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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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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 Henry Gwyn Jeffreys Mose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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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7년 11월 23일 |
잉글랜드 도싯 웨이머스 | |
사망 | 1915년 8월 10일 (향년 27세) |
오스만 제국 갈리폴리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물리학자 |
학력 |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
물리학 / 학사) 맨체스터 대학교 ( 물리학 / 박사) |
소속 | 맨체스터 대학교 (–1910) |
수상 | 마테우치 메달 (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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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물리학자.[1]2. 그의 생애와 업적
박물학자인 헨리 노티지 모즐리(Henry Nottidge Moseley)의 아들로 출생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트리니티 컬리지를 졸업하고, 1910년 맨체스터 대학교의 강사로 있었다. 그가 대학 강사로 있을 때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지도로 X선 연구를 하였다. 연구 초기에는 라듐 B 및 라듐 C의 원자 1개의 붕괴에 의해서 방출되는 알파 입자 평균 개수의 측정 등에 관한 실험을 하였다.그러다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의 X선 산란(散亂) 실험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친구 찰스 골턴 다윈(Sir Charles Galton Darwin)과 협력하여 X선 산란 연구를 시작, 특성 X선의 연구결과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여러 원소의 특성X선 스펙트럼을 실험적으로 연구하여 그 파장과 원자번호 사이에 간단한 관계(파장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 반비례)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서 원자구조론에 크게 기여하고 현대 주기율표 자체의 이론상 근거가 된다. 또한 주기율상의 미발견원소의 확인, 미측정 스펙트럼의 파장 예측 등 X선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영국 육군 공병 장교로 자원 입대하였으며,[2] 1915년에 갈리폴리 전투에 투입되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관련된 연구주제를 연구한 다른 학자들은 전부 노벨상을 받았고, 살아있었다면 모즐리도 분명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기에 아쉬운 죽음이다.
모즐리를 아꼈던 스승 러더퍼드는 모즐리의 전사 통지를 받고는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이 영국에 입힌 최대의 타격."이라며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처칠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과학 기술의 꿈나무들이 전쟁에서 죽는 꼴을 볼 수 없다."라고 한 것이 현재의 전문연구요원 제도의 시작이라고 한다.
3. 여담
모즐리의 모교인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물리학과에는 '모즐리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노벨상 수상이 확실시 되었으나 일찍 전사하는 바람에 원통하게 노벨상을 받지 못한 모즐리의 한맺힌 저주(?) 때문에 옥스퍼드 물리학과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한다는 내용이다.영국 내에서 옥스퍼드는 학생의 수준이나 연구비 지원 및 학교 시스템이 케임브리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모즐리 사후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케임브리지 물리학과에서 수십 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배출되는 동안 옥스퍼드 물리학과에서는 졸업자 중 수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옥스퍼드는 문과 쪽이 강하고 케임브리지는 이과 쪽이 강하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화학이나 생물학(+의학) 분야에서는 옥스퍼드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케임브리지 만큼은 아니지만) 수십 명 배출되었고, 영국 내 다른 대학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도 결코 적지 않으며, 옥스퍼드 물리학과가 유별나게 수준이 낮거나 망한 것도 아니어서 졸업생 가운데 노벨상만 못 받았지 노벨상 바로 직전까지 가는 수준의 권위자들이 득시글거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저주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묘한 현상이었다.
학사부터 박사과정까지 전부 옥스퍼드 물리학과에서 공부한 앤서니 레깃 경이 20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면서, 모즐리의 저주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깨어졌다.
4. 관련 문서
[1]
화학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물론 이 사람의 연구가 현대 화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치긴 했지만 본인은 물리학자로서 물리학 연구를 한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
헬리콥터 조종사로 입대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 시기에는 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시험적인 헬리콥터만 존재했던 것을 고려하면 잘못된 정보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느려터진 복엽, 삼엽기들이 날아다니던 시대였고 헬리콥터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되기 시작한 건
6.25 전쟁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