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2:23:27

에밀 헤스키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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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에밀 헤스키
Emile Heskey
본명 에밀 윌리엄 아이반호 헤스키
Emile William Ivanhoe Heskey
출생 1978년 1월 11일 ([age(1978-01-11)]세)
영국 잉글랜드 레스터셔 레스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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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8cm
포지션 스트라이커
소속 선수 레스터 시티 FC (1994~2000)
리버풀 FC (2000~2004)
버밍엄 시티 FC (2004~2006)
위건 애슬레틱 FC (2006~2009)
아스톤 빌라 FC (2009~2012)
뉴캐슬 유나이티드 제츠 FC (2012~2014)
볼튼 원더러스 FC (2014~2016)
국가대표 62경기 7골 ( 잉글랜드 / 199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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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2. 선수 경력

2.1. 레스터 시티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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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키는 1978년 1월 11일 과테말라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레스터의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는 업주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 선수가 되기를 소원했고 레스터의 지역 유스팀에 들어와서 축구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후 헤스키는 9살에 레스터 시티의 축구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수년간 체계적인 훈련을 수행했다.

헤스키는 1994년 16살의 나이에 레스터 유스팀에 소속되었고 1년 뒤인 1995년 3월 8일에 QPR과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레스터는 그 시즌에 디비전 1(현재의 챔피언십)로 강등되었고 헤스키는 10월 3월에 정식으로 프로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곧 1995-96 시즌 팀의 주전 선수가 되었고 리그 30경기에 출장하여 7골을 기록하며 팀이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는 데 기여했다.

1996-97 시즌, 헤스키는 자신의 첫 프리미어리그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다. 그는 35경기에 출장하여 10골을 기록했고 1997년 리그컵 결승전에서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견인했다. 다음해, 리즈 유나이티드와 토트넘 핫스퍼가 그를 영입하려고 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그는 그 시즌에서도 35경기에 출장하여 10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레스터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1998-99 시즌때 그는 겨우 6골만 기록했고 팬들은 그가 쉬운 골을 너무 많이 놓치고 너무 쉽게 넘어진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헤스키는 골을 넣는 것보다 동료 스트라이커를 각성시키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레스터에서 동료 스트라이커 토키 코티를 위해 찬스를 많이 만들어줬고 자신이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슛을 날리지 않고 동료들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이타적인 플레이는 팀이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는데 보탬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레스터 감독이었던 마틴 오닐은 헤스키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헤스키는 1999-2000 시즌에 23경기에 출장하여 7골을 넣었고 리그컵 결승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를 도와 2번째 리그컵 우승을 달성했다.

2.2. 리버풀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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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드와 함께 골 세레머니를 벌이고 있는 헤스키

헤스키는 2000년 3월 10일 11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고 리버풀로 이적했다. 이 금액은 당시까지 리버풀이 지불한 이적료 중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팬들은 골을 많이 넣지 못하는 공격수를 엄청난 돈을 주고 데려오냐며 반발했다. 이에 당시 리버풀 감독이었던 제라르 울리에는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훨씬 성장할 가능성이 많은 선수다."라며 팬들에게 기다려줄 것을 호소했다. 헤스키는 당시 리버풀의 주전 공격수였던 로비 파울러, 이안 러쉬의 대체자로 영입되었고 리버풀 유스팀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던 마이클 오언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헤스키는 2000년 3월 11일 선덜랜드 AFC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4월 1일 코벤트리 시티와의 경기에서 첫번째 골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2000년 3월부터 5월까지 12경기에 출장하여 3골을 기록했다.

그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 시기는 이듬해인 2000-01 시즌이었다. 그는 이 시즌에 리그에서 36경기 출장하여 14골, FA컵 5경기에 출장하여 5골, 유로파 대회에서 11경기에 출장하여 3골을 기록하는 등 총합 56경기에 출장하여 22골을 기록했다. 특히 2001년 5월 12일 FA컵 결승전에선 로비 파울러에게 결정적인 쓰루패스를 전달하고 파울러가 이를 넣음으로서, 리버풀은 아스날을 2:1로 격파하고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헤스키는 2001 UEFA 슈퍼컵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팀의 2번째 골을 기록하며 3:2 승리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헤스키는 2002년 12월에 토트넘으로부터 1200만 파운드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에 휩싸였지만, 울리에는 그를 계속 잡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 시즌에 51경기에 출장했는데, 이는 리버풀 내 스트라이커 중 가장 많은 출장 기록이었다. 하지만 헤스키는 리그에서 6골, 유럽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하며 52경기 동안 겨우 9골만 기록했고, 팬들은 골을 지지리도 못넣는데 너무 많은 기회를 준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2003-04 시즌, 헤스키는 리그 35경기에 출장하여 7골을 기록하는 등 종합 42경기에 출장 12골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 그는 버밍엄 시티의 제의를 받고 리버풀을 떠났다. 그는 리버풀에서 223경기에 출장하여 60골을 기록했다. 확실히 출장 수에 비하면 골수는 적은 편이다. 하지만 오언 등이 그의 도움을 받으며 부쩍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리버풀에게 많은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다.

2.3. 버밍엄 시티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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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키는 버밍엄으로 이적한 후 350만 파운드의 주급을 받게 되었는데, 이 주급은 추가 보너스를 모두 수령할 경우 625만 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서 그는 버밍엄에서 가장 많은 주급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그는 프리시즌에 CA 오사수나와의 친선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했다. 버밍엄 팬들은 그가 이적하자마자 드러눕는 게 아닌가 싶어 기겁했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2004-05 시즌 개막전에 출전할 수 있었다. 헤스키는 8월 24일 맨시티와의 리그 3차전에서 헤딩골을 기록하며 버밍엄에서의 데뷔골을 기록했다. 버밍엄은 이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버밍엄은 부진에 휩싸였지만, 헤스키는 팀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였고 리그 34경기에 출장하여 10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버밍엄에서 가장 많은 골 기록이었다.

그는 2005-06 시즌에서도 거의 모든 경기에 출장했다. 2006년 4월 19일에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상대의 깊은 태클로 무릎 부상을 입었지만 놀랍게도 바로 사흘 뒤인 4월 22일에 에버튼과의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문제는 골을 넣질 못했다. 그는 리그 34경기에 출전했지만 불과 4골만 기록했고 팀은 챔피언쉽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버밍엄 팬들은 지난 시즌에 비해 헤스키가 성의없이 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야유를 퍼부었다. 또한 버밍엄의 축구 디렉터 커렌 브래디는 팀이 강등되었으니 150만 파운드의 보너스를 지급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헤스키는 불만이 쌓인 끝에 2006년 5월 7일 위건으로 전격 이적했다.

2.4. 위건 애슬레틱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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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키는 2006년 8월 19일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지만 팀은 2:1로 패했다. 그리고 8월 26일, 헤스키는 자신의 프로 데뷔 이후 500번째 경기를 맞이하여 레딩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2006-07 시즌에 36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기록했다.

헤스키는 2007-08 시즌에 30경기에 출장하여 4골을 기록했다. 골을 적게 넣은 건 분명하지만 골의 순도는 매우 높았다. 그는 2008년 4월 14일 첼시를 상대로 추가시간에 극적인 골을 기록하며 승리, 팀을 강등권에서 구원했고[1] 시즌 최종전인 토트넘 전에서도 1:0으로 지고 있던 후반 막판에 동점골을 기록하며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이후 2008-09 시즌 중반, 헤스키는 자신의 친정팀인 리버풀로 이적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위건의 감독 스티브 브루스는 그의 이적을 만류했다. 결국 헤스키는 리버풀로 돌아가지 못했다. 헤스키는 계약만료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겨울에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에 휩싸였지만 계약을 끝까지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다가 2009년 1월 막판에 아스톤 빌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자, 그는 이를 수락하고 위건을 떠났다. 헤스키는 2008-09 시즌에 팀을 떠날 때까지 20경기 동안 3골을 넣었다.

2.5. 아스톤 빌라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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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3일, 헤스키는 아스톤 빌라와 3년 6개월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그해 1월 27일에 포츠머스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그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 그는 이후 잔여 시즌 동안 14경기에 출장하여 2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헤스키는 2009-10 시즌 때 잔부상에 시달려서 제대로 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 아스톤빌라의 감독이었던 마틴 오닐은 그를 계속 신임했고, 헤스키는 42경기에 출장하여 5골만 기록했다.

2010-11 시즌, 리버풀 시절 그와 함께 리버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제라르 울리에가 아스톤빌 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은사의 후원을 받으며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헤스키는 부상에 시달리면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고 초반에 2연속 골을 기록하며 기분좋게 출발했던 그는 곧 기세가 죽어버렸다. 결국 그는 그 시즌에서 리그 19경기 3골을 기록하는 부진에 시달렸다. 게다가 그는 2011년 5월 7일 위건과의 경기에서 불미스런 일에 연루되었다. 이날 헤스키는 상대 선수 안톨린 알카라스에게 팔꿈치로 얻어맞았는데도 심판이 반칙을 선언하지 않자 격렬하게 항의하다 경고를 받았다. 이후 경기가 끝나자, 헤스키는 터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알카라스와 만나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그가 이런 행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스톤 빌라와 축구 협회 모두 그에게 별다른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팀동료인 루크 영은 훗날 헤스키가 운좋게 징계를 모면했다고 밝혔다.

이후 헤스키는 2011-12 시즌에 28경기에 출전했으나 1골만 기록했고 시즌이 끝나자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났다.

2.6. 뉴캐슬 유나이티드 제츠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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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1일, 헤스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클럽인 뉴캐슬 제츠로 이적했다. 그는 2012년 10월 13일 시드니 FC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고, 팀은 3:2로 승리했다. 헤스키는 2012-13 시즌 동안 23경기에 출전하여 9골을 기록하며 뉴캐슬 재츠 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그는 이러한 좋은 활약 덕분에 2013년 4월에 계약을 1년 더 연장했다. 그러나 헤스키는 2013-14 시즌 19경기에서 고작 1골만 기록했고 결국 팀을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7. 볼튼 원더러스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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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4일, 헤스키는 볼튼 원더러스와 6개월 단기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16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 그대로 팀을 떠날 거라는 에측이 많았지만, 볼튼은 놀랍게도 계약을 1년 더 연장했다. 이제 나이가 어언 37세에 접어들었고 노쇠화가 진행된 지 오래된 그와 1년 더 간다는 것은 실로 납득할 수 없는 조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헤스키는 이후 극도로 부진에 휩싸였다. 그는 2015-16 시즌 17경기에 출전하여 겨우 1골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볼튼은 리그 꼴지를 기록하며 3부리그 강등이 유력해지고 있다.

2.8.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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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키는 처음엔 1994년 UEFA U-16 축구 챔피언쉽 대회에 참가하여 잉글랜드 U-16 대표팀에서 4경기 출장했다. 이후 그는 마이클 오언과 함께 U-18 대표팀에 차출되었고 8경기에 출장하여 5골을 기록했다. 1996년 10월 8일, 헤스키는 U-21 대표팀에서 폴란드를 상대로 데뷔전을 가졌다. (이 경기는 0:0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1997년 5월 30일, 헤스키는 폴란드를 상대로 데뷔골을 터트려 팀의 1:1 무승부를 이끌었다.

헤스키는 2000년 UEFA U-21 축구 챔피언쉽 대회 본선 진출을 위한 플레이오프에 출장하여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1998년 2월 10일 잉글랜드 B팀에 차출되어 칠레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하여 추가시간에 골을 기록했지만 팀은 2:1로 패했다. 그로부터 9개월 후인 1998년 11월 18일, 헤스키는 잉글랜드 1군에 포함되었지만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그가 대표팀에서 처음으로 출장한 경기는 1999년 4월 28일 헝가리와의 친선경기에서였다.

헤스키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최종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스웨덴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좌측 윙어로 출전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별로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였다. 이후 헤스키는 덴마크와의 16강전에 출전하여 골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에 한몫을 했다. 뒤이어 8강에 올랐지만 브라질에게 2:1로 패배했다. 그는 이 브라질전에도 출전했지만 별다른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월드컵 이후 치러진 슬로바키아와의 평가전에서, 헤스키는 애슐리 콜과 함께 슬로바키아 팬들로부터 인종차별적 욕설을 받아야 했다. 이에 UEFA는 슬로바키아의 A매치 기간 동안 홈경기 무관중 징계를 내렸다.

2003년, 헤스키는 웨인 루니가 상대 선수의 거시기를 밟는 짓을 하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그를 대신해서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표팀에서 골을 기록하질 못했는데도 계속 경기에 출전해서 많은 비판을 한 몸에 받았다. 헤스키는 비판을 뒤로 한 채 UEFA 유로 2004에 출전했지만 지역 예선 내내 매우 좋지 않은 경기력으로 일관하여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유로 대회에선 기어이 사고를 쳤다.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상대로 1:0으로 이기고 있던 상황에서 그는 막판에 교체로 출전했는데, 위험지역에서 클로드 마켈렐레를 밀어버리는 바람에 프리킥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 프리킥에서, 지단이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렸고 프랑스는 기세를 올려 기어이 경기 종료 몇 초 전에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며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냈다. 이후 헤스키는 유로 대회에서 다시는 출전하지 못했다.

헤스키는 2004년 8월 우크라이나와의 친선경기에 선발 출전했으나 그 경기에서 지워지자시피 했고 팀은 맥없이 패하고 말았다. 이후 피터 크라우치가 그를 대신해 대표팀에 차출되었고 헤스키는 2006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렇듯 대표팀에서 삽질만을 했기 때문에, 갈수록 그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줄어들었다. 2008 유로 대회에서 루니가 부상을 당하자, 헤스키는 2007년 9월에 극적으로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벤치에서 대기해야 했다. 사실 그가 뽑히게 된 것은 그의 절친한 동료인 마이클 오언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스라엘과의 경기에 드디어 출전한 그는 대표팀의 공격을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러시아와의 경기에서도 출전했고 오언의 두번째 골을 어시스트해줬다. 그는 이 두 경기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앨런 시어러는 "웨인 루니가 많은 시간 동안 해주지 못한 것을 이 위건의 공격수가 해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헤스키는 유로 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벤치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후 헤스키는 2008년 8월 체코와의 친선경기에서 46분에 교체 출전했다. 그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는데, 그는 거기서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 이후 헤스키는 2010 월드컵에도 차출되었다. 월드컵 지역 에선에서, 헤스키는 크로아티아측 관중들로부터 "원숭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이에 격노한 헤스키는 경기장을 이탈했고 다음 경기에 뛰기를 거부했다. 이후 FIFA는 진상을 조사한 후 크로아티아 축구 협회에 15,000 유로의 벌금을 매겼다. 얼마 후 대표팀에 돌아온 헤스키는 친선 경기에서 주로 서브로 출전했다. 그리고 2009년 2월, 그는 마침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슬로바키아와의 친선경기에서 골을 기록함으로서 성인 대표팀에 뽑힌 지 6년만에 첫 골을 기록했다!

이후 2009년 6월 카자흐스탄과의 지역 예선전에서 대표팀 차출 이래 7년만의 첫 결승골을 기록한 그는 루니와의 투톱으로 활약하면서 2010 월드컵 대표팀 로스터에 합류했다. 그러나 헤스키는 훈련 도중에 잉글랜드의 주장 리오 퍼디난드를 부상시켜서 전열에서 이탈하게 만들어 수많은 욕을 먹었다. 그는 미국과의 1차전 경기에 출전하여 제라드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팀은 1:1로 비겼다. 그러나 헤스키는 이후 벤치에서 내내 대기해야 했다. 2010 월드컵이 끝난 후, 그는 정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매우 파워풀한 유형의 스트라이커로, 188cm의 장신에 피지컬이 대단히 좋아서 몸싸움 실력이 탁월해 상대 수비진을 유린하고 공중볼 경합에 능한 전형적인 포스트 플레이어였다. 또한 장신임에도 발이 빨라서 다른 비슷한 유형의 스트라이커들과는 달리 측면으로 침투하는 플레이도 해내는 등 활동 범위가 넒었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팀의 승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알았다는 점. 스트라이커임에도 골 결정력이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동료 선수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능력이 뛰어났다. 즉, 연계 플레이에 능했던 공격수. 덕분에 리버풀 시절엔 마이클 오언이 그의 도움을 받아 대단한 활약을 선보일 수 있었다.

다만 국내의 많은 축구 팬들에겐 월드컵에서의 부진이 부각되어 골을 지지리도 못 넣는 무능한 공격수라는 오명을 사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국내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이 하는 말이며, 아예 이 되었을 정도로 결정력 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던 편이다.

4. 수상

4.1. 레스터 시티 FC

리그컵 우승 : 1996-97, 1999-2000

4.2. 리버풀

FA컵 우승 : 2000-01

리그컵 우승 : 2000-0, 2002-03

커뮤니티 실드 우승 : 2001

UEFA컵 우승 : 2000-01

UEFA 슈퍼컵 우승 : 2001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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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커뮤니티에서는 농담삼아 신 취급을 받는다. 헤스키의 생일을 기념하며 수많은 축구 커뮤니티들의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벤트너 혹은 척 노리스와 비슷한류의 -"밈이다. 유명 유튜버 KSIOlajidebt가 활동 초기때 헤스키 기믹을 많이 애용해 유명한 밈 # #이 되었지만 원래부터 본토에서 많은 조롱을 받는 선수였다. 한때는 골을 꽤 넣어주는 선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최악의 골 결정력을 자랑하면서 그만... 덩치는 산만한데 얼굴은 순박해보이는 인상이라 뭔가 힘만 세고 투박하고 바보같은, 한마디로 놀리기 좋은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그래도 만나본 사람들에 의하면 굉장히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한다.

2017년에 KSI와 만났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 개고기 문화에 반대한다며 잉글랜드 대표팀과 소속팀 리버풀의 동료인 마이클 오웬, 제이미 레드냅과 함께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반대와 압력을 넣는 서명에 참여했고, 이어서 프랑스 대표팀이자 첼시 FC 소속의 에마뉘엘 프티도 이 서명에 동참했다. 당시 기사[2] 웃긴 건 이들은 역시 월드컵 공동개최국이었던 일본 고래사냥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3]

문제는 이 서명한 게 대부분이 백인인데 헤스키같은 경우는 드물게 흑인으로 서명했던 점. 게다가 브리지트 바르도같은 백인우월주의자가 주도하는 서명에 사인했다라고 일부 비난을 받았기에 헤스키도 이후로 입다물고 이에 대하여 자신의 수치라고 생각하는지 거론하지 않고 있다.


[1] 이는 맨유와 첼시의 프리미어리그 우승경쟁에서 맨유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참고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는 이에 대해서 한국의 전통문화일 뿐이라며 개고기 문화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영국은 여우사냥을 왜 그만두지 않냐고 비꼬았다. 그리고 당시 FIFA 회장인 제프 블라터가 반대파인 정몽준을 깎아내리기 위해 개고기를 가지고 트집을 잡도록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 [3] 당시 일본 현지의 분위기가 베컴 열풍 때문에 월드컵 한정으로 일본과 잉글랜드는 형제의 국가나 다름없었던 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