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14:50:37

홍수환

파일:홍수환.jpg
홍수환
洪秀煥 | Hong Soo-Hwan
출생 1950년 5월 26일 ([age(1950-05-26)]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남양 홍씨
학력 서울 중앙중학교 (졸업)
서울 중앙고등학교 (졸업)
인천체육전문대학교 체육학과 전문학사 (졸업)
신체 170cm
가족 동생 홍수철, 아내 옥희, 슬하 2남 2녀
소속 정당
[[자유통일당|
파일:자유통일당 로고타입.svg
]]
종목 복싱
전적 53전 44승 (14KO) 5패 4무
1. 개요2. 생애
2.1. 권투 선수 시절2.2. 은퇴 이후
3. 카라스키야는 강한 선수였나?4. 복싱협회장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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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4년 7월 3일에 개최되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15라운드 판정 승으로 누르고 한국 복싱 최초로 원정 경기에서 승리하며 WBA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다. 1966년 김기수 선수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이긴 이후로 8년만의 승리로, 한국 복싱 사상 두 번째 세계 챔피언이었다. 1977년 11월 27일에는 WBA에서 신설한 Jr.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에 나서 파나마의 헥토르 카라스키야에게 2라운드에서만 4번 다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3라운드에서 역전 KO승을 거두며 WBA Jr.페더급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colbgcolor=#315288> 당시 뉴스에 방영된 챔피언 등극 이후 귀국하는 모습

2. 생애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권투 선수로 1950년 5월 26일 출생이며 유년기 시절을 경기도 과천시에서 잠시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어릴 적 복싱광인 부친 덕에 복싱을 권유받아서 취미로 복싱을 하였으나 중학생 시절 안타깝게도 부친상을 당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의 챔피언 결정전 중계를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프로 복싱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였다. 이후 실제로 김기수가 훈련하는 체육관 지역에서 수소문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단골 목욕탕을 찾아내서, 직접 김기수를 만나서 먼저 말을 걸고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후에 홍수환이 챔피언이 되고도 김기수가 운영하던 다방에 가서 선후배로의 친분을 많이 유지했다고 한다. 평안북도 신의주부 출신인 홍수환의 모친도 같은 북한 출신인 김기수를 자랑스럽게 여겨 홍수환에게 평소 김기수처럼 챔피언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을 했고 그도 김기수를 좋아하고 존경했기에 친분을 만들어[1] 따라다니며 롤모델로 삼았다.[2]

2.1. 권투 선수 시절

1969년 5월 10일 프로 복싱에 데뷔한 홍수환은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 웨스트리지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상대로 네 번의 다운을 얻어내며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챔피언으로 등극하며 한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경기 영상 경기 직후 전화로 어머니에게 외친 "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다!"라는 말이 매우 유명한데, 이에 어머니는 " 김기수씨(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 어머니가 그렇게 부럽더니만, 평생 소원을 풀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물론 "귀에 피는 안 나냐, (홍수환이 피가 안 난다고 말하자,) 그러면 됐어." 라는 자상한 말씀도 아끼지 않으셨다.[3]
파일:19740703_WBA Bantomweight_Arnold Taylor v Hong Soohwan.jpg
對 아놀드 테일러 경기 당시 오피셜
<colbgcolor=#315288> 대한뉴스에 방영된 1차 방어전 모습
1974년 12월 28일 필리핀의 페르난도 카바넬라를 상대로 1차 방어전에 성공하지만 1975년 3월 14일, 미국에서 열린 2차방어전에서 멕시코의 알폰소 자모라에게 패해 타이틀을 상실한다. 제대로 훈련은 못한 탓도 있다고 하고 경기전에 꿀을 먹어 컨디션이 엉망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2차 방어전 당시 엄청난 KO율을 자랑하는 자모라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4라운드 KO패. 참고로, 이 때 홍수환은 현역 군인 신분이었는데, 방어전에 패배하고 귀국하자마자 영창에다 유격 훈련까지 받으며 고생했다. 오죽 고생을 했으면 패배한 직후 권투를 그만둘까 생각하다가 이 군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권투를 계속하는 게 낫겠다'라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이것을 절치부심하여, 보유하던 목욕탕을 팔면서까지 전재산을 다 모아서 1976년 10월 16일, 한국에서 리턴매치를 벌이지만 이때도 TKO로 패한다. 먼저 다운을 빼았긴 했지만 후에 그로기 상태로 몰리게 되는데 이때 심판이 카운트를 세지 않고 바로 TKO를 선언, 이 때문에 홍수환의 형이 심판판정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는 등 난장판이 벌어진다. (이 경기는 인터넷에 아무리 찾아도 찾을수 없다. 짤막하게 그로기 상태에서 TKO가 선언되는 장면만 남아있을 뿐.)

1977년 11월 27일(현지시각 11월 26일 밤)에는 파나마 뉴파나마체육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슈퍼밴텀급) 초대 타이틀 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3회 KO로 누르고 챔피언이 된다. 특히 홍수환은 당시 2회 4번 다운된 뒤 3회 KO승해 `4전5기' 신화를 이루었다. 영상 34초부터 경기 장면이 나온다. 한편 경기 이후 홍수환과 카라스키야는 오히려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홍수환이 도전 지구탐험대에 출연해 카라스키야를 만나러 건 적도 있고 2017년 11월 27일에는 카라스키야가 경기 40주년을 기념해 홍수환을 만나러 방한했다. # 카라스키야는 복싱을 그만둔 후 파나마에서 산 미구엘리토 시장을 거쳐 파나마 상원의원으로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카라스키야와의 일전은 전국민적인 사건이었다. 드라마틱한 승부와 당시 최고의 인기스포츠였던 권투와 맞물려 4전5기의 신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또 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챔피언을 등극할 당시 등장했던 "대한국민 만세"를 다시 언급해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한국프로복싱사상 가장 극적인 세계타이틀매치 승리로 기억되며 홍수환은 그야말로 극적인 승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어린애들까지도 4전5기의 모습을 따라할 정도였다.

이후 가사하라 유우를 상대로 1차 방어전에서 승리했으나, 1978년 5월 7일 한국 장충체육관에서 콜롬비아 선수인 리카르도 카르도나를 상대로 치른 2차 방어전에서 패배해 챔피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당시 버팅으로 인해 1라운드부터 눈두덩이에 피가 났는데, 당시 협회와의 다툼으로 인해 제대로 된 조치를 받지 못하고 경기가 속행되었다고 한다. 12라운드까지 근성으로 버티다 결국 기권패. 피가 굳어 층이 생기고 그 위로 피가 흐를정도였다고 한다. 그 경기를 마치고 사실상 은퇴 상태로 1년 이상의 공백기를 갖다가 1980년 12월 19일 염동균과의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프로권투선수로서의 경력을 끝내게 된다. 참고로 경기 결과는 10라운드 무승부를 기록했다.

2.2. 은퇴 이후

은퇴한 뒤 1995년에는 권투해설위원을 맡았으며, 이후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며 자신의 권투 선수 경험을 통한 삶의 한 모습을 다시 일깨우고 조명하는 강연자로 명성을 얻었다. 단순히 세계 챔피언 출신의 경력이나 4전5기 명승부를 자랑하는 수준이 아닠, 은퇴 이후 이어진 삶의 굴곡을 극복했던 여정과 믿을 수 없을만큼 해박한 상식과 기억력으로 전국적인 명성의 명강사로 자리잡았다. 20년간 1,000여 곳이 넘는 관공서, 대기업에서 홍수환을 초청했고, 부인 옥희와 함께 방송에서도 종종 만나볼 수 있었다. 그의 강연과 방송에서는 선수 시절부터 변함없는 패기와 긍정 에너지를 전해준다.

3. 카라스키야는 강한 선수였나?

결론적으로 카라스키야는 1류 선수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선수다. 카라스키야가 홍수환과 만나기 직전까지 상대한 11전의 상대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11전 11승 11KO승을 거둔 것만으로 강한 선수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다. 우선 데뷔전부터 5경기째까지의 대전상대들은 은퇴할 때까지 통산 1승도 못거둔 허접선수인데다 나머지 선수들도 2명 정도를 제외하고 패가 승보다 많은 약체 선수들이었다. 이러한 전적을 두고 커리어를 쌓기 위해 시행착오를 줄인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약체 선수들과 붙어서 좋은 전적을 나타내보이고 인기를 쌓는 것은 복싱계에서는 전형적인 꼼수나 편법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홍수환과의 패배 이후 세계챔피언에 두 번이나 더 도전했지만 모두 TKO로 진것을 본다면 1류선수라고 하기에는 더더욱 무리다. 카라스키야가 정말 강한 선수였다면 홍수환과의 일전 이후의 세계타이틀매치에서 최소한 선전을 했어야 하지만 두 경기 모두 속절없이 TKO로 졌다. 이후에 카라스키야는 더 이상 선수로서는 성공을 모색하기 어렵다 판단하여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카라스키야의 전적 #

또한 체급에 관하여 설명하자면 당시 카라스키야는 해당 체급 주니어 페더급의 챔피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카라스키야와 홍수환의 체급은 새롭게 만들어진 주니어 페더급이다. 신설 체급이니 당연히 챔피언이 없었고 두선수는 챔피언을 뽑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룬 것이다. 당시 이 둘의 적정 체급이었던 밴텀급에는 극강의 강적들이 둘씩이나 있었다. 한명은 통산전적 33승 32KO승 5패의 알폰소 자모라, 또 한명은 통산전적 66승 63KO승 4패의 카를로스 사라테였다. 당시 파나마에서 유망주로 인기를 끌던 카라스키야가 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WBA 협회측에서 새롭게 주니어 페더급을 신설한 것. 애초에 카라스키야가 정말 "지옥에서 온 악마"로 불릴정도로 강한 선수였다면 밴텀급에서 이들과 경쟁했을 것이다.

4. 복싱협회장

복싱협회 회장을 맡은 이후로 협회회원 간에 갈등이 있었다. #

그가 KBC 협회장에 추대된 것은 복싱 경기 직후 사망한 최요삼 선수(2008년), 한국타이틀 전 직후 쓰러져 사망한 배기석 선수(2010년)에게 치료비가 지급되지 않은 협회의 무책임과 무능함을 타개하고자 함이었다. 보험 가입이 되지않는 권투선수들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복싱후유증때문에 치료비차원에서 "권투위원회"에 대전료중 일부를 치료비로 적립해놓고 있다. 그러나 최요삼, 배기석 선수에게는 치료비와 위로금이 나와야 했지만 받지못하였다고 한다. 권투하는 이들은 저 치료비가 어디로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비영리 사단법인인 권투위원회가 회원에게도 회계내용을 공개하지않고, 외부 회계감사도 받지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권투위원회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있는데, 사실상 보험회사에서 돈받아놓고 가입자가 암걸렸더니 암 치료비 지원 안해주는 거랑 다름이 없다.

2008년 최요삼, 2010년 배기석 사망 당시 회장은 김철기, 김주환이었고 홍수환은 그 이후인 2011년에 협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홍수환은 KBC가 시합 때마다 선수들 대전료의 3%를 건강보험료로 수십년 간 징수해왔는데 왜 이런 사고 시 보상금이나 장례비를 지원하지 않냐며 끈질기에 항의했다. 본인이 1974년 첫 세계 타이틀 획득 시에는 후원금 2백만 원 중 절반인 백만원을 협회에 기부하기도 했고, 당시 백만원은 서울 시내 집 한 채 비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축적되었어야 할 협회 예산은 비권투인 출신 회장들에 의해 허투루 관리되어 고갈된 것에 대해 집요하게 항의하는 홍수환에 대해 협회에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깎아내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선수들의 파이트머니 문제에도 홍수환은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문경에서 열렸던 이재성의 시합에서 서성인 프로모터가 계체량 직후 파이트머니를 선수에게서 도로 가져간 사건에 대해 법정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서성인이 실제로 파이트머니를 선수에게서 되받아 간건을 인정하면서도, 시합 전에 도전자인 이재성이 이번 시합에선 타이틀매치를 성사시키는 프로모터의 사정을 고려하여 파이트머니를 안받는 것을 사전에 용인했기에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판결을 내려 패소하고 말았다. #

기존의 KBC측은 홍수환이 권투위원회 회장으로 추대한 비상대책위원회의 선임 절차에 문제를 법정 소송을 벌였다. 이사회의 회의록이 조작되었기에 홍수환을 비롯한 신임 집행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7명이 모두 만장일치로 홍수환을 투표했으며, 여기까지는 명망있는 사람 뽑아준 거기에 별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이 가운데 두명은 회의장에 출석하지도 않았고 서면으로 승인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년간 이어진 소송에서 결국 패소한 홍수환과 함께 KBC에 입성했던 집행부는 새로운 단체를 창설하기로 했고 실제로 유명우를 중심으로 KBF라는 단체를 창설해 실행에 옮겼으나, 홍수환은 법적인 결과에 승복하고 KBC 단일 협회 체제가 유지되는 것을 택했다.

5. 여담

  • 제일 기억나던 문하생은 압구정에 사는 어떤 애가 와서 복싱을 하는데 움직임에 천부적 재능이 느껴져서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느날부터 스파링에 자꾸 안나와서 집에 찾아가니 어머니와 그 문하생이 있는데 문하생이 복싱 관두고 공부하겠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근데 그 옆에서 그 어머니 되시는 분이 계속 웃길래 왜 계속 웃으시냐고 물어봤는데 알고보니 그 문하생은 조선 최강의 주먹 시라소니 이성순의 외손자였다고.
  • 선수 활동하던 당시, 1남 2녀를 둔 유부남이었는데도 "나는 몰라요"등 히트시킨 당시 유명 가수 옥희와 염문을 뿌려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명목으로 권투협회에서 제명당하고 이혼, 옥희와 결혼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옥희를 때려서 경찰에 붙들리는 등 문제가 되었고 또 이혼했다. 그런데 어찌 된 건지 92년도에 옥희와 재결합해 1남 1녀를 더 두고 잘 살고 있다.
  • 당시 권투 선수 중에는 상당한 미남으로 인기가 꽤 있었다.
  • 동생 홍수철은 가수로, 유명한 형처럼 잘생긴 얼굴 덕분에 데뷔 초기부터 널리 알려졌고 "황제를 위하여" "장미 빛깔 그 입술" "철없던 사랑" 등 히트곡도 여럿 냈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는 목사로 재직하는 중이다.
  • KBS 예능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에 두 번 출연한 적 있다. 1995년 5월 2일 50회를 통해 절망 속 빛 같았던 여자를 찾았고, 1970년 3월 및 10월에 상대했던 김상일 선수를 찾기 위해 2005년 8월 16일 회차에 한번 더 출연했다.

[1] 김기수의 체육관 주변 지역에서 수소문 하여 김기수가 훈련 후 자주 가는 목욕탕을 알아냈다고 한다. 그 목욕탕에 가서 김기수를 발견하고 "저도 권투를 하는 사람이고 형님(김기수)을 존경한다. 우리 어머니도 이북 출신이시고 평안도 신의주에서 내려오신 분이신데 형님을 정말 좋아하신다."라고 먼저 말을 걸어, 북한 함경도 출신인 김기수(6.25 전쟁 때 남한으로 옴)가 어머니 이야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친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홍수환의 소개로 김기수와 홍수환의 모친끼리도 만났다고 한다. [2] 두 사람은 성격은 좀 다른 편이다. 둘 다 훈련할 때 매진하는 건 같았는데, 홍수환은 사적으로는 밝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김기수는 정반대로 내성적이라서 보일만큼 지극히 과묵한 성격이었다. 하루에 말 한마디 몇번 할까 싶을 만큼 사적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말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훈련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과묵함이 멋있어서 따른 권투 후배들도 많았다. [3] 귀국한 뒤 실제로 모친과 10년 전에 돌아가신 부친의 묘소에 방문하여 챔피언 벨트를 놓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