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4 21:34:40

하인리히 제페를로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Heinrich Severloh (1923~2006)

독일 국방군 육군 병사.

2. 생애

1942년 7월 23일에 19세의 나이로 징병되어 서부전선의 육군 제321 포병 연대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통신병으로 보직을 받아서 통신병으로서 활동하다가 같은 해, 10월 동부전선으로 재배치를 받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군과의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어 1943년 6월까지 군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퇴원 후 다시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 되어 기관총 사수로 보직이 바뀌게 된다. 그가 재복무를 하게 된 곳은 서부 전선에서도 정예 사단에 속했던 육군 제352 보병 사단이었다.

그는 1944년 6월 6일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당시 나치 독일의 상황은 동부전선으로 대부분의 전력이 몰려있었다. 때문에 독일군은 부족한 무기들을 동부전선에서 재배치될때 노획한 소련 프랑스제 무기들로 싸웠다. 제페를로의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D-Day 당일 제페를로에겐 그의 MG42 1정과 7.92mm 링크탄 12,400발이 있을 뿐이었다.

제페를로가 당시 있던 곳은 그 유명한 오마하 해변이었다. D-Day 당일 중에서도 가장 많은 미군이 상륙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제페를로에겐 퇴로가 없었고,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MG42를 발사했다. 미군들을 향해 제페를로는 아낌없이 MG42를 발사하였고, 기본 탄띠를 모두 소진해서 대공용 탄띠까지 써야 했다. 문제는, 사용한 대공용 탄의 특성상 매 5발마다 예광탄이 발사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있던 미군 구축함, USS 프랭크포드에게 위치가 탄로가 나, 집중포화를 받았다. 폭발로 인해 얼굴에 파편이 튀긴 하였지만, 더 큰 피해를 입기 전 자리를 피하였다. 자신의 기관총을 보니 망가져져 있었고, 12,000여 발을 발사해 빨갛게 달아오른 총열이 떨어져나가, 잔디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이쯤되어, 구축함의 포격으로 방어진지가 거의 무력화되었고, 몇몇 미군은 이미 진지에 도달하여 싸우고 있었다. 더 이상의 방어는 할 수 없다고 여긴 소대장은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제페를로도 동료 병사 한 명과 함께 후퇴하였다.

그후 제페를로가 머물고 있던 대대의 대대장은 상황이 불리하다며 퇴각을 명령했고, 제페를로 역시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페를로는 D-Day 바로 다음 날인 6월 7일, 미합중국 육군의 데이빗 실바 보병 병장이 쏜 M1 개런드 소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곧 포로가 되었다.

이후 전후인 1947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그는 독일로 돌아와 자신의 가업인 농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의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곤 했다. 신기한 것은 그가 종전 후, 자신을 쏜 실바 병장과 다시 만나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는 것[1]인데, 그 두 사람은 6월 6일만 되면 오마하 해변을 함께 방문하여 1944년 당시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한다. 서로 농담 삼아 "내가 그때 자네를 죽였어야 했는데..." 라면서 놀려 먹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독일 국방군 참전용사들이나 실바를 비롯한 연합군 참전용사들하고도 만나 우정을 쌓다가 2006년 1월 14일 생을 마감한다.

3. 여담

제페를로는 혼자서 1,500~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했고 이게 널리 퍼져 인간흉기로 언급되지만 이는 사실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다른 사례와 비교해보자면 더 퍼시픽의 주인공 중 1명이자 과달카날 전투에서 기관총 반장으로 명예훈장을 받은 존 바실론의 경우 그가 지휘했던 기관총호 부근에 38명의 일본군이 쓰러져 있었고, 그 공로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상륙 당일 오마하 해변의 미군 사상자는 3,000명 가량인데, 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따르자면 미군 전체 사상자의 절반 이상이 고작 1명의 기관총 사수에게 죽거나 부상당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흔히 오마하 해변의 MG42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위시한 각종 매체에서 워낙 강조해 묘사하여 마치 독일군의 기관총이 오마하의 참상을 전적으로 이뤄낸 것처럼 그려지는데 여기에는 다소 과장이 있다. 진짜 미군에게 큰 병력손실을 안겨준 독일군의 화기는 상륙정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수중지뢰와 해변에 배치된 대전차포, 해변 후방에서 발사되는 각종 곡사화기들이었다. 특히 수중장애물과 지뢰는 미군이 영국군과 달리 만조가 아닌 간조기를 골라 상륙을 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였다.

영문 위키에 따르면 당시 오마하 해변의 독일군 병력이 7,800명, 야포가 장착된 벙커가 8개(8 artillery bunkers), 필박스가 35개(35 pillboxes), 포좌가 4개(4 artillery pieces), 박격포좌가 6개(6 mortar pits), 대전차포가 18문(18 anti-tank guns), 로켓포좌가 45개(45 rocket launcher sites), 기관총좌가 85개(85 machine gun sites), 매설한 전차포탑이 6개(6 tank turret)로 나온다. 제페를로가 혼자서 오마하 해변의 미군 사상자 절반 이상을 만들었다면 이 나머지 독일군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결론은 제페를로가 혼자서 천 명이 넘는 미군을 살상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터무니없는데다 교차검증이 가능한 어떠한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 주장일 뿐이다.


[1] 의외로 2차대전 종전 후, 추축국 참전용사들과 연합국 참전용사들이 만나 친구가 되는 일은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돌프 갈란트 더글러스 베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