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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

<colbgcolor=#D7CCC8><colcolor=#000>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
Prinz Heinrich von Preußen
파일:Prinz_heinrich_von_preussen_00.png
이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루트비히
(Friedrich Heinrich Ludwig)
출생 1726년 1월 18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802년 8월 3일 (향년 76세)
프로이센 왕국 라인스베르크
배우자 헤센카셀의 빌헬미네 공녀 (1752년 결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어머니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형제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빌헬미네,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2세, 샤를로테, 프레데리케 루이제, 필리피네 샤를로테, 루트비히, 조피 도로테아, 루이제 울리케, 아우구스트 빌헬름, 안나 아말리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7년 전쟁2.3.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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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동생이자 프로이센의 장군. 7년 전쟁 시기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대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하인리히는 프로이센의 2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그의 왕비 조피 도로테아[1] 사이에서 태어난 13번째 아이였다. 1740년에 14살의 나이로 프란츠 하인리히 화승총 연대의 지휘관이 되어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맡았다. 그는 1742년 5월 코투지츠 전투에 참가했고 1745년 6월 4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도 참가해 상당한 활약을 선보여 그해 7월 15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는 아군의 군사 작전에 가담했다가 천연두에 걸려 한동안 요양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 시기 그의 군사 지휘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부하들을 잘 돌보고 가급적 사상자를 적게 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형보다 훨씬 신중한 지휘 스타일을 갖췄음을 드러냈다.

2.2. 7년 전쟁

1752년 6월 25일, 하인리히는 헤센-카셀의 빌헬미나와 결혼했다. 그후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한 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을 침공했을 때, 그는 보병 여단을 지휘해 대왕의 승리에 한 몫을 담당했다. 1757년 2월 16일 중장으로 승진한 하인리히는 프로이센군의 보헤미아 침공 작전에 참가하여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서 프로이센 좌익을 이끌었다. 전투 막판에 오스트리아군이 패퇴하기 시작했지만 격렬한 전투를 치르느라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은 함부로 적을 추격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하인리히는 개울에 뛰어들고는 "대왕 만세!'를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앞다퉈 개울을 건너 적을 추격했고,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프라하 요새로 패주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이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패한 뒤 프라하 포위를 중단하고 작센으로 퇴각했을 때, 하인리히는 키스 공작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장군의 군단 휘하의 후위대를 지휘했다. 또한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 때 우익을 지휘해 대왕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때 그는 부상을 입고 1758년 봄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요양했다. 그후 하인리히는 프랑스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엘베강 전선을 지탱하는 독립 야전군을 지휘하여 브라운슈바이크 영지를 프랑스군으로부터 가까스로 지켜냈다. 그는 이 공적으로 12월에 중장으로 승진했다.

1759년,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합세하여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과 맞섰다. 8월 12일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때, 하인리히는 다른 장성들과 함께 러시아군 한쪽 측면을 돌파한 병사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자고 제의했으나 대왕은 어떻게든 러시아군을 당장 괴멸시키고 싶어 이를 거부하고 공세를 지속했다가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대역습으로 완패당하고 말았다. 대왕은 이로 인해 절망해 자살이나 퇴위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인리히는 그런 대왕을 대신해 오스트리아군의 진군을 저지했고 9월 25일 호이어스베르다 전투에서 기막힌 기습 작전을 이끌어 베흘라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군 3천 명을 격멸했다. 이 때문에 당초 프로이센에 대한 공세를 감행하려 했던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이를 중단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동생의 활약에 기운을 차려 전장에 다시 설 수 있었다.

1760년, 하인리히는 슐레지엔 방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브레슬라우를 탈환하고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과 수차례 접전을 치렀다. 이후 1761년 작센 전역을 지휘했으며 1762년 10월 29일 2만 2천 명을 이끌고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스톨베르크 공작(Fürst) 휘하의 오스트리아군 3만 명을 격파해 적병 7,400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혔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투를 끝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프로이센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2.3. 이후의 경력

1763년 이후, 하인리히는 스톡홀름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연이어 방문해 1772년 8월에 진행된 제1차 폴란드 분할 계획을 이끌어내는 데 한 몫을 담당했다. 이때 그는 폴란드 국왕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1778년, 하인리히는 다시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했으나 별다른 군사 행동을 보이지 않아 대왕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1786년 대왕이 사망한 후 후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즉위한 뒤 그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1790년 라인스베르크에 있는 그의 궁전의 한 호수에 15m 높이의 오벨리스크를 만들었다. 이 오벨리스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용기와 지혜로 영원히 기억될 자격이 있는 모든 프로이센 영웅들에게 이 조각상을 바친다.

또한 오벨리스크의 옆면엔 그의 개인적인 지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프로이센 장교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밉보여 소외되었던 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그가 프리드리히 대왕을 반대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했다.

하인리히는 1802년 8월 3일 76세의 나이로 라인스베르크 궁전에서 사망했다.


[1] 조지 1세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