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9:09:28

가와사키 무네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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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키 무네노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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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iei_NSC_2003.pn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5.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8.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3 2011 2017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4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2003년
이구치 타다히토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2도루
카와사키 무네노리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2도루
2005년
니시오카 츠요시
( 치바 롯데 마린즈)
41도루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4년 퍼시픽리그 최다 안타
2003년
타니 요시토모
( 오릭스 블루웨이브)
189안타
카와사키 무네노리
마츠나카 노부히코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71안타
2005년
와다 카즈히로
( 세이부 라이온즈)
153안타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 반지}}}
2006 2009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52번
브라이언 윌리엄스
(1998)
가와사키 무네노리
(2000~2011)
결번
시애틀 매리너스 등번호 61번
맷 맨지니
(2010)
가와사키 무네노리
(2012)
팻 벤디티
(2016)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번호 66번
후안 구즈만
(1991~1995)
가와사키 무네노리
(2013~2015)
저스틴 샤퍼
(2018)
시카고 컵스 등번호 66번
라파엘 돌리스
(2011)
가와사키 무네노리
(2016)
라파엘 오르테가
(2021~2022)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52번
결번 가와사키 무네노리
(2017)
리처드 스나가와
(2020~)
}}} ||
파일:Kawasaki_GoldenBraves.jpg
가와사키 무네노리
川﨑宗則 / Munenori Kawasaki
출생 1981년 6월 3일 ([age(1981-06-03)]세)
가고시마 아이라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좌타
학력 가고시마 공업 고등학교
프로입단 1999년 드래프트 4위
소속팀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2000~2011)
시애틀 매리너스 (2012)
토론토 블루제이스 (2013~2015)
시카고 컵스 (201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7)
웨이취안 드래곤스 (2019)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 (2020~)
지도자 웨이취안 드래곤스 (2019)
응원가 [구단자작곡]

1. 개요2. 일본프로야구 시절3. 메이저리그 시절4. 일본프로야구 복귀와 은퇴5. 현역 복귀 및 대만 프로야구 시절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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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크스 시절 응원가

일본프로야구를 거쳐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었던 일본 프로야구 선수. 별명은 무네린. 메이저 리그 진출 이후에는 팀 동료들에게 '무니'라고 불렸다.

2.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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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가라테 야구를 병행했으나 야구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가라테는 그만두었다. 야구 소년치곤 드물게 고시엔보단 프로에 가고픈 마음이 컸기에 주전자리가 보장된 가고시마 공업고교로 진학하였고, 사쓰마 이치로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 내에서 주루센스와 타격을 인정받았으나 전국적으로는 무명에 가까운 고교 선수였다.[2]

가고시마 공업고교 졸업 후 1999년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지명되며 프로생활을 시작하였다. 가와사키는 당시까지만 해도 70kg조차 안 나가는 상당히 마른 몸이었고 고시엔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3] 대학을 거쳐 프로에 도전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타격센스와 빠른 발을 눈여겨본 다이에에서 깜짝지명을 한 것이다. 전술했듯 가와사키도 프로에 직행할 자신이 없어서 대학을 알아봤을 뿐 사실은 프로에 가고싶은 마음이 컸기에 지명 이후 고민 없이 다이에에 입단했다.

2000년 한해는 2군에서 보내고 2001년 10월에서야 처음으로 1군 경기에 출장했다. 원래의 포지션은 유격수이지만 2003년에 주전 3루수였던 고쿠보 히로키의 시즌 아웃 부상으로 유격수가 아닌 3루수로 출전하면서 규정타석을 채우고 0.294에 30도루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2004년에는 수신타병이던 토리고에 유스케[4]를 밀어내고 주전 유격수로 정착해 3할 타율에 171안타, 42도루로 최다안타, 도루왕을 차지했다. 이 해에는 골든글러브와 베스트나인도 획득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빠른 발을 살린 전형적인 단타 위주의 타자로 일본리그에서는 꾸준히 3할 타율과 2~30개 정도의 도루를 기록하며 2000년대 호크스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코어로 활약했다. 2000년대 초중반 이구치 타다히토, 마츠나카 노부히코, 고쿠보 히로키, 조지마 겐지, 페드로 발데스[5], 훌리오 줄레타 등 거포들이 포진한 '다이하드 타선'[6]의 테이블 세터로 리드오프인 시바하라 히로시/무라마츠 아리히토[7]/오무라 나오유키[8] 등의 뒤에서 중심타선으로 연결하는, 스몰볼에서의 2번타자 역할을 묵묵히 해주며 많은 인기를 얻었고, 저 외야수들이 죄다 노쇠화한 뒤에는 본인이 리드오프 역할을 맡아 준수하게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니시오카 츠요시, 나카지마 히로유키와 함께 퍼시픽 리그 3대 유격수로 평가받았다. 이 둘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펀치력이 떨어졌지만, 그걸 견고한 수비와 준수한 작전능력으로 만회했다. 또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도 자주 뽑혀서 국내 야구팬들에게도 친숙한 선수. 2006년, 2009년 WBC와 2008년 올림픽에서도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2011년 시즌 종료 후 FA 권리를 행사해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 호크스에서 2루수 혼다 유이치와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오토바이 드립이 자주 나왔다.

3. 메이저리그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Munenori_Kawasaki_on_August_6,_2012.jpg

사실 가와사키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실력은 아니라고 본 사람들이 많은지라 별 주목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헐값에 시애틀 매리너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본인이 프로가 되기 전부터 스즈키 이치로의 광팬이어서, 이치로가 있는 팀이 아니면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다른 구단으로 눈을 돌렸으면 조금 나은 대우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는데 굳이 마이너리그 계약까지 감수하면서 시애틀에 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2012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고작 61경기 출전에 타율 1할대, OPS는 0.459를 찍었고, 유격수 수비에서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NPB 시절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특유의 개그 캐릭터를 살려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시즌 중 이치로가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는 사고도 겪었다. (이 때 기사에 대한 일본쪽 반응은, 이치로 얘기는 없고 가와사키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2012년 시즌이 끝난 후 시애틀에서는 결국 방출되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양키스로는 못 갔지만 그래도 AL 동부지구까지는 따라 갔다.

파일:external/assets1.sportsnet.ca/munenori_kawasaki-640x360.jpg

2013시즌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도 마이너에서 출발했지만, 4월 중순에 호세 레예스의 부상으로 메이저로 콜업되어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타격 성적은 여전히 별로지만 타율이 2할 초반대로 조금 올라서, 영양가있는 홈런도 때려내기도 하며 일단 토론토 팬들의 반응은 레예스가 뚫어놓은 구멍을 그럭저럭 잘 메워줬다는 평. 팀 내에서는 '무니'라고 불리면서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는 듯하다. 하지만 6월 25일자로 호세 레예스가 부상에서 복귀하면서 마이너리그로 옵션되었다. 아무리 비즈니스라지만 친화력과 기행으로 현지팬한테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인 만큼 가와사키의 마이너행이 아쉬운 사람도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멜키 카브레라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15-day DL에 오르자 마이너리그로 강등된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시 콜업. 다시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다. 그러나 내야수 브렛 로리가 복귀하며 다시 마이너행…

8월 중순 세 번째로 메이저로 올라왔다. 9월엔 메이저 첫 4안타 게임을 기록하기도 하며 그대로 메이저에서 시즌을 마감. 성적은 96게임 출전에 1홈런 24타점, 타율은 0.229. 다만 어떻게든 출루하기 위해 끈질게 물고 늘어진 모습을 보인 결과, 출루율이 .326으로 상승했다는 것은 고무적이었다.

2013시즌 종료 이후, 블루제이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주전 2루수 마이서 이스투리스가 무릎부상으로 DL에 가며, 현지시간 2014년 4월 13일에 메이저로 콜업되었다. 이스투리스의 부상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여 가와사키에게 많은 출전 기회가 돌아갈 듯 싶었으나 호세 레이예스가 복귀하며 5일만에 다시 마이너리그로 갔다. 그리고 6월에 이 해 두번째로 메이저로 올라왔는데, 브렛 로리가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선발출장 기회도 늘어났다. 시즌 최종 성적은 82게임 출전 .258, 62안타 17타점.

2014시즌 종료 후 다시 FA가 되었다. 일본프로야구 복귀도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지만, 결국 토론토와 다시한번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2015년에는 토론토가 컨텐더를 노리며 트로이 툴로위츠키 등 선수들을 질렀고, 팀도 선두싸움을 하게 되면서 거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23경기 출장에 그쳤다. 일본복귀 가능성이 높으며, 친정팀인 소프트뱅크로의 복귀가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미국 잔류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토론토 동료등과도 잘 지내는 모양이긴 한데[9] 성적도 별로면서 친목질로 살아남는다고 한국 네티즌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물론 가와사키의 유쾌한 성격과 괜찮은 멘탈, 실력보다는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것 때문에 옹호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시즌 후 토론토와 재계약에 실패해 논텐더로 풀렸고 2016년 1월,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시범 경기에서 3할 후반대의 고타율을 기록했음에도 개막전 로스터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하지만 개막전이 열린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카일 슈와버가 수비 도중 덱스터 파울러와 충돌로 입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해 부상자 명단에 올라가버리는 바람에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다. 다만 메이저리그에서 2경기에 나서 2타수 1안타 1도루를 기록하고 콜업된지 일주일만에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하지만 토론토 시절처럼 팀메이트들과의 친화력을 사서였는지 포스트시즌 로스터에는 들어있지 않으면서 월드시리즈 7차전까지 팀과 함께 있었다. 또한 시카고 컵스가 마지막 아웃을 잡아내는 순간 다른 선수들과 같이 덕아웃에서 뛰어나와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뻐했으며 샴페인 파티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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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컵스에서의 총 성적은 14경기 출장 .333/462/429을 기록했으며 우연치않게 컵스의 108년만의 우승에따른 귀중한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도 받게되었다. #

4. 일본프로야구 복귀와 은퇴

2017년 3월 29일 스프링 캠프 도중 시카고 컵스가 계약을 해제하면서, 원 소속팀인 NPB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의 복귀가 결정되었다. 계약 내용은 1년 9,000만엔, 등번호는 원래 번호였던 52번을 사용한다. 여담으로 4월 1일에 발표가 나는 바람에 뉴스 기사만 보고 만우절 장난인줄 알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가와사키의 신묘한 기운 때문인지 소프트뱅크는 지바 롯데 마린즈와의 개막 시리즈를 스윕하며 기분 좋은 시즌 출발을 알렸다. 이후에 팀이 부진하며 순위가 하락했었는데 가와사키가 1군으로 합류하자마자 폭풍 연승을 달리며 2위로 올라섰다. 시즌 초 2군 조정을 거쳐 4월 28일 오릭스전에서 1번 2루수로 선발출장하며 복귀후 첫 공식전에 출장했다. 미국에 있던 동안 이마미야 겐타가 완전히 유격수로 정착했기 때문에 2루수로 전향했다. 42시합에 출장하며 타율 0.241, 출루율 0.310으로 일본에서의 마지막 시즌보다 소폭 하락된 기록을 남기다가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7월 24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몸상태가 안좋아 계약이 보류되면서 2018시즌은 반 무소속 상태로 시작하게 되었다. 다만 호크스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복귀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몸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개막 직전인 2018년 3월 26일에 은퇴를 선언했다. 부상 이외에도 자율신경계에 문제가 생겨 자기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5. 현역 복귀 및 대만 프로야구 시절

그 후 한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가[10], 2019년 7월 9일자로 대만 프로야구 리그 웨이취안 드래곤스[11]의 객원 코치로 취임하였으며, 사흘 뒤인 13일에는 선수로도 플레이 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동갑내기이자 한때 팀 동료였던 이범호에게 은퇴식 축하를 겸해서 연락했다고 한다.

웨이취안 드래곤스의 육성선수 린지에첸(林桀晨)[12]이 가와사키를 동경하여 일본으로 약 5년간 야구 유학을 다녀와 일본어에 능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와사키가 린지에첸과 주로 같이다니며 야구를 가르쳐주면서 선수단에게 할 말이 있을 때 통역을 부탁하고 있다. 가와사키 본인 역시 이치로를 롤모델로 삼아 야구를 해오면서 결국 같은 시애틀 매리너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것 처럼,자신을 동경하여 일본까지 유학을 하며 야구를 해온 린지에첸과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상당히 감회가 새로울 것이고, 이러한 점들 덕분에 일본프로야구 은퇴 이후 야구와 거리를 두려 했던 힘든 시간을 털어내기 시작하고 웨이취안 선수단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웨이취안 드래곤스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가와사키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재창단하는 웨이취안 드래곤스의 행보와 선수들의 생활이 담겨있다.

그러나 2020년 시즌을 앞두고 선수 계약을 하고 싶었던 본인과 플레잉코치 계약을 하고 싶었던 구단의 의견 충돌로 재계약에 실패하며 팀을 떠났다.

2020년 8월에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13]과 선수 계약을 했다. 대만프로야구 재입성을 목표로 임하겠다는 뜻을 전했으며, 나이를 감안해 일본프로야구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6. 기타

파일:external/www1.pictures.zimbio.com/Ichiro+Suzuki+Munenori+Kawasaki+2MA0MtVZKnwm.jpg

이치로 본인에게 이치로 매니아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이치로의 광팬. 일본에서 뛸 무렵의 등번호는 '이치로 다음 가는 선수'라는 의미로 이치로의 등번호인 51보다 하나 많은 52를 달고 뛰었으며, 메이저 진출시에도 이치로를 따라 매리너스로 가버렸고, 등번호 51은 다른 선수가 쓰고 있었기 때문에 거꾸로 읽으면 이치로가 된다는 의미로 등번호 61을 달았다.[14] 또한 시즌 이후엔 자율훈련도 함께할 정도이고, 타격폼도 이치로의 폼을 따라했는지 상당히 흡사하다.

이러한 한결같은 이치로에 대한 위험한 동경과 약간 유들유들하게 생긴 외모때문에 2ch에서는 TDN에 이은 게이 네타의 희생양이다. 특히 이치로 따라 마이너 계약으로 시애틀 갔을 때랑, 기껏 쫓아갔는데 이치로가 양키스로 트레이드 됐을 때가 절정. 그리고 토론토가 게이의 도시라는 이상한 편견까지 섞여서 일본 야구계 게이의 2인자로 네타거리가 되었다. 근데 실은 가와사키는 결혼도 했고 2013년에는 득남까지 했다.

2013년 8월 21일 뉴욕 양키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경기에서 이치로가 미일 통산 4000안타를 달성할 때 필드에서 같이 열렬히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치로 본인도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관중들 에게 인사한 후 마지막으로 무네노리에게까지 고맙다는 사인을 보내주었다. 무네노리의 활짝 핀 표정이 귀엽다.

파일:external/blog-imgs-49.fc2.com/20111008112001422.png

일본 시절에는 미남으로 불리며 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으나,[15]

파일:external/assets.sbnation.com/kawasakidance_medium.gif

메이저에서는 대머리+괴짜 일본인 컨셉으로 가고있었다.

일본에선 이케맨으로 불리며 수많은 얼빠들을 몰고 다녔지만, 사실은 유쾌한 성격의 분위기 메이커로 알려져 있다. 약간 4차원적인 기질도 있어서, 일본 시절 때는 경기 시작 전 응원가에 맞춰 춤을 추는 ' 무네린 댄스' 가 유명했다. 특유의 낯가림 없는 성격 덕분인지 이범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했을 때도 절친이 되었다고 하며, 그 덕에 소녀시대 티파니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인연이 계기가 되었는지 2019년 7월 13일 이범호의 은퇴식에 영상편지를 한국어로[16] 촬영해 보내주는 정성을 보였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그 기질이 죽지 않아서, 덕아웃에서 음악에 맞춰 정체불명의 댄스를 구사하기도 하고 1루에서 도루하는 척 발만 터는 슈퍼 플레이를 선보여 중계하는 사람들을 포복절도에 빠트리기도 했다. 토론토에서도 이런 모습은 여전해서, 성적과는 관계없이 팀내에서 인기는 굉장한 듯 하다.

일단 팀 동료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지금까지 잘 해오고는 있는데, 쟤 영어는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인 듯. 그리고 그걸 확인해 볼 수 있는 2013년 5월 26일 볼티모어전에서 역전 끝내기 2루타를 치고 난 다음에 인터뷰 모습.

역시 개그 캐릭터. 못 알아들을 사람을 위해서 가와사키가 수첩을 펼쳐놓고 뭐라고 했는지 옮겨적으면 "My teammates gave me an opportunity. So I wanted to do something about it. (팀 동료들이 상을 차려줬다. 그래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이다.

그의 영어 실력을 볼 수 있으니 알아서 판단하길...

https://www.youtube.com/watch?v=86PkGlBlVbA

https://youtu.be/MwUPFU9rDMg

https://youtu.be/Jm9bEizIGBE[17]

https://youtu.be/VQRvt3aZllo

https://youtu.be/3Di2_EM3zCg

2017년의 모습. 전보다 많이 늘어난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txhkzQ_dyp0

2013년 6월 21일 경기에서는 메이저리그 진출 후 첫 홈런을 신고했다. 토론토 홈팬들로부터 조 카터 월드 시리즈 끝내기포를 방불케 하는 대단한 환호를 받고, 동료들과 합장 세레머니를 한 뒤 커튼 콜까지 받으며 관중들에게 합장 세레머니를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런 개그 캐릭터가 그리 좋게만은 보이지 않았던 건지, 거침없는 독설로 유명한 장훈은 가와사키의 인기에 대해 "홈런은 완전 운빨. 팬들로부터는 마스코트 취급 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 타율이 2할 1푼인 선수는 야구 선수가 아니다." 라고 혹평을 했다.[18]

이에 대해 트위터에서 누군가가 가와사키와 친한 다르빗슈 유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다르빗슈는 "가와사키는 꽤나 팀에 도움이 되고 있어. 그런데 장훈이 나온 프로그램[19]은 뭐 때문에 있는 거야? 선수를 까기 위해서? 모르겠구만."이라고 반박했다.[20]

그러다 2014년 10월 26일, 가와사키가 직접 TBS 선데이모닝 '주간 고견코너'에 직접 출연했다! 원래는 NPB 은퇴선수들과 장훈이 출연하는데, 이번에 장훈과 같이 패널로 참석하게 된 것! "떽!"을 날려버리면서 혹평한 장훈 옆에서도 기죽지않고 그 시절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해버려서 4차원 강철 멘탈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 우연이겠지만 TBS 제작진에서 장훈이 "떽!"을 날리던 장면을 방송하려 했지만 음성이 나오지 않는 방송사고가 나버려서 움찔하던 분위기가 급훈훈해지기도.

파일:external/pbs.twimg.com/B-j5zCZUIAE97b_.jpg
2015년 2월 스프링캠프 카미카제가 적힌 두건을 두르고 나온 것이[21] 트위터에 올라왔는데, 이로 인해 한국 한정으로 굉장한 빈축을 샀다.

프리미어 12 4강 한일전을 앞두고 오타니 쇼헤이에게 아침밥 잘 먹고 마운드에 오르라는 다소 이색적인 조언을 했다. 오타니는 이에 대해 아침밥 잘 먹고 마지막까지 체력관리 잘 하겠다며 화답하였고 실제로도 한국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호투를 펼쳤지만 결과는...준결승 한국전을 tv로 일본의 공격인 8회말 까지만 보고 2살짜리 아들을 목욕시키고 나왔는데 부인이 큰일났다며 한국의 역전 소식을 알려줬다며 자신(카와사키)이 만약 9회까지 제대로 보면서 파워를 보냈다면 100% 이겼을거라며 자신의 자만심이었다며 고쿠보 히로키감독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22]


[구단자작곡] 踊るぞ川崎は 魅せるぞ川崎は 決めるぞ川崎は 男だ川崎は 춤춘다네 카와사키는 매료시킨다네 카와사키는 끝내준다네 카와사키는 남자라네 카와사키는 [2] 공고 재학 시절 전기공사기사 자격증을 따서, 독립 리그에 와서는 전기공사업체 스폰서 광고를 하기도 했다(...). [3] 가와사키가 살던 가고시마 현 대표로 고시엔에 단골 출전한 학교는 스기우치 도시야를 배출한 가고시마 실고와 쇼난고교 였다. [4] 현재는 치바 롯데 마린스의 수석 코치. 90년대에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주전 유격수로 뛰며 장신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수비를 펼쳤다. 그러나 97년 말에 밝혀진 대규모 야구선수 탈세사건에 연루되어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뒤 이종범, 구지 테루요시, 후쿠도메 고스케 등 유격수 포지션 경쟁자들에 밀려나 1999년에 다이에 호크스로 트레이드된다. 하지만 호크스는 그가 트레이드된 해인 1999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끝내 센트럴리그 우승팀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심지어 호크스는 2000년에도 리그 우승을 이룬다! 고마워요 호시노 참고로 수신타병이라고 한 이유는 리그 탑급의 수비력과 거기에 대조되는 타선에서의 거대한 블랙홀 역할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타자였기 때문. 매년 공격에서의 목표가 자기 키(187cm)를 넘는 타율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5] 2007년 LG 트윈스에서 뛴 그 발데스 맞다. 발Death [6] 호시노 센이치 한신 타이거즈를 꺾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2003년은 그 백미. 팀타율 .297, 100타점 타자가 4명이라는 괴물같은 득점력을 자랑했다. [7] 2003년 시즌오프에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FA 이적했고, 팀명이 오릭스 버팔로즈로 바뀐 뒤에도 2008년까지 뛰다가, 오무라 나오유키의 트레이드로 다시 호크스로 돌아와 선수생활의 마지막 2년을 보냈다. [8] 본래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주전 중견수-리드오프였지만, 킨테츠 구단이 해체되자 FA 권리를 행사해 소프트뱅크로 이적했다. 앞서 말했던 무라마츠와의 트레이드로 버팔로즈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마쳤다. [9] 실제로 2015년 플레이오프 기간 중에도 로스터에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마지막 경기인 ALCS 6차전까지 가와사키를 덕아웃까지 대동했다. [10] 이때 소식이 하도 뜸한 탓에 자율신경계 부상은 핑계고 우울증이나 난치병으로 투병 중인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팬들이 꽤 많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유격수 치고 너무나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감도 있었고. 사실 우울증 증세가 자율신경계와 무관하진 않기에 일리있는 걱정이긴 하다. [11] 대만 리그 초대 창설 팀 중 하나였다가 한 차례 해체했지만, 재창단한 팀이다. [12] 이 선수는 2020년에 입단하여 2년만에 방출당했다. 1군 기록 없이 2군 통산 4타석 1안타에 그쳤다. [13] 한선태, 무라타 슈이치, 니시오카 츠요시 등이 거쳐갔던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소속 독립야구단 [14] 정확하게는 1이 이치(いち), 6이 로쿠(ろく)다. 이치로(一朗, いちろう)에서 '로'의 장음을 무시하고 6의 '로쿠'에서 '쿠'를 뺀 것. [15] 한창 인기가 좋았던 다이에 시절에는 그야말로 후쿠오카 아이돌 수준이었고, 소프트뱅크로 모기업이 바뀐 이후에도 한동안 팀내 여성팬 지분 1위를 차지했었다. [16] 영상을 보면 옆을 바라보면서 얘기하는데 한국어 발음을 일본어로 적어서 보고 읽는 듯하다. [17] 개인 영어강사로 에스밀 로저스가 나온다. [18] 원로 야구 평론가들 중에서는 꽤 거침없는 독설이 서슴없이 나와서 한때는 MLB로 진출한 NPB 선수들에게 혹평을 하거나 다시, 국내로 돌아오면 혹평을 하거나 그래왔었다. 예전에 김태균이 그랬다가 까인 적이 있었다. [19] TBS 테레비 선데이 모닝의 코너「주간 고견코너」. [20] 장훈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기본적으로 야구계에서 보수적인 인사일 뿐만 아니라, 일본프로야구의 스타들이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국 리그를 등한시하는 행동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봤을 때, 미국에 진출한 뒤 야구보다는 마스코트적인 행동으로 주목받는 가와사키가 장훈으로서는 곱게 보였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다만 응원이나 조언은 없고 맨날 누군가를 까내리기만 한다며 안티도 굉장히 많은 편. 그런데 우에하라 고지를 극찬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면 그 발언 수위가 한없이 높아서 문제. [21] 위의 마지막 링크의 영상에서 선수단이 머리에 쓰고 있는것을 잠깐 볼 수 있다. [22] 출처: http://hanshintigers1.blog.jp/archives/5791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