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1:43:41

안수산

안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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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5년 1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사망 2015년 6월 24일 (향년 100세)
가족 아버지 안창호, 어머니 이혜련
오빠 안필립, 안필선, 여동생 안수라,
남동생 안필영(랄프 안)
남편 프랜시스 자비에르 커디,
아들 필립 안 커디, 딸 크리스틴 안 커디
복무 미합중국 해군
기간 1942년~1946년
임관 OCS 학사장교
최종계급 대위
주요보직 항공병기장교[1], 정보장교
공식 홈페이지 #

1. 개요2. 일생
2.1. 출생 및 성장2.2. 2차대전 참전 및 정보원 활동2.3. 결혼 및 레스토랑 운영2.4. 말년의 사회 활동 및 수상2.5. 타계
3. 미디어에서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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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수산은 한국계 미국인이며 군인이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로 1915년 미국 LA에서 출생했다. 1942년 미 해군 학사장교( OCS)로 임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참전용사이다. 또한, 미 해군에 입대한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미국인으로 미 해군 최초의 여성 항공병기장교(Aerial Gunnery officer)였다.

2. 일생

2.1. 출생 및 성장

1915년 미국 LA에서 출생했다. 안수산이 성장한 안창호의 집은 흥사단의 캘리포니아 지부 역할을 하며, 미국내 한인 교민들의 사회 활동, 권익 보호, 언론 활동, 교민 사회의 단결과 사회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독립 운동에 기여하였는데, 안수산은 이러한 활동을 보고 들으며, 안수산 자신의 정체성을 가졌고, 실제로 안창호의 독립 단체에서도 일하며 성장했다.

안수산이 11세이던 1926년 도산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상해로 떠나게 된다. 떠나던 날, 안창호는 안수산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을 잊지 마라."(Be a good American citizen, but don't forget your heritage.)라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은 안수산이 자신의 일생에서 중시하는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안수산이 로스엔젤리스 시티 대학교에 재학중에는 야구선수로 활약했고, 주로 2루수로 활약한다. 또한 소프트볼이나 필드하키 선수로도 활약한다.

1940년 샌디에고 주립대학을 졸업한 안수산은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한다.

2.2. 2차대전 참전 및 정보원 활동

안수산이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한 해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던 후였다. 처음 지원했을 때는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탈락했었으나, 재지원해서 입대할 수 있었다. 입대를 지원한 동기는 일본에 맞섰던 아버지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이 내용은 2020년에 안수산의 일생을 조명한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광복절 특집에서 게스트였던 최희서에 의해서도 소개된다.

1942년 메사추세츠 주 노섬프턴에 있는 스미스 컬리지 근처에 있는 미 해군 예비군 장교교육 학교(United States Naval Reserve Midshipmen's School)에 입교, 과정 수료 후 미 해군 소위로 임관한 안수산은 미 해군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이 되었다. 1943년 미 해군 비행 시뮬레이터의 모의비행 교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이내 미 해군 최초의 여성 항공병기 장교로 항공기총 사수들에게 항공기 후방석 시뮬레이터에서 적의 비행기를 격추하는 각도분석 방법을 교육하는 훈련교관으로 근무했다. 안수산의 이야기를 다룬 존 차의 《버드나무 그늘(Willow Tree Shadow)》이라는 전기에 의하면, 아직 미국 내 반아시아 정서가 높고, 군 내에서 여성이 소수자이던 시절이라서 한 백인 남성 병사가 동양인 여성 장교인 안수산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항의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안수산이 대위가 된 뒤에는 미 해군 정보국과 의회 도서관에서 일했다. 안수산은 공식적으로는 1946년에 해군을 제대했고, 이후 1959년까지 워싱턴 DC에 있는 국가 안보국(NSA)에서 암호 해석을 주로 하는 비밀 정보 분석요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처음 6개월간은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암호 해독 활동에서 배제되었다.

냉전 기간 동안, 안수산은 대 소련 섹터의 300명 이상의 싱크탱크에 대한 책임자로써 국방을 위한 일급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3. 결혼 및 레스토랑 운영

해군 제대 후, 국가 안보국에서 일할 때, 아일랜드 출신의 고급 하사관이자 안수산과 같은 암호 해독가인 프랜시스 자비에르 커디와 결혼했다. 안수산에게 시누이 되는 이는 FBI에서 25년간 근무하여, 존 에드거 후버의 50년 집권 중 절반을 같이한 베테랑이었다. 안수산과 커디는 필립과 크리스틴이라는 두 아이를 낳았다. 안수산이 1959년에 국가 안보국에서 은퇴한 뒤에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LA로 이사했다. 당시 안창호 일가의 가장은 배우이기도 했던 안필립이었고, 안창호 일가는 문게이트 레스토랑이라는 중국요리 레스토랑 사업을 했다. 안수산의 남편 프랜시스 자비에르 커디는 이 사업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안수산 부부는 국가 안보국 은퇴 후, 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데 힘썼다. 안필립이 죽은 1978년 이후부터 1990년까지 안수산은 안창호 일가의 가장 역할을 주로 수행하며, 안창호의 흥사단 활동시기부터 내려오던 각종 기록들을 잘 보존하여 1983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기도 한다.

이후 남편 프랜시스 자비에르 커디는 1994년에 타계한다.

2.4. 말년의 사회 활동 및 수상

한국 독립기념관이나 LA 교포 사회에서 많은 공로상을 수상하고 있었던 안수산은 미국 사회에서도 2차대전의 참전용사이기도 했고,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가 있었던 공로 덕분에, 2003년 캘리포니아 28구역 주 의회에 의해 '올해의 여성'으로 지명되었다. 또한 2006년에는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 센터에서 수여하는 '미국인 용기상'(American Courage Award)을 한국계 최초로 수상한다. 게다가 많은 해군 행사나, 한인 행사에서 연사로 초청되어 연설을 하며 활동하였다. 2008년에는 버락 오바마가 출마한 4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같은 유색인종인 버락 오바마를 위한 선거 운동을 하였고, 유방암을 극복한 이후에 유방암 기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는 등, 만년에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2015년 3월 10일,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회는 수퍼바이저 마크 리들리 토마스의 발의에 따라 '안수산의 날' 지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는 안수산이 타계하기 3달 전의 일이다.

2.5. 타계

2015년 6월 24일 안수산은 향년 100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노스릿지에 있는 자택에서 타계했다. 타계하기 하루 전인 2015년 6월 23일까지도 공식 석상에서 한인 2세대들에게 마지막 강연을 했다고 한다. 유언은 아니지만, 이 강연에서 안수산은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너희는 성공을 위해 다만 최선을 다하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2]

3. 미디어에서

2016년 9월 11일 방영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31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편에서 안수산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참고로 김하영이 역을 맡았다. [3]

2020년 8월 16일 방영된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동 외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안수산의 활동에 대해서 다루었다.

4. 여담

  • 2018년 5월에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 문화유산의 달’ 지정 선포문에서 “미국에 이민 온 최초의 한국인 부부의 딸인 안수산은 가장 큰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도 강한 직업윤리, 불굴의 애국심, 소명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으로 미국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 2020년 7월에는 미국 국무부가 운영하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미국의 외교 정책과 가치를 소개 하기 위한 사이트인 '셰어 아메리카'에서도 안수산을 '선구자, 용감한 장교, 공동체 지도자, 한국계 미국인인 안 여사는 미국의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 2003년 10월 10일, 연세대학교 채플 2교시에 초청강사로 나왔다. 당시 채플에서 안수산은 영어로 강연하였다. 채플 종료 뒤 동행했던 아들 필립 안 커디가 통역을 맡았던 교목과 잠시 얘기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미국에서 오래 사셔서 한국말을 잘 못하십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에게 어머님께서 꼭 한국말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잠시만 들어주십시오.
이윽고 다시 부축을 받아 나온 안수산은 느린 한국말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나라가 없어서,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라가 있으니,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1] 미 해군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겸 미 해군 최초의 여성 항공병기 장교 [2] 출처 :경남일보 기사 [3] 해당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