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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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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2.3. 중근세2.4. 근현대

1. 개요

中牟
영어 Zhongmu 
한국 한자음 : 중모

허난성 정저우시의 현. 정저우와 카이펑 사이의, 쟈루강 하안의 평야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40만명으로, 현 치고 상당히 많다. 중원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역사가 깊고, 삼국지 관도대전이 벌어진 곳이다. 중모(中牟) 지명은 진나라 시절부터 2천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송대 이후 천년 가까이 카이펑 관할이다가 80년대에 정저우 관할로 이관되었다.

2. 역사

기원전 6000년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고, 주나라 성립 후 동성 제후국인 관나라 관할에 놓였다. 동시에 왕후장상의 사냥터로 쓰였다. 춘추시대에는 정나라에 속하였고, 청읍 (清邑)이라 불렸다. 춘추시대 후반, 진-초 양국에 시달리던 정나라는 공물 수요를 맞추기 위해 노비들을 혹사시켰다. 그 결과, 기원전 522년 정나라 노비들이 청읍 동북쪽의 환포택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정공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는 역사상 첫 노예 반란으로, 중국에서는 하푸쩌기의 (萑苻澤起义)라 부른다. 한편 청읍 인근 관숙읍 (莞叔邑)은 조나라 설립 이전 조헌자 ( 조열후의 부친)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삼가분진으로 조나라의 영역이 하북으로 확정된 후 전국시대에는 일대가 모두 위나라에 속했다.

2.1. 고대

진나라 시기 삼천군 (三川郡) 산하 중모현 (中牟縣)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207년, 유방이 동남쪽의 곡우취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을 격파하며 함양 진군을 준비했다. 전한 건국 직후인 기원전 202년, 현 시가지 동쪽에 중모현성이 축소되었다. 한나라 시기 중모현은 하남군 (河南郡)에 속했고, 기원전 195년 중모후국 (中牟侯國)이 설치되었다가 기원전 112년 재차 현이 되었다. 후한 말엽인 서기 200년에는 동북쪽의 평원 (현 관두차오촌) 일대에서 관도대전이 벌어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 동탁 암살에 실패한 후 중모현으로 도주하여 당시 현령이던 진궁과 함께하게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역사적 근거는 없다. 조위 시기에는 조조의 손자이자 조창의 아들 조해가 223~24년 및 242~43년에 중모왕으로 봉해져 일시적으로 중모국 (中牟國)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2.2. 중세

서진~ 유송 시기 중모현은 사주 (司州) 형양군 (滎陽郡)에 속했고, 북위가 정복한 후 중모현은 폐지되어 북예주 (北豫州) 형양군 무현 (武县)에 소속되었다. 그러다 500년에 중모현이 복구되었고, 534년 동위 설립과 함께 신설된 광무군 (廣武郡)의 치소가 되었다. 동시에 인근에 곡량현 (曲梁縣)이 설치되었으나 북제 시기인 556년에 폐지되었다. 566년에는 중모현의 치소가 포전성 (圃田城)으로 옮겨졌다. 수나라 시기인 581년, 중모현은 피휘를 위해 내모현 (内牟縣)으로 개칭되었다. 596년 내모현에서 관성현 (管城縣), 내성현 (郲城縣)이 분리 및 신설되었고 후자는 중모고성에 설치되었다. 598년 내무현은 포전현 (圃田縣)으로 개칭되었고, 예주 (豫州) 형양군에 속했다. 606년 내성현이 폐지되고, 포전현의 치소가 중모고성으로 이전되었다. 당나라 건국 직후인 618년, 포전현은 다시 중모현으로 돌아왔다. 620년, 중모현은 중주 (牟州)로 개편되었으나 이듬해 폐지되고 관주 (管州)를 거쳐 627년 변주 (汴州)에 귀속되었다. 662년 중모현은 정주 (鄭州)로 이관되었다.

2.3. 중근세

후량 시기 동경개봉부 (東京開封府)에 직속되었다가 후당 시기 재차 정주 관할이 되었고, 후진~ 후주 시기 변주 관할이었다. 북송 시기에는 수도권인 경기로 (京畿路) 개봉부에, 금나라 시기에는 남경로 (南京路) 개봉부에 속했다. 원나라 시기에는 하남강북행성 (河南江北行省) 변량로 (汴梁路)에, 명청 대에는 하남성 개봉부에 속했다.

2.4. 근현대

중화민국기 중모현은 하남성 예동도 (豫東道), 하남성 제2 (때로는 제1) 행정독찰구에 속했다. 국공내전기에는 비교적 빠른 시기인 1947년 10월에 인민해방군이 진주했고, 이듬해 중공 위안쑤 (豫皖苏) 제5 행정구에 편성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기에는 첸류전구 (陈留专区)에 속했고, 1952년 첸류전구를 흡수한 카이펑전구 (开封专区)로 이관되었다.[1] 1983년, 중무현은 정저우시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 2004년 10월, 관내의 랑청강진에서 후이족 한족 주민들 간의 충돌이 있었다.


[1] 정확히는 흡수 당시에는 정저우 전구였다 곧 개명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