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6:58

허병률(1890)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양천 허씨
출생 1890년
함경도 단천군 하다면 하대동
(현 함경남도 단천시 하다면 연대리)[1]
사망 1930년 7월 24일
함경남도 단천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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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허병률(許丙律)은 1890년 함경도 단천군 하다면 하대동(현 함경남도 단천시 연대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단천군 하다면을 비롯한 이중면·수하면·복귀면 면민들 다수는 주로 숯과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당시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조직된 삼림조합은 일제의 경찰력과 행정력이 동원되어 강제적으로 운영되는 형태였고, 이들에 의한 임산물 채취 금지 및 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은 생계수단의 박탈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당시 삼림간수들의 행패는 원성이 높았으며 주민들 사이에 삼림조합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 7월 단천군 하다면 연대리에서 삼림조합 간수가 삼림단속 중 연대리 주민 허달규(許達圭)를 도벌(盜伐:무단벌채) 혐의로 취조하려다 그 부인을 구타하고 감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단천농민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다면민 200여 명이 하다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다면민들은 이 문제가 면사무소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사건을 확대시키기 위해 7월 18일 단천군청으로 항의하러 가던 중 일본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의 "해산하면 좋도록 처리하겠다"는 말을 듣고 면민들은 일단 해산하였는데, 일본 경찰은 그날 밤 주모자 20여 명을 검거하는 등 오히려 면민을 탄압하였다. 이에 격분한 면민 400여 명은 이튿날인 19일 단천군청으로 가서 단천군수 임창재(任昶宰)와의 면담 및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위협에 일단 해산하였다.

이후 농민들은 다시 하다면·복귀면·파도면을 중심으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7월 20일 단천군청 앞에 모인 2,000여 명의 단천군민들은 단천군청을 습격하고 단천경찰서로 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던 중 일본 경찰과 충돌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정세가 점차 어려워지자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의 발포로 허병률을 비롯하여 김계환· 최두필· 장종형·이선식(李善植)·최종협(崔鐘協)· 안경룡· 유경을· 안길현·김을룡(金乙龍)·김창언(金昌彦)·이원호(李元鎬)·김응철(金應喆)·김득수(金得洙)· 심정붕· 안병환이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고 이 밖에 2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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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근의 송파리와 함께 양천 허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