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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덕찬(德贊) |
휘 | 적송(赤松) |
생몰년도 | 742년 ~ 797년 |
재위기간 | 755년 ~ 7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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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번의 제 37대 찬보로 당나라의 공주 금성공주(金城公主)와 36대 찬보 티데쭉짼(赤德祖赞)의 아들이며, 치송 데첸, 티쏭데짼(ཁྲོ་སྲོང་ལྡེ་བརྩན)[1]이라고도 불린다.2. 생애
티쏭데짼의 재위기간 때는 토번의 국력이 가장 강력할 때였으며 천축(天竺), 서역(西域)을 지배하기도 했다. 또 안사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던 당나라를 공격하여[2] 청해 일대에서 당군을 축출한 이후 하서와 농우 일대를 점령함으로써 당과 서역의 연락선을 끊었고, 명장 다짜뤼공(達扎路恭)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잠시 점거하고 황족 이승굉[3]을 황제로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토번군에 전염병이 돌고 곽자의의 공격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토번은 당나라와 화친을 맺었다.770년 인도에서 날란타 대학의 승원장 샨타락쉬타(ཁན་ཆེན་ཞི་བ་འཚོ་)[Shantarakshita]와 빠드마삼마와(པདྨ་འབྱུང་གནས.)[Padmasambhava]를 초빙하여 논법(論法)을 설파하고, 771년 토번은 불교를 국교로 공포하게 되었으며, 이후 라싸 동남쪽에 쌈얘사(桑耶·bsam yas)를 건축하여 775년에 낙성했다.
티쏭데짼은 라싸의 중요 관원과 왕족, 승려 및 모든 지방 관리들을 소환하여 충성을 맹세케 하여 쌈예사의 축조 기록과 왕실과 불교를 숭상하는 맹세를 비문을 남기게 하였고, 티쏭데짼은 왕권 강화를 위한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쌈얘사(桑耶·bsam yas) 대전 전경
781년에는 명재상 상치싱얼(尙綺心兒)이 월아천 전투에서 당과 위구르 연합군을 격파한 뒤 돈황을 점령하자, 당에서는 새 황제 덕종(德宗)이 즉위하여 토번과의 화친을 추구하였다. 당나라 쪽에서 먼저 포로교환을 제의했고, 이후 토번도 응답하여 783년 토번 측의 상결찬(尙結贊)과 당 측의 장일(張鎰)이 교섭하여 국경선을 확정하니, 이것이 당-토번간 6차회맹인 청수맹약(清水盟約)이 체결됐다.
그러나, 784년 당나라에서 4진 반란[6]을 비롯해 절도사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덕종은 각 지의 절도사들을 장안에 불러들였는데, 이들이 오히려 다른 마음을 품고 주차(朱泚), 주차의 동생인 노룡절도사 주도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나라 쪽에서는 토번의 공이 크지 않다는 여론이 나왔고,[7] 이에 분개한 토번이 다시 당나라를 공격함에 따라 맹약은 결렬되었고, 788년 토번은 3만 기병이 경주(涇), 빈주(邠), 영주(寧) 등 5주의 인근 지역을 약탈하니, 관공서와 민가를 불태우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후 티쏭데짼은 780년대 말부터 인도와 카슈미르 경략에 나서, 카슈미르와 카슈가르 일대를 둘러싼 압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들어갔다. 하서 일대에서 양측은 격전을 치렀고[8] 토번은 마침내 압바스 왕조에 승리, 결국 다시금 영향력을 아무르디아 강(Amu Darya)에 유역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790년에는 명장 줘치수(卓赤蘇)가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함락시켰다.
794년에는 쌈얘 사원에서 유명한 쌈얘 사 종론, 즉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의 교리 대결이 벌어졌다. 양자의 수용 여부를 두고 왕과 왕비, 귀족 등 권력 집단 간에 이견이 있었고, 티쏭데짼 왕의 중재로 중국 북종선(北宗禪) 계열의 마하연 화상(摩訶衍和尙)[9]과 인도 불교를 대표하는 논사 까말라쉴라(Kamalaśīla, 740-795)[10]가 쌈얘 사원에서 논쟁을 벌였다.
만일 사람이 선행이나 악행을 한다면 그 결과로서 선취나 악취에 태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깨달음을 얻는데 항시 장애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고 작용도 없는 사람은 현세의 생존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이같은 방식으로 사람은 제10지에 도달한 보살처럼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마하연 화상으로 대표되는 중국 선종(북종선) 불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악업은 물론 선업마저도 배제하고 어떠한 사고 작용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어떠한 사고 작용도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마하연 화상의 가르침은 본연적 자성의 밝음, 이것의 ‘자발적’ 활동을 강조했고, 모든 수행과 노력 대신에 어떠한 분별 작용이나 지향적 의식 작용조차 없는 불사불관(不思不觀)의 상태를 깨달음의 상태로 간주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그가 샨타락쉬타에 의해 대변되는 철학적 교의적 불교 대신에, 모든 의식 작용의 소거를 선정 체험 속에서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철학적인 선불교의 전통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티베트에서 크게 어필하고 있었다.
만일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분별작용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면 이것은 관찰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만일 이러한 관찰작용이 없다면 어떤 요가행자도 무분별지(無分別智)[11]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누가 일체법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의도하는 것도 없다면 이것은 그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을 기억하거나 사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체법을 사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할 때 이 생각 자체도 그가 이미 마음작용을 일으켰다는 증거이다.
만일 사념하지 않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면 기절하거나 술에 취한 사람도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관찰작용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념작용을 중지했다고 하면 어떻게 일체법의 무자성함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공성을 증득하지 못한다면 어떤 장애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작용에 의해서만 잘못된 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반대가 되므로 좋은 것이 아니다. 기억이나 관찰작용 없이 이전에 거주했던 장소를 상기할 수도 없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사념하지 않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면 기절하거나 술에 취한 사람도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관찰작용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념작용을 중지했다고 하면 어떻게 일체법의 무자성함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공성을 증득하지 못한다면 어떤 장애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작용에 의해서만 잘못된 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반대가 되므로 좋은 것이 아니다. 기억이나 관찰작용 없이 이전에 거주했던 장소를 상기할 수도 없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까말라쉴라는 이러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마하연 화상의 견해에 대해 그러한 견해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관찰' 작용, 즉 비파사나(觀)의 유용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끈다는 점을 지적하고, 마하연 화상의 입론이 실은 반야에 대한 그릇된 파악에서 나오고 있다고 반박한다. 한 마디로 "머릿속에 사념을 없애는 게 깨닫는 거면, 술 취한 사람도 머릿속에 사념이 없으니 깨달은 거라고 할 수 있느냐? '일체법을 사념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또 다른 사념이 아니냐? 그리고 분별을 안 하면 관찰도 안 한다는 건데, 그럼 일체법의 무자성함은 또 어떻게 관찰하고 어떻게 인식할 건데?"라는 것으로, 현장이 번역한 《유가사지론》, 《섭대승론》 등에서도 무분별지에 대한 잘못된 파악의 하나로서 지적되는 것이기도 하다.
대론의 결과에 대해 티베트 측 문헌인 《바세(sBa bshed)》는 까말라쉴라를, 20세기 초 돈황에서 출토된 중국 측 문헌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에서는 마하연 화상의 승리로 기록하여 양측의 기록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티쏭데짼 왕을 비롯한 당시 티베트의 권력층이 인도 불교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다.
폴 드미에빌, 《라싸 종교회의》(배재형, 김성철, 차상엽 譯)
중암,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
조병활, 《바세 연구》
《돈오대승정리결》(김치온 譯)
박건주, 《티베트 돈점 논쟁 연구》
쌈예 사 대론 이후 티베트 지역 불교의 주류는 인도 불교가 점하게 되었고, 마하연 화상으로 대표되는 중국 불교는 '하샹(ha shang)'의 가르침이라 불리며 배척의 대상이 된다. 선종과 유사한 점이 있는 닝마의 족첸도 사캬 빤디타(Sa skya paṇḍita) 등에 의해 '하샹'에게서 유래하였다는 의심을 받으며 '중국식 족첸'으로 비판받았고, 까규의 마하무드라 역시 인도 전승의 마하무드라가 아닌 '중국식 족첸'에서 유래한 '오늘날의 마하무드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차상엽, 《싸꺄빤디따(Sa skya paṇḍita)의 마하무드라(Mahāmudrā) 비판》 Roger R. Jackson, 《Sa skya paṇḍita's Account of the bSam yas Debate: History as Polemic》 David Jackson, 《Enlightenment by a single means : Tibetan controversies on the "self-sufficient white remedy"(dkar Po Chig Thub)》
안성두 서울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 서울구도회 강의
《티벳 불교의 이해:삼예사의 논쟁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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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년 사망했고, 무네첸뽀가 첸포 자리를 이어받았다.
티쏭데짼은 티베트 불교 전파와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기에 손챈감포, 적조덕찬(赤祖德贊)과 함께 묶여 토번삼법왕(吐蕃三法王)이라고도 불리며, 인도 날란타 대학의 승원장 샨타락시타, '제2의 부처'라 여겨지는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 빠드마삼바와과도 묶여 사군삼존(師君三尊)이라고도 한다.
3. 대중 매체에서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Jade Dragon DLC가 있다면 769년 시나리오에서 티베트 제국의 군주로 플레이할 수 있다.
[1]
동국대학교 티베트장경연구소 티베트어 한글 표기법에 따른 표기. 와일리 표기법으로는 'khri srong lde brtsan'으로 쓴다.
[2]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하서, 농우 일대의 당나라 군사들 상당수가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3]
금성공주와는 남매 사이이다.
[Shantarakshita]
725~790 또는 728~788. 티베트 불교에서 추앙하는 고승으로 날란타 17논사의 한 명이다. 한문으로는 적호(寂護)라고 불린다.
[Padmasambhava]
티베트 불교에서 제2의 부처로 칭송받는 성인으로, 전설에 의하면 부처는 자기가 죽은 뒤 '빠드마삼마와(蓮華生)'라는 이름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티쏭데짼은 빠드마삼마와가 오자 위대한 스승이 온 것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라싸 근교까지 마중을 나가고 많은
황금을 바치며 가르침을 구했으나, 빠드마삼마와는 금을 모래로 만들고는 "나는 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후 모래를 다시 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6]
유악, 위박절도사 전열, 산남동도절도사 양숭의,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가 일으킨 반란
[7]
덕종은 <죄기조>를 반포해 반란군을 사면하고
절도사 세습을 인정해주기로 약속함에 따라 상당수 절도사들이 항복했다.
[8]
무기를 만드느라 동전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9]
기존에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 선승으로 알려졌으나 남종선 계열 혹은 양자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수경(성제), 《티벳 불교의 쌈예 논쟁에 대한 재검토》. 화상(和尙)이란 승려를 높여 부르는 한자어이다.
[10]
한역하면 연화계(蓮華戒)라는 뜻이다.
[11]
반야를 다른 말로 무분별지라고 부른다. 주객의 대립을 전제하는 지혜인 '분별지'가 아니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무분별의 지혜를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