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3:30:00

장화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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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왕후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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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왕후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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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왕후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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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후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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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왕후 황보씨
<rowcolor=#670000> 경종 후 성종 후 목종 후 현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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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의왕후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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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헌정왕후 황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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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왕후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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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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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왕후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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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왕후 김씨
<rowcolor=#670000> 덕종 후 [ruby(정종, ruby=靖宗)] 후 문종 후 순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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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왕후 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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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목왕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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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선종 후 숙종 후 예종 후 인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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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숙왕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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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왕후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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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왕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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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덕왕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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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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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창원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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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왕후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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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평왕후 김씨
<rowcolor=#670000> 의종 후 명종 후 신종 후 희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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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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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왕후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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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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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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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왕후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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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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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국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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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녕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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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대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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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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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제2왕후
장화왕후 | 莊和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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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혜종조 왕태후
왕태후 오씨 | 王太后 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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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왕건과_장화왕후.jpg
출생 미상[1]
후백제 나주 목포 오다련의 사저
(現 전라남도 목포시)
사망 922년 이후[2]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제2왕후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
고려 왕태후
943년 7월 4일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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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나주 오씨
부모 부친 다련군(多憐君)
모친 덕교(德交)[3]
형제자매 1녀 중 장녀
배우자 태조
자녀
1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혜종(惠宗, 912 ~ 945)
종교 불교
작호 왕후(王后) → 왕태후(王太后)
시호 장화왕후(莊和王后) }}}}}}}}}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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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제2비. 나주 태생으로 나주에서 대대로 소금을 생산하던 호족 오다련의 딸이다. 왕건이 아직 후고구려의 장군이던 시절인 910년대에 나주를 정벌할 당시 호족 유화책으로 결혼했으며 고려 2대왕 혜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고려사 열전 후비전 서문에는 "왕의 모친을 왕태후(王太后)라 부르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장화왕후는 혜종의 어머니이면서도 왕태후의 존호도 받지 못했고, 남편의 시호에 들어간 신(神)자로 시작되는 시호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원 간섭기 이전 왕의 생모로서는 유일한 경우이다. 나주 지역의 강력한 해상 호족 출신이면서도 미천한 신분이라 언급되고 돗자리와 혜종의 주름살 이야기처럼 불가능한 이야기가 공공연히 정사에 쓰여진 것으로 볼 때, 왕요/왕소 측이 자신들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부러 기록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해석.

2. 생애

고려사에 의하면 나주 오씨 가문은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곳은 통일신라 서라벌 당나라를 연안 항해로 오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인데다 영산강의 하구라 서해안에서 내려올 때도 만나는 교차점으로 상업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장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은 지방 세력가로서 사간 관등을 가진 연위(連位)라는 자의 딸 덕교(德交)에 장가들어 장화왕후를 낳았다. 신라의 6두품 귀족인 연위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나주 오씨 가문이 지방 세력치고는 위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4]

왕건과 장화왕후 사이에 있었던 일에 관해 2가지 설화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그 유명한 나뭇잎 이야기로 금성(나주)를 지나던 왕건이 완사천에서 갈증이 나 우물에 있는 아가씨에게 물을 얻어마시고자 청했는데, 그 아가씨가 물을 담은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주었다. 왕건이 왜 나뭇잎을 띄웠냐고 묻자 목이 마르다고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하는 법이라고 답했고, 아가씨의 현명함에 감탄한 왕건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청혼을 했는데 그녀가 바로 장화왕후 오씨였다는 이야기다.

두번째 설화는 금성 정벌에 성공한 왕건이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오씨를 우연히 봤는데, 그녀 뒤에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오씨가 마음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을 하는데, 오씨를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핀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음부 에 넣었다고(...)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고려의 2대 황제 혜종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태어나서 혜종의 얼굴이 돗자리처럼 자글자글하게 주름살이 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물론 이 설화는 사실일 가능성이 없는데 일단 왕건과 오씨가 혼례를 올린 것이 903년인데, 왕무는 912년생이다. 또한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누군가 그 장면을 목격했거나 아니면 당사자(왕건이나 오씨)가 말하고 다녔단 얘긴데 과연 이런 대형사건이 설화로만 남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이런 식으로 임신되기는 매우 어렵다. 정상적으로 질 내부에서 나름 높은 압력으로 사정을 해도 여성 질 내부의 보호 시스템 때문에 정자들이 난자가 있는 나팔관까지 살아서 도착할 확률이 매우 낮다. 실제로 남녀 모두 문제가 없음에도 이런 과정에서 정자가 거의 죽어버리는 경우가 꽤 있다보니 쉬이 아기가 생기지 않는 부부들이 많다. 그런데 돗자리에 흘린 정액을 질 안에 넣어서 임신을 하기란... '삼국사기'에 견훤이 신라 왕비를 강간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를 두고도 진위 여부 논란이 있듯이, 당시 고려 초기 치열했던 왕권 다툼을 생각해 본다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확실한 것은 이런 소문이 났을만큼 오씨가 왕건의 장남을 낳은 사실을 주변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또한 저런 설화가 있을 정도로 당대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 출신의 실세인 자들에게 자신들의 딸을 바쳐 접대를 하는 문화가 많았다. 그래서 저런식의 설화가 나온다는 것은 중앙 호족들이 지방에 변변찮은 호족이 제 딸 바쳐서 출세하려 한다.식의 은연중의 괴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혜종이 태자로 책봉된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왕건은 건국 당시 전국의 호족 세력들의 반발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거의 30명에 달하는 호족들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았는데, 당연히 그 부인들 하나하나가 권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윤을 두고 장화왕후와 신명왕후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장화왕후는 왕건의 두번째 정실부인인데다 왕건의 장남을 낳았으니, 이를 두고 자신의 아들들을 정윤으로 삼지못한 신명왕후의 불만이 컸다. 왕건은 신명왕후의 배경인 충주 유씨 호족들의 반발이 격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불사하고 왕무를 정윤(태자)으로 책봉하고 싶어했다. 이에 "신하들의 뜻으로 왕무를 원자로 책봉한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상자에 자황포를 넣어 장화왕후에게 전해준다. 왕건이 황제가 입는 옷 '자황포(柘黃袍)'를 장화왕후에게 보냈다는 것은 장화왕후의 아들을 차기 왕으로 세우겠다는 뜻이었으니, 장화왕후는 이를 깨닫고 그것을 대광 박술희에게 보여주었다. 옷을 본 박술희 또한 왕의 의도를 깨닫고 신료들간의 회의를 열어 왕건의 큰아들 왕무를 후계자로 책봉할 것을 합의한다. 이렇게 하여 왕무는 신료들의 뜻을 가장한 왕건의 의지로 태자로 책봉된다. 그 후 왕무는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러 개경에 왔을 때, 왕건을 대신하여 경순왕을 영접할 정도로 왕건의 굳건한 후계자로 성장한다. 또한 나주 오씨 계보에는 934년 죽은것으로 되어있는데 고려실록과 고려사에 왕건이 죽기전 장화왕후에게 당시 정윤이었던 혜종 왕무에게는 새로 제작한 자황포를 입게 하라 지시 한것을 보아 왕건 사후에도 살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세종대왕 전국 각지에 있던 고려 역대 왕들의 어진과 조각상들을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으며 고려 왕조를 지워버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던 왕이다. 그런 세종도 《 고려사(高麗史)》를 제작하는 과정 중 고려 왕들의 일화에 민망한 내용들이 너무 많자 비록 전 왕조이지만 전 왕조의 위신이 너무 깎인다고 여겨 민망한 내용들은 삭제하라고 명했는데,[5] 유독 왕건과 장화왕후의 민망한 내용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훗날 혜종이 불천지주(不遷之主)에 올라 고려 왕조의 왕통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이름의 '무(武)'를 피휘해야 하는 왕이므로 이는 '무(武)'가 마치 고려 왕조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어 어느 정도는 폄훼하려고 삭제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세종은 분영갱상(焚影坑像)을 일으키면서 이안관 장득수(張得修)를 전라도 나주로 보내 사당에 모셔져 있던 혜종의 어진과 소상을 옥교자에 모시고 개경으로 가져가 땅에 묻었다.

3. 여담

  • 거의 천년이 지난 2011년 법정싸움에 휘말린 사례가 있다. 고려사를 다룬 서적에 "돗자리 일화"를 실었다는 이유로 후손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저자와 출판사를 고발한 것이다. 법원은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망인이나 후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볼 수 없고, 명예훼손의 책임을 넓게 인정하면 역사적 사실에 관한 재조명은 사실상 불가능해 진다.”는 이유로 출판사의 손을 들어 줬다. #

4. 대중매체

  • 2000년 KBS1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 배우 염정아가 연기했다. 혼인 전에는 작가가 지은 극 중 이름인 '오도영'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나주의 호족인 오다련의 딸로 등장한다. 총명함과 행동력을 겸비한 여장부로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업과 가문의 일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어 1차 나주 전투 때 여러 제장들과 함께 전투에 참전한다. 당시는 궁예가 다스리던 고려에서 사자가 와 내통할 것을 요청했을 때 금성태수 종례와 오다련의 마음은 이미 후백제를 저버리고 있었지만[6] 아무래도 위험한 결정인 만큼 쉽게 선택을 못하고 있었는데 고려와 내통할 것을 결정한 것이 바로 오씨였다. 오씨는 고려가 금성을 보호해 줄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약속을 지킬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고려의 정주에 가보기까지 한다. 왕건이 나주 정벌을 위해 나주에 왔을 때 안팎으로 왕건을 도와주면서 왕건의 둘째 부인이 되고,[7] 이후 왕건의 큰아들인 무[8]를 낳게 된다.
이후 왕건이 궁예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건국하면서 나주부인이라 불리게 되는데 첫째 부인이며 왕후가 된 류씨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궁 밖으로 피접을 나가게 되고 아들인 무가 정윤으로 봉해지면서 장화왕후로 봉해지게 된다. 왕후가 된 뒤에는 젊었을 때와는 달리 왕건과 아들 정윤에게 친정의 불안을 토로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본인도 전장을 누볐지만 어머니 마음은 다 똑같아서 아들 무가 전장에 나가게 되자 많이 심란해 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전란에 진력을 내기도 한다. 셋째 부인인 충주부인 유씨와 잠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있는데 특히 첫 아들을 낳고 자신에도 기회가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충주부인을 향해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이후 자신의 아들인 무를 위해 기도하는 순간에 충주부인의 아들이 요절하는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그녀가 기도하는 모습이 언뜻 보면 충주부인을 저주했던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한 눈빛을 보여주기도 했다.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오해를 풀고 반목을 멈췄지만 소설에서는 끝까지 이 일로 갈등하게 된다.[9] 195회에서는 왕건의 부인들을 통솔하는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모습도 보인다. 199화에서는 상부어른께 환후가 중하신데 전쟁터로 가냐며 걱정하기도 했다. 소설판에서는 하마터면 견훤의 후궁이 될 수도 있었으나 견훤 본인이 거부하는 전개가 나온다.
  • 2002년 KBS1 드라마 《 제국의 아침》에서는 배우 반효정[10]이 연기했다. 충주부인 유씨와의 갈등이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되는데 자신의 아들인 혜종과 그 손자로 왕통을 계승하려 노력하지만 혜종이 병약한 탓에 마음 고생이 심했으며 이 때문에 왕규에게 더욱 크게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혜종 붕어 이후 결국 서경 군대가 공격을 감행해 왕식렴의 지지를 받은 정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궁에서 퇴출되는 것으로 하차한다.

[1] 나주 오씨 족보에는 89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고려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2] 나주 오씨 족보에는 934년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려사》에 태조가 맏아들 혜종을 정윤으로 책봉하기 위해 장화왕후에게 천자가 입는 자황포(柘黃袍)를 상자에 담아 내려주었는데, 혜종은 양력 922년 1월 10일(음력 921년 12월 신유일)에 정윤으로 책봉되었으므로 이 시점까지는 살아있었을 것이다. [3]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이다. [4] 6두품이 비록 진골 아래지만, 좀 넓은 의미의 왕족 범위로 소수 특권층에 불과했음을 감안한다면 6두품 정도면 통일신라 전국에서 손꼽히는 중견 명문가였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사찬이라는 관등은 경주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외가가 신라 권력 핵심부와 맞닿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5] 고려는 남녀 혼탕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성이 개방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이런 일화들에 거부감이 없었지만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는 민망하고 감추어야 할 내용들로 간주되었다. [6] 후백제가 신라와의 전쟁을 하면서 호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전재산을 다 까먹게 생긴 금성의 호족들은 세금을 줄여달라고 호소했지만 견훤은 그 요청을 씹는다. 이후 고려의 밀사가 오자 오다련이 종례와 의논하는데 종례는 처음엔 밀사를 수달에게 넘기라고 주장했으나 얼마 후 수달이 종례에게 금성의 호족들을 더욱 닥달하여 세금을 더 걷으라고 요구하자 종례 역시 후백제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오다련과 함께 내통에 동참한다. [7] 이 때 왕건의 뒷바라지를 하던 부용(신혜왕후 류씨)에게 왕건의 시침을 들었냐고 대놓고 물어 두 사람을 당황케 했는데, 이는 왕건이 미혼인지 아닌지 떠보기 위함이었다. [8] 아역배우 출신인 안정훈이 무의 성인기를 담당해 연기했는데 안정훈은 1969년생으로 1972년생인 염정아보다 3살이 많아 미스 캐스팅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9] 후속작 《 제국의 아침》까지 감안하면 이쪽이 더 그럴싸한 전개이기는 하다. [10] 2009년 KBS 드라마 《 천추태후》에서는 신정왕후 황보씨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