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52:51

우에스기 카게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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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당주
우에스기 카게카츠
上杉景勝
파일:Uesugi_Kagekatsu_Uesugi_Museum.png
<colbgcolor=#002f6b><colcolor=#fff> 출생 1556년 1월 8일
에치고국 우오누마군 우에다쇼
(현 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시)
사망 1623년 4월 19일 (향년 69세)
데와국 오키타마군
(현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마루노우치)
재임기간 제8대 우에다 나가오 당주
1564년 ~ 1575년
제17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당주
1578년 ~ 1623년 4월 19일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후계분쟁과 승계2.3. 오다가와의 싸움2.4. 히데요시에게 항복2.5. 전봉과 감봉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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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이자 에도시대 요네자와 번(米沢藩)[1]의 초대 번주.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로, 원래 이름은 나가오 아키카게(長尾顕景).

2. 생애

2.1. 출신

원래 켄신의 누이인 아야고젠의 아들로, 켄신의 원 성씨인 산조 나가오가(三条長尾家)의 방계인 우에다 나가오가(上田長尾家)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의 자식이다. 나가오 마사카게는 켄신이 형 나가오 하루카게(長尾晴景)를 몰아내고 에치고를 장악할 적에 최후까지 저항했음에도 이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집안 내에서 좋지 않은 본보기였다.

이후 나가오 마사카게가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定満)와 뱃놀이 도중 함께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난다.[2] 이로 인해 우사미 일족은 에치고에서 추방당했고,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카게카츠는 우에스기 켄신의 양자가 되었다

우에스기 켄신에게는 카게카츠 말고도 호조(北条) 가문에서 들인 양자 카게토라가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로,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누나 세이엔인과 결혼하고(즉, 카게카츠의 자형이다) 우에스기 켄신의 첫 이름이었던 카게토라(景虎)를 내려받아 우에스기 카게토라가 되었으며, 카게카츠보다 5년 정도 앞서 우에스기성을 사용했다. 게다가 켄신에게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家) 성[3] 관동관령(関東管領)[4]직을 양도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카게토라 편에 붙은 걸로 보아,[5] 켄신은 카게토라를 후계자로 삼고, 카게카츠를 보좌역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반대로 켄신 생전에 카게카츠에게 켄신의 관위였던 단죠노쇼히츠(弾正少弼)직을 물려준 점, 카게카츠의 저택이 카게토라의 저택보다 혼마루에 가까웠던 점, 켄신 생전에 작성된 '우에스기가 군역첩'에 카게카츠가 켄신을 부르는 호칭이었던 오미조사마(御実城様)와 비슷한 온나카조사마(御中城様)로 기록된 점 등에서 미루어볼 때 오히려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 또 카게토라에게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를, 카케카츠에게는 나가오 우에스기[6]를 잇게 하여 분가시키려 했다는 설 등 아직 역사학계에서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최근에는 각종 기록의 검토를 통해, 켄신 사후 바로 양자 간의 대립이 일어났다는 지금까지의 통설과는 달리 당대의 기록에는 켄신 사망 직후에는 오히려 그런 대립이 나타나지 않는 점,[7] 카게토라는 관동관령을 계승했음을 나타내는 존칭인 '야마노우치토노(山内殿)'라고 불린 기록이 없으나 오히려 카게카츠는 관동, 오우[8]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야마노우치토노로 불린 기록이 남아있는 점, 3월 말~4월에 걸쳐 카게카츠가 혼조 시게나가(本庄繁長) 등 아가키타슈(揚北衆)에 켄신 사망을 알리고 가독계승의 축하 등을 받은 기록이 있으나 카게토라에게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점, 또 4월 3일 카게카츠가 아이즈(会津)의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에게 켄신 사망과 가독 계승을 알리는 사절을 보내고 그 답례로 모리우지가 카스가야마성에 조문 사절을 파견하지만 이 사절을 카게카츠, 카게토라가 함께 맞이한 점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공식적으로는 카게카츠가 계승하게 되었으나 이후의 대우에 카게토라 파벌이 불만을 품고 분쟁이 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2.2. 후계분쟁과 승계

텐쇼(天正) 6년 3월 13일(1578년 4월 19일), 켄신이 사망한 후, 양자 간의 대립이 이어지다가 결국 무력 분쟁이 발발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카케카츠를 섬겼던 측근이었던 나오에 카네츠구의 활동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다. 다행히 선대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카키자키(柿崎), 기타조(北条)[9]등을 제외한 선대의 중신들 이로베(色部), 사이토(斎藤), 나카죠(中条), 아마카스(甘粕), 혼조(本庄) 등은 모두 카게카츠 파였다.[10]

분쟁의 시작은 의외로 카게카츠와 카게토라 양자간의 직접적인 충돌이 아니었다. 카게카츠가 가독을 계승하고 얼마 후인 3월 28일, 에치고 산조성(三条城) 성주였던 카나마리 치카츠나(神余親綱)가 아시나 씨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주변의 유력자들에게서 인질을 받은 것이 발견되자 카게카츠는 이것을 모반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여 카나마리를 질책하고, 카게카츠와 치카츠나를 중재하기 위해 전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우에스기 일문의 산폰지 사다나가(山本寺定長)[11]가 나섰으나 카게카츠의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중재는 결렬되고, 이로 인해 노리마사와 사다나가는 치카츠나에게 가담하여 5월 5일, 이들이 군대를 일으켜 카스가야마성을 공격하면서 무력 분쟁이 시작되게 된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카게토라는 아직 치카츠나의 군대에 가담하고 있지 않았고, 이후 5월 13일에 카스가야마성에서 노리마사의 저택인 오타테(御館)로 옮기고 지지세력이 더 모이고 난 후인 5월 17일에 직접 군대를 일으켜 다시 카스가야마성을 공격한다.

이로 미루어, 일단 카게카츠가 가독을 계승하였으나, 전대 켄신과는 달리 고압적인 태도로 호족 통제를 강화하며 중앙 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하자 여기에 반발한 호족들이 카게토라 파벌에 가담하면서 후계자 분쟁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초반에는 카게토라가 본가인 호조가와 호조가의 동맹이었던 다케다가의 후원을 받아 우세했으나, 카게카츠가 다케다 집안에 엄청난 뇌물을 먹이고[12] 타케다 신겐의 딸 키쿠히메(菊姫)와 결혼동맹을 맺는 등 후원을 얻었으므로 카게토라는 대패하고 도망가던 길에 죽었다. 난의 초반에는 외부세력의 힘을 등에 업은 카게토라의 세력이 명백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호조의 본대가 적대가문인 사타케(佐竹)-우츠노미야(宇都宮)의 연합군에 발이 묶여 진군이 늦어졌고 이후 다케다의 변심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패배하게 되었던 것.[13] 세이엔인은 동생인 카게카츠의 항복권고를 거부하고 자결하고, 카게토라의 아들은 누군가에게 암살되고, 궁지에 몰린 카게토라도 아내와 아들의 뒤를 따라 자결하면서 카게토라 가족은 멸망하고, 가독 분쟁은 카게카츠의 완승으로 끝난다. 이 사건을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 한다.

아무리 승계에 카네츠구가 공이 컸다고는 하지만, 그로부터 '애송이'라는 소릴 들으며 범재 취급을 당한걸 보면 그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네츠구는 아예 대놓고,
'돌아가신 어르신을 따라잡기는 요원한 일이나, 주군께서 어르신의 모습을 흉내내어 가만히 있고, 소인이 어르신의 군략을 흉내내면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했으며, 카게카츠도 이를 잘 따라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다만 이는 에도시대 군담소설 등에 나오는 이야기로, 실제로도 이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장 카네츠구는 카게카츠보다 5살 연하로, 카게카츠가 우에스기가의 당주가 되었을 때 카네츠구는 겨우 19살이었다. 더구나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자신의 직속 신하가 될 것을 요구했을 때, 카네츠구는 카게카츠에 대한 충정을 내세워 거절했다. 본인이 깔보던 주군 때문에 더 조건이 좋은 스카웃을 거절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켄신을 훌륭한 무장으로서 존경하고 있던 카게카츠는, 항상 켄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여 행동했다고 한다. 카게카츠가 늙어 병에 걸렸을 때 출가하여 소신(宗心)이라는 법명을 썼는데, 이는 켄신이 예전에 교토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었던 법명이다.

2.3. 오다가와의 싸움

그렇게 카게카츠가 우에스기 가의 당주가 되긴 했지만, 더한 시련이 오고 있었다. 먼저 은상문제로 중신인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가 시바타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시바타 시게이에의 난은 무츠의 아시나 모리타카와 다테 테루무네 등이 연루된 본격적인 반란이었다. 이 난이 진압된 것은 1587년으로 장장 6년 동안 에치고 북단을 되찾지 못했다. 여기에 호응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파견한 시바타 카츠이에 마에다 토시이에, 삿사 나리마사 등과 함께 엣추 방면에서 우에스기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14] 텐모쿠잔에서 다케다 카츠요리가 패사한 뒤에는, 북시나노 방면에서 모리 나가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가 북상해 카게카츠는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진다. 여기에 오타테의 난으로 틀어진 호조 가마저 코즈케 방면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마침내, 엣추가 오다 세력에 떨어지고, 이 때 카게카츠 본인도 옥쇄를 각오하고, 히타치의 다이묘 사타케 요시시게에게 "나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일본의 60여 주를 상대로, 에치고 일국을 가지고 도전하여 대치하고, 멸망하는 것은 사후의 추억이다."라는 내용의 유언장까지 보냈다.

하지만 곧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카게카츠는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이때 우에스기군이 워낙 거세게 저항해서 시바타 카츠이에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우에스기군과 싸우고 있었다. 결국 텐쇼 10년(1582년) 6월 3일에 우오즈성이 함락되지만, 곧 함락 전날인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바타 카츠이에는 급히 퇴각하고 우에스기군이 우오즈를 탈환했다. 그리고 후호조가와 협정을 맺고, 북시나노의 구령도 회복한다. 그러나 엣추를 지키던 삿사 나리마사의 반격으로 우오즈는 도로 내줬다.

2.4. 히데요시에게 항복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키요스 회의를 거쳐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대두된다.

카케카츠가 다이묘로서 히데요시와 상대할 것을 준비하고 있을 때, 히데요시는 시종 몇 명만 거느린채 카케카츠 진영을 직접 방문해서 카케카츠와의 강화를 이끌어낸다. 나름 뭐 담대한 히데요시같기도 하고 적국의 총대장을 그냥 보낸 카케카츠가 더 대인배같기도 하지만, 일화로는 단신으로 적국에 방문한 히데요시에게 감동했다는듯. 어쨌든 패배하여 항복한게 아니기에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의 대우 역시 거진 이에야스보다 약간 못한 정도였다.

어쨌든 이에 카게카츠도 이에 응해 히데요시를 지지,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토야마의 역에서 히데요시 측을 지원하여 히데요시의 신임을 산다. 히데요시에게 복종하고 그를 지원하면서 카게카츠는 사도 섬, 쇼나이 지방[15] 등을 점령하고 이를 영지로 인정받으며 우에스기의 판도를 넓혔다.

이후, 1586년에 상경해 히데요시와 회견해 신종, 오기마치 덴노를 알현해 좌근위소장에 서임된다. 이후 1588년 재차 상경하여 도요토미의 카바네(姓)와 하시바 묘지(苗字)를 하사받고 참의로 승서되었다.[16]

2.5. 전봉과 감봉

임진왜란 때는 이에야스와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한 다이묘가 아니기에 히데요시도 대대적으로 참전을 요청하기는 힘들었고, 이에 카케카츠도 1592 6.9 ~ 9.8 딱 3개월간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나오에 카네츠구와 다카나시 요리치카(高梨頼親) 등을 대동하여 조선으로 도해하여 현재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웅천왜성을 축성하였고, 그 기간 동안에도 싸움보다는 조선에서 서적을 털어가고 사람들을 납치해가는데 열을 올렸다고 한다.

1594년 관위가 중납언으로 승서되고, 1597년에는 오대로의 일원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오대로가 되었다.[17]

1598년 1월, 히데요시는 당대 강력한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해 이 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카게카츠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번으로 전봉시키고 원래 90만석이던 아이즈를 120만석으로 규모를 더 키워줘 전국 넘버3에 들어갔다. 아이즈는 그 중요성 때문에 히데요시도 특별히 가모 우지사토에게 맡긴 영지였으나, 우지사토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아들 히데유키는 어려서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아이즈를 가모 가문에서 우에스기 가문에게로 옮긴 것이다. 원래 영지였던 에치고는 호리 가문에게로 돌아갔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얼마 전, 카게카츠는 후시미저택을 떠나 아이즈 영지로 돌아가서 군비를 증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발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토벌군을 이끌고 출발했으나 아이즈로 향하는 도중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을 듣고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대신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집안을 상대하도록 했다. 우에스기 군은 무문의 명문답게 다테군을 박살내며 선전했지만, 세키가하라의 패전소식이 전해지자 사기가 떨어지고 후퇴 및 수비 일변도로 변하여 모가미군과 다테군의 반공에 시달렸다.

패전 후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 와서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마디했을 뿐이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죄를 요구했고, 1601년 8월 16일.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오사카성을 찾아가 이에야스에게 사죄한다. 그리고 원래 영지인 아이즈의 북쪽 일부였던 요네자와로 영지를 옮기게 되고, 고쿠다카는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4분의 1까지 줄어든다. 원래 이에야스는 가이에키[18] 처벌을 생각했으나 이에야스의 차남이자 우에스기 토벌군 대장이었던 유키 히데야스가 카게카츠를 높게 평가하여 적극적으로 구명하고, 나오에 카네츠구가 혼다 마사노부를 만나 나오에가의 후계자를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로 정하기로 한 끝에 가이에키는 면할 수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신종한 이후로는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측으로 출진, 겨울의 전투에서는 시기노, 이마후쿠에서 오오노 하루나가가 이끄는 도요토미군을 패퇴시키고 사타케군을 구원하는 등 전공을 세웠고, 여름의 전투에서는 교토 경비를 맡았다.

참고로 카게카츠의 인품에 매료된 가신들이 감봉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떠나질 않아서 에도시대 초기 우에스기 가문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한다.[19]

게다가 요네자와번 4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노리(上杉綱憲)[20] 시절엔 30만석의 절반인 15만석으로 감봉까지 되었다. 원래 3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카츠(上杉綱勝)가 아들도 없는 상태에서 양자 같은 후계자 지명도 없이 급사했기 때문에 후계자 없는 요네자와번은 원칙적으론 가이에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츠나카츠의 장인인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21]의 노력으로 츠나노리를 말기양자[22]로 들이는 것과 영지의 절반인 15만석 감봉의 조건으로 겨우 가이에키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에스기 가의 재정난은 계속되고, 후대 번주(藩主)들은 어떻게든 감봉된 영지의 회복을 꾀하고자 없는 돈에 까지 끌어다 로비까지 했는데,[23] 오히려 이는 빚만 더 늘려서 막부에 영지를 반납할 것을 고려할 수준의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 재정난은 18세기 요네자와 번의 9대 번주 우에스기 요잔이 단순한 절약만이 아닌 적극적인 식산흥업과 복지정책, 의식개혁을 일으킨 덕에 그 만년에야 겨우 어찌어찌 수습된 뒤[24][25] 지역 명사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몬 후유지가 쓴 소설 우에스기 요잔(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불씨)에 이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전투씬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전투를 다룬 소설처럼 치열함이 느껴진다.

도쿠가와 가문과는 안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우에스기 가문이지만, 보신전쟁시에는 의리를 지켜서 아이즈 번, 센다이 번 등과 함께 오우에츠열번동맹을 결성, 좌막파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고, 판적봉환이 실시되면서 요네자와도 몰수된다. 그래도 후손들은 신정부로부터 본가는 백작, 지번은 자작위를 받는 등 화족으로 대우받고 관직도 부여받으며 나름 좋은 대접을 받았다.

2021년 현재 요네자와 우에스기가의 당주는 카게카츠의 15대손에 해당하는 우에스기 쿠니노리(上杉邦憲, 1943년생)라는 사람인데, 우주공학자였다가 2006년 정년 은퇴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우에스기의 본거지 요네자와에서도 시립 우에스기 박물관을 우에스기가의 재단이 운영하는 등 지역유지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그 동생인 우에스기 다카하루(上杉隆治)는 음악가였다.(2004년 사망) 이 두 사람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출신이라서 오늘날 도쿠가와 종가와 요네자와 우에스기가는 인척 관계인 셈이다.[26]

3. 평가

에도시대 초기에는 우에스기 집안 내에서도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저평가를 당했지만, 후에 긍정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믿을 수 있는 사나이', '무문명가의 대장' 같은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요네자와 번[27] 우에스기 가의 일사불란한 가풍과 무문 모두의 명문이라는 자긍심은 카게카츠의 대에 와서 확립된 것이라 볼 수 있다.

4. 기타

  • 말수가 적고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지라 온 집안의 사람들이 카게카츠를 두려워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후시미에서 여러 영주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 연회장의 멤버 중에는 가부키모노로 유명한 마에다 케이지가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마에다 케이지가 말석에서 일어나 원숭이 가면을 쓰고 천을 뒤집어 쓴 채 부채를 펄럭이면서 온몸과 손발을 떠는 등 영주들 앞에서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을 추기 시작했다. 케이지는 나란히 앉아 있는 영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무릎 위에 앉아 원숭이 흉내를 냈는데 케이지는 카게카츠 앞에 오자 그 위풍에 압도되어 도저히 무릎에 앉을 수 없었다고 한다. 케이지는 그 때 카게카츠의 의연한 인물됨을 순식간에 꿰뚫어보고 훗날 "천하가 넓다고 해도 진정 내 주군으로 모실만한 분은 아이즈의 카게카츠 님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카게카츠는 평생 남의 앞에서 웃은 적이 없어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어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루는 카게카츠가 키우던 애완 원숭이가 카게카츠가 무게를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따라했는데 카게카츠는 가신들 앞에서 이 모습을 보고 뜻하지 않게 피식 하고 웃었다고 한다. 이 웃음이 카게카츠가 남에게 보인 단 1번의 웃음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무표정했는지 알 만하다.
  • 평생의 가신이었던 나오에 가네츠구의 부음을 전해 듣고는 "주군보다 먼저 죽는 가신이 어디 있느냐."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냉철하고 감정 표현을 잘 안 하기로 유명했던 카게카츠가 이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으니 카네츠구에 대한 카게카츠의 신뢰를 엿볼 수 있다.

5. 대중매체에서

5.1. 란스 시리즈

모에화되어 우에스기 카츠코로서 등장.

5.2.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上杉景勝1.jpg 파일:上杉景勝2.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pk2312.jpg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파일:F9WfVDjaMAAz8kb.jpg
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어느정도의 전투형 만능 다이묘이다. 양아버지보다는 통솔, 무력이 낮지만 다른 능력치인 지력, 정치는 양아버지보다 높다. 물론 켄신이 지력, 정치가 너무 낮은 이유가 있지만.

천하창세에서는 마지막 등장 기준으로 정치:80, 통솔:85, 지력:67, 교양:67, 특기:기마2, 철벽,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양아버지가 있든 없든 쓸만한 무장.

천도에서는 통솔 90, 무용 87, 지략 71, 정치 84에 전법이 양아버지의 전법인 차현지비로 비록 양아버지만큼은 못하지만 역시 쓸만하다.

창조에서는 통솔 83, 무용 80, 지략 70, 정치 82에 보수 성격으로 전작보다 하향된 것으로 보이나, 천도는 능력치 최고가 120, 창조는 초기에 100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상당히 상향된 편이다. 천도처럼 최고치 120으로 계산하면 지략만 빼고 모두 90이 넘는 특급 능력치다. 또한 창조 역시 경험을 통해 120까지 능력치 상향이 가능하기 때문에 최종능력치는 아니다.

코에이 삼국지 12에서는 등장하는데. 어째선지 병종이 창병에 전법이 기병격봉인이라서 기병이 득실한 우에스기보다는 유비, 원소, 오다 노부나가에게 쓸만한 무장이다.

5.3. 센고쿠히메

역사대로 켄신의 양자. 남자다. 능력치도 미묘하게 낮다. 말수가 적어서 어깨위의 원숭이인 사루가 대신 의사소통을 한다. 검덕후.

5.4. 전국무쌍 시리즈

우에스기 카게카츠(전국무쌍) 항목 참조.

5.5. 태합입지전 5

큰 비중은 없으나 우에스기 켄신 카드를 얻기위해선 플레이해야 할 인물. 우에스기 켄신 병사 이벤트를 볼 경우 후계자가 되고, 켄신의 주인공 카드를 얻게 된다. 이 방법외에 켄신의 카드를 얻는 방법은 시바타 가츠이에로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뿐이다.


[1] 현재의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일대. [2] 과거에는 사다미츠가 켄신의 명령을 받아 익사를 위장해 암살한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현재로는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있다. [3] 참고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씨는 후지와라 계통이고, 본디 켄신의 성씨인 나가오씨는 타이라 계통이다. [4] 무로마치 막부에서 관동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간토쿠보(関東公方)를 보좌하기 위한 집사직.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는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외가였기때문에 이후 대대로 당주가 관동관령을 맡았다. [5]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카와고에 야전에서 카게토라의 아버지 호조 우지야스에게 패해 에치고로 도망친 사람이다. [6] 우에스기 켄신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를 계승한 이후의 우에스기를 나가오 우에스기라고 별칭하기도 한다. [7] 이 시기에 카키자키 하루이에(柿崎晴家)가 암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마다 사인이 달라서 확실하지 않다. [8] 奥羽, 지금의 도호쿠 지역인 오슈(奥州), 우슈(羽州)를 합쳐서 칭하는 말이다. [9] 가키자키가는 선대 당주 카키자키 카게이에(柿崎景家)가 켄신에게 모반의혹을 사서 살해당했고, 기타조는 선대 기타조 타카히로(北条高広) 대부터 누차에 걸쳐 타케다, 호조가와 밀약을 맺고 모반을 일으킨 바 있다. [10] 혼조 시게나가가 이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서 간혹 카게토라 파였다고 잘못 아는 사람도 있다 [11] 우에스기씨의 방계인 산폰지 우에스기씨의 당주 [12] 선수를 쳐 거성인 가스가야마 성을 장악하고 성내에 그동안 모아둔 막대한 양의 황금을 적절하게 이용한게 컸다. 영지인 에치고에는 다케다의 가이와 마찬가지로 금광이 많았다. [13] 그렇다고 다케다가 원군을 보내서 승부가 결정 난 것은 아니고, 그냥 카게카츠군과 카게토라군이 외부지원 없이 붙어서 카게토라가 패배한 것이었다. [14] 발음은 둘다 시바타에 이름도 비슷하지만 시바타 시게이에는 新発田씨고, 시바타 카츠이에는 柴田씨다. [15] 야마가타현 북부 [16] 이때 나오에 카네츠구, 스다 미츠치카(須田満親), 이로베 나가자네(色部長実) 등의 유력 가신도 도요토미 카바네를 함께 하사받았다. 단, 가신들은 하시바 묘지까지 하사받은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카바네는 자기가 키운 가신 출신인 중소 다이묘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는 배신(陪臣)에 불과한 타 다이묘의 가신들에게까지 널리 하사했으나, 하시바 묘지는 소수의 대다이묘들에게만 하사했다. 카바네와 묘지의 차이에 대해서는 우지(성씨) 참고. [17] 다만 타카카게 생전부터 카게카츠는 타카카게와 함께 온오키테(御掟)에 서명하며 그와 동격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8] 영지 전부를 몰수하는 조치. [19] 다른 가문의 경우 어쩔 수 없이 가신들을 정리해고하여 살 길을 도모했지만 우에스기 가는 차마 가신들을 내버릴 수 없어 정리해고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비유하자면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백성들을 모두 이끌고 힘들게 도망치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대폭의 감봉 및 전봉된 다이묘들 상당수는 영지를 이전하면서 기존의 가신들에게 매우 촉박한 기한을 급작스럽게 통보하여 이동을 명령하고 많은 가신들을 기일을 지키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해고하는 등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죠슈의 모리 등은 전봉이 아니라 기존 영지의 3~4분의 1로 영지가 감봉되어 훨씬 적어진 고쿠다카로 기존의 가신단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런 외양 웅번들은 에도 막부 내내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점점 해당 지역들의 농업생산력이 높아지면서 19세기 무렵에는 번의 재정이 상당히 회복되기도 했다. [20] 추신구라에서 악역을 담당한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의 장남, 요시히사의 정실이 요네자와번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츠(上杉定勝)의 딸. 키라 요시히사의 조상에서 두 번 외가를 건너면 전국시대에 망한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씨(扇谷上杉氏)의 혈통으로 이어진다. [21] 에도 막부 2대 쇼군이었지만 공처가였던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가 아내가 무서워 숨겨둔 자식으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이복동생이 된다. 형 이에미츠에게 꽤나 중용되어 아이즈 번까지 받았다. [22] 생전이 아닌 사후에 들인 양자. 한국사로 치면 봉사손과도 비슷하다. [23]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규모가 큰 번들은 막부에 청원해서 막부로부터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리로 공식적인 대부금을 받는 경우 또한 있었다. [24] 15년만에 빚을 갚는데 성공했다. 단순히 빚만 갚은게 아니라 재정상태도 얼추 괜찮아 졌는지 대기근이 닥쳤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종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고(에도시대에만 해도 중앙집권제가 아니다 보니 기근의 피해는 각 번들의 재정상태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25]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요잔의 노력 덕인지 몰라도 그의 시기 말엽에는 텐메이 대기근이 일본을 덮쳤는데 요네자와 번은 피해가 없던 4개의 번 중 하나였다. [26] 쿠니노리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17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마사의 장녀이기 때문에, 이에마사의 차녀의 아들인 18대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와는 사촌 관계가 된다. 참고로 츠네나리는 막말의 교토수호직으로 유명한 아이즈 번 9대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증손자로, 아들이 없는 외할아버지 이에마사의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종가를 계승했다. [27] 전술했듯이 본래 우에스기의 영지는 에치고였지만, 도요토미 시대에 아이즈로 전봉되었고, 세키가하라 패전 후에 감봉되면서 요네자와의 영지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