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2:56:19

잔루카 비알리

잔루카 비알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첼시 FC 로고.svg

23대
파일:왓포드 FC 로고.svg

28대

유벤투스 FC 주장
로베르토 바조
(1992~1995)
잔루카 비알리
(1995~1996)
안토니오 콘테
(1996~2001)
}}} ||
잔루카 비알리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세리에 A 로고.svg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베스트팀
파일:UEFA 유로 1988 로고.svg
}}} ||
잔루카 비알리의 기타 정보
{{{#!folding ▼ 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1991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1500만 유로)
1992
잔루카 비알리
(1650만 유로)
1993
호마리우
(1200만 유로)
}}} ||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cdn.images.express.co.uk/81589.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잔루카 비알리
Gianluca Vialli
출생 1964년 7월 9일
이탈리아 크레모나
사망 2023년 1월 6일 (향년 58세)
영국 런던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피치게토네 (1973~1978 / 유스)
US 크레모네세 (1978~1980 / 유스)
US 크레모네세 (1980~1984)
UC 삼프도리아 (1984~1992)
유벤투스 FC (1992~1996)
첼시 FC (1996~1999)
감독 첼시 FC (1998~2000)[1]
왓포드 FC (2001~2002)
이탈리아 대표팀 (2019~2022 / 어시스턴트)
국가대표 59경기 16골 ( 이탈리아 / 1985~1992)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6. 은퇴 이후의 삶7. 사망8. 기록
8.1. 선수
8.1.1. 대회 기록 8.1.2. 개인 수상
8.2. 감독
8.2.1. 대회 기록
8.3. 수훈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이다.

현역 시절 그는 골 결정력이 탁월했고 윙어나 트레콰르티스타와 같은 타 포지션에서도 얼마든지 활약할 정도로 축구 지능도 뛰어났다. 특히 골 냄새를 맡는 능력은 발군이라 할 수 있다. 90년대 초중반은 그의 축구 커리어에 있어서 전성기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유벤투스로 이적할 당시 기록했던 1,250만 유로는 당시 월드 레코드 이적료였다.

그의 경력 중에서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바로 첼시에서의 업적이다. 그가 오기 전의 첼시는 중위권 구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알리의 활약에 힘입어 첼시는 약소팀에서 벗어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2000년대에 들어 중상위권 팀으로 치고 나가게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2]

2. 클럽 경력

2.1. US 크레모네세

파일:external/media.tumblr.com/tumblr_m1wekaSXra1qbelx7.png

어린 시절 준재벌급 집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수성가한 건축업체 경영자 아버지 밑에서 방이 60개가 넘는 대저택 Castello di Belgioioso에서[3] 성장하다가 9살이 되던 1973년, 지역의 유스팀인 피치게토네에 입단하면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5년간 피치게토네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후 1978년 14살의 나이로 U.S. 크레모네세 유스팀에 입단했다. 유스팀에서 2년간 활동한 비알리는 1980년 16살의 나이로 1군에 데뷔했다. 당시 크레모네세는 세리에 C에 속해 있었는데, 그는 그 팀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여 소속팀을 세리에 B로 승격시켰다. 이후 비알리는 꾸준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1983-84 시즌에 10골을 기록한 후 UC 삼프도리아로 이적했다.

2.2. UC 삼프도리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ianluca_Vialli_-_Sampdoria_1991-92.jpg

비알리는 삼프도리아에서 삼프도리아의 레전드 로베르토 만치니와 함께 환상적인 듀오를 결성했다. 두 사람을 가리켜 'The Goal Twins'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두 사람은 골을 수없이 양산하며 삼프도리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비알리는 1990-91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이 시기에 19골을 넣으며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골을 기록했다. 특히 1990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에서 안데를레흐트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일궈내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그의 삼프도리아에서의 최고의 활약상이었다. 이후 비알리는 삼프도리아에서 리그 우승 1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3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1회를 기록했고 유러피언컵에서도 1992년에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바르셀로나에게 1:0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1992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끝난 뒤, 비알리는 1,250만 유로, 당시 세계 최고액 이적료를 기록하며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2.3. 유벤투스 FC

파일:external/www.storiedicalcio.altervista.org/vialli-juventus-dev5.jpg

세계 최고액 이적료를 갈아치우며 유벤투스에 입성한 비알리는 새 소속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선보인다. 그는 첫 시즌인 1992-93 시즌에 UEFA컵 우승을 차지한다. 비알리는 유벤투스에서 로베르토 바지오와 함께 훌륭한 파트너십을 맺었고 1995년에 16골을 몰아치며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다만 UEFA컵 결승전에서 비알리가 팀의 두번째 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파르마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친 것은 아쉬웠다.

그는 1995년엔 팀의 주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파브리치오 라바넬리와 함께 이탈리안 쓰리톱을 구성하여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추구하는 공격 축구의 중심에 섰다. 95-96 시즌 시즌 개막과 함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을 달성했으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아약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염원하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것이 유벤투스 역사상 두번째 빅이어다. 그는 유벤투스에서 4년간 활동하며 102경기에 출전하여 100골을 기록했다

2.4. 첼시 FC

파일:external/www.sporting-heroes.net/12361-zoom.jpg

1996년 여름, 비알리는 스코틀랜드의 명문 구단인 레인저스 FC의 제의를 거절하고 루드 굴리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6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첼시에 입단했다. 그는 첫 시즌에 FA컵 4라운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2골을 기록하며 4:2 승리를 이끄는 등 맹활약하여 끝내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정작 FA컵 결승전에서는 후반 막판에 교체로 출전하여 고작 5분만 뛰었다. 1997-98 시즌, 비알리는 반즐리 FC를 상대로 4골을 기록했고 유로파 위너스컵에서 노르웨이의 구단 트롬쇠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1998년 굴리트 감독이 경질되자, 비알리는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8년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리그컵도 우승했다. 또한 1998년 UEFA 슈퍼컵에서는 레알을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또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그는 첼시 감독으로서 직무를 집중하기 위해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3.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www.dnamilan.com/201204011201250Vialliinnazionale.jpg

비알리는 1984년에 이탈리아 U-21팀에 차출되었고 1986년에 UEFA 유로피언 U-21 축구 챔피언쉽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3위를 기록했다. 비알리는 이 대회에서 4골을 기록하며 대회 최다골 기록자로 선정되었다. 비알리는 U-21 팀에서 20경기에 출장하여 11골을 기록했다.

1985년, 비알리는 폴란드와의 A매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서의 첫 경기를 뛰었다. 이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비알리는 대표팀 스쿼드에 합류하여 교체 멤버로 활동했다. 그는 이 시기 교체로 4경기를 뛰었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했다. 그의 대표팀에서의 첫 골은 1986년 몰타와의 UEFA 유로 1988 지역 예선 경기였다. 이후 비알리는 UEFA 유로 1988 대표팀 스쿼드에 포함되었고 조별 예선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했다. 비록 이탈리아는 소련을 상대로 4강전에서 2:0으로 패하고 말았지만, 비알리는 UEFA가 선정한 이 대회 베스트 11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비알리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강력한 활약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대회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와의 첫번째 경기에서는 골을 기록하지 못했고 미국과의 예선 2차전 경기에서는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로베르토 바지오에게 밀려 벤치에 박혀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4강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간신히 출전한 그는 이탈리아가 선제골을 넣는데 기여했다. 그의 슛이 아르헨티나 골키퍼에게 막혔지만 그것을 살바토레 스킬라치가 받아먹은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결국 졌고 월드컵을 3위로 마감했다.

비알리는 UEFA 유로 1992에서도 차출되어 이탈리아의 공격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헝가리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고 뒤이어 키프로스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해 2:0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불행히도 소련에게 밀려 유로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비알리는 1992년 12월 알제리와의 A매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그는 더 뛸 수 있었지만 당시 이탈리아 감독이었던 아리고 사키가 그를 싫어하여 더 이상 차출하기를 기피했다는 루머가 돌았다. 아무튼 비알리는 대표팀에서 59경기에 출장하여 16골을 기록했다.

4. 플레이 스타일

8-90년대 이탈리아 최고의 공격수 중 한명이었으며, 슈팅부터 플레이메이킹, 제공능력 및 현란한 드리블 및 탄탄한 신체능력까지 뭐하나 부족한게 없는 멀티툴 축구선수로 유명했다. 로베르토 바조, 로베르토 만치니, 파올로 디 카니오등 수많은 전설들과 함께 세리에에서 많은 우승컵을 들고 로만 아브라모비치 시대 이전 첼시의 전설들 중 하나로 기억되는 등 클럽 커리어도 화려하다. 2000년대 이후 최고의 무결점, 멀티툴 공격수는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AC밀란 시절의 안드리 셰브첸코로 꼽히지만, 그 이전 시대를 주름잡던 원조 '육각형 공격수'는 비알리였다.

공격수로서 비알리의 최대 장점은 바로 못하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축구선수들은 특출난 장점 또는 선호하는 플레이 형식이 정해져 있는 반면, 비알리는 어느 위치에 가서 어떠한 플레이를 시켜도 1인분 이상을 족히 해내는 특출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포지션인 스트라이커 뿐만 아니라 윙어, 2선 공격수 등 공격진영 어디에서나 제 몫을 해냈다.구체적으로 공격수로서 비알리의 첫번째 능력은 바로 득점능력이었다.박스 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받아먹는, 뤼트 판 니스텔로이같은 포처형 공격수의 장점도 충분히 탑재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타입의 공격수와는 다르게 양발에서 뿜어져나오는 대포알 같은 슈팅능력과 헤딩 정확성까지 갖고있어 박스 안과 밖에서 모두 득점할 수 있었다.

비알리의 또다른 장점은 훌륭한 찬스메이킹 능력이었다. 천부적인 전술 이해 능력, 압박 정도는 쉽게 벗겨갈 수 있는 드리블 스킬과 어지간한 중앙 미드필더에 버금가는 훌륭한 시야 덕분에 볼 배급 및 플레이메이킹에도 일가견이 있어, 공격형 미드필더나 심지어 중앙 플레이메이커까지 담당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흔치않은 인재였겠지만, 비알리 스스로가 투쟁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가지기도 했으며 활동량, 빠른 속력과 탄탄한 몸싸움, 발리슛과 바이시클킥까지 두루 섭렵한 민첩한 신체능력 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전방 압박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선수이기까지 했다. 추가적으로 리더십과 강인한 멘탈, 훌륭한 카리스마까지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선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 리그였던 세리에 A에서도 이름을 날렸고, 마르첼로 리피 같은 레전드 감독들도 입에 침이 마르게 비알리에 대해 칭찬했다.

종합하자면 천재적인 운동신경과 득점력을 겸비한 공격수라는 점에서는 뒷세대의 안드리 셰브첸코,이탈리아 출신 공격형 미드필더다운 넓은 시야와 공격 전 진영에서의 활동능력은 프란체스코 토티의 장점들을 합쳐놓은, 당대 세리에 A에서도 혁신적인 선수였지만 오늘날 현대축구에서도 무리없이 통했을 선수였다.

5. 지도자 경력

5.1. 첼시 FC

파일:external/www.premierleague.com/gianluca-vialli-lsh.jpg

비알리는 1998년 루드 굴리트의 경질 이후 33세의 나이로 선수 겸 감독으로서 첼시에 부임했다. 그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이탈리아 출신 감독이었다. 그는 첫 시즌에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리그 컵 우승도 이끌었다. 그 다음 시즌엔 유로피언 슈퍼컵에서 레알을 1:0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리그에서도 순항한 끝에 1위 맨유와 4점차인 3위를 기록했다. 이 3위는 첼시 구단 역사상 1970년 이래 가장 높은 순위였다. 비알리는 1998-99 시즌 마지막 경기인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출장했는데, 이것이 그의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는 첼시에서 83경기에 출전하여 40골을 기록했다.

1999-00 시즌, 첼시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했다. 첼시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매우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들은 1,2차 조별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고 8강에 진출하여 바르셀로나와의 1차전 홈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캄푸 누에서의 2차전 원정 경기에선 연장전 끝에 5:1로 패하긴 했지만, 챔피언스리그를 처음으로 경험한 것 치곤 매우 훌륭한 활약이었다. 하지만 리그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고 5위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도 FA컵 결승전에서는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우승을 차지해 무관은 면할 수 있었다.

2000-01 시즌, 첼시는 커뮤니티 실드에서 지난 시즌 우승 팀인 맨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비알리는 3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5개의 트로피를 획득하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 그런데 불과 리그 5경기를 치른 직후, 그는 돌연 경질되고 말았다. 비록 5경기에서 1승만 거두어 10위에 그치긴 했지만 그가 그동안 첼시에서 거둔 업적을 생각하면 좀더 기다려줄 만 했지만, 보드진은 그를 경질하기로 결정했다.

그 까닭은 비알리와 선수들간의 불화에 있었다. 비알리는 선수들의 사생활에 일일이 간섭했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훈련에 집중하는 것보다 나이트에 가서 노는 것을 선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선수들도 자신들이 먀냥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답게 몸관리를 하고 경기에서도 최선을 다하는데도 마치 교감 선생님 마냥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그를 싫어했다. 결국 그는 대부분의 선수들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팀을 떠나고 만 것이다.

5.2. 왓포드 FC

파일:external/i.telegraph.co.uk/Gianluca_Vialli_1294057c.jpg

비알리는 첼시에서 경질된 뒤 2001-02 시즌에 왓포드에서 전임 감독인 그레이엄 테일러가 경질되자 부임되었다. 그는 왓포드에서 많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코치 스탭들도 대거 교체했다. 그러나 왓포드는 불과 14위에 그치고 말았고 비알리는 단 한 시즌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왓포드는 그에게 잔여 계약기간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길 거부했고 비알리는 왓포드를 고소하여 수년 간 법정 싸움을 치러야 했다.

6. 은퇴 이후의 삶

2006년, 비알리는 "이탈리아인의 직업 : 두 개의 위대한 축구 문화의 심장으로의 여행"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축구의 차이점을 다뤘고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에서 선수로 활동했을 때의 이야기를 덤덤한 어조로 서술했다. 그는 이 책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암과 루게릭병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재단에 기부했다.

왓포드에서 경질된 뒤, 그는 스카이 이탈리아 방송국의 축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2007년, 그는 QPR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루머에 휩싸였지만 그는 이를 부인했다. 유로 2012가 열리던 시기, 그는 BBC의 페널로서 각 경기들을 분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도 방송계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췌장암을 투병 중이였지만 2020년 4월 13일쯤 완치한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0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단장으로 부임하였고, 삼프도리아 시절 환상의 듀오였던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과 다시 한솥밥을 먹게됐다. 2021년 아주리 군단의 유로 2020 우승에 기여하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주 지위를 박탈당하자 각 재벌들이 첼시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의 부동산 재벌인 닉 캔디(Nick Candy)가 인수를 위해 출범된 '블루 풋볼 컨소시움'[4] 자문 담당으로 발탁되었다.

7. 사망

2023년 1월 6일, 췌장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5] 향년 58세. #
파일:IMG_Gianluca Vialli.jpg

첼시 공식 SNS는 모두 검은 첼시 엠블럼을 프로필 사진으로 쓰며 추모를 표했다. 또한 수많은 축구 클럽들이 경기 전에 그의 사망을 추모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존 테리 또한 스탬포드 브릿지에 방문해 그를 추모했다. #

8. 기록

8.1. 선수

8.1.1. 대회 기록

8.1.2. 개인 수상

8.2. 감독

8.2.1. 대회 기록

8.3.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5등급: 1991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3등급: 2021


[1] 1998년~1999년까지 선수 겸 감독 [2] 이후 첼시는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을 인수하고 막강한 오일머니와 함께 세계적인 클럽으로 거듭나게 된다. [3] 이 후 별장으로 사용하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4] 여기에 대한민국의 하나금융그룹과 영국 런던을 거점으로 두고 있는 C&P 스포츠 그룹이 지분을 투자했다. [5] 2020년경 완치된 것으로 알려졌던 췌장암이 2021년에 재발해 투병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