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자르반 3세는 자신의 대관식이 끝난 직후, 데마시아 백성들 앞에서 연설했다. 자랑스러운 데마시아 왕국은 여전히 수많은 외부의 적들과 맞서고 있었지만, 귀족 가문 간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심지어 몇몇 가문은 새 국왕의 눈에 들고자 사설 군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자르반 3세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혼인을 통해 귀족들 간의 반목을 해소하려고 했고, 레이디 캐서린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예전부터 레이디 캐서린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궁정에서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를 향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결혼식이 있던 날, 위대한 도시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축하연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해가 바뀔 무렵, 국왕 부부는 첫아들을 가졌다는 임신 소식을 발표했다. 왕자가 탄생했지만,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캐서린이 분만 중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왕가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는 왕위를 계승할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과 아들을 얻은 기쁨을 동시에 겪은 자르반 3세는 다른 왕비를 들이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왕자가 자신의 꿈을 이어받아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르반 4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항상 경비병과 시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자르반 국왕은 왕자에게 최상의 교육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관용의 덕목, 국왕의 신성한 의무와 그 무게, 백성들에게 봉사하는 영광스러운 삶에 관해 일찌감치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왕가의 집사 신 짜오로부터 발로란의 역사와 정치를 배웠다. 머나먼 아이오니아 출신의 충직한 수호자 신 짜오는 왕자에게 무술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도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사 훈련을 받던 자르반 4세는 가렌을 만났다. 크라운가드 가문 출신의 혈기왕성한 청년 가렌은 왕자와 비슷한 또래였고, 두 사람은 금세 단짝이 되었다. 자르반 4세는 가렌의 투지와 용기를 높이 샀고, 왕자의 천부적인 전술적 재능은 가렌을 매료시켰다. 자르반 4세가 성인이 되자 국왕 자르반 3세는 왕자를 명예 장군으로 임명했다. 자르반 4세는 왕위 후계자였기 때문에 전투에 나서지 않아도 됐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서라도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아르젠트 산맥 너머의 국경 지대는 오래전부터 녹서스 제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약탈을 일삼는 외부 세력과 부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 때문에 사실상 무법 지대나 다름없었다. 자르반 4세는 이 국경 지대에서 평화를 이루겠다고 맹세했다. 오래전 남부에서 발생한 두 국가의 충돌에서 자르반 4세의 증조부는 비열한 녹서스군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제 그 원수를 갚을 시간이었다. 자르반 4세가 이끄는 데마시아군은 승승장구했지만, 외딴 마을에서 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고뇌에 빠져들었다. 애도의 성문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자르반 4세는 부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녹서스 영토까지 공격을 이어갔다. 결국 무리한 공격을 감행한 자르반 4세의 부대는 트레베일에 당도하기도 전에 녹서스 부대에 포위되어 패배하고 말았다. 자르반 4세와 소수의 생존자들은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적군의 추격을 피해 수일간 도망쳤지만,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자르반 4세는 결국 쓰러져 있는 나무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정신을 잃어가던 와중에도 가족들과 왕국, 부하들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자르반 4세는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다. 그곳에서 쉬바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보랏빛 피부의 괴이한 모습을 한 쉬바나는 자르반 4세를 데마시아 왕국의 렌월성으로 대피시켰다. 자르반 4세는 몸을 추스르면서 쉬바나가 외모와는 다르게 따뜻하고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렌월성 수비대 사령관 역시 처음에는 쉬바나의 기이한 외형에 기겁했지만, 왕자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왕가 수호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쉬바나 역시 누군가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그것은 바로 원소의 힘을 다루는 거대한 용, 이바였다. 성벽을 지키던 보초들이 지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낸 이바를 발견했을 때, 자르반 4세는 이바를 처치해 쉬바나에게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하프 드래곤의 모습을 한 쉬바나가 이바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동안, 자르반 4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병상에서 일어나 수비대를 집결시켰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했다. 창을 손에 쥔 자르반 4세는 기필코 이바의 머리와 함께 위대한 도시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이바는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자르반 4세는 겁에 질린 초소의 병사들을 다독였고, 다친 병사들에게 치료사를 보냈다. 결국 이바는 쉬바나의 손에 쓰러졌지만,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르반 4세의 통솔력 덕분이었다. 자르반 4세는 데마시아인들의 진정한 힘을 보았다. 비록 서로가 달랐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가득했지만, 이들은 하나가 되어 조국을 지켰다. 그는 쉬바나가 원한다면 자신의 친위대에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자르반 4세는 이바의 머리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궁궐로 돌아갔다. 쉬바나 역시 그와 함께였다. 국왕은 왕자의 무사 귀환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귀족들은 괴물이 왕자의 곁에 머무르도록 한 것도 모자라 왕자의 친위대로 삼은 국왕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귀족들의 우려를 뒤로한 채, 자르반 4세는 다시 군대로 복귀해 국경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불굴의 선봉대 검대장이 된 친구 가렌과 쉬바나, 그리고 국경 수비병들을 훈련하는 렌월성의 숙련병들이 있는 한 데마시아에 그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왕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왕국은 변하고 있었다. 귀족 가문의 지지를 얻은 마력척결단이 마력을 지닌 국민들을 데마시아 전역에서 체포했다. 백성들의 두려움은 곧 분노로 변했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위대한 도시를 공격한 마법사들이 자르반 3세를 시해했을 때, 자르반 4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마법사들을 향한 자르반 4세의 정치적 입장은 확고해졌지만, 자신에게 왕국을 통치할 자격이 있는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자는 가렌의 고모이자 대원수인 티아나 크라운가드를 비롯한 여러 유력 귀족 가문의 자문을 구하고, 앞으로 그들의 지혜와 경험을 경청하기로 맹세했다. 이제 자르반 4세는 데마시아의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자신의 양심과 왕국을 향한 충성을 철저히 시험해야 할 것이다. |
2. 상아, 흑단, 벽옥
미사 장군은 지도 위의 상아 원뿔을 옆으로 밀었다. 자르반은 단순하지만 세밀하게 조각된 새하얀 원뿔을 주시했다. 머리나 얼굴, 그 무엇도 연상되지 않을 자연스럽고 간단한 둥근 모양이었다. 수백 명의 데마시아 병사를 나타내는 조각이었지만 거기에서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지금 기사들을 남쪽으로 이끌면, 아르고스가 이븐무어에 도착하기 전에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이벨 장군이 말했다. 그녀는 드물게 여인의 몸으로 장군이 된 실력자로, 위엄 어린 눈빛과 당당한 풍채를 자랑했다. “아르고스는 무리를 이룰 때 가장 난폭합니다,” 미사 장군이 천막 안을 돌아다니며 말했다. “정면돌파는 위험합니다. 놈들은 압도적인 머릿수를 내세워 진격합니다. 아르고스의 무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면 우리가 여왕까지 가기도 전에 모조리 학살당할 겁니다.” 자르반은 천막의 끝으로 걸어가 가림막을 들어 올리며 협곡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경치는 한없이 아름다웠다. 아침의 빛무리가 신록에 어린 이슬과 부딪혀 반짝였고, 멀리 보이는 이븐무어 마을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는 무리가 몰려오며 일으키는 불길한 회색 먼지가 보였다. 아르고스의 몸집은 하마 정도의 크기로, 그렇게 거대한 생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르고스가 집단을 이루면 여왕의 의지에 지배당해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한 개체와 싸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무리를 이룬 포악한 아르고스는 상대하기 훨씬 까다롭다. 그리고 이번 무리는 자르반이 태어나서 본 무리 중 가장 컸다. 미사가 눈썹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당장 오늘 저녁 무렵에 도착할 기세군요” “그것보다 빠를 겁니다.” 이벨이 말했다. “이븐무어를 뒤덮어버리기까지 아마 한 시간, 운이 좋으면 두 시간 정도일 겁니다.” 자르반은 다시 지도를 바라봤다. 아르고스를 나타내는 10개의 흑단 원뿔이 이븐무어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채, 하나뿐인 데마시아 부대의 하얀 원뿔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단 무리의 심장부에 위치한 여왕은 조금 더 작은 붉은색 벽옥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여왕에게 접근하려면 돌격대는 수백 마리의 아르고스를 뚫고 싸워야 해.” 자르반이 붉은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획은 있나?” 미사가 걸음을 멈췄다. “주군께서 기뻐하실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저희는 후퇴할 수 있습니다. 이븐무어를 포기하고 다음 날 무리를 뚫고 여왕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력을 보충해서 돌아오는 겁니다.” “이븐무어를 아르고스에게 넘기겠단 말입니까?” 이벨이 물었다. “그건 그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몇 시간 내로 짓밟혀버릴 겁니다.” 자르반은 흑단과 상아를 지긋이 바라봤다. 마음의 눈으로 보자 둘은 하나가 되었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여왕을 나타내는 붉은 돌 뿐이었다. 이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가 보이십니까” “절박한 계획이 있다." 자르반이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건 이 방법뿐인 것 같군. 우리는 최정예 병력을 이끌고 이븐무어 내에 매복한다. 소수니까 우리 공격을 눈치채지 못할 테지. 그다음, 여왕이 사거리 내로 들어오면 빠르고 강력하게 공격한다. 그녀가 죽으면, 무리의 결속력이 무너질 거야” “아르고스의 중심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주군?” 미사가 말했다. “그것 또한 사형선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븐무어가 공격에서 살아남을 기회이기도 하죠.” 이벨이 말했다. “위험이 없는 계획은 없다,” 자르반이 말했다. "자원하는 자들만 이끌고 가겠다. 그리고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까지는 공격을 개시하지 않겠다. 우리는 소용돌이의 눈이 다가올 때까지 시간을 벌고, 가장 중심에서부터 공격한다. 여왕이 죽으면, 길을 뚫고 나오기 훨씬 수월할 거다.” 이벨은 지도 위의 마을로 하나의 상아 원뿔을 밀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흑단 조각들을 앞으로 밀어 이븐무어를 완전히 덮었다. 벽옥 여왕은 중심에 섰다. 손가락을 튕겨 그녀는 붉은 돌을 넘어뜨렸다. 그다음, 그녀는 두 개의 흰색 원뿔을 더 밀어 전투에 참전시켰다. “이게 우리의 계획이다,” 자르반이 말했다. “이벨과 미사, 너희들은 남은 병사들과 함께 두 번째 공격을 이끌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미사가 말했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이벨이 물었다. “어디 계실 겁니까?” “여왕을 잡겠다." 자르반이 결의에 찬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
3. 여파
해당 문서 참조 바람.4. 깨지기 쉬운 유산
처음으로 바렛 부벨르를 만난 날에 나는 젊고 두려움을 몰랐으며, 의심의 그림자를 전부 몰아내는 일종의 정의로 마음이 불타올랐다.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듣고 용기의 전당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고작 2주 전에 왕위에 오른 어린 국왕 자르반 3세의 왕좌 옆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젊은 두 사람은 잠시 흥미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당시의 내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난 그런 아름다움을 잠재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어린 왕에겐 불만이 가득한 귀족 가문을 상대하는 것이 지루하고 지치는 일처럼 보였다. 왕은 바렛이 자신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바렛의 몸은 왕을 향하고 있었기에 나는 바렛의 왼쪽 모습만 겨우 볼 수가 있었다. 그는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왕이 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강하고 선명했으며 페트리사이트와 대리석으로 만든 전당에 울려 퍼졌다. "레스타라 데모이시어, 무엇이 너를 여기에 부른 거지?" "폐하의 실패입니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 말이 두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왕은 왕관 밑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썹을 치켜들었다. 바렛은 눈을 크게 뜨고 주군의 어깨에 올린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나의 실패?" 왕은 혼란과 즐거움이 섞인 채로 물어보았다. "무엇에 대한 나의 실패지? 내 대관식은 고작 2주 전이었는데 대체 그 이후로 내가 무엇을 실패할 수 있었다는 건가?" "그 2주 동안 폐하는 밑에 있는 사람들의 고충을 헤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마치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분명 당시에는 자신과 가문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왕에게 청원하는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며 왕은 그에 지쳤을 것이다. "내가 수도 없이 많은 청원자들에게 말했듯 이유도 없이 데모이시어에게 작위를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나라를 위해 전투에서 싸운다면..." "저는 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바렛은 놀라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바렛이 입고 있던 갑옷의 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슴 중앙에 찍힌 부벨르 가문의 인장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그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왕은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내가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해야 할 말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블라우스에서 빛의 사자 수도회 상징으로 빛나는 목걸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폐하의 백성입니다." 나는 신랄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반목하는 귀족들을 중재하느라 데마시아의 집도 생계도 없는 이들을 외면하며 저버리셨습니다. 착하고 정직한 이들이 거리에서 살아가거나 밤에 비를 피하기 위해 헛간에 숨어들거나 긁어모은 음식을 아이들에게 먹이기 위해 며칠을 굶고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왕국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아신다면 그들을 우선시하십시오... 이미 충분히 가진 이들이 아니라 말입니다." 두 사람의 어색한 침묵 후에 바렛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알현실을 지나 전당의 벽에 메아리치고 마침내 붉게 달아오른 내 귀까지 닿았다. 부끄러움이 마치 돌덩이처럼 내 뱃속에 자리 잡았다. 그는 내게 다가왔다. 나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발걸음은 빨랐다. 나의 손을 잡고 그가 말하길... 흠. 아쉽게도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기억이란 인생의 특별한 순간에는 명확하지만, 다른 이들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 때문이다. 요점은 그가 데마시아의 모든 약자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한 계획을 개인적으로 감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말했다는 것이다. 자르반 3세는 허락하지도 않은 일을 약속하는 자신의 친구를 놀라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렛은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겠다 결심하기 전에는 무언가 하겠다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 동의할 때까지 그저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진작에 그런 이들을 지원했어야 했지." 왕은 존경심을 가지고 나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이런 간극을 내게 알려주어 고맙군. 부벨르 경과 내가 서둘러 이 계획을 실행할 것이다." 상기된 나는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는 바렛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그때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어린 왕의 오른팔. 누구보다 왕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왕은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이고 기꺼이 죽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걸렸다는 사실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바렛 부벨르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겐 이렇게 명확했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말입니다, 레스타라 데모이시어." 그가 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6주 전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과부가 된 지 3주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병사들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바렛의 부재는 언제나 길었다. 보통은 3개월이었다. 카히나와 나는 가끔 전방에 있는 그를 방문하여 우리를 대신해 목숨을 걸고 있는 데마시아인들에게 식량과 보급품을 나눠주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자주는 아니었다. 이번에도 여전히 그가 언제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어린 병사들이 앞으로 겪어야 일과 병사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비탄에 잠길 가족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얼굴을 찡그릴 것만 같다. 그는 사제였다. 전투에서 죽어서는 안 되었다. 물론 바렛만이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다. 나는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굴의 선봉대조차 데마시아의 적들 앞에서 쓰러졌다.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남편과 다른 많은 이들이 죽은 곳은 애도의 성문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왕은 바렛의 시신이 우리에게 돌아오자마자 장례를 치르길 원했다. 나는 왕에게 대원수를 먼저 기려야 한다고 말했고 내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칼과 영혼으로 당신을 섬긴 이들에 대한 의무를 흐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끔찍한 진실을 내가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례식을 영원히 미룰 수는 없는 법이다.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할 힘을 찾아야 한다. 바렛이 내게 청혼해 왔을 때 네 번은 거절했었다. 나는 고통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내 답은 변하지 않는데 계속 청혼하는 거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대답이 똑같기 때문에 계속 물어봐야 하는 겁니다." 바렛은 참을성 있는 미소로 답했다. 바렛을 처음 만난 후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미소였다. 그는 나를 궁전 옆에 있는 정원으로 이끌었다. 하늘을 맑았고 백합은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처음 세 번의 청혼보다는 더 낭만적인 준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 알고 있잖아요." 나는 어린 시절 빛의 사자 수도회에 들어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고, 그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음식과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픈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치료법을 배우기로 다짐했다. 빛의 사자 수도회는 내가 데마시아인으로서 배운 가치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 같았고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내가 평생 봉사할 수 있도록 나의 눈과 마음을 열어 주었다. 선행과 가족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평신도도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수도회에 헌신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나도 그럴 셈이었다. "압니다." 바렛은 불평등에 대해, 이를 바로잡기 위한 방법에 대해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이런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사랑이 모든 것을, 심지어 선을 행하려는 고집스러운 여인의 바람까지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끈기 있게 청혼했을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것을 꾸준히 보여주었고 이는 나의 결심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작은 노력이 아니었겠지만, 나도 결국엔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거절할 때마다 나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청혼을 허락한다면 이 남자와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게 눈에 훤했다. 그에게서 몸을 돌리는 나의 손은 떨렸고 눈은 화끈거렸다. "다른 곳에서 아내를 찾아야 할 거예요, 바렛. 아니면 친절한 여성은 전부 결혼해버리고 말 테니까요." "당신이 아니라면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가문이 그렇게 두진 않을 거예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벨르 가문이 후계자를 위해서 바렛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날 사랑하나요?" "물론이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나요?" "네. 그건 확실히 보여주셨죠." "그렇다면 하나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우리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괜찮다면 말이죠." 나는 바렛을 바라본다면 눈물이 터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그가 심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어깨를 돌리며 긴장을 풀려고 했을 것이다. "나의 가문은 수 세기에 걸쳐 부와 영향력을 축적해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게 부탁한다면...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당신이 원하는 선행에 바칠 것입니다. 데마시아의 사람들을 지원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을 말이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부벨르 가문의 모든 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바친다고? 내가 빛의 사자 수도회와 함께 이룰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능가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나는 바렛이 내가 청혼을 받아들이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란 생각에 갑자기 화가 나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당신과의 결혼을 거절한다면, 그럴 일은 없겠죠? 그건 당신을 명예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없어요, 바렛. 당신을 방조자로 만들 뿐이죠." 바렛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깜빡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와 결혼해야 한다고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내가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신의 부탁뿐입니다. 가장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손을 이끌어 주는 일 말입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모든 분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바렛은 내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나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인 것이다. 대체 어떤 남자가 이럴 수 있을까? 그는 눈에 사랑을 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당신이 내 인생에 있다면 더 즐거울 거라는 사실은 인정해야겠군요." 바렛은 다섯 번째 청혼을 했다. 그리고 나는 청혼을 받아들였다. 내 요청에 따라 자르반 3세는 대원수의 장례식을 먼저 치렀다. 데마시아 전역에서 모인 시민들과 병사들은 용기의 전당에 있는 다른 영웅들과 함께 안치되는 퍼시벨 브론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애도하는 이들로 가득했고 브론즈는 그가 섬긴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받으며 떠나갔다. 도시는 나의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인파로 북적였다. 여관은 가득 찼다. 성벽 밖에는 수천 개의 텐트가 세워졌고 남편의 선행으로 인해 인생이 어떻게든 변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장례식 행진은 경로를 두 번이나 바꿔 거리와 성벽 주변을 돌았다. 모두가 남편의 관을 만지고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나의 양손을 꼭 붙잡고 있는 내 딸들의 손이었다. 나는 딸들의 손바닥을 통해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고 아이들이 여기에 살아있으며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 있었다. 보통 알현실은 망자에 대한 경의를 지키기 위한 조문객으로 가득했겠지만, 왕은 오늘 선택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다음 주에 대중에게 용기의 전당을 공개하겠다고 너그럽게 제안했지만, 오늘은 많은 이들이 있지는 않았다. 나는 거의 모든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을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을 이들이었다. 귀족. 상류 가문. 중요한 정계 요인. 왕은 내 요청에 따라 수도회가 식을 진행하게 했다. 저명한 치료사이자 내 딸 카히나의 스승인 마틸레는 익숙한 시를 낭송했다. 한때 밝게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우리에게 주던 그 빛과 온기를 애도하리라. 우리가 보는 것은 연기뿐이지만, 어떤 빛도 진정으로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리라. 다른 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밝게 열정으로 타오르는 것이라. 우리가 서로가 품은 불씨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들의 온기는 타인에 머물고 그들의 빛은 여전히 타오르리라. 이런 말로 위안이 되지는 않지만, 수십 년을 반복한다면 쉽게 말할 수 있겠지. 내가 장례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대신에 나의 시선은 계속해서 유골함에 머물었다. 바렛의 갑옷은 전투에서 죽은 자들의 관습대로 개조되어 그의 유골을 담게 되었다. 빛나는 견갑을 입은 그의 모습을 그릴 수는 있었지만, 갑옷 안에 있는 그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알던 사람을 담아두기에는 너무 작아 보였다. 아마도 그 안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 추도 연설을 할 시간이다. "부벨르 경은 훌륭한 데마시아인이었습니다." "뛰어난 전사였습니다." "폐하의 겸손한 종복이었습니다." "전통의 수호자였습니다." 내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바렛은 거의 30년 동안 전투에서 싸우지 않았고 귀족 가문의 전통을 '수호'하는 것보다는 데마시아 사람들을 돕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바렛을 봤으면서도 마치 멀리서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바렛에 대해 그렇게 모를 수가 있지? 하지만 어떤 추도 연설도 마력척결관 엘드레드의 것보다는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부벨르 경은 본질적으로 데마시아 최악의 질병을 없애기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엘드레드는 남편이 살아있을 적의 친구도 아니었지만, 그는 마치 바렛을 아주 잘 이해하는 것처럼 말했다. 바렛은 데마시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엘드레드가 의미한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남편은 마법사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법사 하나를 우리의 집에, 우리의 가문에 받아들였다. 누구도 그 아이를 빼앗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입양한 딸 소나는 오늘 내 옆에 앉아 마력척결관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엘드레드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내부에서 데마시아를 집어삼키겠다고 위협하는 공포를 보았고 그런 악을 처단하기 위한 조직을 지원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원은 데마시아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거짓된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왕은 가족 앞에서 마지막 순서로 나섰다. 연단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너덜너덜한 바렛의 푸른 옷자락을 움켜쥔 채로 나에게 직접 말했다. "바렛 부벨르는 나의 형제였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지도자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이 부족하고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을 말과 행동에 담기 위해 노력했던 남자. 하지만 그의 우정은 나를 바꾸었고 내가 오늘날의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왕이 될 수 있게 했다. 바렛은 만나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졌고 그들을 더욱 나은 존재로 만들었다." 소나가 내게 손짓했다. "드디어 진짜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나왔어요." 사실이었다. 누구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자르반이라고 생각했다. "바렛이 이 세상에 더욱 많은 것을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빼았겼고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전장에서 싸우던 자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우는 데마시아인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사랑을 주던 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랑을, 우리의 조국을, 동포를 위하던 이를 빼앗겼다. "날개 수호자의 검에 대고 맹세하건대 내게서, 우리에게서 바렛을 앗아 간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평생이 걸려도 좋다. 바렛에 대한 나의 애정은 바렛과 함께 죽지 않았다. 그 애정은 나와 함께 죽을 것이다." 내 심장을 얼음물에 던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왕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바렛이 약속할 때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왕은 내가 그것을 원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박수 소리가 방을 울리고 또 울리며 더욱 커져 갔다. 전당 전체가 더 많은 데마시아인들을 죽음으로 보내고자 하는 피에 굶주린 이들로 가득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복수를 위해? 거짓된 정의를 위해? 이것은 바렛이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카히나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연단을 가리켰다. 카히나는 아버지와 똑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어요, 어머니." 카히나가 내게 손짓했다. "제가 여기 있잖아요." "우리 둘 다 있어요." 소나가 손짓했다. 내 사랑스러운 딸들. 나와 내 남편이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줄 수 있었던 두 개의 선물들. 내 목은 거칠었다. 목소리를 내자 거슬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기침을 했지만 잠긴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의 소음은 이미 조용해진 상태였다.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노력하며 말했다. "남편이 데마시아의 사람들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여러분들께 말해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저는 대신 남편이 했을 일들을 실행할 것입니다." 나는 주변에 있는 상류층을 바라보며 처음 이 방에 섰을 때와 동일한 불꽃을 담아 말했다. "저는 남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위대한 도시의 부벨르 저택을 데마시아의 사람들에게 기부할 것입니다. 이는 모든 데마시아 사람들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가문이 수집한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될 것입니다." 중얼거리는 충격의 물결이 방을 휩쓸었다. 다른 귀족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자신의 도서 수집품을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누구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렛과 나는 몇 년 전부터 도서관에 대해 논의해 왔다. 바렛은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지식 그 이상을 데마시아의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다른 이들이 남편을 이렇게 형편없이 추모하는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다. "제 딸 소나가 아버지를 추억하며 연주할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소나?" 소나는 등에 에트왈을 맨 채로 일어나 나와 자리를 바꾸며 에트왈의 나무 받침대가 준비되어 있는 연단에 올랐다. 남편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다시 카히나의 옆에 앉자 카히나는 내게 속삭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예요. 이게 올바른 일이니까요." "나도 알고 있단다." 소나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히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소나의 노래에 용기의 전당에 있는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기까지는 고작 여섯 마디만 필요했을 뿐이다. "몇 개월이면 됩니다." 수도사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우리가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아이들이 잘 지내도록 후원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바렛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오래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바렛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쟁고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홉 명을 돌보고 있는데, 그중에 두 명은 아파서 일주일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하나는 말을 못 하는데 치료가 가능한지도 모르겠군요." "아이들이 다시 회복될 때까지 치료사 중 한 명을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흠... 네, 그건 가능합니다." 바렛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오세요. 우리에겐 아이들을 보살필 방과 자원이 있으니 당신은 아이들이 장기적으로 머물 만한 가정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수도사는 우리가 집을 개방한 것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우리는 데마시아 밖에서 온 아이들을 이렇게 많이 집에 들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데마시아인만 유일한 사람은 아니며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도와야 할 것이다. 나는 카히나 굉장히 흥분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카히나는 아이들을 더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교사들과 함께 아이오니아에 대한 것들을 조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함께 기념할 수 있는 휴일 같은 것들 말이다. 바렛과 나는 방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했고 모두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첫 번째 식사를 준비했다. 아이들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누구도 데마시아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바렛과 카히나는 손짓과 표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날 저녁 집에서는 많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던 중 나는 음악 소리에 이끌렸다. 어디서 음악 소리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방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소나를 보았다. 소나는 진지한 얼굴로 음악에 맞춰 흔들리는 제 몸의 세 배나 되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오자 몸을 흠칫하며 놀랐지만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바렛은 늦은 저녁 문가에 기대어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레스타라? 거기서 뭐..." 바렛은 음악을 듣자마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갑자기 어린 소녀는 연주를 멈추고 커다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바렛과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바렛은 소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이라는 의미의 작은 손짓이었다. 소나는 달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부끄럽게 손인사를 하더니 앞으로 걸어와 우리 앞에 앉았다. "내 생각엔 이 아이가 말하지 못한다는 아이 같아." 바렛이 부드럽게 말했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나는 소나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나의 전부를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보다 더 깊은 대화를 나눈 것처럼 느껴졌다. 바렛은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바렛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석 달 동안 아홉 명의 아이들을 돌보았다. 여덟 명의 아이들은 집을 떠나게 되었다. 소나는 우리와 남았다. 장례식 연회는 내가 바렛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다시 남편과 아내가 되어 서로에게 맹세했던 여명의 성채 옆 정원의 백합 속에서 진행되었다. 너무 오래전인 것만 같았고 마치 어제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딸들은 내 옆에 앉아 수도 없이 많은 귀족 조문객을 맞이했다. 현실에 머무르는 것은 힘들었지만, 나의 딸들은 내가 추억에 빠져 너무 멀리 흘러가지 않게 나를 지켜주었다. 훈련된 푸른날개수리를 어깨에 올린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몇 년 전 전투에서 바렛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남동생을 잃은 여성이었다. 나는 일어나 그녀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 속삭였다. "퀸, 남편과 2년을 더 함께 있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퀸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스러운 듯 말했다. "벼...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별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었죠. 부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해요." 나는 퀸이 내게 말해야 할지, 지금이 적절한 순간이지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괜찮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고 싶어요." 계속해서 설득하자 마침내 퀸은 입을 열었다. 퀸은 기사가 되고 싶다며 새로 임명된 대원수에게 자신의 얘기를 해 줄 수 있는지 머뭇머뭇 물었다. "물론이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퀸과 내 딸들은 모두 내가 당장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오늘을 생각하는 것 대신 해야 할 일이 생겨 상당히 기뻤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티아나 크라운가드는 아직 나와 내 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다른 가문의 귀족들에게 마력척결관을 더 늘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었다. 누구도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크라운가드의 존재 때문에 엘드레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는 듯했다. 내가 다가가자 크라운가드와 엘드레드는 내게 조의를 표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남편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나를 안아주기까지 했다. 그녀가 나를 놓아준 후에 나는 말했다. "저기에 퀸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군요." "친애하는 레스타라, 오늘만큼은 자신만 생각하고 한 번이라도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아 봐요." "저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저기 있는 젊은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예전에 바렛의 목숨을 구해준 아가씨거든요." 크라운가드의 입술이 수치심으로 꾹 다물렸다. 그녀는 3주 전에 있었던 애도의 성문 전투에서 불굴의 선봉대 검대장이었지만, 차기 대원수로 지명될 가능성이 있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의 남편을 안전하기 지키지 못하고 퍼시벨 브론즈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한 것은 바로 그녀의 선봉대였다. 어떻게 그녀가 더 높은 계급을 받을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일 이야기는 다른 날에 하도록 하죠."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 말이죠?" 그녀는 일주일 안에 전선에 복귀해야 한다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며칠 안에 찾아가도록 하죠. 차 한잔할까요?" 마침 그녀의 수하가 절도 있게 다가와 전략인지 다른 문제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불러내자 그녀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엘드레드가 내게 다가왔다. "위대한 도시에 도서관을 개방하겠다니 아주 너그러우시군요."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남편은 너그러운 사람이었죠." "소장 도서 목록에 관심이 생기네요." 나는 눈을 굴렸다. "마력척결단은 제 영지에서 마법과 관련된 그 어떤 책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장담하죠." "아, 하지만 마법에 대한 서술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레이디 레스타라." 어느새 미소를 지운 그는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광기 어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어떤 책들은 마법을... 위험한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악한 것이 아니라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 책 때문에 데마시아의 사람들이 마법을... 중립적인 힘이라 믿게 둘 수는 없습니다." "마력척결단이 도서관을 개방하기 전에 소장 도서를 조사하겠다는 의미인가요?" 이 남자의 뻔뻔스러움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력척결단은 그런 요청을 할 권리가 없었다. 하물며 귀족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됐다. "제 딸이 작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부벨르 가문의 수장은 저입니다. 그 이름 뒤에 있는 모든 역사를 고려하면, 폐하께서 그런 행동을..." "용납하시지 않을 거라고요? 아,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그 얼굴에 따귀를 날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애도의 성문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녹서스의 마법사였습니다. 폐하께서 누구를 처벌하길 원하시겠습니까?" "녹서스인들이겠죠." 나는 단호히 말했지만,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엘드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바로 마법사입니다." 나는 소나의 악기에 대해 한동안 의문을 가졌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아름다운 음악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바렛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 무엇도 숨긴 적이 없었다. 나는 바렛이 다른 귀족들처럼 마법사를 두려워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딸이 마법을 사용한 것 같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서야 말할 결심이 섰다. 여름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였다. 모란 향이 나는 따뜻한 밤,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바렛." "음?" 그는 곧 전선에서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빛의 사자 수도회의 시집을 넘기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만약 당신이 우리 딸들을 해치는 일이 생긴다면 내가 떠날 거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 바렛은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뭐라고?" 바렛은 놀라서 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대체 그런 생각을..." "그냥 확실히 하고 싶었어. 나와 우리 딸들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바렛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몸을 기울여 바닥에 떨어진 바렛의 책을 줍고 접힌 페이지를 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고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바라볼 무언가가 필요했다. "소나가 마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해." "...오." 내가 바라보았을 때, 남편의 얼굴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딸의 목숨을 위험하게 한 걸까? 내가 결혼 생활을 망친 걸까? 그는 눈동자에 거친 공포를 담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남편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소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지?" 나는 그 순간보다 남편을 더 사랑했던 적이 없다. 종일 이어진 일정에 진이 빠지고 마지막 귀족 손님들이 정원에서 빠져나가자 나의 딸들은 내가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집으로 모셔다드릴까요?" 소나가 물었다. 소나는 나를 걱정하며 하루 종일 관심을 쏟았지만, 슬픔이 소나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그냥 작별 인사를 하고 싶구나. 떠나기 전에 우리 셋이서만 말이다." 내일 알현실이 대중에 공개되고 조문객 무리가 몰려들면 조용히 인사하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카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왕을 찾으러 갔다. 왕은 물론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좋다며 자신은 문밖에 있을 테니 필요할 때 언제든 부르라고 말했다. 나는 이러한 제안에 감동했다. 왕이 살면서 곁을 지켜 주겠다고 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재가 되어 버렸다. 바렛에 대한 그의 애정은 바렛의 가족에게도 이어지는 듯했다. 나는 남편의 안식처를 봉인한 조각 옆에 무릎을 꿇었다. 바깥 부분에는 그의 옆모습과 이름, 부벨르 가문의 인장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데마시아의 모두가 그를 영원히 기릴 수 있도록 공적으로 새긴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는 카히나가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이 그의 유골 앞에 놓여 있을 터였다. 그림에는 말에 탄 두 남자 옆에서 물과 새 부츠를 전달하는 바렛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린 아이의 그림이었다. 카히나는 내 옆에 무릎을 꿇고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를 어떻게 기리면 좋을지 생각해봤어요." "너는 네가 자라온 것처럼 훌륭한 여성으로 살면서 아버지를 기리면 된단다." 나는 카히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카히나는 몸을 뒤로 물리며 무릎 위에 손을 떨어뜨렸다. "저는 진지해요, 어머니."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카히나에게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히나가 말할 내용을 내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아버지의 관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카히나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야 해요." "...아버지는 사제셨죠." "그래서 저도 그렇게 되려고 해요. 어느 정도는요." "이해가 안 가는구나, 카히나." 카히나는 심호흡했고 나의 걱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카히나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빛의 사자 수도회에 기사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어요."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빛의 사자 수도회의 기사들은 필요한 순간 데마시아를 돕기 위해 전투에서 활약한다. 평화의 시기에는 왕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다. 헌신적인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지위도 갖지 않는다.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문제가 아니겠지만, 부벨르의 이름을 물려받은 카히나는... "참... 잘됐구나, 얘야. 멋진 소식이야." 나는 얼굴에 떠오른 염려를 숨기기 위해 카히나를 꼭 껴안았다. "나처럼 너의 아버지도 네가 정말 자랑스러울 거란다." 사실이었다. 바렛이라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소나는 바렛의 무덤에 있는 페트리사이트 인장을 만졌다. 소식을 듣고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카히나가 빛의 사자 수도회에 들어간다면 소나는 유일한 후계자가 된다. 데마시아 혈통이 아닌 아이오니아 출신의 입양아 소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특히 엘드레드가 기대하는 힘을 마력척결단이 얻게 된다면 말이다. 상황이 너무 위험해져서 소나가 데마시아에 머물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되지? 바렛과 나는 바렛이 아직 살아있을 적에 여러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지만, 누구도 실제로 문제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력척결단은 호의나 존경을 받는 곳이 아니었지만, 엘드레드가 티아나 크라운가드와 결혼을 한다면 머지않아 상황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두 딸의 미래를 생각하며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너무나 빠르게 떠날 준비를 끝냈다. 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있겠다며 먼저 가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작별 인사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자르반 3세가 전당에 들어왔을 때 내가 짜증이 났는지 안도를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레스타라? 아직도 여기에 있었나?" "그렇습니다." 그는 조용히 내 옆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장신이지만,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나는 왕을 보며 늙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얼굴에서 나이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바렛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소년이었지." 나는 이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언제나 바렛의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왕의 기억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졌다. "나는 마구간에서 일하는 다른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마 놀이에서 졌던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늘상 하는 것처럼 성질을 부리고 있었지. 내가 어찌나 심하게 소리를 쳤는지 얼굴이 보라색에 가까웠다고 하더군." 왕은 웃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서 즐거움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렛이 내게 다가와 대관절 무슨 이유로 불쌍한 마구간 소년이 나의 모욕을 받아야 하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 망할 미소와 함께 말이다." "그이가 폐하를 상대로 참을성을 발휘할 때 늘 짓던 그 미소였겠죠." "맞아. 그 미소는 숨이 찰 정도로 소리를 지르던 여섯 살짜리를 더 자극했지. 그래서 나는 대신 그에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어. '내가 누군지 알아?' 그리고 그는 인내심 있게 물론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이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한다고 말했지." 왕은 머리를 흔들었고 맹세하건대 그의 뺨에서 나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바렛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어. 내가 왕자라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나는 진정했고 울음을 그친 다음에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이 웃음은 기억 속의 소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진짜 미소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바렛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시 눈동자 뒤로 차오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요?" "그게 무슨—" "바렛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내가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점점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망자가 원하는 일은 아니지." 그는 슬픔과 강철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은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자르반 3세는 나의 남편처럼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무언가 하기로 마음먹은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함께 앉아있었다. 남편과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왕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나는 그와 함께 더 앉아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문으로 움직였고 다시 왕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대는 바렛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레스타라.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알아요. 남편도 늘 그렇게 말했는걸요." 갑자기 왕이 일어서더니 나를 꽉 껴안았다. 흐느낌을 억누르느라 들썩이는 왕의 몸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바렛은 떠났다. 정말로 떠난 것이다. 나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숨이 막힌 듯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몸에서 모든 숨이 쥐어짜이고 타오르는 눈물만 남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끔찍한 슬픔을 입에 담지 못한 채 서로의 품에서 울었다. 왕을 놓으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몇 초? 몇 분? 몇 시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호흡이 돌아왔고 나는 일어나 숨을 쉬며 왕도 진정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왕이 속삭였다. "바렛에 대한 것들을 기억하기가 힘들군. 내 마음은 언제나 바렛이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바렛의 웃음이나 그가 했던 중요한 말들을 정리할 이유가 없었어. 하지만 난... 내겐 바렛의 말이 필요해, 레스타라. 다시 나의 마음에 울려 퍼질 그의 목소리가. 부탁이야." 나는 잠시 생각했지만... 내가 남편에 대해 기억하는 최고의 순간은 자르반 3세와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기억은 나의 것이며, 바렛과 나 사이의 순간은 나만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편의 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3주 만에 처음으로 내게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지만,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억할 수 있다. "남편이 했던 일들과 남편으로 인해 느꼈던 감정은 기억이 나지만요. 누구나 그런 것들을 남기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여명의 성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소나는 방에서 자고 있는 카히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침대 밑의 트렁크를 꺼내고 옷장을 비우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옷이 공연할 때 입는 것들이었고 실용적인 옷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확실히 그것은 가출하는 십 대의 복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나가 집을 떠나 독립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음악과 연주 실력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떠난 지 불과 3주 만에 데마시아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소나는 왕이 녹서스인들이 아닌 자신과 같은 마법사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소나는 어머니가 왕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버지처럼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나는 떠나는 것이다. 상황이 잘못되기 전에 떠나는 것이다. 누군가 소나를 막기 전에 떠나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소나는 그렇게 희망했다. 소나는 정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소나는 에트왈에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나를 막지 못하게 할 수 있어.' 레스타라는 소나의 문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편안하게 손을 움직이며 딸에게 확고한 뜻을 전했다. "나도 너와 함께 갈 거란다." 소나는 침실로 향하는 어머니를 따라갔다. "어머니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요!" 소나는 레스타라가 자신의 손을 볼 수 있게 되자 격렬하게 수화를 했다. "상관없다. 너와 함께 갈 거다. 짐을 쌀 테니 일주일 안에 떠나자." "어머니..." 레스타라는 딸에게 슬픈 미소를 지었다. "소나. 내가 마음을 결정하고 나서 네가 그걸 바꿀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니?" 그리고 레스타라는 떠나갔다. 소나는 창문을 바라보며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칠 때까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소나는 생각했다. '이건 공평하지 않아.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아. 여기는 내 집이야.' 하지만 그랬나? 여전히 그런가? 아버지가 떠난 이후로도 전과 같을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 종종 그랬던 것처럼 소나는 자리에 앉아 에트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슬픈 선율이 소나의 창문에서 흘러나와 위대한 도시의 거리와 성채, 심지어 성벽 너머에도 울려 퍼졌다. 선율을 들은 이들은 자신이 왜 울기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던 한 남자의 죽음을 위해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존재로 인해 더욱 나아졌으며 이제는 그의 부재로 영원히 변해버린 국가를 위해 울었다. 소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울며 연주했다. |
5. 구 설정
5.1. 구 단문 배경
라이트실드 왕조의 자손인 자르반 왕자는 데마시아의 왕좌를 물려받을 후계자이다. 데마시아의 덕목을 대표하는 귀감으로 자라난 자르반 왕자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큰 기대와 전선에서 싸우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다. 자르반 왕자는 가공할 만한 용기와 자신을 돌보지 않는 투지로 병사들을 고무시키며, 데마시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신의 백성을 이끄는 미래의 지도자로서 진정한 힘을 뿜어낸다.5.2. 구 장문 배경 1
속설에 의하면 라이트실드 사람들은 날 때부터 뼛속 깊숙이 녹서스에 대한 증오를 품고 태어난다고 한다. 라이트실드 혈통은 데마시아의 왕족으로서 수 세기 동안 데마시아의 윤리를 거스르는 자들과 전쟁을 벌여왔다. 리그 오브 레전드 시대에 태어난 첫 라이트실드 가문의 후예, 자르반 4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상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자르반 4세도 직접 데마시아 군을 이끌었다. 녹서스 군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져간 동료, 아군들의 수는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르반은 늘 그들과 함께 피를 나누고 고통을 직면했다.자르반에게 있어 가장 참담했던 패전은 제리코 스웨인이 이끄는 녹서스 군과의 전투였다. 데마시아군은 스웨인의 작전에 휘말렸고, 자르반은 우르곳의 손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 가렌의 정예부대가 그를 구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그곳에서 처형당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측근들은 자르반 4세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예를 들어 신 짜오는 그를 두고 "누굴 마주 보고 있든, 그의 시선은 그 사람 너머를 향했다. 그의 시선은 한 번 목도하면 다시는 거둘 수 없는 그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고 증언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르반 4세는 소수의 데마시아 병사를 손수 선발해 '속죄'를 다짐하며 데마시아를 떠났다. 처음에 그는 발로란 북부에 있는 야수들과 도적들을 추적해 소탕하기 시작했다. 위험천만한 전투를 지속하던 그는 끊임없는 사냥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대장벽 남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아무도 그가 남쪽으로 향한 이유를 알지 못했고, 이후 거의 2년 동안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지만 자르반에게는 그 자신만의 사명과 이유가 존재했던 것 같다. 2년간의 공백을 뚫고, 자르반은 당당히 데마시아로 귀환했고 성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그의 곁에는 함께 길을 떠난 병사 열둘 중 단 두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짐승의 뼈와 비늘로 장식된 그의 갑옷은 출전 당시에 입고 나갔던 그것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은 자신의 나이보다 갑절은 더 성숙해 보였고 노장들의 현명함까지 감돌았다. 그를 보려고 몰려든 인파 속에서, 자르반 4세는 강철처럼 차갑고 침착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데마시아의 적들을 제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세상에는 단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며, 그 진실은 나의 창끝에 있다." - 자르반 4세가 실패로 돌아간 처형 전에 남겼던 '유언'
5.3. 구 장문 배경 2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자 자르반 4세는 데마시아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재목이지만,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사람들의 기대는 때로 그에게 버거운 짐이 되었다. 전장에서 자르반은 가공할만한 용기와 자신을 돌보지 않는 투지로 병사들을 고무시키며 지도자로서의 진정한 힘을 드러낸다.원래 데마시아의 지도자는 최고 의회가 적합한 후보자를 추린 뒤 가장 뛰어난 인물을 선출하는 방식이지만, 지난 3세대 동안은 같은 혈통의 후예가 왕위에 올랐다. 현왕 자르반 3세의 유일한 후계자인 자르반 4세는 태어나자마자 이 전통을 이어가도록 키워졌다. 왕국 통치법을 배우는 것은 물론, 최고의 역사학자들을 스승으로 맞이했으며, 전쟁의 기술 또한 연마했다. 가문의 의도는 왕실의 의무부터 그의 이름까지 자르반의 삶 모든 곳에 투영되었다.
자르반은 격투 훈련을 받으면서 자주 가렌이란 이름의 어린 전사와 겨루게 되었다. 가렌은 다음 왕의 친위대장이 되기 위해 수련하고 있었다. 이 당시 자르반은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가렌의 용맹함에 감탄했고, 가렌은 왕자의 기민한 두뇌에 감복했다. 둘은 곧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자르반 3세는 나이가 찬 아들을 영예로운 데마시아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자르반 4세는 그동안 전쟁의 전술과 전략을 수없이 공부했으며, 소드마스터 상대로 결투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지만, 전선에 직접 서보기는커녕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적도 없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던 자르반 4세는 병사를 이끌어 겨울 발톱 약탈자 무리를 섬멸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부족을 공격했으며, 사악한 마법사들의 주둔지를 급습하기도 했다. 비록 병사들을 지휘해 대승을 거뒀지만, 자르반은 사방으로 자신을 지키는 호위대 때문에 전사로서 직접 나서지 못하는 것이 내심 아쉽기도 했다.
녹서스의 전쟁부대가 데마시아 국경 근처의 농지를 습격했을 때, 자르반 4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말을 타고 며칠을 달려간 피해 마을의 흔적은 예상보다 훨씬 참혹했다. 녹서스군은 마을 전체를 습격해 수백 명의 데마시아인들을 학살했고, 고작 몇 명만의 부상자들이 탈출에 성공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할 수 있었다.
장교들은 왕자에게 후퇴하여 지원군을 부를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심란한 자르반 4세는 차마 도움이 필요한 생존자들을 두고 등을 돌릴 수 없었다. 장교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다친 자들을 지키고 녹서스군의 퇴로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원군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자르반은 당장 행동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자르반은 병력을 나눠 일부는 다친 민간인을 돌보도록 하고, 나머지 병력과 함께 진군했다. 데마시아군은 야밤을 틈타 녹서스군을 기습했으나, 전투의 혼란 속에서 자르반은 친위대와 멀어지게 됐다. 그는 맹렬하게 싸워 수많은 적을 베어냈지만 결국 압도적인 수에 밀려 포로로 잡혔다. 녹서스군은 자르반 4세를 쇠사슬로 구속한 뒤, 녹서스로 귀환하여 위대한 ‘불멸의 요새’에서 자르반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녹서스군의 위용을 과시하기로 했다.
벌써 몇 주째 포로가 되어 점점 멀어져가는 데마시아를 바라보는 자르반은 자신의 경솔한 판단 때문에 무고한 데마시아인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상실감에 짓눌린 자르반은 왕위는 고사하고, 더는 데마시아에 살 자격조차 없다고 믿었다.
어느 달이 없는 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로 알려진 용감무쌍한 정예병들이 녹서스 야영지를 공격했다. 데마시아 전사들은 자르반까지 닿지 못했으나, 자르반은 혼란을 틈타 탈출을 감행했다. 녹서스 병사들과 싸우며 포위망을 돌파하는 자르반의 옆구리에 화살이 박혔으나, 어린 왕자는 굴하지 않고 황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쓰러질 때까지 달린 자르반은 쓰러진 나무의 틈 사이에 숨어 상처에 열악하게나마 붕대를 감았다.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누워 흐릿해지는 의식을 위태롭게 붙잡으며 죽음이 다가옴을 느꼈다. 꿈을 꾸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도 모를 몽롱한 상태에서 불타는 눈과 보랏빛 피부의 여인이 그를 외딴 데마시아 마을로 들고 가는 모습이 각인됐다. 그곳에서 자르반은 약초를 아낌없이 처방하는 치료사들의 보살핌 아래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되찾았다.
데마시아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두 개의 산 사이에 평화롭게 자리 잡은 이 작은 산악 마을에서 자르반은 심신이 치유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실의 의무, 압박과 요구로부터 자유를 만끽하며 해방감을 맛봤다. 이방인임에도 그를 순수하게 환영해주는 마을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또한, 기묘한 보랏빛 피부의 은인을 만나 그녀가 같은 이방인인 것,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쉬바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포악한 용이 주변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풍전등화의 위기가 찾아왔다. 건물은 새까맣게 불타고 농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만약 저 거대한 용이 이 작은 산악마을을 공격하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판단한 자르반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렌월성으로 향했다.
그날 밤, 자르반은 쉬바나가 영지를 몰래 떠나는 것을 발견하고 저지했다. 그러자 쉬바나는 자신이 용과 인간이 섞인 하프 드래곤이라는 것과 그들을 위협하는 파멸의 생물이 자신의 어머니 이바라는 것을 고백했다. 이바는 쉬바나를 혈통의 수치로 여기고 극도로 증오했다. 그리고 쉬바나가 죽을 때까지 사냥을 멈추지 않을 것은 명백했다. 여느 데마시아인과 다름없이, 자르반은 마력을 가진 존재를 신뢰하지 않도록 길러졌다. 하지만 그는 쉬바나의 선량한 성품과 강력한 힘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데다가 목숨의 빚을 갚고 싶었다. 무시무시한 적에 대항하려면 모두의 힘이 필요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용의 위협에 맞서 자르반은 데마시아 마을 사람들을 훈련하여 렌월 요새의 병사들과 함께 싸우도록 했다. 그리고 결전의 무대로 서쪽의 고대 페트리사이트 폐허를 선택했다. 과거 격변하는 룬 전쟁 시기에 지어진 고위 신전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지만, 여전히 마법을 무효화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녔다. 이 돌들은 용을 상대로 최선의 방어책을 제공해줄 터였다. 자르반은 화살촉마저 뾰족한 페트리사이트로 덮었다. 저 극악무도한 짐승을 죽일 기회라도 노리려면 모두가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결전의 날, 자르반과 병사들은 폐허 곳곳에 몸을 감추고, 쉬바나는 공터의 가운데에 섰다. 자르반은 그녀가 용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봤다. 쉬바나는 하늘 높이 불꽃을 뿜으며 어머니를 불렀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뒷걸음쳤지만, 자르반은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쉬바나는 진정한 적을 쓰러뜨릴 것이라 읊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실루엣이 태양을 검게 가리며 위대한 용 이바가 그들을 공격했다. 자르반의 지휘하에 병사들은 수십 개의 페트리사이트 화살을 용의 등에 발사했으며, 적중할 때마다 그녀의 힘은 차츰 약해져 갔다. 용은 고통에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으로 불꽃을 뿜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병사가 갑옷 속에서 숯이 되었지만 화살 공격은 계속되었고, 마력이 억제된 용은 폐허 중에서도 사방이 막힌 공간에 갇혀 날아오를 수 없게 되었다.
쉬바나와 이바는 대지를 뒤흔드는 힘으로 서로와 부딪쳤다. 자르반은 경외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용들은 너무 빠르고 맹렬하게 싸워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르반은 친구가 다칠세라 궁수들을 뒤로 물렸다. 어느 순간, 쉬바나는 목에서 피를 흘리며 인간 형태로 돌아가 쓰러졌다. 자르반은 절망했으나, 쉬바나는 어머니의 눈을 노려보며 불타는 발톱으로 그녀의 심장을 공격했다.
이바가 죽으며 위협이 사라졌다. 자르반 4세는 드디어 집에 돌아갈 자격을 얻었다고 느꼈다. 진정한 데마시아의 가치는 단순히 승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가 되어 단결하는 것에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쉬바나의 용맹에 보답하기 위해 자르반은 그녀에게 얼마든지 왕국에 머물러도 된다고 약조했다. 하지만 데마시아 왕국 자체가 아직도 마법을 굉장히 경계한다는 것을 알기에, 쉬바나는 자르반의 곁에서 싸울 때 그녀의 두 번째 본성을 드러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둘은 함께 용 이바의 해골을 들고 수도로 향했다.
왕자가 무사히 귀환한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이 열광했으나, 다른 이들은 쉬바나를 친위대로 등용한 자르반의 판단을 의심했고, 녹서스군으로부터 탈출하고 즉시 수도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왕 자르반 3세는 대외적으로 아들을 왕실에 다시 반갑게 맞이했다. 자르반 4세는 왕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복귀하면서, 데마시아의 이상을 받들어 어떤 위협이 닥쳐와도 하나가 되어 대항할 수 있도록, 한 명의 국민도 빠짐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를 만들기로 다짐했다.
5.4.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후보: 자르반 4세
날짜: CLE 21년 3월 21일
자르반이 한껏 거만한 태도로 대전당에 들어선다. 제 아비를 딱 닮아, 다른 이들은 자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는 듯한 태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다. 방어구는 호화롭기는 하나 전혀 실용적인 데는 없으며, 그간 해치운 야수들의 가죽을 주렁주렁 건 걸 보면 과시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라이트실드 가문의 개답게 튀어나온 턱을 보면, 권위보다는 몽둥이나 휘두르는 편이 훨씬 어울려 보인다. 안하무인인 데다 오만한 꼬락서니는 왕세자에게 바치는 대중의 찬사가 다 아까울 지경이다.
사육이 필요한 야수인 양, 자르반은 위풍당당하고 거칠게 문으로 당당히 나아간다. 입구를 지나고, 빛을 지나서… 이제 내 손아귀 안으로.
"환영한다, 자르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거든."
신 짜오는 회고의 방을 ‘심연 같은 어둠이 자욱한’ 곳이라고 묘사했으나 그건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었다. 물론 어둡긴 했지만, 그 밖에는 평범할 뿐이었다. 빛이 없다고는 하나 어둠이 방 안에 있는 다른 존재의 모습을 숨겨주는 것도 아니었다. 자르반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전혀 다른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이 어리석은 연극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둔 채 한가로이 서서 기다렸다.
그 형상은 비좁은 대기실 반대편 쪽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자르반에게서 3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자르반은 그 존재에게는 별 관심 없이 환상이 시작되기만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기이한 신기루에 휩쓸리는 대신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둠 속에서 돌연 공격이 시작됐다.
자르반은 아무 준비도 없이 허를 찔리고 말았다. 앞에 있던 형상이 칠흑 같은 날개를 넓게 펼치더니 앞으로 돌진해 왔다. 뒤로 물러나 방어 태세를 취하려 했으나 땅 아래서 솟아 나온 날카로운 발톱이 양다리를 붙잡아 그 자리에 붙박아 두었다. 주위로 검은 피조물들이 잔뜩 몰려와 드러난 살을 쪼아댔다.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그림자는 이제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명백한 의도를 드러내며 자르반에게 돌진해 왔다. 피보다 더 붉고 타오르는 불덩이보다 뜨거운 여섯 개의 눈이 그를 노려보자, 주위 대기까지 증오로 들끓는 듯했다.
스웨인이군.
자르반은 살이 찢기는 고통을 무시하며 다리를 움켜쥔 발톱들을 거칠게 떼어냈다. 적의 심장을 노리며 창을 내지르자 창끝이 날개 달린 형상의 가슴에 닿아 깊숙이 파고들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을 정도로 오싹한 함성을 내지르며, 자르반은 스웨인을 번쩍 들어 넘겨 뒤쪽 벽으로 내던져 버렸다. 어렴풋한 실루엣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가운 돌벽에 부딪치더니 털썩 땅으로 쓰러져 버렸다.
돌아서는 자르반의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
“네놈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다면, 상대를 아주 잘 골랐군!”
자르반은 스웨인의 머리를 베려고 돌격했다. 이게 환영이든, 실제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한 발짝을 겨우 떼자마자 에너지 덩어리가 대기를 가르며 날아들더니 갑옷을 관통하여 몸을 태워 들어갔다. 광선이 몸을 훑자 온 방에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자르반은 고통에 휩싸여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방에 걸린 횃불이 방을 비추자,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스웨인이 아까 쓰러졌던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옆에서는 까마귀가 부리에서 에너지 줄기를 뿜어내며 허공을 맴돌았다. 스웨인의 가슴에는 짙은 주홍빛의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난 증명할 필요 따윈 없다. 왕자.”
스웨인은 맛있게 베어 먹던 고깃덩이에서 구더기라도 나온 양 역겹게 왕자라는 호칭를 내뱉었다.
“리그의 실수로 네가 ‘불운하게’ 서거한다면 꽤 만족스러울 텐데 말야. 그렇게 될 것도 뻔하고. 그럼 네 아버지가 그 조약이라는 걸 어떻게 할 지 궁금한데.”
스웨인이 주먹을 쥐자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마법의 기운이 나타나 손안에서 흘렀다. 잠시 후 손을 펴자 마법 줄기가 앞으로 뻗어 나가 까마귀의 힘을 더욱 증폭시켰다. 격렬한 고통에 자르반이 눈을 부릅뜨더니, 이윽고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정말 답답할 정도로 멍청한 데마시아 인이군. 전략도 요령도 없이 달려들다니, 내 적수라고 하기도 역겨울 정도야. 널 얼른 처치해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는군그래. 그럼 좀 더 내게 걸맞은 상대가 네 자리를 차지하기라도 할 텐데.”
이 말과 함께 스웨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르반이 보는 앞에서 몸이 부풀어 오르면서 여기저기 늘어나더니 흉측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그 몸에서 까마귀가 솟아 나오더니 자르반에게 달려들어 살갗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새떼가 몰려들 때마다 방 안의 횃불이 깜박거리더니 하나하나 꺼져 갔다. 마지막 횃불마저 꺼지고 나니 보이는 것은 흉하게 일그러진 스웨인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는, 피에 굶주린 여섯 개의 점뿐이었다. 자르반의 시야가 흐려지면서 점들이 하나로 뭉치더니, 결국 모든 것이 어둠에 물들어 버렸다.
이제 자르반은 학회에서 멀리 떨어진, 전에 와 보았던 장소에 있었다. 삶과 죽음의 외로운 기로였다. 그곳은 영원한 평화의 절벽 끝, 끝없는 잠을 향한 관문이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언젠가는…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눈을 감은 그의 몸속에서,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영혼 밑바닥을 뚫고 내려간 존재의 한복판에서 어떤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소리는 넘실대며 퍼지더니 결국 심장에서 터져 나와 혈관을 데우고 근육까지 번져갔다. 이윽고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자기 살을 뜯어 먹고 있는 까마귀 떼만큼이나 강력하고 생생한 분노 그 자체였다. 조상들의 목소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데마시아 전사의 전투 함성이자 왕자로서의 외침이었다. 자신이 내지른 함성이 귓가에 울리자 자르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눈은 더이상 보통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눈에 깃든 불꽃이 야수의 탄생을, 제왕으로서의 각성을 알렸다. 이윽고 그 눈이 스웨인을 포착했다.
자르반은 자신을 움켜쥐고 있는 발톱들을 부러뜨리고 점점 더 죄어오는 부리를 산산조각내며 벌떡 일어서더니, 창도 버린 채 앞으로 뛰어들었다. 자르반이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자 스웨인의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 자르반은 스웨인의 몸뚱이를 벽에 내리치며 계속 움직였다. 움켜쥔 손가락 틈으로 어렵사리 지나는 부드러운 숨결에 그는 손을 더욱 단단히 그러쥐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날카로운 미소가 자르반의 입가에 떠올랐다.
“전략? 요령? 전쟁에는 승리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녹서스 인이여.”
자르반은 까마귀가 자신의 살덩이를 찢어 내어 스웨인에게 그 생명력을 날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눈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것으로 보아, 죽음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르반은 스웨인의 불거진 눈에서 생명이 사그라지는 것을 볼 때까지는 절대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다짐으로 남은 온 힘을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서로 상대를 끝장내기 전엔 절대 먼저 죽지 않으려 뒤엉킨 둘의 밑에 피가 고여 웅덩이를 이뤄갔다.
“그만해 두세요!”
돌로 만들어진 학회의 전당에 쨍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르반은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려 스웨인에게서 멀리 휙 날려가 반대편 벽에 부딪히기 일보 직전에 멈췄다. 그리곤 허공에 뜬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인간 형상으로 돌아온 스웨인 역시 방 반대편 허공에 떠 있었다. 늘 함께 다니는 새 한 마리를 빼곤, 까마귀는 모두 온데간데없었다.
베사리아 콜민예 상임 의원은 뒤집어썼던 후드를 내리며 처음엔 자르반을, 그다음에는 스웨인을 쏘아 보았다.
“무슨 짓입니까, 스웨인? 여기는 신성한 곳입니다. 당신의 음험한 게임은 이곳에선 용납되지 않아요.”
그리곤 자르반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유 때문에 리그에서는 당신을 받아들일 겁니다만, 오늘 일에 대한 보복을 꿈꿨다간 정치적인 끈을 동원한다 해도 리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겁니다.”
그녀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오늘 여러분이 서로에게 선사하려 했던 운명이 차라리 낫다고 후회하게 될 거에요.”
베사리아가 손목을 획 젖히자 스웨인이 마치 헝겊 인형처럼 허공을 날아 훌쩍 방 밖으로 휩쓸려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베사리아가 넌더리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자르반은 여태 입은 상처로 고통스러워 신음하며 볼품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창으로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일어났지만, 리그로 향하는 문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그냥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절룩이며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그러모으는 그의 머릿속에서, 부친이 일러줬던 말씀이 메아리쳤다. 그러자 겨우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왕족에게는 왕족의 특권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