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4 03:58:02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응씨배에서 넘어옴
應氏杯世界職業圍棋錦標賽(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Ing Cup/Ying Shibei World Professional Go Champio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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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응씨배_우승컵.jpg
크고 아름다운 응씨배 우승컵의 모습. 사진은 1회 당시 주최자 잉창지로부터 조훈현 九단이 우승컵을 수여받는 모습이다. 하지만 저건 실제로 수여되는 트로피는 아니고, 역대 우승자들을 기록하여 보관하는 페이크 트로피(...)이다. 줬다 뺏기

파일:0307-e12.jpg
실제 수여되는 트로피는 아래쪽에 나와있는 작은 사이즈와 볼품없는 디자인의 물건이다. 왼쪽이 우승, 오른쪽이 준우승.

1. 개요2. 잉창치3. 운영 방식4. 역대 우승자5. 대회 이력
5.1. 1988년 1회 대회5.2. 1992년 2회 대회5.3. 2016년 8회 대회
5.3.1. 개요5.3.2. 8강 및 준결승 진출자5.3.3. 결승전
6. 창작물에서

1. 개요

대만의 부호이자 열렬한 바둑 애호가인 잉창치(應昌期 - 응창기)가 40만 달러라는 거액의 우승 상금을 걸고 1988년 창설한 본격적인 세계기전. 일본은 응씨배 창설 움직임을 보고, 서둘러 전자회사 후지쯔의 후원을 받아 후지쯔배를 만들면서, 최초의 세계 대회라는 타이틀을 가져갔다. 그러나 2011년을 끝으로 후지쯔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응씨배가 가장 전통있는 세계 바둑 대회가 되었다.

'잉창치배', '잉씨배'라고도 불린다. 4년마다 개최되기 때문에 바둑 올림픽 혹은 바둑 월드컵이라는 별명도 있다. 타이페이· 상하이 응창기 바둑교육기금회가 주최 및 후원한다.

조훈현의 세계 제패로 한국바둑의 급성장을 불러온 대회이며, 한국 4천왕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우승한 대회라는 점 등에서 여러모로 한국 바둑계와 연관이 많은 대회이다.

응씨배의 우승 상금은 40만 달러(약 4억 8000만 원)며 전체 상금 규모는 115만 달러(약 13억 9000만 원)니 상금 규모 면에서 가장 큰 대회다. 대회가 창설된 1회부터 쭉 같은 금액을 유지하고 있는데, 1회 당시의 화폐가치를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일본 국내기전 요미우리신문 기성전(棋聖)의 우승상금 5,000만 엔(45만 달러)에 못미친다. 자칭 세계 최대의 기전이 일본 국내기전 상금 하나 못 따라잡는 셈. 더욱이 응씨배는 4년 주기, 기성전은 매년 개최를 감안하면 더더욱.

그리고 토요타덴소배가 있었을 때에는 토요타덴소배보다 기전 규모가 작았다. 토요타덴소배는 1회 대회 때 렉서스 자동차(LS430)를 우승자 부상으로 제공하고, 2회 대회 때부터는 렉서스 자동차 출고가에 상당하는 현금을 부상으로 지급했기 때문에 우승자 실제 상금은 4,300만 엔이었기 때문이다.

바둑 갤러리에서는 응가배라고 불리면서 까인다.

국제 바둑 기전 중에서 유일하게 봉수가 있다. 점심시간을 공식적으로 60분 제공하기 때문에, 점심시간 직전에 봉수한다.

2. 잉창치

파일:external/a3.att.hudong.com/01300000044935129068423429608.jpg
잉창치(应昌期, 응창기) (1917.10.23~1997.08.27)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관계 때문에 가고 싶어도 고향을 갈 수 없던 잉창지는 이렇게 응씨배 결승을 통해서라도 고향을 방문하고 싶어했고,[1] 응씨배를 바탕으로 양국 간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잉창지씨는 결승 제5국 후 조훈현에게 우승컵을 전달하면서도 시상식 내내 웃음과 미소, 그리고 축하 메세지로 조훈현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건냈다.

3. 운영 방식

응씨룰 번역

잉창치룰이라 불리는 독특한 중국식 바둑룰을 사용한다[2]. 바둑돌 수가 180개씩(바둑판에 돌을 둘 수 있는 점 수는 19²=361이라 여기에 맞춘 것)으로 한정되어 있고, 덤도 일반적인 룰과는 다르다. 가장 합리적이고 공평하며, 처음 배우는 사람이 바둑을 끝내고 계가를 할 때 가장 쉬운 계가법[3]이라고 평가도 받는다. 하지만 바둑판, 돌 등까지 세트로 구매해야 해서[4] 보급이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①바둑이 끝나면 중국식 계가법처럼 따낸 돌을 돌려주고 잡힌 돌을 바둑판에서 모두 들어내서, 시작할 때 그 돌이 들어 있던 바둑통에 도로 담는다.
②덤 8점의 반인 흰돌 4알을 흑집에 놓는다(이렇게 해서 사실상 검은돌 184알, 흰돌 176알로 8알 차이).
③흑집은 검은돌 쪽 바둑통에 남아 있는 검은돌로, 백집은 흰돌 쪽 바둑통에 남아 있는 흰돌로 채운다. 여기서 흑집은 검은돌이 살아 있는 영역, 백집은 흰돌이 살아 있는 영역이다.
④검은돌과 흰돌이 180알씩이니 돌이 없는 자리가 하나 남는다. 이게 흑집에 있으면 흑이 이겼다는 뜻이고, 백집에 있으면 백이 이겼다는 뜻이다.
또한 응씨배에는 판빅(비기는 바둑=무승부)이 없다.[6] 응씨배에서 판빅이 등장하거나 응씨룰로 두어 판빅을 만드는 기보를 제출하면 상금으로 5만달러를 준다고 한다. 또한 3시간 30분의 기본 시간을 주고, 초읽기가 없으며 기본 시간을 모두 소비하면 두 집을 대가로 35분간 시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7]. 세 번까지 연장할 수 있었으며 그 시간도 모두 소비하면 시간패.

제 2회 대회부터 24명의 기사가 출전하게 되었다.

8강전을 치른 8명한테 다음 대회 16강전 직행 자격을 주는 방식에서, 2008년 대회부터 결승에 오른 두 사람만 다음 대회 출전자격 진출로 변경 되었다.

8강전까지는 단판, 4강전은 2선승제고, 결승은 3선승제며 일정을 나눠 두 군데에서 진행한다.

4. 역대 우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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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회차 년도 우승자 준우승자 점수
1 1988 조훈현 녜웨이핑 3-2
2 1992 서봉수 오타케 히데오 3-2
3 1996 유창혁 요다 노리모토 3-1
4 2000 이창호 창하오 3-1
5 2004 창하오 최철한 3-1
6 2008 최철한 이창호 3-1
7 2012 판팅위 박정환 3-1
8 2016 탕웨이싱 박정환 3-2
※ : 우승 당시 三단이었으나 중국기원의 규정에 따라 즉시 九단이 되었다.
}}} ||
보면 알겠지만 바둑의 한국천하 치세 이후 쟁쟁한 기사들이 한번씩 우승하고 이후 포스트 이창호 세대의 선두주자 중 하나인 최철한이 우승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창호 이후 최강자로 군림하던 이세돌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응씨배에 약한 모습을 보였으며,[8] 현재 선두주자인 박정환도 내내 2등으로 아쉬운 성적표를 받고 있다. 응씨배 공인 콩라인

5. 대회 이력

5.1. 1988년 1회 대회

1회 대회때는 한국 바둑이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대회측에서는 중국 4명, 일본 6명, 대만 3명, 한국, 미국, 호주 각각 1명만 초청했다. 출전권을 1장밖에 못받은 한국이 강력 반발하자 서봉수를 예비 1번에 올려주기는 했다. 당대 최고 상금이 걸린 대회인데 기권할 기사는 있을 리가 없었기에, 당연히 서봉수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속기원이 아닌 국적 기준으로 초청한 것이라 조치훈 九단도 한국 대표라고 주최측에서 해명(이라기 보단 변명)을 했다.

또한, 결승 5번기는 처음에는 모두 중국에서 치르기로 정해졌었는데, 이또한 한국 측의 강력한 항의로 중국에서 3판, 제3국에서 2판을 마저 두는 것으로 변경됐다. 추가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녜웨이핑의 지병으로 인해서 결승 장소에 제약이 가해지기도 했다. 여튼, 한국 입장에서는 당시 중국은 공산권 국가에다 미수교 상태였다. 굳이 중국에 가기 위해서는 홍콩에 가서 비자를 받고 대회 장소인 항저우까지 몇번을 갈아 타야 했다고 한다. 대신, 4강전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했다. 원래는 대만에서 하려고 했지만, 대만 사정이 안 좋아서[9] 한국으로 장소를 바꿨다고 한다.

사실 세계대회 결승 장소는 주최측에서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자 관례이다. 한국이 주최하는 LG배나 삼성화재배도 결승 장소를 주최측 홍보를 위해서 주최사가 지정한 장소에 따라 한국에서 5번기를 모두 치르거나 중국에서 치르지 결승전에 오른 사람의 국적에 따라 안배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당시 언론이나 일부 기사들이 결승 장소의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는 제기할 거리가 되지 않는 사안이다. 다만 이는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당시에는 세계대회 자체가 처음이었던 만큼 그런 관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쯤은 논란이 있을 만한 문제이기는 했다. [10]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006.jpg

1988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제1회 응씨배 준결승 3번기(11월 20일 제1국[11], 22일 제2국).
왼쪽은 린하이펑. 오른쪽이 조훈현. 180알씩 넣을 수 있게 만든 바둑통도 보인다.

물론 결과는 알다시피 그 조훈현이 당시 중국의 자랑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에게 대역전 우승.[12] 바둑계 최초(이자 최후)로 카 퍼레이드를 하고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九단과 함께 은관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대회 이후 전국적으로 엄청난 바둑 열풍이 일어나고 특히 어린이 바둑교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조훈현의 우승 덕분에, 응씨배 뿐만 아니라 모든 국제기전에서 한국 기사들의 문호를 대폭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국 기사들을 제외하고 벌어졌던 기전들[13]은 모두 2부 리그 격으로 위상이 추락하고 말았다. 쌤통이다

대회 토너먼트 대진표를 보면 80년대 바둑을 주름잡던 역사적인 기사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는데, 눈에띄는 이가 후지사와 히데유키.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가토 마사오 등의 기사를 꺾으며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터뷰 중 "조훈현이 최강이다 우승은 그의 몫이다 아마도 나와 결승전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다"라는 발언을 남기고는 4강에 안착했으나, 아쉽게도 녜웨이핑에게 덜미를 잡힘으로서 제자와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도 조훈현이 우승했으니 절반의 염원은 이루긴 했다

5.2. 1992년 2회 대회

이전 대회에서 갑작스레 한국바둑의 위상이 높아진 덕을 본 것인지 해당 대회에선 한국 선수들의 처우는 제법 나아 졌다. 주최측은 한국에 출전권을 얼마나 더 주느냐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와 동시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 정부에서 수배령을 내리던 장주주, 루이나이웨이[14] 출전을 주최측이 허용하자 중국 기원측이 반발하며 불참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결국 이 여파로 한국과 일본에 출전권이 대폭 늘어나며, 한국에서는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 양재호 5명이 출전하게 되었다. 중국 기사들의 대거 불참으로 인해 대회는 한국기원, 일본기원 위주의 선수층으로 진행하게 되었으니 한국기사의 대량 출전도 이런 해프닝 덕을 봤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호재와는 별개로 대륙의 관심을 잃게 된 2회 응씨배는 흥행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으나, 아래 서술할 갖가지 반전들이 터져나오며 기념적인 요소들로 주목을 받는 데엔 성공하긴 했다. 우선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조훈현의 16강 조기탈락과 함께[15] 당시 유망주를 막 벗어난 이창호, 유창혁 또한 16강에서 맥없이 떨어지며 바둑계에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그것도 이창호를 꺾은 기사는 여류기사였던 루이나이웨이로서 그녀는 4강까지 안착하면서 최강의 여류기사임을 입증하기도 했다.[16]

이렇다 보니 한국은 8강에선 양재호 서봉수 2명만이 진출한 상황. 상대적으로 약체로 평가받던 양재호는 결국 루이의 4강 제물이 되었으며,[17] 서봉수만이 다케미야 마사키를 꺾고 준결승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4강에서 맞붙은 조치훈과의 대결은 대회의 백미 중의 백미. 중반까지만 해도 조치훈의 완승으로 굳어가던 반상위에서 서봉수의 끊어치기 묘수로 대마를 궤멸시켜 승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결승 티켓은 서봉수가 가져가게 된다. 그리고 조치훈의 자학도 어김없이 터져나왔다

파일:응씨배 2회.jpg

결승 최종국의 서봉수 vs 오타케 히데오. 이전 대회의 조훈현 결승국 상황을 답습하듯 초반에는 서봉수의 불안한 전개로 이어지다 겨우 동률을 이뤄내며 2:2로 최종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종국에도 어김없이 중반까지 절망적인 상황까지 밀리다 초강수를 연거푸 두면서 바둑을 혼전으로 몰아갔고, 결국 대마를 잡아내는 데 성공하며 서봉수가 우승하게 된다. 여러모로 서봉수의 끈질긴 기풍이 빛을 발휘했던 대회였다.

5.3. 2016년 8회 대회

5.3.1. 개요

기본 시간 3시간, 추가 시간 20분 2번(1번에 2집씩 차감)으로 시간이 줄었다. 점심시간은 전처럼 바둑 시작하고 3시간 뒤, 1시간 동안 주어진다.

4월 18일~ 25일까지 개막식[18], 본선 1회전(각국 대표 28명 참가. 대진표에서 2-3, 4-5, … , 28-29가 대결), 16강(대진표 1을 받은 전기 대회 우승자, 대진표 30을 받은 준우승자, 1회전 승자 14명 참가), 8강전이 열린다.
6월 8일~ 15일까지 3번기로 4강전이 열린다.
결승 1,2 국이 8월 8일부터 13일, 결승 3~5국과 시상식 폐막식이 10월 21일부터 27일에 열린다. 예전에는 적어도 결승 2차전은 해를 넘겨서 열곤 했는데 이번에는 일정을 빨리 진행하고 있다.

본선 1 라운드에는 한국 6명, 중국 10명, 일본 6명, 대만 2명, 미주 2명, 유럽 2명, 총 28명이 출전해 절반인 14명이, 16강에 합류하게 된다. 직전 대회 우승자와 준우승자 2명은 시드를 적용하여 16강에 직행한다.

한국에서는 직전 대회 준우승자 자격으로 박정환 九단이 본선 2회전에 직행하였다. 6장의 출전권은 랭킹 시드를 통해서 이세돌 박영훈에게, 국가대표 시드는 김지석 나현에게 주어졌다. 또한, 국내 선발전을 치러 강동윤 원성진이 나머지 자리를 차지했다.

5.3.2. 8강 및 준결승 진출자

4월 22일에 8강 진출자들이 가려졌다.

- 한국 : 이세돌, 강동윤, 김지석, 박정환
- 중국 : 커제, 스웨, 탕웨이싱
- 일본 : 고노 린

4월 24일 4강 진출자들이 가려졌다.

- 한국 : 이세돌, 박정환
- 중국 : 스웨, 탕웨이싱

5.3.3. 결승전

6월 14일 결승 진출자들이 가려졌다. 두 기사 모두 준결승에서 상대를 2-1로 이기고 진출했다.

- 한국 : 박정환
- 중국 : 탕웨이싱

참고로 박정환-탕웨이싱은 2014년부터 7번 만났으며,역대 전적은 박정환 기준 4승 3패다.
  • 8월 10일 결승 제1국 : 박정환 九단의 3점 승리
  • 8월 12일 결승 제2국 : 탕웨이싱 九단의 3점 승리
  • 10월 22일 결승 제3국 : 박정환 九단의 7점 승리
  • 10월 24일 결승 제4국 : 탕웨이싱 九단의 11점 승리
  • 10월 26일 결승 제5국 : 탕웨이싱 九단의 5점 승리

8회 응씨배는 3승 2패로 탕웨이싱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박정환은 2회 연속 준우승을 기록했다.

6. 창작물에서



[1] 그렇게 성사된 영파 방문이 잉창지씨 개인에게는 50년 만의 고향 방문이었다. [2] 을 세는 단위는 이지만 여기서는 알기 쉽게 으로도 적는다. [3] 내 돌이 살아 있는 곳에 내 바둑알을 채우면 몇 집인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끝나고 나서 집을 세려고 판에 놓은 바둑알을 이리저리 옮길 필요가 없다. 중국식 계가법에서 돌을 180알씩 맞추고, 바둑판에서 살아 있는 돌을 그대로 두고 남은 돌로 각자 영역을 채우는 방식이 바로 전만(塡滿)법이라고 봐도 좋다. [4] 사실은 돌 180알씩 맞춰서 준비하기 어려워서 그렇다. 그래서 바둑돌을 딱 180알 넣을 수 있는 통(한 층에 36알×5층인 육각기둥형)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 Ctrl+F+함중아, 이제까지 나온 여러 바둑통). 본문에서 말하는 '세트'는 응씨룰을 세계표준으로 만들려는 잉창치의 목표 때문이고, 돌 갯수만 확실히 맞춰서 준비할 수 있으면 이 규칙을 쓸 수 있다. [5] 그래서 덤(8점)을 한국식으로는 7집 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서로 돌을 놓을 수 없는 공배 주변 돌 배치에 따라 가르는 방식( 그래서 공배가 변에 있으면 ⅓, ⅔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제1회 대회 8강전에서 조훈현 九단은 흑으로 '1과 5/6점'을 이기기도 했다)에서, 중국처럼 반씩 나눠가지기로 바꿨다. [6] 보통 바둑은 패 세 개가 번갈아 나타나거나( 삼패빅) 장생 등으로 동형이 반복되면 그 판은 판빅으로 처리하지만, 응씨배 룰대로 바둑을 두면 세 개 이상의 패과 장생까지도 동형반복으로 간주한다. [7] 생각시간을 다 쓰면 1/6만큼 시간을 더 줬다. 3시간 30분은 210분이니 6으로 나누면 35분.이것도 처음에는 초읽기를 한 번 넘길 때마다 2집씩 뺀다는 규칙이었다. 시간을 몇 번 넘겼는지에 따라 덤이 바뀌는 셈이라, 집을 셀 때 덤(흰돌 네 알) 말고도 별도로 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끝났을 때 흑이 시간을 한 번 넘기고 백이 시간을 두 번 넘겼다면 흑집에 놓는 흰돌은 4알(덤)+1알, 백집에 놓는 검은돌은 2알. [8] 바둑에 입단하고 나서 줄줄이 광탈하는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왔다. 그러다 2016년 8회 대회서 알파고를 통해 각성한 이세돌이 돌연 4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으며, 박정환에 밀려 아쉽게 결승에 진출하진 못했다. [9] 대회 주최자가 중국 공산당과 관계있다는 소문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확인바람. [10] 사실 출전권을 달랑 한 장만 주는 등 처음부터 한국기원을 계속 푸대접한거에 빡쳐서 반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11] 빈삼각이 묘수인 바둑으로 유명하다. [12] 조 九단이 바둑인생에서 일어났던 기적을 4등까지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대회 8강전을 2등,(참고로 8강에서 맞이한 상대가 고바야시 고이치) 1:2로 뒤진 채 맞이한 결승 제4국을 3등으로 꼽았다. [13] 대표적으로 '중일 슈퍼대항전' 같은 것이 있다. [14] 둘은 천안문 사건 시위 경력으로 수배령을 받고 해외에서 망명을 떠돌던 신분이었다. [15] 특히 일본 내에서조차 대단한 성적이랄 것도 없던 아와지 슈조에게 패한 것이 상당한 이변. [16] 4강에서 오오다케 히데오에게 패한 루이 나이웨이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전에서 하얗게 불태운 후 자리에서 울었다는 후문도 있으며, 같이 망명하며 교제하던 장주주와는 대국으로 머물던 일본에서 결혼한 후 다시 망명길을 떠났다. [17] 재밌게도 양재호가 16강에서 꺾은 기사가 루이의 남편 장주주였다. 부인이 대신 설욕 [18] 24명일 때는 1회전 뒤 16강전 대진표를 짜는 제비뽑기를 또 했지만, 이번에는 제비뽑기를 개막식에서만 하고 대진표가 끝까지 간다. 지난 대회 우승자는 1번, 준우승자는 30번. [19] 제1회 대회 결승에서 시작하고 제2회 대회 결승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