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4 16:12:40

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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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라틴 십자가.svg 동방교회의 4대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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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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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1. 개요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사망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리스어: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1]
라틴어: Joannes Chrysostomus
영어: John Chrysostom

349년경부터 407년까지 살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이자 동방의 4대 교부 중 하나인 그리스도교 성인이다.

한국어 표기는 어느 언어의 이름을 기준으로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일단 퍼스트네임은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한'으로 통일하고, 요한 금구[2],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 요한 크리소스토모[4], 요한 크리소스토모스[5], 요한 크리소스톰[6] 등으로 옮긴다. 라틴어 표기를 그대로 옮겨서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라고 읽기도 한다.

'크리소스토모스'는 그의 뛰어난 설교 능력을 기리는 별칭인데, '금구'(金口) 즉 '황금 입'을 가진 이라는 뜻이다.[7] 때문에 연설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2. 생애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47년 안티오키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리바니우스에게서 수사학을 배워 변호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생각을 바꾸어 372년 세례를 받았으며, 안티오키아의 디오도루스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가서 성서 주석을 배우고 수행하였다.[8] 이후 안티오키아를 떠나 4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으며, 그 후 2년 동안 홀로 동굴에서 지내면서 날마다 성경을 되새김질하며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성경을 전부 외웠다고 한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뒤 부제 서품을 받고 5년 동안 부제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다가 386년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였던 넥타리우스의 뒤를 이어 398년 동로마 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로부터 후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크리소스토모는 에페수스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 성직을 사고 팔며 돈벌이하던 주교 6명을 면직시키고, 세속적인 욕심에 가득 차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누리던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부잣집만 골라 다니며 호사를 누리던 수도자들을 소속 수도원으로 돌려보냈다.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의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썼다.

평신도들도 복음에 따라 살아갈 것을 권유했고 성서 읽기에 몰두할 것을 요청했다. 거의 700여 편에 이를 만큼 신약과 구약에 관한 설교를 남겼는데, 특히 사도 바울로의 서간집을 애독했다고 한다. 성서 인용에 사도 바울로를 자주 언급했고 사도 바울로 서간집을 직접 주해하기도 했다.

당시 동로마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강단에서 사치와 부도덕을 여러 차례 비난하는 걸 자신의 정치 권력에 대한 도전 및 규탄으로 받아들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63px-John_Chrysostom_and_Aelia_Eudoxia.jpg
"…가난이 말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난하게 파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완전한 자유로 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는 강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해나 손상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들, 황금, 재산, 일, 끝없는 욕심, 사회적 야심, 끝없는 필요 등 모든 것이 그를 억누르고 사로잡습니다.”
<히브리서 강해> 18, PG 63,137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재물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탓에 가치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누가 행복하다는 말은 그가 돈이 있다는 뜻이요, 누구를 동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게 없다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누가 재물을 모으려고 어떻게 했다거나, 다른 누구는 어찌하다 파산에 이르렀다거나 하는 것들뿐입니다. 누가 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무슨 직업을 가지려 할 때는, 그것이 빠른 시일 안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인지 분명할 때만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우리는 이러한 악을 어떻게 쫓아버릴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여러분을 종으로 삼고 있는 맘몬을 언제까지 재갈을 물리지 않은 채 방치할 작정입니까? 여러분은 언제까지 돈의 종 노릇을 할 작정입니까? 언제가 되어야 여러분은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까? 만일 사람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얻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겠지만, 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여러분은 이 무서운 종노릇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돈이라는 폭군에 잡힌 삶은 사람의 종 노릇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
< 마태오 복음서 강해> PG58, 790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은 것을 볼 때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바깥 거리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시는 그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곳( 성당)에서 비단옷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9]라고 말씀하신 분이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10]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은 분입니다.

제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비단으로 된 제대보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필요로 하시며, 거리에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에 금잔들이 즐비하지만 그분 자신이 굶어 죽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먼저 배고픈 이를 먹여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로 식탁을 장식하십시오. 여러분은 금잔을 만들게 하면서 배고픈 이에게 물 한 잔을 주지 않습니다. 이로써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제대를 금으로 된 제대보로 꾸미면서 헐벗은 이에게 필요한 옷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그네로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보거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나그네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당의 바닥과 벽과 온 기둥을 장식합니다. 등경에다 은으로 된 사슬을 매달면서 감옥에서 사슬에 매여 있는 그분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성당을 이런 물건들로 장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물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예물을 바치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 협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고소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떨어지게 되고 악마들과 함께 고초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마태오 복음 강해> 50, 3~4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제정한 모든 법률과 규정이 선한 것이요 따라서 이의 없이 복종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

에우독시아 황후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파면시키기 위해 교회 안에 있던 그의 정적들 및 험담가들과 손을 잡고 403년부터 끊임없이 총대주교 파면을 시도했다. 그 중에는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의 수장인 키릴로스도 있었다.

결국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우스는 아내의 뜻을 따라 느티나무골 주교회의(Σύνοδος ἐπί Δρῦν, Synodus ad Quercum)에 압력을 넣어 크리소스토무스 주교를 실각시켜 추방했다. 크리소스토모의 추방에 반대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404년 6월 20일 폭동을 일으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파괴했다.[11]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르메니아의 작은 마을로 유배되었으나 그의 영향력을 여전히 두려워한 무리가 황제를 부추겨 다시금 그를 흑해 동쪽 해안에 있는 피티우스라는 곳으로 옮겼다. 407년 9월 14일 크리소스토모는 최종 유배지에 다다르지 못한 채 가는 도중 향년 60세에 사망했다.

사망 5년 뒤인 412년에 로마의 주교인 교황 인노첸시오 1세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438년 그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도 교회에 안치했다. 이후 유해는 1626년 5월 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져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었다.

3. 평가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정교회 및 동방 교회에서 특히 존경하는 성인이다. 대략적으로 서방 그리스도인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바라보는 것에 대응한다.

넓게 보면 크리소스토모스와 키릴로스의 대립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을 대표하는 안티오키아파및 알렉산드리아파 사이의 경쟁심에서 비롯한 알력도 있었다 ( 성서해석학 문서 참조). 아주 거칠게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을 우의적 의미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문필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12] 즉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경쟁이라는 맥락에 요한의 인생사가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서방 교회에서도 그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성공회 루터교회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공경한다. 정교회는 11월 13일을, 서방 교회는 9월 13일을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의 축일로 지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이름을 붙은,[13] 성찬예배(Η Θεία Λειτουργία του Χρυσοστόμου)가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말기 이래 비잔틴 예법에서 표준 양식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비잔틴 예법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과, 정교회가 가장 많이 봉헌하는 전례 양식이다.

4. 기타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남긴 저서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학자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중 총 6권으로 된 「사제직」(De sacerdotio)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대표적 저서로 꼽히는데 우아한 문장과 숭고한 신학적 사상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그외 수도생활에 관한 「테오도로에게 권고」「진정한 참회」 등이 있으며 236편의 서간도 전해진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저서 대부분은 미뉴(J.P.Migne)의 교부 전집에 18권 분량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개인적 명성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높은 가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저서들은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노와 비교될만 하다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14]

한국에는 아침이슬에서 지혜의우물 시리즈 2번째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어록이 <단순하게 살기>가 번역되어 있고, 388년(혹은 389년)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대해 연속적으로 설교한 내용이 2009년과 2019년에 각기 『부자』와 『라자로에 대한 강해(1-7편)』로 번역되었다. 분도출판사에서 『참회에 관한 설교/자선(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7)』를 번역 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분도출판사에서는 앞서 2016년에 루돌프 브렌들레가 쓴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기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고대 교회 한 개혁가의 초상』을 번역 출간하였다. 번역자는 이종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고 싶은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한국의 천주교 안동교구 3대 교구장 권혁주 주교의 세례명이 요한 크리소스토모이다.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고 있었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소설가 한수산 역시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세례명을 요한 크리소스토모로 삼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세례명에도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포함되어 있다.

[1] 로마자 전사: Iōannēs o Chrysostomos [2] Χρυσόστομος를 번역. 과거에 한국 가톨릭에서 가장 널리 사용한 표기 [3] 라틴어 음차. 주로 한국 가톨릭 교부학에서 사용하는 표기. [4] 한국 가톨릭의 관용적인 라틴어 남성 인명 표기법을 따른 방식.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으나 라틴어로 단수 주격이 -us로 끝나는 이름은 -오 형태로 옮긴다. 한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현대 이탈리아어 등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5] 전치사를 생략하고 그리스어 음차. [6] 영어 음차 [7] 때문에 주교들 가운데 '요안 금구'라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도 많으며, 본 항목도 '요한 금구'라고 입력해도 들어올 수 있다. [8] 매우 거칠게 무리해서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초기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맞서 문헌 실증을 외치며 우의보다는 집필 당시의 역사적 상황 및 정황을 교차 검증하는 것을 중시했다. 물론 이건 상대적인 차이를 강조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론 알렉산드리아 학파인 오리게네스도 문필적 의미로 잘만 주석했고, 안티오키아에서도 우의적 해석을 포기하지 않았다. [9] 마르코 복음서 14장 22절 [10] 마태오의 복음서 25장 45절 [11]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다. 이것도 120여 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2번째 하기아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하기아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남아 있다. [12]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비시키기 위한 거친 이분법에 불과함을 명심해야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이미 오리게네스 시절에도 헥사플라를 써가며 성경의 문필적 의미를 파고들었고, 안티오키아 학파는 모든 구약 구절이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지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즉 두 학파의 차이는 거친 요약보다 훨씬 미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서로에게 위화감을 느낄 정도의 불쾌한 골짜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3] 물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가 이 전례의 모든 부분을 만든 것도 아니고, 성 요한 금구의 시대 이후로 전례가 불변한 것도 아니지만, 관습에 따라 이 전례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성찬예배라 부른다. [14] 다만 아우구스티누스와 비교하면, 세속적 기준으론 고통스러운 삶이였다. 황실 수사학 교수-히포의 주교-펠라지우스에게의 승리 등 이교 시절에도 그리스도인 시절에도 승승장구한 인생을 살았고 인간 관계도 소위 인싸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 비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빈말로라도 인간관계가 좋다고 하기 어려웠고 교회 정치적으로는 패배자 포지션이었으며 사후에야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