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사적 제415호 | ||
청주 정북동 토성 淸州 井北洞 土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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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1-1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수량/면적 | 91,936㎡ | |
지정연도 | 1999년 10월 28일 | |
제작시기 | 후삼국시대 |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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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정북동 토성 |
1. 개요
충청북도 청주시에 위치한 삼국시대 백제의 네모꼴로 축조된 토성이다. 1999년 사적 제415호로 지정되었다.2. 세부내용
미호천(美湖川)과 무심천(無心川)이 합류하는 까치내 주변의 평야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성 안에는 토성마을이 위치하며 주변은 모두 논이다.성벽은 부식된 화강암을 부순 마사토와 붉은흙을 섞어 두께 7∼15㎝씩 판축(版築)하여 쌓았다. 둘레는 655m인데, 동쪽벽 180m, 남쪽벽 155m, 서쪽벽 160m, 북쪽벽 160m는 대체로 직선을 이루고 있어 성곽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다. 성벽의 높이는 약 4m 정도인데, 윗부분에는 성벽을 한바퀴 돌 수 있는 너비 2m 가량되는 길이 나 있다.
성벽의 중간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城)처럼 성벽을 자르거나 어긋나게 한 문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벽 모서리는 곡성(曲城)처럼 높이를 높여 바깥쪽으로 둥글게 쌓았는데, 다락집과 같은 각루(角樓)를 설치한 듯하다. 성벽의 바깥쪽에는 성벽을 둘러 판 해자(垓字)의 흔적도 있다. 1939년에 성 안에서 돌화살촉·돌칼·돌창이 출토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삼국시대 그릇 조각과 고려시대 이후의 자기 조각도 발견되고 있다.
이 산성과 관련하여 조선 영조 때 작성된「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토성을 축조하였고,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평지에 네모꼴로 쌓은 이러한 토성은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드문 중국식 성터이므로, 견훤축성설은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오히려 3세기경에 취락성(聚落城)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
3. 사적 제415호
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있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만든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만든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