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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

'''최재서
崔載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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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문학자최재서.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08년 2월 11일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사망 1964년 11월 16일 (향년 56세)
서울특별시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학력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영어영문학전공 / 문학사)
가족 1남 4녀 중 장남
슬하 4남 2녀

1. 개요2. 생애
2.1. 학창 시절2.2. 문단 활동과 친일 행적2.3. 해방 후
3. 가족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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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세대 영문학자이자 번역가, 문학평론가, 소설가, 친일반민족행위자. 호는 석경우(石耕牛).

2. 생애

2.1. 학창 시절

1908년 2월 11일 황해도 해주시에서 출생했다. 본적은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북행정 72번지. 부친 최경태는 과수원 '태일원(台一園)'을 경영하면서 해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로 꼽혔고( 참조), 부잣집에서 누나 2명과 여동생 2명이 있는 5남매의 외아들로 태어난 최재서는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고, 해주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최재서는 학업에 뜻을 품고 상경하여 지방 출신 유학생들이 많았던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6년 3월 경성제2고보 제1회를 차석으로 졸업한 ( 조선일보(1926.3.7)) 최재서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3회 문과B[1] 수석으로 합격했다( 조선일보(1926.4.2)).[2] 1928년 3월에 예과를 수료한 최재서는 동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로 진학했다. 1학년을 마친 그는 문학과 영어영문학전공으로 전공진입했고, 1년 선배인 이효석 등 여타 조선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법문학부 외국어외국문학(영어영문학) 제1강좌 담임교수 사토 기요시(佐藤清)의 영향을 받아 존 밀링턴 싱(John M. Synge) 등 당대 아일랜드 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본국(영국=일본)과 식민지(아일랜드=조선)의 관계 설정 문제를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낭만주의에 천착한 최재서는 학부생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그와 더불어 애제자로 꼽힌 寺本喜一(제2회), 杉本長夫(제4회) 등 일본인 선후배들까지 모두 제치고 사토 기요시 교수의 총애를 받는 수제자가 되었다. 그는 1931년 3월 'The Development of Shelly's Poetic Mind'를 논문으로 제출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여 문학사를 받았다.

최재서는 학사 졸업과 함께 1931년 4월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1933년 3월까지 연구생으로 수학하면서 스승 사토 기요시 교수가 평의원을 맡고 있던 일본 내지의 일본영어영문학회에 데뷔하여 학회에서 발간하는 일본제국 최고 권위의 영문학술지인 「영문학연구」에 논문을 게재하였고 사토 교수와 동반하여 동경의 일본영어영문학회 발표회에도 참석하였다. 1차 대전 이후 유럽을 풍미하던 신조류인 주지주의를 내지로부터 들여온 최재서는 야마모토 도모미치(山本智道)[3] 교수의 후임으로[4] 강사직에 임명되었다. 이는 조선인/일본인을 막론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생으로서는 최초로 모교의 학부 강사 자리에 오른 것으로,[5] 장안의 일대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조선일보(1933.4.30) 참조).

그러나 동경제국대학 출신 교수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경성제국대학 교수진에서 경성제대 출신의,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을 실질적으로 교수 트랙의 시작인 강사로 임명한 데 대해서 법문학부 타 교수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최재서는 1934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강좌의 강사직에서 해임되었고,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조선인으로서 좌절한 최재서는 한동안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참조). 경성법전 외에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여담으로 최재서가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 1926년 개교한 법문학부의 영어영문학전공에 춘원 이광수가 선과생으로 들어왔는데, 이광수는 폐병으로 인해 1926년 9월부터 1928년 3월까지 휴학했으며 1930년 제적되므로, 1928년 예과를 수롯하고 법문학부로 진학한 최재서와 수학 기간이 겹친다. 이광수는 그가 일제 말기에 쓴 소설 "그들의 사랑"에서 최재서를 모델로 삼아 일본인 집에 살면서 일본 문화에 동화되는 조선인 학생 이원구를 그렸다고 한다.[6] 소설에서 이광수는 예과 재학 시절 최재서가 부친 별세 후 경제적 곤란을 겪던 일, 민족주의 성향의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인 집에서 하숙하며 일본인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리던 최재서에게 주먹다짐을 한 일 등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한다.

2.2. 문단 활동과 친일 행적

최재서가 1930년대 데이비드 흄, T. S. 엘리엇 등 영국 평론가들의 이론을 주지주의 문학론으로 소개하며 모더니즘 계열의 평론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1년, 첫 논문 「미숙한 문학」을 『신흥(新興)』 제5호에 발표하면서이다.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며 대학원에 들어간 1931년 『신흥(新興)』 5호에 브래들리(A.C. Bradley)를 소개하는 「미숙한 문학」을 발표하면서 비평가로 데뷔한 최재서는 이후 조선일보에 「구미현문단총관-영국편- 歐美現文壇總觀 英國篇」(1933),「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의 건설-영국평단의 주류-」(1934),「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1934),「비평과 과학」(1934) 등을 발표했다. 동아일보에도 「영국 현대소설의 동향」(1933),「미국 현대소설의 동향」(1934),「사회적 비평의 대두-1934년도의 영국평단 회고」(1935),「명일의 조선문단」(1938),「비평의 형태와 내용, 특히 월평을 중심으로 하여」(1938),「작가에 유언장,「예이츠의 생애와 예술, 그의 복전을 접하고」등을 발표했다.

그는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조선일보> 1936.11.2.∼7.)에서 박태원의 「천변 풍경」(1936)은 리얼리즘의 확대를, 이상의 「날개」(1936)는 리얼리즘의 심화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는 우리 문학을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분석한 글로 문단의 주목받았다. 그는 ‘현실성과 현대성의 조화, 즉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조화를 추구한 비평가’(허윤회)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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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의 첫 평론집 『문학과 지성』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 최재서는 1937년 12월 합자회사 인문사를 설립해서 대표로 취임했다. 1938년 6월 첫 평론집 『문학과 지성』(인문사)을 발간했다. 『문학과 지성』은 그가 도입한 외국의 주지주의 문학론을 바탕으로 카프문학이 표방하는 이념주의를 극복하려 하면서 비평의 현대화를 지향한 저서였다.

그는 인문사에서 『인문평론』을 창간, 1939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다. 창간호 권두언에서 그는 문학자들도 건설사업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합리화했다. ‘국민문학의 선도적 역할’을 하다가 월간 『국민문학』(1941년 11월 창간)에 그 사명을 넘겨준 『인문평론』은 전기 문학을 암흑기의 친일문학으로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다.

창간호에 밝힌 것처럼 최재서는 『인문평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친일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중일전쟁(1937)을 옹호하기 위해 쓴 「전쟁문학」(『인문평론』 1940년 6월호)은 그 전환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는 이 글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인간성을 ‘최고 경지에까지 고양’시키는 ‘엄숙한 (전쟁) 체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변했다.

최재서는 1939년부터 국책협력을 목적으로 발족한 친일 단체에 참여, 주요 임원으로서 일제의 전시 총동원체제 구축에 부역했다. 1939년 2월 임화· 이태준 등과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을 발의했고 3월 14일 황군 위문 문단 사절 위문사 후보 선거일에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4월에는 황군 위문 작가단 장행회에서 경과보고를 했고 10월 조선문인협회가 만들어질 때는 발기인과 기초위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만주국 민생부가 주최한 만주 문화 건설 공작 강연회에서 순회강연을 했고 11월 30일부터 12월 10일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총후 사상운동을 위한 문예 순회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1941년 8월 최재서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임(1942년 9월엔 상임 간사)됐고 9월에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에서 전쟁에 협력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1월, 일제는 총력전을 명분으로 모든 잡지를 통폐합해 친일 어용 잡지인 『국민문학』을 간행했는데 최재서는 이후 1945년 5월까지 『국민문학』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국민문학』은 조선 문단을 강제 통합, 어용화해 황도 정신에 입각한 국책문학을 수행시킬 기관지였다.

2.3. 해방 후

해방 후 최재서는 과거를 참회한다는 뜻에서 문단에서 물러나 대학으로 돌아갔다. 연희전문학교가 개편된 연희대학교에서 영문학과 과장으로 있던 최재서는 1946년 11월 동아대학교에 초빙되어 1947년까지 재직했고, 다시 연희대학교로 돌아가 1947년부터 1961년까지 재직했다. 연세대에서는 주로 문학개론, 영문학사, 영국문예비평사 등의 강의를 담당했다고 하며, 1957년 출판한 「문학원론」과 1960년 「영문학사」는 바로 이 강의 원고를 토대로 정리해 쓴 것이라고 한다.

1948년 12월 27~28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9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소환되어 문초받았으나, 기소유예되었다.

이후 연세대학교 대학원장(1949∼1960), 동국대학교 대학원장(1960∼1961),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번역작업에도 활발히 나서 주홍글씨(1953년 을유문화사) 등을 번역했으며, 주홍글씨와 햄릿 번역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번역이 국내 최고로 평가되고 있다. ‘햄릿’ 번역은 최재서 작품이 만점…번역본 573종 평가

1964년 11월 16일 사망했다.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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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최낙(차남), 최달(3남), 최승언(4남), 최양희(차녀)
앞줄 최재서, 손녀, 이태원(아내)

최재서는 6남매(4남2녀)를 두었다.

그의 장남 최창은 1950년 도미하여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를 받고 인디애나 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러시아 출신 유대계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얻은 딸 수잔 최는 예일 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문학사를 받고 코넬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석사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바 있는 유명작가이다.[7] 수잔 최는 아버지 최창을 모델로 쓴 데뷔작품 ‘외국인학생’(1998)으로 아시안아메리칸문학상을 받았고, 언론 재벌 허스트의 딸 납치 사건을 소재로 소설 ‘미국 여자’와 ‘요주의 인물’로는 퓰리처상과 펜포크너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 #2

장녀(6남매 중 넷째) 최양희는 중앙대학교 영문과 졸업 후 호주로 유학하여 호주국립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한국 고전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힘써 2005년 "허난설헌 시집" 영역본으로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이 수여하는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했고( #1), 2013년에는 열하일기 번역으로 대산문학상 번역상을 수상했다( #2).

4남 최창언(1945~2013)은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 후 1969년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문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언어학으로 전공을 바꿔 학부 과정부터 학업을 다시 한 끝에 1979년 툴루즈2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그는 1981년 서울대 불문과 조교수로 부임했으나 몇 년 뒤 프랑스 한국학계의 제의로 다시 도불, 2013년 건강이 악화해 숨을 거둘 때까지 파리 7대학에서 한국어•한국문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

4. 둘러보기


[1] 문학과/사학과/철학과 등 법문학부의 문학계 진학반 [2] 이 때 의학부 진학반인 이과의 수석은 경성제이고보 제1회를 수석으로 졸업한 허규(의학부 졸업 후 해방 당시 경성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초대 교수, 대한미생물학회 초대 회장 역임. 참조)였다. [3] 1890년 출생, 1916년 교토제국대학 문과대학을 졸업하고 1921년 경성고등상업학교 교수로 조선에 부임하였으며, 1923년 1월부터 1925년 7월까지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으로 영국•독일•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경성제대 영문학강좌에 겸임 출강하고 있었다. 1939~1943년 경성고등상업학교 제4대 교장을 지냈다. [4] 참고로 강좌제를 구성원리로 하는 제국대학은 1명의 교수(강좌장)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조교수-강사-조수-학부생 위계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강좌들이 모여 학부(Faculty)를 구성하고, 그러한 학부 수 개가 모여 1개의 종합대학(University)인 제국대학이 만들어진 것으로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들어가 연구생(오늘날의 박사과정생)으로 있으면서 먼저 조수로 임명되어야 하고, 그러한 조수들 중에서 차기 교수 후보를 강사로 임명하여 해당 강좌에 소속된 교과 수업을 담당하여 강의를 맡은 후에 순차적으로 조교수, 교수로 승진해야했다. 따라서 당시 제국대학 강사는 오늘날로 치면 전임강사~조교수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5] 제1회 졸업생인 유진오는 1929년 법문학부 졸업 후 형법연구실 조수(1929~1931), 법철학연구실 조수(1931~1933)로 있으면서 1931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경성제대 예과 강사로 임명하여 <법학통론> 교과목을 가르친 바 있으나, 법문학부에서 수업을 담당하지는 못했다. [6] 정혜경•이승엽, '일제하 녹기연맹의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집(1999). [7] 잡지 ‘뉴요커’에서 일했으며 현재 예일대에서 문학 창작을 가르치며 브루클린에서 거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