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6 16:52:04

윌리엄 갈라스

윌리엄 갈라스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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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 FC 주장
티에리 앙리
(2005~2007)
윌리엄 갈라스
(2007~2008)
세스크 파브레가스
(2008~2011)
}}} ||
윌리엄 갈라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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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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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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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파일:external/talksport.com/william-gallas_0.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윌리엄 갈라스
William Gallas
본명 윌리암 에리크 갈라스[1]
William Éric Gallas
출생 1977년 8월 17일 ([age(1977-08-17)]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오드센주 아스니에르쉬르센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과들루프|
파일:과들루프 기.svg
]] 과들루프)
신체 181cm
직업 축구 선수 ( 수비수[2] / 은퇴)
소속팀 AVG 풋볼 (1987~1992 / 유스)
라싱 클럽 드 프랑스 (1992~1993 / 유스)
INF 클레르퐁텐 (1992~1994 / 유스)
SM 캉 (1995~199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7~2001)
첼시 FC (2001~2006)
아스날 FC (2006~2010)
토트넘 홋스퍼 FC (2010~2013)
퍼스 글로리 FC (2013~2014)
국가대표 84경기 5골 ( 프랑스 / 2002~2010)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출전 기록4.2. 대회 기록4.3. 개인 수상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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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라스는 환상적인 선수였다. 갈라스는 스쿼드에 22명의 선수만 있어도, 24명이나 25명을 두고 있는 것 같은 선수였다."
주제 무리뉴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국가대표팀에서 레블뢰 을 계승한 레블뢰 수비진의 핵이었고 클럽에서는 첼시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던 무리뉴 1기 시절 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뛰어난 실력의 보유자였다.

런던을 연고로 하는 클럽을 세번이나 거친 이력을 가지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리그 1 시절

프랑스 2부 리그팀이였던 SM 캉에서 데뷔한 갈라스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1부리그로 승격시킨 뒤 1시즌 더 활약한 후 마르세유로 이적하여 로베르 피레스 등과 함께 팀을 이끌었다.

2.1.2. 첼시 FC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의 눈에 띈 갈라스는 첼시로 이적하게 되었고 등번호 13번을 받은 뒤 마르셀 드사이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수비진을 공고히 하였고 이후 존 테리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수비의 핵으로 자리잡았다.

2004년 주제 무리뉴가 부임한 뒤 갈라스는 존 테리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중앙수비를 책임지던 중 웨인 브릿지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레프트백으로 이동하면서 존 테리의 파트너 자리를 히카르두 카르발류에게 넘겨주게 되었다.[3] 이 시기 그는 첼시 수비진의 한 축으로 맹활약하며 첼시의 EPL 한 시즌 최다 무실점경기 기록과 한 시즌 최다연속 무실점 경기 기록을 수립하는데 일조하였고 첼시의 EPL 최다 승점 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맨유와의 경기에서는 약 30m를 폭발적으로 드리블해 들어가 결승골을 넣는 등, 큰 경기에도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때 "첼시의 수비진은 갈라스- 존 테리-갈라스-갈라스다!" 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그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4][5] 2005-06 시즌에는 맨유와의 경기에서 헤딩 결승골을 넣어 프리미어리그 타이틀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갈라스는 이후 세리에 A에서 뛰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며 구단에 이적요청을 하였지만 구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첼시와의 갈등을 겪게 된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피로하다는 이유로 미국 투어에 빠지겠다고 선언한 그에게 첼시는 등번호 13번을 빼앗아 미하엘 발락에게 주었고 갈라스에게 3번을 주려고 했는데, 이 사건은 갈라스에게 그동안 곪았던 고름이 터진 격이다.[6][7] 거기에다 그는 첼시가 자신을 이적시켜주지 않는다면 자책골을 넣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언[8]을 했기에 이르고 첼시와의 관계는 막장으로 치닫는다.

갈라스는 첼시 시절 지속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풀백이 아닌 센터백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갈라스가 센터백으로 나온 경기가 적은 수가 아니었고 센터백으로 나올 때마다 2004-05 시즌 무실점 신기록 같은 실적도 내었다.[9] 하지만 첼시의 양쪽 풀백은 유럽 최고라는 팀의 명성에는 약간 모자란 수준이었고 센터백엔 당장에 갈라스 만큼 해줄 수 있는 카르발류가 있었다. 이 때문에 갈라스가 좌우풀백 센터백 자리를 안가리고 미친듯이 뛰었던 것이었고 이 사정을 무리뉴가 모르는게 아니라서 그렇게 애쉴리 콜에게 불법 접촉하기도 하고 마이카 리차즈를 영입하려고 애를 쓴 것이다.

결국 첼시는 갈라스를 대체할 준비를 하였고 아스날에서 애슐리 콜을 영입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면서 그는 아스날로 이적하게 되었다. 무리뉴는 갈라스를 내보낸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고 이 점은 첼시에게 2006-07 시즌 내내 수비진의 파행적인 운영 및 리그 우승 실패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 [10]

2.1.3. 아스날 FC

2006년, 애슐리 콜과의 맞거래로 아스날로 이적, 다름 아닌 데니스 베르캄프의 등번호 10번을 받게 되었다.[11][12]

아스날로 이적한 갈라스는 센터백으로써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팀의 수비를 단단히 하고,[13] 2007년 여름 티에리 앙리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뒤 팀의 주장이 된다.

하지만 팀의 주장이 된 갈라스는 사고를 터트리는데, 특정 선수에 대해 선수단이 자신에게 불만을 이야기하자, 해당 선수와 대화를 나눴으나 그 해당 선수가 자신을 비롯한 선수단에게 욕을 했다는 내용을 언론에 폭로한다. 이 일로 분노한 벵거는 갈라스를 주장직에서 박탈하였고, 주장직은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맡게 된다. 이 일에 대해 아스날 레전드인 나이젤 윈터번도 충격을 먹을 정도였고, 이 사건과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아스날은 우승 레이스에서 뒤쳐지게 된다.

이후에도 갈라스는 사미르 나스리와 불화를 겪으며 트러블이 있었고 결국 팀이 재계약을 제시하지 않으며 2010년 자유계약 신분이 된다.

아스날 입장에서는 애슐리 콜을 내주는게 실수였기는 했지만, 어차피 떠날 선수였던 것을 고려하면 갈라스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아스날에서 갈라스 역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으며 애슐리 콜의 공백은 그 동안 콜의 백업을 맡던 가엘 클리쉬가 잘 메꾸었다.

2.1.4. 토트넘 홋스퍼 FC

자유계약 신분으로 이적한 팀은 다름 아닌 토트넘이었다. 이로써 갈라스는 런던 연고 라이벌 관계에 있는 첼시, 아스날, 토트넘에 모두 몸담은 선수가 된 셈. 등번호도 자신이 선호하고 첼시 시절 뺏겨서 한이 되었던 13번을 되찾았다.

2010년 9월 11일 리그 4라운드 웨스트브롬위치와의 홈 경기에서 토트넘 데뷔경기를 치렀다. 유리몸 레들리 킹 조너선 우드게이트가 부상으로 골골대고 마이클 도슨까지 장기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 2010-11 시즌 토트넘 수비진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2010-11 시즌, 나스리와의 불화로 인해 토트넘으로 이적한 갈라스는 10월 토트넘 선수로서의 첫번째 북런던 더비에 토트넘 주장으로 출전한다. 나스리의 선제골과 함께 아스날이 2개의 골을 넣으며 경기를 이끌어나가는듯 싶었으나, 갈라스의 영혼수비, 가레스 베일의 추격골, 라파엘 판데르파르트의 PK 동점골, 유네스 카불의 헤더 결승골로 3-2 역전하며 갈라스는 복수(?)에 성공한다.

2011-12 시즌은 잦은 부상으로 15경기 출전하였다

2012-13 시즌 10월 20일 리그 8라운드에서 베르통헨의 크로스를 받아 헤딩으로 토트넘 데뷔 골을 넣었으나 후반전에 역전을 당해 팀은 4대2로 패배했다. 아이러니하게 득점한 팀은 전 소속팀인 첼시.

갈라스는 총 3년간 토트넘에서 활약하며 2010-11 시즌 팀의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2.1.5. 퍼스 글로리 FC

토트넘을 떠난 갈라스는 퍼스 글로리로 이적하여 1시즌 활약한 뒤 은퇴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2.2.1. UEFA 유로 2004

갈라스는 유로 2004에 참가해 프랑스가 8강에 올라가는데 공헌했지만, 8강에서 프랑스는 그리스의 수비 축구에 일격을 당해 패해 탈락한다.

마르셀 드사이, 릴리앙 튀랑, 미카엘 실베스트르라는 쟁쟁한 경쟁자들에 밀려 라이트백으로 뛰었지만 이것도 사실 무려 윌리 사뇰을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한 것이었다.

2.2.2. 2006 FIFA 월드컵 독일

마르셀 드사이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 뒤 릴리앙 튀랑과 호흡을 맞추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백으로 자리잡아 월드컵 기간동안 팀의 철벽 수비에 공헌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전에서 후반전 막판에 박지성이 동점골을 넣자 공을 하늘높이 쏘아올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차오른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는데[14] 한국에선 아직까지도 이때 장면의 임팩트가 매우 커서 해외축구에 관심이 떨어지는 사람도 이 장면으로 갈라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3. 플레이 스타일

수비수로서의 기량은 냉정히 말해서 최고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갈라스가 고평가를 받았던 것은 바로 여러 자리를 소화할 수 있는 멀티성, 즉 유틸리티 플레이어라는 점 때문이다. 무리뉴가 말한 스쿼드에 22명만 있어도 25명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멀티성 덕분에 어딜 가서든지 한자리는 차지했으며, 수비 능력이 말 그대로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뿐이지 전체적으로 뛰어난 편이었다. 키가 아주 큰 것도 아니고, 대인방어가 완벽한 것도 아니고, 태클이 최고 수준도 아니고, 게임을 읽고 차단하는 능력도 최고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 모든 걸 잘 해냈다. 또한 본업인 센터백 기준으로는 매우 빠른 발을 갖추었기에 첼시에서 웨인 브릿지가 부상을 당했을 때 종종 플레이한 왼쪽 풀백 자리에서도 원래 자기 포지션처럼 잘 뛰었고, 오른쪽 풀백을 보는데도 문제가 없어서 이 포지션으로도 종종 출장하였다. 요약하자면 포백의 어느 자리를 가든 한 가닥 하는 선수였다.

다만 본업이 센터백이기 때문에 풀백으로 출전했을 때의 공격력은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그러나 그걸 만회하고도 남는 뛰어난 세트피스 득점력을 선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비해 점프력이 좋고 오프더볼 상황이나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위치선정이 매우 탁월하여 헤더 옵션으로 활약했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84경기 5골을 기록했고 클럽에서도 첼시와 아스날 시절 도합 260경기 24골을 기록하는 맹위를 떨쳤다. 첼시 시절엔 존 테리, 히카르두 카르발류 등과 함께 첼시의 방패전설의 주역이 되었다. 이 기믹은 이후 갈라스가 떠난 뒤에도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 알렉스, 다비드 루이스, 게리 케이힐 등을 통해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속도와 높이 두 가지를 겸비했고 기술도 나름 괜찮은 수비수였으며, 실수하는 일도 굉장히 적었기에 여러모로 쓰임이 많았던 선수였다. 다만 개인으로는 풀백보다는 센터백으로 출장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기록

4.1.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국내 컵 대회 유럽 클럽 대항전 기타[15] 총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95/96 SM 캉 리그 2 16 0 0 0 0 0 0 0 0 - 16 0 0
96/97 리그 1 18 0 0 1 0 0 0 0 0 - 19 0 0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국내 컵 대회 유럽 클럽 대항전 기타 총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97/98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리그 1 3 0 0 0 0 0 0 0 0 - 3 0 0
98/99 30 0 0 1 0 0 9 0 0 - 40 0 0
99/00 22 0 0 1 0 0 7 1 0 - 30 1 0
00/01 30 2 0 0 0 0 0 0 0 - 30 2 0
합계 리그 1 103 2 0 3 0 0 16 1 0 - 122 3 0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국내 컵 대회 유럽 클럽 대항전 기타 총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01/02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30 1 0 8 1 0 3 0 0 - 41 2 0
02/03 38 4 1 8 0 0 2 0 0 - 48 4 1
03/04 29 0 0 5 0 0 11 1 0 - 45 1 0
04/05 28 2 1 6 0 0 12 0 0 - 46 2 1
05/06 34 5 1 3 0 1 7 0 0 1 0 0 45 5 2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국내 컵 대회 유럽 클럽 대항전 기타 총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06/07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21 3 0 2 0 0 6 0 0 - 29 3 0
07/08 31 4 0 3 0 0 8 0 0 - 42 4 0
08/09 23 2 0 4 1 0 9 3 0 - 36 6 0
09/10 26 3 0 1 0 0 8 1 1 - 35 4 1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국내 컵 대회 유럽 클럽 대항전 기타 총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10/11 토트넘 홋스퍼 FC 프리미어 리그 27 0 0 1 0 0 8 0 0 - 36 0 0
11/12 15 0 0 1 0 0 2 0 0 - 18 0 0
12/13 19 1 0 0 0 0 5 0 0 - 24 1 0
합계 프리미어 리그 321 25 3 42 2 1 81 5 1 1 0 0 445 32 5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국내 컵 대회 유럽 클럽 대항전 기타 총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13/14 퍼스 글로리 FC 호주 A리그 15 1 0 0 0 0 0 0 0 - 15 1 0
합계 호주 A리그 15 1 0 0 0 0 0 0 0 - 15 1 0
통산 455 28 3 45 2 1 97 6 1 1 0 0 598 35 5

4.2. 대회 기록

4.3. 개인 수상

5. 여담


[1] /wiljam eʁik ɡalas/. 프랑스어에서 자음 앞(m,n,h는 제외) 또는 어말에 오는 am, an은 프랑스 고유어로 여겨지는 이름인 경우 /ɑ̃/'앙'으로 발음되며, 외래어 또는 차용어로 여겨지는 이름인 경우 am은 /am/'암', an은 자음 앞에서는 /ɑ̃/'앙', 어말에서는 /an/'안'으로 발음된다. William은 프랑스어권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후자를 따른다. 참고로 프랑스어에서 William에 해당하는 이름은 기욤(Guillaume)이다. [2] 센터백, 풀백 [3] 갈라스는 이후 카르발류에게 밀리게 되어 센터백으로 출전하는 일이 적어졌는데 갈라스는 풀백으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나머지 좌우 풀백으로 기용되는 일이 많았다. [4] 갈라스는 존 테리와 함께 거의 전 경기에 출장했는데 존 테리는 중앙수비수로만 뛰었던 반면, 갈라스는 좌우 풀백과 중앙 수비수를 가리지 않고 뛰었다. 그래서 저 갈테갈갈이라는 말이 나온것이다. 그 나머지 자리는 델 오르노, 웨인 브릿지, 페레이라, 제레미, 후트, 카르발류가 뛰었다. 물론 카르발류가 이들 중에 제일 많이 출장했고 제일 좋은 폼을 보여주었으나 카르발류도 2005-06 시즌 초반 10경기 가량은 갈라스에게 밀려 벤치신세 였다. 2004-05 시즌 무실점 신기록때도 테리-카르발류가 아닌 테리-갈라스 조합이었고 딱 그 기간이 카르발류의 부상으로 인한 결장 기간이었다. [5] 포지션을 번갈아 뛰어서 그런지 갈라스가 후보인줄 아는 사람도 많다. 비슷하게 국내에서 첼시의 전성기였던 2004-05 시절 베스트 11을 뽑을때 그 시즌 31경기 선발포함 51경기를 뛴 티아구 멘데스도 같이 후보로 아는 경우가 많다. [6] 사실 대부분의 수비수들은 3번을 다는 것을 선호하는데 갈라스가 굉장히 독특한 것이다. 3번은 전형적으로 풀백들이 선호하는 번호이기 때문이다. 센터백들이 가장 선호하는 번호는 보통 4,5,6번 중에 하나이고, 풀백들은 보통 2,3번 중 하나를 고른다. 물론 모든 선수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갈라스는 풀백을 어지간히도 싫어했다. 아스날로 이적했을 때도 애슐리 콜이 떠나면서 공번이 된 3번을 배제하고 수비수임에도 10번을 단 이유가, 3번은 죽어도 싫어서였다는 이유가 있다. 이후 3번은 바카리 사냐가 달았다. [7] 게다가 13은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불운한 숫자로 보는 경향이 있어 필드플레이어들이 굳이 달려 하는 번호가 아니다. 대다수의 팀들은 아예 13번을 세컨드 골키퍼의 번호로 고정해 놓고 있다. [8] 갈라스는 2017년 8월,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니라고 못박았기는 했다. [9] 당장 06월드컵에서 센터백으로 나와서 전경기 풀타임으로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0] 많은 사람들이 무리뉴와 아브라모비치의 갈등이 셰브첸코, 발락 영입건이라고 하지만 2006-07 시즌의 문제점을 보면 갈등 상황은 공격, 미드 진이 아니다. 드록바가 터져주면서 셰브첸코는 벤치로 앉히면 그만이고 에시앙이 터져주면서 발락도 로테로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느 자리에 놔도 잘하던 갈라스를 내보냄으로 수비수가 한명 부상당하면 그대로 치명타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고 갈라스가 없으니 괜히 부상안당하던 에시앙이나 페레이라가 이자리 저자리 돌아다니면서 죽도록 고생했다. [11] 이에 대해 아르센 벵거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3번 등번호는 그에게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남아있는 등번호들을 제시했습니다. 등번호 10번을 수비수에게 부여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번호를 스트라이커에게 물려줬으면 데니스 베르캄프와 비교되어 주눅들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데니스 베르캄프의 번호를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것에 대해 주저했었습니다. 특히 수비수에게 말이죠. 하지만 종합적으로 보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언급하였으나 참고로 등번호 3번은 첼시 시절에 발락에게 13번을 빼앗기고 첼시가 주려고 한 등번호였기에 갈라스가 3번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소문이 있다. [12] 이후, 갈라스가 계약 만료로 아스날을 떠나면서 10번은 베르캄프의 후배 격인 로빈 반 페르시가 이어받았다. [13] 이 시기 전 소속팀 첼시는 수비수들의 줄부상으로 인해 에시앙과 페레이라가 센터백을 보기도 했고 골키퍼 역시 체흐와 쿠디치니의 큰 부상으로 써드 키퍼 일라리우가 주전으로 뛰는 등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갈라스 이적시킨건 미친 짓이었다고 팬들에게 까였다. [14] 갈라스로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동점골이 바로 자신의 눈앞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골 자체는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멋없게 들어가긴 했지만, 이게 묘하게 또 자신의 키보다 공이 높게 떠서 골망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골을 막을 방법은 손을 쓰는 방법밖에는 없었는데 그러면 자신은 핸들링 파울로 다이렉트 퇴장에 페널티 킥 확정이라서, 말 그대로 눈 앞에서 골이 들어가는데도 어쩌지도 못하고 골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을 것이다. [15] 각 리그의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