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01:23:45

아일라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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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라우 전투
영어: Battle of Eylau
프랑스어: Bataille d'Eylau
러시아어: битва при преисиш-эилау
파일:1280px-Gros,_Napoleon_at_Eylau.jpg
시기 1807년 2월 7일 ~ 2월 8일
장소 프로이센 왕국 아일라우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러시아 제국|]]
[[틀:깃발|]][[틀:깃발|]][[프로이센 왕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국
지휘관 레온티 베니히센
바클라이 드 톨리
표트르 바그라티온
안톤 레스토크
나폴레옹 1세
미셸 네
조아킴 뮈라
피에르 오주로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
루이니콜라 다부
장드디외 술트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병력 76,000-83,000명 75,000명
피해 사상자 및 포로
15,000~29,643명
사상자 및 포로
15,000~26,000명
결과 프랑스군의 피로스의 승리
영향 프랑스군의 아일라우 점령

1. 개요2. 배경3. 전력
3.1. 프랑스군3.2. 러시아군
4. 경과
4.1. 나폴레옹의 위기4.2. 뮈라의 돌격대4.3. 프랑스의 진격
5. 결과 및 의의
[clearfix]

1. 개요

Battle of Eylau
나폴레옹 전쟁 독일·폴란드 원정 중 일어난 전투.

2. 배경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독일·폴란드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연속된 승전으로 동진을 거듭하며, 1806년 10월 25일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 이후 바르샤바마저 함락하여 프로이센 주력군을 모조리 무력화시킨 상황이었다.

이에 프로이센과 군사동맹을 맺었던 러시아군은 폴란드 전선에서 일단 한발 물러난 후 지원군을 등에 업고 대공세를 펼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새해가 다가오는 폴란드의 겨울은 매우 혹독했기에 프랑스군은 숙영에 들어갔고 러시아군 지휘관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은 기습할 기회로 판단하고 베르나도트군을 공격한 후 나폴레옹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군의 계획을 알아챈 프랑스군은 역으로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재수없게도 베르나도트에게 향하던 전령이 러시아군에게 붙잡히며 이를 알게 된 러시아군은 필사의 후퇴를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후방으로 빠져나가는 러시아군을 쫓았고 이윽고 아일라우[1]에서 맞딱트렸으나 전세가 프랑스군에게 불리했다. 왜냐면 러시아군이 6만에 가까운 병력과 460문에 이르는 야포를 가졌던 반면 추격하던 프랑스군은 네와 다부의 병력이 러시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달려오던 프로이센군을 견제하느라 빠져 있어 분산되고 말아 기껏해야 4만의 병력에 200여 문의 대포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3. 전력

3.1. 프랑스군

영문위키 링크참고

전투 시작 시점

전투 후반 증원

3.2. 러시아군


전투 시작 시점

전투 후반 증원
  • 프로이센군 지휘관 안톤 빌헬름 폰 레스토크 : 9,000 명

4. 경과

파일:0d779453-6ff2-4822-ae09-6276929bd833.jpg
출처 Vincent J. Esposito and John Elting, A Military History and Atlas of the Napoleonic Wars, 1967
파일:777px-Map_of_the_Battle_of_Eylau_-_Situation_early_8_February_1807.jpg
1807년 2월 8일 전개도
미국 국방성 제작

위 책의 저자 빈센트 에스포시토가 미 육군 출신으로 많은 군사사 전투 전개도를 작성하였기 때문에 위 두 전개도 모두 빈센트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4.1. 나폴레옹의 위기

2월 7일 프랑스군은 전투 끝에 아일라우를 점령했지만 아일라우는 대군을 주둔시킬 정도로 큰 마을도 아니었기에 큰 이득은 아니었다. 그리고 함락한 바로 다음 날 러시아군과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러시아군은 숫적 우위와 강인한 정신으로 프랑스군을 압박했고 나폴레옹은 술트가 맡은 좌익 방면의 전투가 제대로 풀리지 않자 중앙의 오주로에게 좌익을 지원하여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오주로는 몸상태가 매우 안좋았고,[2] 때마침 눈보라가 몰아닥치자 오주로의 군단은 아군의 좌익이 아닌 중앙의 러시아 포병대 앞으로 진격해버렸다. 그들은 러시아군의 포병대의 집중포화의 대상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포병대 역시 폭설로 시야가 방해받는 바람에 오주로의 군단을 오폭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프랑스군은 중앙이 그대로 붕괴되어 버렸다.[3]

4.2. 뮈라의 돌격대

파일:atlas to accompany napoleon as a general.jpg 링크
돌격하기전 뮈라의 기병대 배치
중앙의 오른쪽 아래에 길게 2줄로 있는 것이 뮈라의 기병대다. 더 오른쪽의 파란색은 다부의 병력이다.
출처 : Atlas to Accompany Napoleon as a General, Count Yorck von War Art and Engineering, 1942

이윽고 러시아 중앙군이 텅 빈 프랑스군의 중앙을 통과하자 놀란 나폴레옹은 궤멸을 막기 위해 예비대로 돌려 뒀던 조아킴 뮈라 기병대에게 필사적으로 연락해 중앙으로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뮈라는 10,700명[4]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군 중앙 우익에 당도한 뒤 러시아군 중앙으로 돌격했다. 그는 기병대를 80개 제대로 재편성한 뒤, 이들을 둘로 나누었다. 하나는 그루시 장군이 지휘하는 용기병대로 러시아군의 좌측을 공격했다. 다른 하나는 도풀 장군[5]의 흉갑기병대를 선두로 하는 본대로 뮈라는 용기병대를 이끌고 도풀과 함께 중앙의 러시아 포병과 보병대를 관통한 뒤, 거센 안개와 바람을 이용해 적의 집중 사격을 피했다.[6] 그러나 돌격이 너무 성공적이다보니 기병군단은 러시아군 후방에 고립되게 되었고, 러시아군은 정면을 보강하며 뮈라의 기병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기병대를 정비한 뒤, 제 2차 돌격을 감행했고, 반대편에서는 나폴레옹이 뮈라를 구원하기 위해 베시에르 휘하의 제국 근위기병대를 보내 러시아군의 중앙을 반대쪽에서 타격했다.[7] 결국 기병대는 러시아 보병대는 물론이고 460문에 달했던 러시아 포병대마저 박살내고 귀환했다.

이 기병 돌격으로 약 1천5백의 기병들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는 약 14%의 사상률로서, 돌격 한 번에 이런 피해를 입은 것은 꽤 큰 피해였다. 프로이센군이 궤멸되었다는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입은 사상률이 14%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이 기병 돌격은 별 전과도 못 올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멀리서 누가 봤다면 그냥 말탄 사내들이 긴 종대를 이루어 우르르 몰려갔다가 별로 한 일도 없이 우르르 돌아온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돌격에서 러시아군이 얼마나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따로 없다. 그리고 워낙 급하게 달려갔다가 돌아왔으므로 대포 밑에 숨은 러시아 포병들을 몇 명이나 쓰러뜨렸는지도 불분명하고, 구리못과 망치로 러시아군 대포의 점화구를 막아 무용지물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기병의 목적이 진영의 붕괴에 있는 만큼 정말 한 일이 없는 건 아니며, 워낙 대규모의 기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전열을 관통하여 지나갔다가 다시 뒤에서 우르르 몰려와 관통해 간 것은 러시아 장군들에게나 사병들에게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 장엄한 광경은 그날까지 아무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자신의 전열이 적의 기병대에 의해 자유자재로, 그것도 앞뒤로 2번이나 유린당하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면, 그 과정에서 칼을 맞고 쓰러진 병사들의 수가 많지 않다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패닉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또한 러시아 장군이건 병사건 적들이 우리 진형에서 날뛰고 갔다'를 알지 '피해는 별로 없다'는 알기 어렵다.

4.3. 프랑스의 진격

마침내 루이니콜라 다부가 이끄는 제3군단이 모두 도착하자 나폴레옹은 반격을 명령했고, 러시아군은 마지막 예비대까지 투입했지만 다부의 3군단은 러시아 전선의 좌측을 밀어냈고, 베니히센은 사령부를 포기하고 후퇴할 지경에 몰렸다. 그러나 네의 6군단과 전투를 벌이던 레스토크의 프로이센군이 아일라우에 도착하여 러시아의 좌익을 보강하면서 전선은 간신히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 네의 6군단마저 도착하면서 러시아-프러시아 연합군은 3면이 포위되는 형세에 몰렸고, 마침 해가 저물자, 야음을 틈타 연합군이 아일라우에서 후퇴하면서 전투는 프랑스 군의 승리로 끝났다.

5. 결과 및 의의

아일라우 전투는 러시아군이 물러나고 프랑스군이 아일라우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의 위대한 승리로 선전되었지만 실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투가 지속되는 동안 겨울철 눈보라가 몰아치며 프랑스군의 시야를 가렸는데 그 때문에 프랑스군의 자랑으로 여겨지던 정밀한 포격은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적군의 이동까지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질척거리는 진창길은 프랑스군의 진격을 방해했다.

게다가 전투 중 일어난 중앙군의 붕괴는 러시아군이 예상못한 뮈라의 기병대 돌격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나폴레옹과 휘하 참모진들이 러시아군에게 살해되거나 붙잡힐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전사자 1천 5백 이상에 부상자가 4~5천 사이라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거의 2만이 넘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러시아군이 입은 피해에 맞먹거나 그를 능가하는 심각한 피해였고 물론 러시아군이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했기에 분명 승리이긴 하지만 원래 목표인 러시아군 섬멸에 실패하고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기에 대단한 전과라고 선전한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8]

5년 후 러시아 원정에서 일어날 참사의 프리퀄이나 다름없는 전쟁이었으며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자신의 불명예로 생각해 이야기를 꺼렸다고 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고전 끝에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승리하고 틸지트 조약을 맺으며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러시아군의 분전에 질려 러시아를 무시할 수 없는 적수로 두려워했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승리했으나 눈보라가 치는 날씨에 물자까지 부족해 수많은 부상병들이 그대로 몰살당할 뻔했으나 전투 다음날 프랑스군 앞을 지나가던 유대인 상인 덕에 많은 목숨을 구했다. 특히 다량의 증류주를 가지고 온 덕분에 의약품 겸 위문품 등으로 유용하게 썼다고 한다.
[1] 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바그라치온스크이다. 당연히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의 명장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2] 말에 타기 힘들 정도였다. [3] 오주로 역시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4] 국내에 간행된 그레고리 프리몬 반즈와 토드피셔의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17,000명으로 적고 있는데, 10,700명의 오타로 보인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데이비드 챈들러의 책을 인용하여 11,000명으로 적고 있고, 보통 학자들은 뮈라가 이끈 기병대의 규모가 8개 기병사단 8000명 이상에 제국 근위기병대를 더해 만 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본다. 링크 [5] 며칠전에 벌어진 호프 전투에서 맹활약을 한 뒤, 나폴레옹의 열렬한 포옹을 받았는데, 이에 도풀은 흉갑기병대에게 "황제폐하가 나를 포옹한 건 너희들 모두를 포옹한 것이다. 니들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니들 엉덩이(...)에 키스를 해주고 싶다."라고 치하하고 "나는 황제 폐하를 위해 죽겠다."라는 선언을 했는데, 결국 이 돌격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개선문에 이름을 남겼다. [6] 말이 쉽지,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기술이다! 80개 제대의 진로를 겹치는 부분 없이 설정하고, 막힘없이 전진하며, 그러는 와중에도 그 진로를 안개와 바람의 영향 지대에 전부 위치시키는 건 천재적인 직감력과 기병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하다못해 스타크래프트에서 80개 부대를 지정해 움직인다 생각해봐라. 무전기도 없이 실제 병사들로 했다! [7] 적의 사격에 움츠러든 부하들을 향해 "맙소사, 고개를 들어라. 저건 총알이지 똥이 아니다."라고 외친 레픽 대령의 유명한 일화가 바로 이때 일어난 사건이다. [8] 이를 두고 사실상 나폴레옹의 패배라고 주장하는 서술이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원한 단기에 러시아군을 섬멸하여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가 실패한 것이지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사상자를 내고 탄약과 보급품이 떨어진 러시아군이 먼저 후퇴했음으로 패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그 서술을 반대로 말하면 후퇴를 감행했던 러시아군이 사실상 승리했다는 말인데 이는 당연히 더욱 말이 안되는 소리.승리했으면 후퇴를 안했겠지 애초에 나폴레옹도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쫓아갈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보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