관리를 보여주며 다른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런 모범적인 선수의 득표율치고는 지나치게 낮았다.

그러나 이는 누적으로만 봤을 때의 이야기이고, 명예의 전당 통계로 본 프랑코는 명전 입성이 당연히 불가능한 것이 맞다. HOF 모니터가 고작 58에 불과하고 (명전 입성자 평균이 100)이외 어느 지표도 명예의 전당 입성자 평균을 넘긴 것이 없다. 그렇다고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시즌이 있는 것도 아니며, WAR도 23년 간 43 정도밖에 쌓지 못했다. 2,500안타를 계속 유격수나 2루수로 뛰며 기록했으면 입성을 충분히 노려 볼 만 했겠지만, 1993년 이후로는 지명타자나 1루수로 나왔기 때문에 이도 영 애매하다. 이런 식의, 임팩트와 세이버스탯이 부족한 선수들이 명예의 전당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증수표 수준의 통산기록(예: 통산 3백승, 3천안타 이상)을 채우는 것 뿐인데, 프랑코는 3,000안타도 채우지 못했고, 홈런도 200개가 안 된다. 즉 좋은 실력을 가진 선수임엔 분명하지만 명예의 전당은 힘든 선수였다는 것. 물론 1.1%라는 득표율은 이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낮긴 하지만, 첫 해 살아남았더라도 결국 후보에서 탈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제이미 모이어인데, 그 역시 누적은 269승으로 꽤 괜찮은 수준이지만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는 선수였고, 결과적으로 투수로서 명전 입성의 보증수표격 기록인 통산 300승을 채우지 못하면서 첫 해 탈락이라는 결과를 얻었다.[19]

2014년 5월, 프랑코는 미국 독립리그 팀인 포트워스 캐츠에 선수 겸 코치로 복귀한다는 기사가 떴다!!!!! 참고기사 나이 56세에 선수로 뛴다는 것[20]은 정말 프랑코가 얼마나 자기관리를 열심히 했는지 보여주는 예다.

그리고 2015년 3월 13일 일본 독립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팀인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에 선수 겸 코치 공식입단을 했다.[21]

3. 롯데 자이언츠 코치행

2015년 10월 20일 뜻밖에도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로 들어왔다!! 아마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뛰어서 한국 롯데 자이언츠와도 인연이 닿은 듯하다. 크보를 거친 외국인 선수 출신의 코치는 카도쿠라에 이어 두 번째다.

2016년 1월 31일부터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칭스탭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첫 출근에 감자탕을 먹었다고. 시즌 시작 전 2군 스프링캠프 대만 퓨처스 캠프에서 인터뷰 기사에서는 선수 제의가 온다면 당장이라도 할 용의가 있다고 하신다. 본인 말로는 66살까지 뛰고 싶다고 한다. 그러니까 2024년까지는 선수로 뛰어 보고 싶다는 뜻이다.

2016년 4월 6일 SK전 시타 후 인터뷰를 보면 그가 야구 선수로서 뿐만 이니라 인생 선배로서도 대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2016년 8월 18일자로 장종훈 타격코치와 자리를 맞바꾸며 1군에 올라왔다. 타자들의 떨어진 의욕을 되살릴 수 있을 지 주목된다.

난데없이 치바 롯데 마린즈의 차기 감독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루머가 뉴스로 떴다. 하지만 2017년부터 롯데 자이언츠의 1군 타격코치로 잔류했다. 하지만 4월 중순부터 타선 전체가 부진하면서 그 책임을 물어 1군 명단에 말소되었다. 대신 올라온 코치는 김승관인데 이후 롯데 자이언츠의 공격력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2018 시즌 내내 2군 타격코치를 하고 있으며, 조원우 감독이 프랑코 코치에 대해 자신이 평가할 수 없는 분이지만 언어의 벽 탓에 선수와 코치 사이에 긴밀한 소통이 이뤄지지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사실상 프랑코 코치를 1군 타격코치로 올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랬던 결과, 롯데는 제대로 망했다.

2019 시즌 이후 꼴무원들이 대거 잘리는 와중에 살아남았지만 잔류군 코치로 강등되었다. 16 시즌부터 사실상 프랑코 코치가 키워낸 선수가 없는데[22] 살아남은 것에 의문을 가지는 의견도 많다. 다만 자기 관리 하나는 정평이 나있어 잔류군에서 재활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2020년 10월 7일 롯데와의 계약 기간 만료로 롯데를 떠나게 되었다. 3군의 축소로 프랑코 코치의 자리도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4. 이후

2022년부터는 멕시칸리그 팀인 아세레로스 데 몽클로바의 타격코치를 맡는다.

5. 평가

1980~90년대를 중심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통합 23년간 현역선수로 뛰었고, 제이미 모이어, 리키 헨더슨과 더불어 2000년대 메이저 리그 산신령 중 하나였다. 한미일을 포함한 여러 리그에서 자기관리의 모범을 보여준 노익장 운동선수로, KBO 사상 최대의 거물 선수이기도 하다.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도 거물급 경력의 소유자인데, KBO 리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보다 낮았던 2000년대 초반에 들어왔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급이 높다던 호세 리마, 펠릭스 호세, 루크 스캇, 야시엘 푸이그등의 외국인 선수들은 물론, 이들보다 몇 수는 위인 역대 최고의 한국인 야구선수 추신수마저도 훌리오 프랑코보다는 커리어에서 열세에 있다. 추신수의 WAR이 약 35 정도인 반면 프랑코는 누적 BWAR가 43.5나 되며, 50 가까이 선수생활을 한 것은 물론 MVP 후보급의 성적 기준인 WAR 6 이상을 2회나 기록했을 정도다.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1990년대 텍사스 시절이었지만, 그보다 앞서 활동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팬들에게 1980년대 당시 최고의 선수로 극찬을 받고 있다.

6. 기타

  • 삼계탕을 상당히 좋아한다. 한국에 왔을 때 통역에게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추천을 받았는데, 맛도 있어서 한국에 있을 당시에 몇백 그릇은 먹었다고 말했다. 1년밖에 안 있었으니 매 경기 직전 혹은 끝난 후 저녁식사는 거의 매일 삼계탕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이후에도 삼계탕을 잊지 못했는지 뉴욕 메츠 시절 박찬호와 같이 뛰게 되자 가장 먼저 "찬호, 삼계탕 먹으러 가자" 라고 했다고 한다.
  • 오랜 현역 생활과 이후의 코치 활동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모범적인 모습으로 인해 중남미 야구계의 살아 있는 거목같은 존재. 한국 연예계로 비유하면 원로배우 이순재 같은 위치. 2013년 당시 내한한 펠릭스 호세 롯데 자이언츠 이문한 운영부장에게 훌리오 프랑코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간 것도 그만큼 프랑코가 중남미 야구계에서 중요한 존재임을 방증해 준다. 롯데 구단과 연락이 닿은 프랑코는 구단에 루이스 히메네스를 추천하였고, 메이저 경력도 거의 없다시피하고 일본 야구에서도 실패한 히메네스였지만[23] 2014 시즌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선수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히메네스는 한국 야구판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야 했는데 그는 뼛속까지 삼성 라이온즈맨이었다.[24]
  •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야구가 멈춘 지금이 과거를 돌아봐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며 1980년대 각 팀을 대표했던 선수를 뽑았는데 이어 "미국 야구 통계 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의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통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팀을 가장 대표하는 선수를 뽑았다"라며 1980년대 클리블랜드를 대표했던 레전드 선수로 훌리오 프랑코를 뽑았다! 매체는 "1980년대는 클리블랜드에게 과도기적인 시기였다. 전반적으로 꾸준하지 못했고,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면서 "또 다른 스타 코리 스나이더에게는 미안하지만 1980년대 클리블랜드하면 프랑코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전하였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최고 순위가 아메리칸 동부 지구 7개 팀 중 5위가 최고 성적일 정도로 5할 승률을 넘긴 힘든 암울한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프랑코는 1983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트레이드로 넘어와 클리블랜드의 새 식구로서, 한 줄기의 희망이 되어 준 셈이다.
  • 공식적으로는 1958년에 출생했다고 나와 있지만, 출생 신고가 늦어서 실제로는 1956년생이라고 한다. 참고로 한국프로야구에서 뛸 당시 등록된 생년은 1961년생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1955년생,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54년생이라는 말도 있고, 차명석이 만난 프랑코의 동창(1954년생)의 말에 따르면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고 주장했다.[25][26] 이 나이 문제는 일본에서도 얘기가 많았으며, 일본 기자가 인터뷰 중에 프랑코 본인에게 실제로 몇 살인거냐고 질문한 적도 있으며 이때 대답은 "내 나이에 대해 여러가지 소문이 도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나이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고, 야구에는 나이가 상관없다. 56세? 예스." 라고 피해갔다.
  • 어린 나이에 야구를 하러 처음 미국으로 갔을 때 스페인어만 할 줄 알고 영어를 할 줄 몰라서 3개월 동안 프라이드치킨과 감자튀김만을 먹었다고 한다.
  • 삼성 시절 또다른 일화로는, 스프링캠프에서 이승엽, 김기태, 프랑코, 또 한 명의 외국인선수 찰스 스미스가 한 조로 타격 훈련을 했는데, 99년에 40홈런을 쳐낸 스미스는 계속 홈런을 때려내는데, 프랑코는 배팅볼임에도 불구하고 2루 땅볼만 쳐댔다고 한다. 처음에는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왕까지 차지한 프랑코가 "뭔가 숨기는 게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는데, 캠프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2루 땅볼만 쳐대서 삼성 선수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한다. 심지어 스미스가 계속해서 담장을 넘기는데도 프랑코가 "저런 타격훈련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며 한심하게 쳐다보기까지 한 걸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주장이였던 김기태가, "말만 하지 말고 일단 한번 보여주고 얘기하라"고 한마디 하자, 프랑코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시범을 보이는데, 좌중간으로 계속 홈런을 때려냈다고 한다. #
  • 시즌 때 프랑코가 보여준 자세도 선수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개인훈련 때 한국 타자들은 스윙을 하거나 티배팅을 하지만 프랑코는 그냥 거울 앞에 서서 타격 자세만 취하고 말더라는 것이다. 이 모습이 이상해 선수들이 물어보자, "실제 타석이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상대 투수를 그리며 타이밍을 맞추는 훈련을 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훈련을 얼마나 진지하게 하는지, 거울 앞에 서서 자세만 취하는데도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됐단다. 김기태가 말하길, "프랑코의 모습을 보고 야구에 관해 새로운 눈을 떴다"고 한다.[27]
  • 일본 시절에도 일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간단한 일본어도 종종 구사하는 등 적응력이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사토자키 토모야가 일본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자 했던 성공한 용병을 꼽을 때 프랑코도 언급되었다.[28]

7.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2 PHI 16 29 .276 8 1 0 0 3 3 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3 CLE 149 560 .273 153 24 8 8 80 68 32
1984 160 658
(1위)
.286 188 22 5 3 79 82 19
1985 160 636 .288 183 33 4 6 90 97 13
1986 149 599 .306 183 30 5 10 74 80 10
1987 128 495 .319 158 24 3 8 52 86 32
1988 152 513 .303 186 23 6 10 54 88 2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9 TEX 150 548 .316 173 31 5 13 92 80 21
1990 157 582 .296 172 27 1 11 69 96 31
1991 146 589 .341
(1위)
201
(5위)
27 3 15 78 108 36
1992 35 107 .234 25 7 0 2 8 19 1
1993 144 532 .289 154 31 3 14 84 85 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4 CHW 112 433 .319 138 19 2 20 98 72 8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5 치바 롯데 127 474 .306
(5위)
145
(공동 3위)
25 3 10 58 60 1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6 CLE 112 432 .322 139 20 1 14 76 72 8
1997 78 289 .284 82 13 1 3 26 46 8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7 MIL 42 177 .241 34 3 0 4 19 22 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8 치바 롯데 131 487 .290 141
(공동 5위)
27 2 18 77 78 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9 TB 1 1 .000 0 0 0 0 0 0 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000 삼성 132 477 .327 156
(5위)
19 1 22 110
(3위)
79 1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001 ATL 25 90 .300 27 4 0 3 11 13 0
2002 125 338 .284 96 13 1 6 30 51 5
2003 103 197 .294 58 12 2 5 31 28 0
2004 125 320 .309 99 18 3 6 57 37 4
2005 108 233 .275 64 12 1 9 42 30 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006 NYM 95 165 .273 45 10 0 2 26 14 6
2007 40 50 .200 10 0 0 1 8 7 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007 ATL 15 40 .250 10 3 0 0 8 1 0
MLB 통산
(23시즌)
2527 8677 .298 2586 407 54 173 1194 1285 281
NPB 통산
(2시즌)
258 961 .298 286 52 5 28 135 138 18
KBO 통산
(1시즌)
132 477 .327 156 19 1 22 110 79 12
개인 통산
(26시즌)
2917 10070 .300 3028 478 60 223 1439 1502 311

8. 관련 문서


[1] 본인 스스로 실제 생년월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나이는 이보다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2] 메이저 리그에서 등록된 생년월일은 1958년 8월 23일이고, KBO 리그에서 등록된 생년월일은 1961년 8월 23일이다. [3] 파이오니어 리그 소속팀 [4] ~8월 17일 [5] 2016년 8월 18일~2017년 5월 15일 [6] 5월 16일~ [7] 헤이스는 그 해 가을야구에서의 부진 등 때문에, 5명씩이나 주고 데려온 선수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인 5-for-1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특히 1980년 우승 멤버이자 2루수 실버슬러거 초대 수상자인 매니 트리요가 끼어 있어서 더더욱 저평가를 받았다. 다만 이듬해부턴 좋은 성적을 올렸고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8] 1위는 화이트삭스 소속 론 키틀, 유감스럽게도 1991년에 일찌감치 야구선수를 그만두고 독립리그 등지에서 코치생활을 하다 얼마 안 되어 야구판을 아예 떠났으며 지금은 벤치를 만들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9] 이 대기록은 2018년에 추신수가 52경기 연속 출루로 무려 25년만에 갱신했다. [10] 1+1년 계약으로 보였다. 계약 조항에 110경기 이상 출장할 시 재계약 여부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고, 바비 발렌타인이 1년만에 잘리면서 같이 미국 복귀를 선택했다. 롯데에서 제시한 2년차 연봉이 클리블랜드에서 제시한 연봉보다 20%가량 높았기 때문에 돈만 보자면 롯데에 남는 게 더 나았다. [11] 외국인 선수제도 도입 초기에는 외국인 선수에 대한 차별과 견제가 심해서 일부러 스트라이크 존을 공 하나정도 차이나게 잡이주는일이 빈번했다. [12] KBO 등록 나이는 41세, 본인이 주장하는 실제 나이는 46세였지만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당장 구대성이 ABL에서 무쌍찍던 때 나이가 40대 초중반인 걸 생각해도 엄청나게 많은 나이. [13] 물론 랜디 존슨도 이 땐 말년을 보내고 있었을 때이다. [14] 랜디 존슨은 다음해인 2009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다. [15] 1930년대생은 필 니크로, 1940년대생은 찰리 허프, 1960년대생은 마리아노 리베라, 1970년대생은 페르난도 로드니가 마지막이다. 누가 복귀를 선언하지 않는 이상 로드니가 마지막 70년대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16] 이 분야의 대표는 역시 벤 조브리스트지만 조브리스트는 유틸리티인 반면 프랑코는 포지션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간 차이가 있다. [17] 140년이 넘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2014년 2,500안타를 돌파한 아드리안 벨트레가 97번째 달성자였으며 현재 명전 입성 가능성이 언급되는 선수이다. 즉,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18] 참고로 3,000안타를 달성한 선수들 중에서는 승부 조작 및 도박 혐의로 영구제명된 피트 로즈와 약쟁이 알렉스 로드리게스, 라파엘 팔메이로를 뺀 모두가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거나 가입이 확정된 상태다. [19] 아예 명예의 전당 입성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이어와 프랑코 모두 모범적인 선수생활로 타의 귀감이 되었다는 플러스 요인이 있고, 최소한의 누적은 채웠으므로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갈 가능성이 남아있다. 다만 베테랑 위원회를 통한 헌액은 투표를 통한 헌액보다는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긴 하다. [20] 김일권, 유승안과 동갑이다. [21] 참고로 독립 리그에서 프랑코는 25경기 77타수밖에 나오지 않았고 홈런도 0개였지만 타율 3할에 OPS 8할을 찍었으며 심지어 삼진이 16개인데 사사구는 17개였다. 물론 일본 독립 리그의 수준은 KBO 3군 수준으로 평가받을만큼 상당히 낮지만 그래도 여기도 월급 받고 하는 프로리그임을 생각하면 프랑코의 철저한 몸관리를 볼 수 있다. [22] 18 시즌 그렇게 자신하던 전병우는 19시즌 제대로 망해버렸고, 추재현과 트레이드되어 키움 히어로즈에 갔다. 그 전병우가 2022년 한국시리즈 1차전 MVP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23] 프랑코의 추천을 받은 뒤 롯데 구단은 히메네스와 계약을 추진했으나 이미 일본에서 한 번 실패했던 적이 있어서 선수 본인이 망설이던 찰나 롯데에서 뛰었던 외국인 타자이자 같은 베네수엘라 출신의 로베르토 페레즈에게 한국행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한국에 가보라고 조언해줬다고 한다. [24] 다만 태업 전의 히메네스의 비율 스탯과 임팩트는 말할 필요가 없는 말 그대로 실력은 최고였다. 단지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워낙 불성실했던 것이 탈이었다. [25] 즉, 삼성에서 뛰던 시절 한정으로 KBO에 등록된 생년월일(1961년생)로 하면 당시 삼성 주루코치였던 이순철, SK에서 현역 선수로 뛰던 김성래와 동갑이었지만, 만약 1954년생이 맞다면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용희(1955년생)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셈. [26] 중남미 선수들의 나이는 사실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도미니카공화국의 경우 국가 행정체계가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출생신고 누락 혹은 생년월일 기재 오류는 흔한 데다가, 미국에 돈 벌러 가기 위해 나이를 속이는 건 흔하고, 심지어는 여권을 위조해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입국하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행정력이 잘 갖춰진 베네수엘라 국적 선수는 믿어주는 편이었다. [27] 실제로 김기태는 1999년에 비해서 2000년에 꽤 준수한 성적을 찍었다. wRC+는 140.5에서 무려 162.1로 올랐고, 3할 타율, 4할 출루율 6할의 장타율로 OPS가 1000을 넘겼다. [28] 그 외에 적응력이 좋았던 롯데 선수로는 브랜든 레어드, 훌리오 술레타, 베니 아그바야니, 천관위(이쪽은 아예 유창하게 일본어를 해서 그냥 일본인처럼 통역 없이 대화한다.) 등을 꼽았다. 참고로 그 반대로 팀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혀 안 했던 케이스로는 김태균, 프랭크 볼릭(마린 스타디움 역사상 몇 없는 30홈런 타자였다.) 등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