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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루시안테'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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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루시안테 John Fruscian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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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BD0837> 본명 |
존 앤서니 프루시안테 John Anthony Frusciant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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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0년 3월 5일 ([age(1970-03-05)]세) | ||
미국 뉴욕시 퀸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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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음악가, 기타리스트, 작곡가, 프로듀서 | ||
소속 |
레드 핫 칠리 페퍼스 (1988 – 1992, 1998 – 2009, 2019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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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BD0837> 부모님 |
부 존 프루시안테 시니어 모 게일 하워스 브루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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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니콜 털리 (2011 – 2015) | ||
학력 | 뮤지션스 인스티튜트 | ||
신체 | 173cm, 70kg | ||
혈통 | 이탈리아계 미국인 | ||
활동 | 1983년 ~ 현재 | ||
사용 악기 | 일렉기타, 어쿠스틱 기타 | ||
장르 | 얼터너티브 록, 인디 록, 익스페리멘탈 록, 일렉트로닉 뮤직 | ||
레이블 | · Record Collection · Birdman · American · Neurotic Yell · Acid Te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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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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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활동에서 뿐만이 아니라 현 기타리스트들 중에서도 정점으로 손꼽히는 연주 실력의 소유자로서, 롤링 스톤 1020호(2007년 2월) "New Guitar Gods" 특집 기사에서 존 메이어, 데렉 트럭스와 함께 언급되었다.
밴드 활동 뿐만 아니라 매우 활발한 솔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솔로 앨범 11장과 EP 5장을 내놓았으며 그의 앨범들은 익스페리멘탈 록과 뉴웨이브 그리고 일렉트로니카 장르의 음악들을 어우르고 있다. 2015년에 프루시안테는 그의 일명 Trickfinger로 알려진 데뷔앨범 Acid House 앨범을 발표했다. 그는 또한 마스 볼타, 조시 클링호퍼, 조 랠리 등 여러 아티스트들과 같이 녹음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청소년기
존 프루시안테는 1970년 3월 5일 뉴욕주 퀸즈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 John Sr은 줄리어드 음대 출신의 피아니스트였으며, 그의 어머니 Gail 또한 결혼 전까지 유망한 보컬리스트였으며 결혼 후 존을 키우기 위해 커리어를 접게 된다. 프루시안테 가족은 애리조나 투싼과 플로리타에서 거주 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지방법원 판사로 2010년까지 일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이혼하였고 존은 그의 어머니와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에서 거주하게 된다. 프루시안테는 이탈리아 이주민의 후손이며 그의 증조부는 이탈리아 베네벤토 출신의 이주민이다.
산타모니카로 거주지를 옮긴 뒤 1년 뒤 다시 존과 그의 어머니는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였으며, 거기서 존의 새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가 말하길 그의 새아버지가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보고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다른 LA의 많은 청소년들과 같이 존은 펑크락 씬에 물들게 되었다. 그가 9살 때는 그가 동경하던 밴드인 Germs에 빠져들었고 그가 10살 때는 독학으로 그 밴드의 모든 곡들을 카피하기 이르렀다. 그는 한손 바레코드로 모든 코드를 연주할 수 있었음에도 그가 엄청난 실력을 가진 것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다.
프루시안테는 제프 백, 지미 페이지, 데이비드 길모어 그리고 지미 핸드릭스 같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의 곡들을 11살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랭크 자파의 음악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몇시간동안 연주하기도 했다. 프루시안테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는 밴드를 그의 기타 선생이 그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오디션을 볼 때인 1984년쯤 부터 듣기 시작했다.
그는 16살에 그의 부모의 허락을 받고 검정고시를 치고 자퇴하였다. 부모의 지원에 힘입어 그는 음악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LA 내곽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는 Guitar Institute of Technology(현재 Musicians Institute)에서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곧 출석 후 수업을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후에 곧 MI를 떠나게 된다.
프루시안테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을 15살 때 보았고, 그는 그와 동시에 빠르게 그들의 헌신적인 팬이 되었다. 그는 칠리 페퍼스의 기타리스트 힐렐 슬로박을 동경했으며 힐렐과 안면을 트게 되었고 힐렐의 사후 프루시안테는 힐렐의 대체자로서 밴드에 들어오게 된다.
존 프루시안테의 인터뷰에서 힐렐이 죽기 전 그와 나눈 대화를 밝히고 있다.
"힐렐은 내게 물었어요. "너는 칠리스(RHCP의 애칭)가 엄청 유명해지고 큰 무대에서 연주해도 그들을 좋아할 자신이 있어?" 나는 "아니요 그런 유명세는 모든 것을 망칠 거예요. 밴드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청중들은 달라진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할테니까요." 라고 대답했어요. 그들의 쇼에는 고전적인 냄새가 강했고 모든 청중들은 칠리스가 점프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동안 좌절을 느끼지 못했죠. 저는 매우 흥분되어서 슬램 핏 하는 사람들 주위를 계속 돌았어요. 제가 마치 밴드의 일원이 된 것 같았고, 그 곳의 감성적인 청중들도 마찬가지였죠."
프루시안테는 데드 케네디스의 전 드러머인 D.H. 펠리그로와 1988년 초반에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가끔 잼도 같이 했으며 펠리그로는 그의 친구 플리를 그에게 소개시켜주었다. 프루시안테와 플리는 그들의 음악적 케미를 즉시 만들어내었으며, 플리는 나중에 그들이 처음 연주했던 날 플리가 처음으로 친 베이스 리프가 아마도 "Nobody weird like me"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동시에 프루시안테는 프랭크 자파의 밴드에 오디션을 보았으나 자파의 밴드가 마약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오디션에서 마음을 바꾸게 된다. 프루시안테는 "나는 약도 하고 여자도 끼고 하는 락스타가 되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그 것은 프랭크 자파의 밴드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죠"라고 훗날 얘기하였다.
2.2. RHCP 합류
힐렐 슬로박이 헤로인 남용으로 1988년 사망하게 되고 칠리 페퍼스의 전 드러머 잭 아이언스도 힐렐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밴드를 떠나게 된다. 남은 멤버인 앤서니 키디스와 플리는 그 시기를 인내하며 밴드를 재구성하기로 한다. 그 둘은 펠리그로와 드웨인 블랙버드 맥나이트(전 P-Funk의 멤버)를 각각 드럼과 기타 포지션으로 집어넣아 보지만 드웨인의 기타는 영 칠리 페퍼스의 음악 스타일과 맞질 않았다. 플리는 둘의 스타일에 그나마 친숙할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들의 팬 프루시안테에게 오디션을 제안했다. 플리와 앤소니는 그의 오디션을 보고 난 뒤 그가 너무 어려서 영입을 고민하다가 결국 영입을 결정한다. 플리는 그에게 밴드의 일원이 되었다는 뉴스를 전달하며 그를 불렀고, 연락을 받은 프루시안테는 엄청나게 기뻐하며 그의 집을 가로지르며 소리를 지르고 담장을 뛰어 넘었다고 한다. 사실 이 때 프루시안테는 쎌로니어스 몬스터와의 계약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플리의 제안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RHCP를 선택했다고 한다.
밴드에 합류하긴 했지만 사실 그도 레드핫 칠리 페퍼스의 Funky한 사운드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Funk 장르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만큼 플리와 사운드에 대하여 얘기를 많이 나누고 전 멤버였던 힐렐 슬로박의 플레이를 카피하며 연구했다고 한다. 몇 주 뒤, 펠리그로가 약물 남용으로 연주 실력이 떨어져 해고되고, 채드 스미스를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하면서 라인업을 완성하게 된다. 1989년 그들은 그들이 처음 함께 만든 첫 번째 앨범 'Mother's Milk'를 발표한다. 초기의 프루시안테는 슬로박의 스타일을 카피하는데 집중했다.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하기보단 그룹에 녹아드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로듀서인 마이클 베인혼은 프루시안테의 전형적인 카피연주를 거부했고, 강력한 메탈톤으로 기타를 연주하기를 바랐다. 그것은 RHCP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프루시안테는 프로듀서와 기타톤을 가지고 자주 싸웠다. 이 싸움은 프루시안테에게는 없는 업계의 지식과 영향력으로 공격해오는 프로듀서로 인해 프로시안테를 힘들게 했다. 훗날 보컬 앤서니는 베인혼이 존에게서 그룹의 특색인 섹시, 펑키를 배제시키고 강력한 메탈톤만을 요구했다고 회고했다.
프루시안테와 함께한 RHCP의 두 번째 앨범 Blood Sugar Sex Magik은 프로듀서 릭 루빈과 함께했다. 루빈은 독창적이고 특별한 앨범을 원해서 멤버들을 할리우드의 낡은 멘션[2]에 감금하고 레코딩을 하였다. 그들이 가끔 그 집에서 나와서 하는 거라고는 대마를 피우는 것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앤서니 키디스는 힐렐의 죽음과 기타 등의 이유로 대마를 입에 대지 않았는데, 플리와 존은 그런 그렇게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는 그를 놀려대며 대마를 피워댔다고 한다. [3]
Blood Sugar Sex Magik 앨범은 1991년 9월 24일 발매되어 빌보드 차트에 3곡을 올리고 전세계적으로 1300만장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런 성공은 RHCP를 단 한방에 락스타로 만들어버렸다. 프루시안테는 갑자기 얻은 그 명성에 크게 당황했고 명성의 무게에 힘들어했다. 앨범이 풀리고 얼마 뒤, 프루시안테는 밴드의 유명세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앤서니는 존이 항상 무대 뒤에서 투덜거렸다고 말했다.
2장의 앨범으로 얻은 유명세에 질려버린 그는 밴드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RHCP가 월드투어를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다. 1992년 5월 7일, 도쿄 클럽 "콰트로"에서 공연하던 프루시안테는 멤버들에게 밴드를 떠나겠다고 말한다. 멤버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다음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의 자리는 제인스 어딕션의 전 기타리스트인 데이브 나바로[4]로 교체된다.
2.3. RHCP 탈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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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린 기타 연주뿐 아니라 잘생긴 외모로도 유명했던 존 프루시안테는 약물 중독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RHCP 탈퇴 후 존은 오랫동안 마약, 특히 헤로인에 중독된 채 살았으며 마약에 빠져사는 동안 솔로 앨범 Niandra LaDes and Usually Just a T-Shirt(1994), Smile from the Streets You Hold(1997)[6]를 발매하였다. 존은 이 시기에 그림을 그려서 전시하기도 했으며, 1995년 말에는 나빠진 건강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한다.
몇 년 후 헤로인은 끊고 코카인과 술은 계속 하다가 1998년 1월 쯤에 재활원에 들어가게 된다. 몇달 후 재활원을 나와 아파트를 빌려 지내고 있는 존에게 플리가 다시 밴드에 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존은 울면서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며 수락한다.
한편 존의 이 개인적인 암흑기 동안에는 밴드도 순항하지 못했다. 새로 영입한 기타리스트 데이브 나바로와 함께 정규 6집 One Hot Minute을 발매했지만 전작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고,[7] 나바로는 밴드와의 음악적 성향 차이를 비롯한[8] 여러 이유로 1998년 밴드를 떠난다.[9]
2.4. RHCP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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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의 설득으로 존이 복귀하고 플리는 앤서니와 존이 서로 정리를 하고 탈퇴전 문제들을 해결할 시간을 주기위해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났다. 앤서니와 존은 화해를 하고 쓸만한 기타가 하나도 없던[10] 존에게 62년산 스트라토캐스터를 사주었다. 또한 약물 중독의 여파로 무너진 코와 턱뼈를 재건하는 수술도 받았다[11]
이렇게 존은 다시 페퍼스에 합류했고, 밴드는 1999년 7집 앨범 Californication을 발매한다. 존의 복귀와 함께 밴드는 나바로의 영향력으로부터 순식간에 벗어나게 된다. Californication 앨범에선 BSSM 시절과 같은 폭발적인 에너지나 끈적한 리듬감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성찰적인 가사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절제된 사운드는 평단과 대중 모두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15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밴드에게 또다시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도 존 프루시안테는 밴드와 함께 By the Way, Stadium Arcadium을 발표하며 성공을 이어간다.
밴드 복귀후엔 2004년 한해에 앨범 3장을 내는등 솔로로서도 꾸준하게 커리어를 이어갔다. 조쉬 클링호퍼 등 많은 아티스트들과 합작도 했다.
하지만 존은 밴드의 휴식기였던 2009년에 밴드의 방향성과 맞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재탈퇴를 하였다. 이번에는 존의 선택을 멤버들이 존중해주며 좋게 탈퇴했다고 한다.
2.5. 현재
재탈퇴 후 존은 솔로로 활동하며 다른 아티스트들과 협업도 자주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다 2019년에 다시 RHCP에 재합류한다.존이 합류한 RHCP는 2022년 새 정규 앨범 발표와 함께 6월부터 시작되는 유럽-북미 대륙의 Unlimited Love 투어를 진행하였고, 2024년 7월로 투어를 마감했다.
3. 장비
펜더사 기타를 애용하며 기본적으로 부들부들하고 따듯한 싱글픽업(프론트) 클린톤에, 솔로는 퍼즈틱한 디스토션과 와우 이펙트가 사운드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긴 활동기간 동안 음악성 변화가 컸기 때문에 써왔던 장비도 다양하다. 여담으로 이펙터들이 개당 크기가 상당한데 많기까지 해서 존의 페달보드를 보면 가로로 1미터는 넘어 보인다.
몇몇 기타는 존이 마약 살 돈을 구하기 위해서 팔아버렸었기 때문에 이젠 볼 수 없다.
후술은 주요 장비들이며, 생략된 모델들이 많다. 더 자세한 정보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피크는 20년 이상 한결같이 던롭사의 오렌지색 0.6mm만 사용 중.
3.1. 기타
- 1962 Fender Stratocaster - 존의 시그니쳐격인 기타이다. 그 만큼 라이브 에서도 자주 보인다. 앤서니가 사줬던 기타이다.
- 1961 Fender Stratocaster(Fiesta Red)
- 1960 Fender Telecaster Custom
- 1969 Gibson Les Paul Custom
- 1962 Fender Jaguar (Red)
- 1957 Gretsch White Falcon - 그의 기타 중 최고가(약 30000달러 이상)
- Martin 0-15
3.2. 이펙터
- Boss DS-2
- EHX Big Muff
- MXR DynaComp
- MXR Micro Amp
- Ibanez WH-10 V3
- Boss CE-1 Chorus
- Moog MF-101 (~5)
3.3. 앰프
- Marshall Major 200W
- Marshall Silver Jubilee 2555
4. 디스코그래피
4.1. 정규 앨범
- Niandra Lades and Usually Just a T-Shirt (1994)
- Smile From the Streets You Hold (1997)
- To Record Only Water for Ten Days (2001)
- From the Sounds Inside (2001)
- Shadows Collide With People (2004)
- The Will to Death (2004)
- Inside of Emptiness (2004)
- Curtains (2005)
- The Empyrean (2009)
- PBX Funicular Intaglio Zone (2012)
- Enclosure (2014)
- Renoise Tracks 2009-2011 (2015)
- Maya (2020)
- . I : & : I I . (2023)
4.2. EP
- Estrus EP (1997)
- Going Inside (2001)
- The Brown Bunny (2004)
- DC EP (2004)
- Letur-Lefr (2012)
- Outsides (2013)
- 4-Track Guitar Music (2015)
- Foregrow (2016)
5. 여담
- 지금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레드 핫 칠리 페페스 가입 이전에는 17세의 어린 나이에도 에디 밴 헤일런과 스티브 바이를 연상시키는 완성된 기량의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였다. 그간 보여준 지미 헨드릭스 풍의 고전적인 연주 스타일로 인해 다양한 스케일의 활용과 레가토 주법, 태핑 주법 등 현란한 기교가 크게 강조되지 않았고, 강렬한 인상의 즉흥연주 및 센스 있는 리프 메이킹과는 별개로 테크닉적 영역에서는 아무래도 고평가를 받기 힘들었다[12][13]. 그러나 사실은 이미 기교적으로 충분히 완성되었음에도 힐렐 슬로박의 후계자로서 연속성을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180도 바꾼 것이었고, 그럼에도 훌륭한 멜로디 감각과 탄탄한 기본기, 특유의 표현력을 바탕으로 호소력이 상당히 짙은 개성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천재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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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RHCP 1기 시절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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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약물 중독자 시절을 청산하고 재건 수술을 받은 후 |
- 약물 중독의 여파로 인해 무너진 코와 턱을 재건한 이후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 재건 수술 전인 RHCP 1기 시절의 사진만 모아두고 보면 다른 사람일 정도. 심지어 이 당시엔 상당한 미남이었던지라 안타까워 하는 팬들이 꽤 많다.
* 탈퇴 전 RHCP 멤버들과의 불화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앤서니와 존 사이에 텐션이 있던 적이 많았다. 가장 좋은 예가 극악무도했던 1992년 SNL 라이브 Under the Bridge. 팬들 사이에서는 '존이 작정하고 무대를 망치려고 한 것이다' VS '존이 마약에 취한 상태로 실험정신에 도취되어 마음대로 코드를 바꾼 것이다' 등등 말이 많지만 앤서니의 자서전인 Scar Tissue에 따르면 존은 갑자기 인트로부터 앤서니 자신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키로 연주했고 자신은 어떻게든 맞다고 생각하는 키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앤서니는 그 무대에서의 시간은 고문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자신은 라이브로 수 백만 명의 관객 앞에서 맞지도 않는 이상한 키로 노래를 싸지르고 있고 정작 이 모든 원흉의 당사자인 존은 그늘 뒤에서 조용히 연주하고 있는 걸 보자니 이 새끼가 자신을 일부러 엿먹이려 한 것 같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14]
- 1. 처음 곡의 인트로부터 심상치 않다.
- 2. 1분 47초 경의 릭(Lick)이 환상적이라고 직접 기타로 시도해보는 팬들이있다.
- 3. 2분 2초 경에 존이 Verse 2의 코드인 A를 "실수로" 연주했다가 다시 E로 돌아온다.
- 4. 3분 35초와 3:47초 경부터 존이 "Under the bridge downtown" 코러스 대신 내지르는 호!!!!!!!가 별미.
- 5. 4분 13초 경에 앤서니가 "We're on stage."라고 하는데, 해석하기에 따라 "지금 무대 위야 XX아" 정도로 들리기도 한다.
-
6. 4분 35초 때부터 앤서니의 제대로 빡친 얼굴을 볼 수 있다.
마이크 스탠드를 꽉 쥐고 있는게 후려칠까 고민하는거 같기도
팬들은 Under the Bridge 바로 전의 Stone Cold Bush 무대에서는 존이 정상으로 연주했던 것을 빌미로[15] Stone Cold Bush 무대에서 앤서니가 존의 엉덩이를 걷어찬 것에 대한 존의 보복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고 그냥 존이 헤로인에 너무 취해서 타이밍 안좋을 때 즉흥연주를 해버렸다는 설도 있는데 이 둘을 합친 복합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존이 이 당시 헤로인 정키였던 것도 맞고 처음부터 밴드의 방향과 존의 그것이 맞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니 당연히 팀 내에 긴장감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
RHCP 멤버들과 팬들 사이에서도 음악적 천재로 여겨지고 있다. 2016년 앤서니 키디스의 인터뷰에 따르면 앤서니는 자기 생애에서 존처럼 창작/작곡을 쉽게 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한다. 앤서니에 따르면 존은 같이 음악 만들기 정말 쉬운 사람이었다고한다. 말인즉슨, 앤서니가 새 노래 가사를 끄적이면 옆에서 존이 즉석에서 가사에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어서 어느새 둘이 같이, 앤서니는 노래를 하고 존은 기타를 치며, 작곡을 하고 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앤서니가 "이런 느낌을 더하면 어때?" 하면 존이 바로 '그 느낌'을 더해주었다고. 실제로 밴드의 많은 히트곡들이 그가 만들어 낸 즉흥적인 기타 리프에서부터 탄생하거나 완성되었다. 대표적으로 Snow.
멤버들이 입을 모아서 미친 순간이었다고 이야기한다.[16]]
그리고 그 릭은 자기가 가르쳐 준 거라고 말하는 채드
- RHCP의 음악적 특색이 폭발하던 기간에 멤버간의 단합이 끝내주기는 했다. 위는 Night Music 프로그램에 방영되었던 이들의 공연으로 Subway to Venus, Sexy Mexican Maid, 그리고 Back in Black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다들 똘기 충만하지만 무대를 너무나 즐기고 있다는 것이 보여준다. 존의 솔로를 보다보면 존이 기타와 말하고 있는지 기타를 대신해서 말을 하고 있는 지 분간이 안간다. 실제로 모 다큐에서 존은 자신은 남들과의 대화 보다 기타연주가 더 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 라이브 중 가끔 무대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기타를 친다. 감정이 격해지면 기타를 이리저리 휘두르거나 하기도 하는데, 연주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의 표정이 일품이다. 퍼포먼스가 가끔 독특할 때도 있다. #
-
팬들 사이에서도 존은 예수나 신으로 불리긴 하는데 그만 큼 그의 작곡 / 연주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닮은 게 제일 크긴 하다.그래서인지 예수 분장을 하고 찍은 사진들도 존재한다. 게다가 RHCP 팬들은 락 황금기였던 80, 90년대 락을 듣고 자란 세대들이 많은데 락 좀 듣는다하는 그들 사이에서도 추앙받을 정도이면 말 다했다. 사기급인 음악적 재능, 데뷔 초 뛰어난 외모, 그리고 완벽한 무대 체질임에도 유명세를 얻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약물 중독에서도 벗어난 후 현재는 그가 원하는 음악을 하면서 종종 앨범도 내는 등, 그가 그토록 원했던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고 있는 듯하다.
- 참고로 그의 팔은 흉터로 가득한데 집이 불에 탔던 영향도 있지만 하도 팔에 마약 주사를 많이해서라고 한다. 앤서니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팔에 흉터가 너무 많아 괴저가 생겼고 이 때문에 피부 이식수술까지 받았으며, 잘못하면 팔을 절단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흉터 때문에 복귀 이후 한동안 라이브공연에서는 긴팔만 입었다.
- 보컬 실력이 꽤나 좋은 편이다. 목소리가 상당히 부드럽고 가성 활용을 잘 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앤서니 키디스보다도 노래를 더 잘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정도. RHCP 공연 때는 종종 프루시안테가 솔로로 기타를 치며 How Deep Is Your Love, Tiny Dancer 등의 노래를 맛깔나게 커버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1]
미국식으론 "프루샨테"에 가깝게 발음한다.
[2]
근처에서 귀신 나오기로 유명한 맨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드러머 채드 스미스는 맨션에 감금되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 했다
[3]
대략 이 때부터 앤서니와 존 사이의 관계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앤서니는 플리와 존이 마약을 해대는 걸 못마땅해하며 그들에게 "약 좀 그만하라"고 했고, 존은 "마약단속반 납셨네"라 답하며 맴버들 사이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중엔 앤서니의 말 자체를 대놓고 무시하는 상황까지 간다.
[4]
얼마 못 가 멤버들과의 불화로 그만두지만..
[5]
1990년대 중반경의 사진으로 마약으로 인해 외모가 폐인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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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은 마약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낸 앨범인데 그의 흑역사 중 하나로
피치포크 미디어에서 빵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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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에 수록된 플리의 공격적인 슬랩 연주가 돋보이는 곡들은 지금도 꾸준히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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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로는 메탈 장르의 성향이 강한 연주를 즐기는 기타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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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감정의 골이 다소 깊었는지 한동안 나바로와 다른 멤버들은 교류하지 않았다. 다만 최근에는 화해한 모양인지 2020년 베벌리 힐스에서 열린(존 프루시안테 재합류 이후로 밴드의 최초의 라이브인) 소규모 공연에서 존 프루시안테를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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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을 구입하기 위해 기타를 처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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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SM 까지의 젊은 시절과 밴드 복귀 이후의 인상이 확연하게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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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존 프루시안테는 기타리스트로서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펜타토닉 스케일과 내추럴 마이너 스케일[18]을 기반으로 벤딩, 비브라토, 해머링, 풀링 오프, 트레몰로, 트릴 등의 주법 정도만 가미한다. 그리고 지판을 현란하게 상하좌우로 오가기보다는 익숙한 스케일 폼 몇 가지에 집중하는 편. 상당히 기본에 충실하여 연주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다 스트라토캐스터로 연주할 경우 때때로 아밍이 추가될 정도로 동세대의 전설들에 비하면 주법 상의 난이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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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외도 있는데,
에디 밴 헤일런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태핑 주법을 적극 활용한 곡인 Eddie가 대표적이다. 정작 본인은 곡마다 음악적으로 가장 어울리는 연주를 할 뿐, 에디 밴 헤일런에게 헌정하는 곡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태핑 주법을 넣을 바에 차라리 아웃트로 솔로 파트를 빼버릴까 고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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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세히 분석하면 알 수 있지만 키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곡의 시작이 존 프루시안테의 기타 반주로만 이뤄지는데, 문제는 원곡에 비해 매우 느린 템포로 전개된데다가 리프 자체를 맘대로 즉흥연주로 바꿔버리는 바람에 보컬인 앤서니 키디스로서는 도대체 존 프루시안테가 뭘 하는 것이며 본인이 어떤 타이밍에 들어가야할지 종잡을 수 없던 것이었다. 물론 기타 반주에서 즉흥연주를 곁들이는 것은 Give It Away 라이브에서도 종종 보여주긴 했으나, 베이스와 드럼 없이 기타로만 반주를 채우는 부분에서도 무리하게 즉흥 연주를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코드를 틀리거나 괴성을 지르는 기행까지 벌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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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Stone Cold Bush 라이브 역시 잘 들어보면 그간의 열정적인 연주답지 않게 무성의한 부분들이 굉장히 많이 들린다. 존 프루시안테가 크게 영향받은 블루스 계열의 연주에는 어느 정도의 실수도 인간미로 허용되긴 한다. 그러나 음정 및 박자에서 실수가 있어도 곧잘 바로 만회하던 것에 비하면, 그저 되는 대로 자포자기식으로 연주하는 듯한 장면들이 중간 중간 튀어나온다. Under the Bridge 무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미 Stone Cold Bush 무대에서부터 맛이 가있던 상태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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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이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하듯 존은 지미 헨드릭스가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항상 이야기한다. 또한 밴드의 몇몇 노래들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Dani California의 기타 솔로 파트의 첫 마디는 영락없이 Purple Haze에 대한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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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기 마츠리의 애완견 이름 또한 존이며, 이 두 이름을 합치면 존 프루시안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