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09:36:50

대만 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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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쭝런 천청 옌자간 셰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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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덩후이 리위안추 롄잔 뤼슈롄
<rowcolor=#fff>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샤오완창 우둔이 천젠런 라이칭더
<rowcolor=#fff> 제16대 (예정)
샤오메이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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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부총통기 총통부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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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부총통
中華民國副總統
Vic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China
파일:라이칭더 공식 사진.jpg
현직 라이칭더 / 제15대
취임일 2020년 5월 20일
정당

1. 개요2. 역사
2.1. 헌정 이전2.2. 헌정 이후
3. 임무4. 선출5. 탄핵6. 관저7. 역대 부총통8. 여담

[clearfix]

1. 개요

中華民國副總統. 대만의 국가수반인 총통을 보좌하는 직책.

현재 대만 부총통은 민주진보당 라이칭더이다.

2. 역사

2.1. 헌정 이전

부총통 직책은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마련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난징 임시참의원이 수립되자 호북 군정부의 수장이었던 리위안훙은 임시참의원에 의해 임시부총통에 추대되었다. 리위안훙은 이를 수락하여 1월 3일 중화민국 임시부총통(臨時副總統)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 10월 7일 국회 투표에서 리위안훙은 정식 부총통에 선출되었고 10월 10일 1대 정식부총통에 취임하게 된다.

1915년 홍헌제제가 단행되면서 부총통직이 폐지되고 리위안훙은 12월 15일 친왕에 책봉되지만 호국전쟁 발발 이후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면서 다시 부총통에 복직했다.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6월 7일 부총통 리위안훙이 총통에 계임하면서 부총통직은 공석이 되었다.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는 남방에 국회와 약법을 회복시켜달라는 군무원의 요구를 수락하여 호국전쟁이 종결되었고 8월 1일 국회가 개막되었다. 10월 30일, 국회는 신임 부총통으로 직예군벌의 수장인 강소도독 펑궈장을 선출하였는데 펑궈장은 11월 8일이 되어서야 난징의 도독부에서 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1917년 7월, 장훈복벽으로 리위안훙이 7월 2일 총통 사직을 선언하고 톈진 일본 공사관으로 도주하자 펑궈장은 대총통을 계임해달라는 리위안훙의 요청을 수락한다고 통전하고 난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부총통은 다시 공석이 되었다.

1918년 펑궈장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새로운 정부총통 선거가 이루어졌는데 대총통에는 쉬스창이 무난하게 선출되었으나 부총통에는 직예군벌 차오쿤, 봉천군벌 장쭤린, 서남군벌의 루룽팅, 정학회 수장 천춘쉬안 등이 쟁쟁하게 대립하고 있어서 선출이 어려웠다. 북양군벌에서는 호법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차오쿤이나 장쭤린을 부총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대총통 쉬스창, 서남군벌, 교통계에서는 남북 화해를 위해 거국적으로 남측의 인물인 루룽팅이나 천춘쉬안을 부총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립이 너무 치열하다보니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부총통 선출에 다들 흥미를 잃어버렸다.(...)

거기에 당시 중화민국의 투표는 투표의 대가로 돈을 주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북양군벌 측에서 남방인사가 뽑힐 가능성이 높은 투표에 돈을 대는 것을 거부하면서 국회의원들도 투표를 거부하여(...) 자동적으로 부총통 선거는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었고 북양정부는 부총통 선거 무기한 연기를 선포했다. 이에 따라 1923년 선거에서는 대총통은 뽑았으되 부총통 선거는 하지 않았다. 1924년 북경정변 이후 집정제가, 1926년 장쭤린에 의해 대원수제가 도입되면서 총통 자리가 사라졌는데 부총통 자리가 남아있을리 만무했고, 국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수반이 총통이 아니라 국가주석으로 바뀌면서 아예 폐지되었다.

2.2. 헌정 이후

1948년에 중화민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부활했다. 이때는 총통과 함께 국민대회에서 간접선거로 뽑혔으며 총통선거와는 별도로 투표를 하여 선출하였으나, 1996년부터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총통 후보와 러닝메이트로 출마한다.

3. 임무

다른 나라의 부통령 역할을 한다. 그러나 헌법에 규정된 부총통의 권한이 많지 않은 덕에 다른 나라의 부통령들처럼 실제로 뭔가 하는 건 별로 없다. 부통령보다 서열이 낮은 행정원장의 실질적인 권력이 더 세다.

미국 부통령이 러닝메이트 대통령이 궐위되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되어 전임자의 잔여 임기를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화민국 부총통도 궐위된 총통의 잔여 임기 동안 '계임총통'으로서 총통직을 승계한다. 권한대행과 달리 정식으로 총통이라는 직함으로 불리나 대수는 전임자 것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4. 선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본래는 국민대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었지만 현재는 타이완 지구(타이완, 펑후 제도, 진먼 현, 마쭈 열도 등 대만 정부의 실질 통치지역) 유권자의 보통선거로 선출된다.

입후보하려면 총통처럼 40세 이상으로 타이완 지구에 거주한 기간이 15년 이상이어야 하며, 6개월 이상을 연속으로 거주하여야 한다. 귀화한 국민, 홍콩/ 마카오/ 중국 대륙 거주자, 군인, 선관위 공무원은 출마 자격이 없다. 임기는 4년이며, 3선 이상은 불가능하다. 총통 후보와 부총통 후보는 한 조로 출마해야 한다.

부총통이 사망 탄핵 등으로 궐위될 경우 총통은 즉시 부총통 후보를 지명하고, 입법원으로부터 선거를 치러 부총통을 선출한다. 2000년에 헌법이 수정되기 이전에는 과거 미국처럼 부총통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다.[1] 부총통직이 공석이 된 사례는 리쭝런 탄핵으로 공석이 된 사례 1건과 천청의 재임 중 사망으로 공석이 된 사례 1건, 부총통의 총통직 계임으로 공석이 된 사례 2건이 있으나, 부총통 궐위 시 차기 부총통을 선출하는 제도가 마련된 뒤에는 아직 부총통이 궐위된 사례가 없다.

5. 탄핵

중화민국 헌법 수정증보조문에서는 부총통을 강제로 해직하는 제도로 파면과 탄핵이 규정되어 있다. 파면안은 입법원(국회)에서 전체 입법위원(국회의원)의 1/4의 동의로 발의되고 전체 입법위원의 2/3의 동의를 얻어 제출될 수 있다. 이후 국민투표를 벌여 과반수가 투표하고 그 가운데 과반수가 동의한다면 즉시 통과되어 총통이나 부총통이 해직된다. 반면 총통이나 부총통의 탄핵안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제출하여 사법원 대법관의 심리를 요청하게 된다. 사법원은 이때 헌법재판을 거쳐 탄핵안을 인용할지 기각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인용될 경우 탄핵소추된 부총통은 즉각 해직된다.[2]

수정증보조문 추가 이전에는 감찰원에서 탄핵안을 제출하고 국민대회에서 이를 의결했다. 1954년에 리쭝런이 이 방법을 통해 부총통직에서 탄핵된 예가 있다. 1997년부터는 감찰원 대신 입법원이 탄핵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2005년에 국민대회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현행과 같이 개정되었다.

6. 관저

부총통의 관저는 2/3대 부총통 천청의 자택을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뤼슈롄 부총통부터 이 관저를 쓰고 있으나, 특이하게도 샤오완창 우둔이 전 부총통은 부총통 재임 당시 관저를 쓰지 않고 사저에서 출퇴근했다.

뤼슈롄 이전의 부총통은 따로 관저가 없었고 그가 사는 집이 곧 관저였다. 리덩후이의 경우 타이완성 주석일 때 사용한 다안구의 사저[3]를 부총통 시절에도 관저로 사용하다가 장징궈 총통이 새로 관저를 지어줘서 그곳으로 이주했고, 그가 장징궈 사후 총통이 되면서 그의 집이 현재도 사용되는 총통관저가 되었다.

7. 역대 부총통

7.1. 임시정부

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재임기간 소속 출신지[A] 학력 비고
1대 리위안훙 1912.1.3 1913.10.10 북양군벌, 공화당 후베이성 톈진북양수사학당 호북 군정부 도독에서 난징 임시참의원의 추대로 부총통 취임

7.2. 북양정부

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재임기간 소속 출신지[A] 학력 비고
1대 리위안훙 1913.10.10 1916.6.7 북양군벌, 공화당 후베이성 톈진북양수사학당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대총통 계임.
2대 펑궈장 1916.11.8 1917.7.6 북양군벌 허베이성 천진무비학당 리위안훙의 총통 사직으로 대총통 계임.

7.3. 헌법 제정 이후

총통처럼 일반적으로 헌정이 시작된 이 시점부터 대만 부총통의 대수를 센다.
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재임기간 정당 출신지[A] 학력 비고
1대 리쭝런 1948.5.20 1954.5.20 6년 중국 국민당 광시좡족자치구 광서육군속성학교 장제스의 하야로 인해 총통 권한대행을 하게 됨
국부천대 이후로 귀국을 거부해 탄핵안 제출, 1954년 국민대회에서 탄핵안 가결.
2대 천청 1954.5.20 1960.5.20 6년 중국 국민당 저장성 황푸군관학교 행정원 원장 겸임
임기 중 사망
잔여 임기동안 부총통 공석
3대 1960.5.20 1965.4.5 4년 11개월
4대 옌자간 1966.5.20 1972.5.20 6년 중국 국민당 장쑤성 상해
성요한대학
장제스의 사망으로 인해 계임총통으로서 총통직 승계
잔여 임기동안 부총통 공석
5대 1972.5.20 1975.4.5 2년 10개월
6대 셰둥민
(謝東閔)
1978.5.20 1984.5.20 6년 중국 국민당 타이완성
( 장화현)
중산대학(광저우) 첫 대만 출신 부총통
7대 리덩후이 1984.5.20 1988.1.13 3년 8개월 중국 국민당 신베이시 국립타이완대학
( 코넬 대학교 박사)
장징궈의 사망으로 인해 계임총통으로서 총통직 승계
잔여 임기동안 부총통 공석
8대 리위안추
(李元簇)
1990.5.20 1996.5.20 6년 중국 국민당 후난성 국립정치대학
( 본 대학교 박사)
9대 롄잔 1996.5.20 2000.5.20 4년 중국 국민당 산시성(陝西省) 국립타이완대학
( 시카고 대학교 박사)
첫 직선제 부총통
1997년 9월 1일까지 행정원 원장 겸임
10대 뤼슈롄 2000.5.20 2004.5.20 4년 민주진보당 타오위안시 국립타이완대학
( 하버드 대학교 석사)
첫 여성 부총통
11대 2004.5.20 2008.5.20 4년
12대 샤오완창 2008.5.20 2012.5.20 4년 중국 국민당 타이완성
( 자이시)
국립정치대학
13대 우둔이 2012.5.20 2016.5.20 4년 중국 국민당 타이완성
( 난터우현)
국립타이완대학
14대 천젠런 2016.5.20 2020.5.20 4년 무소속 가오슝시 국립타이완대학
( 존스 홉킨스 대학교 박사)
첫 무소속 부총통
15대 라이칭더 2020.5.20 2024.5.20(예정) 민주진보당 신베이시 국립타이완대학
( 하버드 대학교 석사)
16대 샤오메이친 2024.5.20(예정) 2028.5.20(예정) 민주진보당 일본 효고현 오벌린 칼리지
(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8. 여담

  • 1대 부총통 리쭝런은 유일하게 탄핵으로 임기를 마무리한 부총통이다. 국민정부는 뉴저지에 체류하던 리쭝런에게 귀국을 촉구했으나 리쭝런이 이를 묵살하자 1950년 2월 12일에 감찰원에 리쭝런 탄핵안이 제출되었다. 국민당 비상위원회는 2월 21일 3일 안에 귀국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리쭝런이 듣지 않자 3월 1일 장제스를 다시 총통으로 복직시키고 리쭝런의 총통 권한대행 직위를 박탈했다. 1952년에 리쭝런 탄핵안이 감찰원에서 가결되어 국민대회에 회부되었으나 국민대회는 리쭝런 탄핵안을 부결했다. 하지만 1954년 국민대회가 소집되자 국민대회는 1468표 중 1403표의 찬성으로 리쭝런을 나라를 그르친 죄목으로 탄핵하고 천청을 2대 부총통으로 선출했다.
  • 천청, 옌자간, 롄잔은 부총통 임기 중에 행정원장을 겸한 바 있으며, 모두 행정원장 신분으로 부총통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롄잔이 부총통 겸 행정원장이었던 시절에 민진당 등 야당이 부총통-행정원장 겸임에 문제를 제기하고, 1997년에 사법원(중화민국의 최고 법원)에서 겸임이 적절하지 않다는 해석을 내렸다. 이 때문에 롄잔은 1997년 9월에 행정원장에서 사퇴했다.


[1] 본래 총통과 부총통이 모두 공석이 되는 사태에 대비해, 총통과 부총통이 모두 궐위될 경우 행정원장이 권한을 대행하며 3개월 이내에 국민대회를 소집해 보궐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헌법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총통과 부총통이 모두 공석이 된 사례가 없으므로, 이 조항이 실제로 발동된 적은 없다. 현대에는 수정증보조문에 따라 해당 조항은 적용되지 않으나, 총통과 부총통이 모두 궐위되면 행정원장이 권한을 대행하며 직접선거 형태로 보궐선거를 실시할 것이 수정증보조문에 규정되어 있다. [2] 대한민국에서는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위배하여 피소추인을 강제로 퇴직시키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만 대한민국 대통령을 파면할 수 있지만, 대만에서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가 없어도 의회의 2/3 찬성 + 국민투표 가결로써 총통이나 부총통을 파직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3] 이곳은 현재 재개발로 철거되어 아파트가 들어섰다. [A] 현재의 성급 행정구역 기준 [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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