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9:04:59

조지 브렛

조지 브렛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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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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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버스비 에이모스 오티즈 딕 하우저 쿠키 로하스 폴 스플리토프
데니스 레너드 할 맥레이 조 버크 래리 구라 프레디 파우텍
유잉 카우프먼 조지 브렛 프랭크 화이트 무리엘 카우프먼 존 메이베리
댄 퀴즌베리 화이티 허조그 윌리 윌슨 제프 몽고메리 데니 매튜스
브렛 세이버하겐 마이크 구비자 아트 스튜어트 케빈 에이피어 조지 토마
마이크 스위니 네드 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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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Brett%20George%20Plaque%2078_NBL_0.png
조지 브렛
헌액 연도 1999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8.2% (1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돈 베일러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조지 브렛
( 캔자스시티 로열스)
롤리 핑거스
( 밀워키 브루어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커크 깁슨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조지 브렛
( 캔자스시티 로열스)
마티 바렛
(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3루수 실버 슬러거
1980년 첫 수상 조지 브렛
( 캔자스시티 로열스)
카니 랜스포드
(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3루수 실버 슬러거
버디 벨
( 텍사스 레인저스)
조지 브렛
( 캔자스시티 로열스)
웨이드 보그스
(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1루수 실버 슬러거
돈 매팅리
( 뉴욕 양키스)
조지 브렛
( 캔자스시티 로열스)
프레드 맥그리프
( 토론토 블루제이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3루수 골드 글러브
버디 벨
( 텍사스 레인저스)
조지 브렛
( 캔자스시티 로열스)
게리 가이에티
( 미네소타 트윈스)
}}} ||
파일:George Brett.jpg
<colbgcolor=#004687><colcolor=#ffffff> 캔자스시티 로열스 No. 5
조지 하워드 브렛
George Howard Brett
출생 1953년 5월 15일 ([age(1953-05-15)]세)
웨스트버지니아 주 글렌 데일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 83kg
포지션 3루수, 1루수[1]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71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29번 ( KC)
소속팀 캔자스시티 로열스 (1973~1993)

1. 개요2. 은인을 만나다3. 전성기의 시작, 그리고 숙적 뉴욕 양키스4. 꿈의 타율에 도전하다5. 로열스의 전설6. 명예의 전당 입성
6.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브렛과 양키스의 악연
7.1. 파인타르(송진가루) 사건
8. 평가9. 이모저모10. 연도별 기록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야구선수.

캔자스시티 로열스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영구결번 선수이며 원클럽맨이다. 1970~80년대 로열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3루수로 한 팀에서만 뛰면서 3,000안타를 기록한 10명의 선수 중 한 명.[2]

통산 성적은 타율 .305, 317홈런, 3154안타, 출루율 .369, 장타율 .487, OPS .857, 순장타율 .183, BB/K 1.21, wRC+ 132, 1595타점을 기록했다.

2. 은인을 만나다

1971년 드래프트에 나온 조지 브렛은 사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을 뻔했다. 그러나 브렛의 형들을 지명했다가 모두 실패를 맛본 레드삭스는 조지 브렛을 지명하지 않았고 2라운드에서 로열스가 브렛을 지명한다.[3]

본래 브렛의 포지션은 유격수였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오른쪽 타구에 대한 수비가 불안하여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1973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의 무대를 밟은 브렛이지만 13경기에서 타율 0.125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다음해에 주전 3루수로 무대를 밟았지만 방망이가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로열스의 타격코치로 일하던 찰리 로[4]가 브렛에게 특타를 제안했고 로의 특타를 받은 브렛은 로의 타격 이론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데 성공하면서 환골탈태한다.

3. 전성기의 시작, 그리고 숙적 뉴욕 양키스

메이저리그 3년차이자 주전으로 나선지 2번째 시즌인 1975년, 브렛은 처음으로 3할을 기록했고 195개의 안타와 13개의 3루타를 기록하며 최다 안타, 최다 3루타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1976년에는 타율 0.333으로 처음으로 타율 1위를 기록했고 215개의 안타, 14개의 3루타, 298루타를 기록하며 타율, 안타, 3루타, 총 루타에서 1위를 기록했지만 리그 MVP투표에서는 뉴욕 양키스 서먼 먼슨에게 밀리며 2위에 그친다.

브렛이 이끈 로열스는 양키스와 아메리칸 챔피언쉽 시리즈[5]에서 대결했고 브렛은 포스트시즌에서 타율 0.444, 출루율 0.476, 장타율 0.778, 8안타, 1홈런을 기록했지만 양키스에게 월드 시리즈 진출을 내주고 만다.

그렇지만 이것은 브렛과 양키스의 악연의 시작일뿐이었다.

1977년에는 3할과 20홈런을 동시에 기록했고 1978년에는 약간 주춤했지만(타율 0.294) 45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최다 2루타를 기록하는등 로열스의 중심타자로서 로열스를 이끈 브렛은 1977년과 1978년에도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양키스를 상대했다.

브렛은 포스트시즌에서 양키스의 투수진을 난타했지만 팀은 계속해서 양키스에게 월드 시리즈 진출을 내줘야만 했다.

4. 꿈의 타율에 도전하다

1979년, 타율 0.329, 출루율 0.376, 장타율 0.563, 212안타, 2루타 42개, 3루타 20개, 23홈런, 107타점을 기록하며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인 브렛이었지만 다음해, 더 놀라운 일을 만들어낸다.

1980년, 4월에는 타율 0.259, 5월에는 0.329을 기록하며 0.301에 그친 브렛이었지만 6월에는 0.472, 7월에는 0.494, 8월에는 0.430을 기록하며 타율을 0.403으로 끌어올리며 마지막 4할타자이후 다시 4할타율을 기록하는 선수가 될지 언론과 팬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9월, 브렛의 타율은 0.324에 그치며 아쉽게도 타율 0.390으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6]

부상으로 117경기에만 출장했지만 타율 0.390, 출루율 0.454, 장타율 0.664를 기록하며 리그 MVP를 차지한 브렛은 또다시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양키스를 만났지만 이번에는 3차전에서 구스 고시지를 침몰시키는 홈런을 포함, 양키스를 물리치며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다.

월드 시리즈에서 내셔널리그 최고 3루수 마이크 슈미트[7]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만난 브렛은 치질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8] 타율 0.375, 출루율 0.423, 장타율 0.667, 9안타, 1홈런을 기록했지만 아쉽게도 로열스는 필리스에게 월드 시리즈 우승을 내준다.

5. 로열스의 전설

이후에도 브렛은 꾸준히 로열스의 타선을 지킨다.[9] 1985년, 브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0홈런을 기록했고 팀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안겨주었다.[10]

이후로도 브렛은 로열스의 타선을 꾸준히 지켰고 1990년에는 타율 0.329를 기록하며 3번째로 타율 1위를 차지했으며 70-80-90년대의 3세대에 걸쳐 타격왕을 차지한 선수가 되었다.

1992년 9월 30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브렛은 통산 16번째로 3000안타를 기록한다. 그러나 기립박수후 재개된 경기에서 1루에서 견제사당한다.

1993년을 끝으로 브렛은 은퇴했고 21년간 로열스에서만 뛰면서 통산 3154안타를 기록했다.

6. 명예의 전당 입성

1999년, 명예의 전당투표에서 브렛은 98.19%의 투표율을 얻으며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이는 역대 최고 투표율 7위이자 좌타 내야수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11]

6.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조지 브렛 39 159 210 61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Third Base (5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조지 브렛 88.4 53.2 70.8
3루수 HOF 입성자 평균 67.5 42.8 55.2

7. 브렛과 양키스의 악연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브렛과 양키스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이다. 브렛이 전성기를 누린것과 동시에 서부지구의 강자로 떠오른 로열스는 3번이나 양키스에 가로막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실패했으며 브렛 역시 2번이나 양키스 선수들에게 리그 MVP를 내줘야만 했다.[12]

그러나 더 큰 악연이 일어났으니...

7.1. 파인타르(송진가루) 사건



1983년 7월 24일, 로열스와 양키스의 경기가 있던 날. 3번타자로 선발 출장한 조지 브렛은 양키스의 투수 리치 고시지를 상대로 9회초에 역전 2점 홈런을 때려낸다. 그러자 양키스의 감독 빌리 마틴은 즉각 덕아웃에서 걸어나와 브렛의 방망이를 보여주며 브렛이 방망이에 규정을 어기고 더 많은 양의 송진가루를 발랐다고 심판에게 어필했다.

이 당시, 규정상 송진가루는 방망이 끝에서 18인치[13]까지 바를 수 있었지만 브렛의 방망이는 송진가루가 방망이 끝에서 24인치까지 발라져있었다.(17인치인 홈플레이트의 너비와 뱃에 발린 송진의 너비로 판단) 심판은 즉각 브렛의 홈런을 무효로 선언함과 동시에 부정 배트 사용으로 인한 아웃을 선언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브렛은 곧장 심판에게 뛰쳐나갔다. 단순히 뛰쳐나간 것도 아니고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역사에 길이남을 돌진을 했다[14] 심판은 브렛에게 퇴장을 선언했고 이 경기는 결국 양키스의 승리로 끝난다.

경기가 끝난 후, 로열스는 이 경기를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제소했고 사무국은 브렛이 방망이에 규정을 넘는 송진가루를 발랐지만 이것이 홈런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며 홈런을 취소할 이유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1달 후 두 팀의 휴식일이었던 8월 18일에 브렛이 홈런을 친 순간부터 재개되어 로열스의 승리로 끝이 난다.[15][16] 이 때문에 야구 규정에 야구방망이에 대한 규정인 1.10의 (c)항에는 규정에 어긋난 방망이를 사용해도 타격 중이나 타격 후에는 플레이를 인정하도록 되어있다. 즉 부정 배트 사용은 타자가 배팅 박스에 들어오기 전에 발견해야 퇴장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바뀌었다.

그 때, 캔자스시티의 게일로드 페리가 조지 브렛의 배트를 가지고 클럽 하우스로 도망쳐서 뉴욕 시경이 클럽하우스까지 진입하는 일이 일어나는 등 엄청난 해프닝이 있었다. 사건 25일 후 홈런을 친 순간부터 약 20여분간 이루어진 '특별 9회'는 짧은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1000여명의 많은 관중이 왔지만 너무나 간단히 끝나서 김이 빠졌다.

한편, 이 때 심판의 판정에 머리끝까지 분노하여 뛰어나온 장면은 이후 조지 브렛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다만 조지 브렛 자신은 성질머리가 대단한 선수로 기억되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했는데, 이는 브렛이 송진가루 사건 이전에는 치질수술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서 빠진 치질보이로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인터뷰에서 "당신이라면 치질로 기억되는 것과 송진가루로 기억되는 것 중 어느것이 나은지 알거 아니오"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8. 평가

단 4명 뿐인 3,000안타를 기록한 3루수이며[17] 한 팀에서만 뛰며 3,000안타를 기록한 10명의 선수중 한 명이기도 하다. 비록 잔부상 때문에 시즌을 완벽히 소화한 적은 드물지만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타자였으며 꾸준하고 강력한 모습을 보인 선수였다.

동시대의 감독이 새해에 일어나 가장 먼저 안타를 때릴 선수로 지명했으며, 로열스가 브렛의 은퇴이후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적이 단 3번뿐이라는 것과, 브렛이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갖가지 타격기록에서 1위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에서 브렛이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9. 이모저모

2012년 KC 카우프먼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서 미국 팀 감독을 맡아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기(필리스의 홈 개막전)에서 마이크 슈미트와 함께 시구를 했다. 그리고 2013년 5월 말 로열스가 타격코치를 해고하고 레전드 브렛을 임시 타격코치로 임명하였는데, 그 첫날 로열스는 미주리 주 라이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인터리그 시리즈에서 우천 중단으로 한국프로야구가 시작하기 몇시간 전이 돼서야 끝난 경기를 치뤘다.(...)

사회인 야구를 한다면 들어봤을법한 BRETT이라는 야구용품 브랜드는 조지 브렛의 이름을 딴 브랜드이며 조지 브렛이 감수를 맡고있다.

2014년 10월 15일 로열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펼친 ALCS 4차전을 승리해 스윕을 거두며 29년만에 월드시리즈로 진출하자 감격에 벅차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인터뷰에서도 "내가 뛰지 않았는데 로열스가 가을에 이겼다." 라고 하여 오랜 로열스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2015년 10월 23일에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펼친 ALCS 6차전에서 로열스가 승리해 2년 연속 ALCS 우승과 월드 시리즈를 보게 된다.

멘도사 라인의 유래가 된 조금 쪽팔리는 기록도 있다. 통산 3천안타를 훌쩍 넘기고 타율도 3할이 넘는 대타자임에도 유독 4월에는 2할 6푼대의 지못미한 타율을 기록하며 선수생활 내내 고질적인 슬로우 스타터 기질을 보였는데, 멘도사 라인은 그렇게 시즌 초반에 해도해도 너무할 정도로 안 맞다보니 동료들이 농담을 한 것이 그대로 널리 알려져버렸다.

2015년부터 미국의 프로축구 리그 메이저 리그 사커 뉴욕 시티 FC 양키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참가하기 시작한 이후, 같은 캔자스시티를 연고지로 둔 스포팅 캔자스시티가 뉴욕 시티 원정에서 1-0 으로 승리한 후, 기념으로 상대 팀 구장이 야구장인걸 이용해 선수들이 파인타르 사건을 재현했다.

201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홈경기는 물론 원정 경기들도 응원을 와서 관람했으며, 5차전 로열스가 승리하여 30년만에 팀이 또 한번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는 장면을 보는 감격을 누린다.

2017년에는 느닷없이 4월 2일 마산 야구장에서 시구를 했다. 이유는 NC 다이노스의 전훈지인 쿠카몽가 구단주여서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Royals라는 곡으로 16세에 그래미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한 뉴질랜드의 천재 싱어송라이터 Lorde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그 이유가 다소 엉뚱해 보일 수도 있는데, 곡의 제목이 Royals인 이유는 Lorde가 딱히 캔자스시티나 브렛의 팬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연히 잡지에서 본 브렛의 유니폼에 쓰인 Royals라는 글자가 이뻐 보여서.

2022년 4월 30일 양키스 vs 로얄스 경기에서 5회말에 양키스 중계석에 찾아와 카를로스 벨트란과 담소를 나눴다. 벨트란은 중계석에서 일어나 시종일관 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브렛을 찬양했고, 자신의 롤모델이 되어준것에 감사하며 "I love you"라고 하자 브렛이 똑같이 "I love you"라고 답하며 서로 포옹했다. 이에 " 마이크 스위니[18] 자랑스러워 하겠네요, 내가 포옹을 하다니"라며 웃었다. 그리고 벨트란에게 반드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을거라고 덕담을 건네자, 벨트란은 그땐 뽀뽀해주겠다고 했고 브렛은 폭소하며 자신이 맥주를 쏘겠다고 했다. 5회말이 끝나며 중계석을 떠날때는 벨트란이 작별인사를 하며 또다시 "I love you"라고 했다.

현재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야구용품 브랜드인 브렛(BRETT)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10. 연도별 기록

파일:MLB 로고.svg 조지 브렛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3 KC 13 41 5 2 0 0 2 0 0 0 5 .125 .125 .175 .300 -0.3 -0.2
1974 133 486 129 21 5 2 49 47 8 21 38 .282 .313 .363 .676 0.7 1.4
1975 159 697 195 35 13 11 84 90 13 46 49 .308 .353 .456 .809 5.4 5.8
1976 159 705 215 34 14 7 94 67 21 49 36 .333 .377 .462 .839 7.0 7.5
1977 139 627 176 32 13 22 105 88 14 55 24 .312 .373 .532 .905 7.1 7.6
1978 128 558 150 45 8 9 79 62 23 39 35 .294 .342 .467 .809 4.8 5.4
1979 154 701 212 42 20 23 119 107 17 51 36 .329 .376 .563 .939 8.3 8.6
1980 117 515 175 33 9 24 87 118 15 58 22 .390 .454 .664 1.118 9.1 9.4
1981 89 379 109 27 7 6 42 43 14 27 23 .314 .361 .484 .846 3.0 3.3
1982 144 629 166 32 9 21 101 82 6 71 51 .301 .378 .505 .884 5.7 6.0
1983 123 525 144 38 2 25 90 93 0 57 39 .310 .385 .563 .947 4.1 4.3
1984 104 422 107 21 1 13 42 69 0 38 37 .284 .344 .459 .802 3.0 2.8
1985 155 665 184 38 1 30 108 112 9 103 49 .335 .436 .585 1.022 8.3 8.3
1986 124 529 128 28 4 16 70 73 1 80 45 .290 .401 .481 .881 3.8 4.0
1987 115 508 124 18 0 22 71 78 6 72 47 .290 .388 .496 .884 3.2 2.7
1988 157 681 180 42 3 24 90 103 14 82 51 .306 .389 .509 .898 5.3 5.2
1989 124 528 129 26 3 12 67 80 14 59 47 .282 .362 .431 .793 1.6 1.7
1990 142 607 179 45 7 14 82 87 9 56 63 .329 .387 .515 .902 4.2 4.1
1991 131 572 129 40 2 10 77 61 2 58 75 .255 .327 .402 .729 0.3 0.4
1992 152 638 169 35 5 7 55 61 8 35 69 .285 .330 .397 .727 0.3 0.5
1993 145 612 149 31 3 19 69 75 7 39 67 .266 .312 .434 .746 -0.2 -0.2
MLB 통산
(21시즌)
2707 11625 3154 665 137 317 1583 1596 201 1096 908 .305 .369 .487 .857 84.6 88.6

11. 관련 문서




[1] 선수생활 말미에는 1루수와 지명타자로 출장. [2] 나머지 9명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알 칼라인, 볼티모어 오리올스 칼 립켄 주니어, 보스턴 레드삭스 칼 야스트렘스키, 휴스턴 애스트로스 크레이그 비지오, 뉴욕 양키스 데릭 지터, 피츠버그 파이리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밀워키 브루어스 로빈 욘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스탠 뮤지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토니 그윈이다. [3] 한편, 그 다음 2라운드 전체 30번으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지명한 선수는 마이크 슈미트. 메이저리그 최고의 3루수가 앞뒤로 포진된 드래프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드랩 당시엔 두 선수가 모두 유격수로서 지명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4] 테드 윌리엄스와 함께 타격이론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테드 윌리엄스가 몸통의 회전을 이용한 타격과 약간의 어퍼스윙을 주장했다면 찰리 로는 무게중심의 전진을 이용한 타격과 레벨스윙을 주장했다. [5] 이 시기엔 지금과 달리 3지구가 아니라 2지구 체제로서, 서부지구 1위와 동부지구 1위가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대결하여 이긴 팀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 방식의 포스트시즌이 진행되었다. [6] 이 시즌은 파업으로 인해 중단된 토니 그윈의 1994 시즌과 함께 4할 타율에 가장 가까웠던 단일 타자 시즌으로 평가받는다. [7] 교타형의 좌타자와 정통 우타 거포, 위에 언급된 찰리 로와 테드 윌리엄스의 타격 이론을 각각 수용한 선수, 냉정히 말해 수비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던 브렛과 내셔널리그의 단골 골드글러버 슈미트, 양대리그 챔피언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양팀 모두 역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한다는 점 등, 여러모로 1980년 월드시리즈는 브렛 vs 슈미트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8] 결국 2차전 도중 교체되어 수술을 받는다. [9] 부상으로 89경기에만 출장한 1981년 제외 [10]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팬들에게는 정말로 분노할만한 월드 시리즈였는데, 6차전 9회말, 로열스의 선두타자였던 5번타자 호르헤 오르타의 1루 땅볼타구가 1루심 돈 덴킨저에 의해 내야안타로 처리되는 명백한 오심으로 카디널스가 6차전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여기에 다음날 7차전의 주심을 돈 덴킨저가 맡으면서 카디널스 선수들은 평정심을 잃고 7차전까지 놓치고 말았다. [11] 브렛보다 높은 투표율을 얻은 선수는 만장일치를 받은 마리아노 리베라, 켄 그리피 주니어, 톰 시버, 놀란 라이언, 칼 립켄 주니어, 타이 콥뿐이다. [12] 서먼 먼슨 돈 매팅리가 그 주인공들이다. [13] 야구 규정 1.10의 (c)항. [14] 덕아웃에서 배터박스까지 달려간 시간은 3.7초에 불과했다. 무려 항의를 위해 덕아웃에서 달려나오는데 걸린 시간 올타임 1위 기록이다.. 참고로 2위 기록은 조 네이선의 통산 300세이브 달성 순간 뛰쳐나온 조 매든. [15] 경기가 재개된 후, 빌리 마틴 감독은 또 다시 이의를 제기 하는데, 브렛이 홈런을 치고 모든 베이스를 밟았음을 어떻게 증명 할꺼냐고 항의 했다. 하지만 평소 마틴 감독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심판진들은 마틴이 또 다른 규정을 빙자해 딴지를 걸 것이라 예상했었고, 미리 받아둔 증명서(이전 홈런 상황에서 브렛이 모든 베이스를 밟았음을 확인하고 보증한다는 모든 심판의 사인이 담긴 서류)를 들이밀어서 마틴을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다. [16] 한 달 후 재개된 경기에서 기이한 상황(...)이 일어났다. 원래 이 경기에서 양키스의 중견수였던 제리 멈프리가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하는 바람에 투수인 론 기드리가 중견수로 교체되는가 하면, 2루수였던 버트 캠퍼네리스는 부상으로 뛸 수가 없어 왼손잡이인 돈 매팅리가 2루수를 봤다(...). 사실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해 브렛의 홈런 판정에 불복하는 빌리 마틴 감독의 분노 표출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17] 나머지 세 명은 웨이드 보그스, 알렉스 로드리게스, 아드리안 벨트레. 이들 가운데 A-ROD는 유격수로 뛴 경기가 더 많기에 애매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약쟁이기도 하고. [18] 팀원들끼리 포옹을 하는 전통을 시작했는데 브렛 본인은 그것에 질색했다고 웃으며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