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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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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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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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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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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경
Sir Isaac Newton
출생 1643년 1월 4일 ( 그레고리력)[3]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울스소프
(현 영국 잉글랜드 링컨셔 울스소프바이콜스터워스)
사망 1727년 3월 31일 ( 그레고리력)[4] (향년 84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미들섹스 켄징턴
(현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징턴첼시 켄징턴)
국적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연금술사, 탐정, 신학자, 의원[5], 조폐국장
분야 수학, 물리학, 천문학, 철학[6], 신학, 연금술
종교 개신교( 성공회)[7][8]
서명 파일:아이작 뉴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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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묘소 웨스트민스터 사원
작위 기사 (Knight Bachelor)[9]
학위 더 킹스 스쿨 그랜섬 (1655년 – 165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1661년 – 1665년 / B.A.)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1667년 – 1668년 / M.A.)
경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특별연구원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전임특별연구원 (166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10] (1669년 – 1702년)
영국 의회 서민원 의원 (1688년)
조폐국 감사 (1691년)
조폐국장 (1699년 – 1727년)
제12대 왕립학회장 (PRS) (1703년 – 1727년)
부모 아버지 아이작 뉴턴 시니어 (1606년 – 1642년)
어머니 해나 어스큐(1623년 - 1679년)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각성2.3. 정신질환2.4. 사망
3. 업적4. 초상화5. 기타
5.1. 사과에 관한 일화5.2. 신학자로서의 뉴턴5.3. 연금술사로서의 뉴턴5.4. 조폐국 감사, 국장으로서의 뉴턴5.5. 남해회사 거품 투자 손실
6. 어록7. 평가8. 대중매체에서9.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영국 물리학자, 수학자, 정치인, 과학자, 신학자[11], 종교학자, 마지막 르네상스[12], 최후의 연금술사이다. 가장 유명한 대마법사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불리며, 인류를 대표하는 천재로 꼽힌다. 일반적인 천재는 한 가지 정도의 분야를 필두로 뛰어난 것이 보통이지만, 뉴턴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 수천 년간 내려온 다양한 학문들에서 정점급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연도 활동
1643년 영국 동부 울스소프에서 태어남
1655년 그랜섬 공립 중등학교 입학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입학
1665년 학사 학위 수여, 전염병 창궐로 인한 고향 피신
1666년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미분 유율법 창시
1667년~ 166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복귀 후 연구원으로 활동, 석사 학위 수여
1669년 26살의 나이로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로 임명
1687년 프린키피아 출간, 뉴턴의 운동법칙 발표
1704년 빛의 이론에 관한 연구 '광학' 출판[13]
1705년 앤 여왕이 기사 작위 수여
1710년 그리니치 천문대 감독 위원장으로 활동
1727년 84세의 나이로 별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힘

2.1. 초기 생애

율리우스력 기준 1642년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사이 밤에 잉글랜드 동해안에 가까운 울스소프(Woolsthorpe) 마을에서 태어났다. 뉴턴 가문은 농장을 갖고 있어서 마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지만 평민가였고 뉴턴의 증조부대에서야 가문이 시작된 격식 낮은 집안이었다. 뉴턴이 태어나기 전에 친아버지는 죽었고, 친아버지의 이름인 '아이작 뉴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또한 뉴턴 본인은 1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라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뉴턴은 생애 동안 죽은 친아버지나 조상의 기록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3살에 어머니 한나 어스큐(Hannah Ayscough)가 근처의 성공회 사제 바너버스 스미스(Barnabas Smith)와 재혼을 해 집을 떠나는 바람에, 뉴턴은 외할머니 마저리 어스큐(Margery Ayscough)[14] 의 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외삼촌인 사제 윌리엄 어스큐(William Ayscough)도 그를 자주 돌봐주었다. 뉴턴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극히 부족하지만, 1720년대에 뉴턴의 전기 작가인 스터클리가 그랜섬에서 수집한 이야기에 따르면, 뉴턴은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낸, "침착하고, 말이 없고, 사색적인 소년" 이었고, "어쩌다 밖에서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경우마저 없었다" 고 뉴턴의 유년 시절 가까운 친구였던 빈센트(Vincent) 부인은 회고한다. 출처

뉴턴이 학문을 접한 것은 어머니 쪽보다는 죽은 아버지 쪽 친척들의 영향이 크다. 어머니는 평생 농부로 살았는데, 인류 정점급 학자가 된 말년의 뉴턴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 엄청난 재능 가치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반면 아버지 쪽 친척들은 의사, 사제, 약제사 등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분상승을 꾀하던 인간들이 많았고 미숙아였던 뉴턴이 제법 건강해진데다가 마을 학교에서 쓸만한 성적을 내자 후원을 해줘서 자기들과 같은 의사, 약사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뉴턴을 근교의 그랜섬(Grantham)에 있는 학교로 보냈다.

뉴턴은 그랜섬에서 사적인 노트를 만들고 눈에 띈 사물이나 독서의 내용을 수시로 메모했다. 또한 수집을 즐겨 약초를 모았으며 무슨 일이든 실험을 통해 증명하려고 했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해서 물레방아 모형이나 해시계, 물시계 등도 만들었다. 후에 뉴턴의 전기 작가인 스터클리가 일화를 수집하고 다닐 무렵, 그랜섬의 사람들은 뉴턴을 "이상한 발명품과 기계적인 일을 좋아하는 성향"을 지닌 아이로 기억했다. 이렇게 뉴턴은 어릴 때부터 협동연구보다는 독자적인 환경에서 일하기를 좋아했다.

뉴턴이 세 살 때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재혼했던 어머니는 10년 후 남편과 사별하여 뉴턴과는 아버지가 다른 동생들을 데리고 농장으로 되돌아왔다.[15] 어머니는 뉴턴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랜덤의 학교를 그만두게 하여 농장 일을 돕게 하였다. 뉴턴과 같은 천재에게 농삿일이 학문보다 흥미로웠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는 평생동안 어머니에게 매우 순종적이어서 곧바로 자퇴 후 농장으로 돌아와 농사를 도왔다. 2년 뒤 그랜덤의 학교에 뉴턴이 복학하고 1년 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아버지 쪽 친척들이 어머니를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뉴턴은 그냥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별난 소년에 불과했다. 당시 18세의 뉴턴은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이 뭔지도 몰랐고 완전체형 신동으로 유명했던 라이프니츠나 16세에 원뿔곡선 논문을 쓰던 파스칼 등과는 비교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2.2. 각성

이렇게 다른 천재들보다 비교적 낮은 교육상태에 머물러 있던 뉴턴이 정점급 천재로 각성한 계기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첫 번째로는 어머니로부터의 지원이 적어서 잡일을 하면서 배워야했던 서브시디어리(Subsidiary)였던 뉴턴을 정식 스콜라(Scholar)로 만들고 여러가지 혜택을 베풀어준 수학교수 아이작 배로(Isaac Barrow)와의 만남이고, 두 번째로는 1665–1667년에 페스트가 창궐하며 고향 울스소프로 2년간 피신했던 '창조적 휴가'다.

22–24살에 걸친 이 시기에 뉴턴은 후대 사람들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뛰어난 창의력을 보이며 만유인력의 법칙, 역학, 광학, 미적분학을 직관적으로 발명하였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시기를 뉴턴이 생애 동안 보인 정신능력의 최고점으로 친다.[16] 이 당시 뉴턴의 지능은 말 그대로 일상적인 자연현상 속에서 세계와 우주가 내재하고 있는 성질을 추출해 발명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믿기 어려운 수준에 달했다. 수학 연구 1년차에 유율법을 발명해 세계 최초로 미분을 창시하였으며 프리즘을 연구하여 빛의 성질에 대한 뛰어난 발견을 이루었다. 관측으로 이루어진 케플러의 법칙에 자신의 중력이론을 도입해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중세 우주론을 종결내었으며, 발표가 노년에 되었을 뿐 계산 자체는 이미 이 시기에 이뤄졌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고안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이 시기에 나온다.

이 정도로 전례없는 수준의 강력한 지적 각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가지 추측들이 난무한다. 몇몇 정신의학자들은 뉴턴이 가진 정신분열증창조적 휴가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분열증을 가진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려 하는데, 그 이유는 상대에 대해 둔감해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서 자기 붕괴가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리학자들은 뉴턴이 배로와 같은 뛰어난 연장자와의 만난 일은 인생의 모델을 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나, 그 압도적인 영향력 때문에 자기 상실이 될 수 있는 위협이기도 했다고 진단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일시적으로 배로와 떨어진 덕에 뉴턴의 자아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벌어진 종말론적, 세기말적인 분위기도 뉴턴의 머릿속에서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후 광학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반사 망원경을 발명해낸 업적을 인정받아, 1669년에 신학에 투신하기로 뜻을 굳힌 아이작 배로의 후임으로서 입학 후 약 8년 만에 케임브리지의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직으로 올라서게 된다.

2.3. 정신질환

이후 《빛과 빛깔의 새 이론》을 발표한 직후 훅에게 공격받은 뒤 뉴턴은 상궤에 벗어날 정도로 폐쇄적이게 되었다.

뉴턴은 평생을 지낼 동안 독신 동정이었는데, 심각한 수준의 정신증이 있었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한 방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했으며, 신화적인 업적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위협과 조롱에 극도로 민감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과 거리를 두었다. 또한 평생 동안 정신질환으로 인해 치명적인 고통을 겪었다.

일단 뉴턴은 올든버그에게 자신을 왕립학회로부터 영구히 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절망에 가까운 자존감 하락과 우울을 호소하며 앞으로 일체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회비 면제라는 특권이 부과되었다.
이 시기가 되었을 쯤 뉴턴의 대인관계는 처참한 수준으로 박살났으며 병적인 발표 기피, 인간불신, 자기혐오로 이루어져 있었다. 1672년 이후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어떠한 연구도 자진해서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 뉴턴은 자신의 업적에 대해 이렇게 자학하고 있다.
저는 자진하여 철학[17] 노예가 되었습니다만, 제가 리누스[18]씨와의 일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앞으로는 나 혼자만의 만족을 위한 것 외에는 철학에 이별을 고하고 물러나겠습니다.
-1676년 11월 18일, 뉴턴이 올든버그에게 보낸 편지 #
나는 빛의 이론 발표에 의해서 생긴 논쟁으로 매우 괴로웠으므로 실질적인 정복을 잃은 무분별을 스스로 책망하였습니다.
-1676년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1693년 해군 행정관 새뮤얼 피프스(Samuel Pepys)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견되는
벌써 열두 달 동안 만족하게 먹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또 당신이나 다른 어떤 친구와도 만나지 않겠습니다.
등의 폐쇄성과 섭식장애가 드러나는 문장들,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가상의 여인을 만들어내
당신이 여성[19]을 시켜서 또 그 밖의 수단으로 골탕먹이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화가 나고 당신이야말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1693년 로크에게 보낸 편지
등의 망상, 환각적 발언들, '광학'과 같은 탁월한 업적들의 발표를 극도로 꺼렸던 점을 통해 뉴턴의 정신상태가 제정신이 아니고 광기, 망상, 자학, 분노로 점철된 미치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질환은 뉴턴 본인에겐 고통스럽긴 했겠으나 업적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는데, 우선 병적학에서 정신분열증은 극도로 뛰어난 창의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관적이고 혁명적이며 한 순간 번개와 같이 발현하는 세계초극적인 천재성은 분열병권 천재들의 공통적인 특징[20]으로 뉴턴도 그 수혜자라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바로 광적으로 연구에만 집중한 것이다. 친척이자 조수였던 험프리 뉴턴은 "내가 알기론 그는 어떤 오락을 즐기거나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 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헛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뉴턴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연구원들처럼 본업을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취미생활을 하는 식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새로운 이론 창시, 증명에 쏟아붓는 극단적인 인생을 살았다.

2.4. 사망

노년의 뉴턴은 학회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엄청난 영향력과 유명세를 지니게 되었으며, 국회의원, 왕립 조폐국장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하였다. 또한 학자로서는 최초로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뉴턴은 자신의 업적과 실력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거나[21] 허영심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찬양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잠을 자던 중 편안하게 사망하였으며 사망 당시 나이는 84세로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장수했다.[22]

죽은 뒤에는 영국의 위인들이 잠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함께 사원에 안장된 과학자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찰스 다윈, 찰스 라이엘 등이 있다. 석관 위에는 그가 자신이 쓴 저서들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몸을 기댄 모습이 조각되었으며, 연구에 사용했던 망원경과 프리즘 등의 기구가 묘사되었다. 라틴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
파일:attachment/아이작 뉴턴/뉴턴묘비명.jpg H. S. E.
ISAACUS NEWTON Eques Auratus,
Qui, animi vi prope divina,
Planetarum Motus, Figuras,
Cometarum semitas, Oceanique Aestus.
Sua Mathesi facem praeferente
Primus demonstravit:
Radiorum Lucis dissimilitudines,
Colorumque inde nascentium proprietates,
Quas nemo antea vel suspicatus erat, pervestigavit.
Naturae, Antiquitatis, S. Scripturae,
Sedulus, sagax, fidus Interpres
Dei O. M. Majestatem Philosophia asseruit,
Evangelij Simplicitatem Moribus expressit.
Sibi gratulentur Mortales,
Tale tantumque exstitisse
HUMANI GENERIS DECUS.
NAT. XXV DEC. A.D. MDCXLII. OBIIT. XX. MAR. MDCCXXVI
이곳에 아이작 뉴턴 경이 묻혀 있으니, 하느님과 같은 정신력에 의하여 그가 발견한 수학적 원리로 행성의 운행, 혜성의 경로, 바다의 조석을 처음 밝혔으며, 일찍이 어떠한 학자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광선의 본성을 발견하였다. 또한 자연, 고대, 성서에 관하여 세밀하고 예민하며 확실하게 해명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이 존엄하심을 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인류가 하느님 곁에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우리의 큰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642년 12월 25일 출생, 1727년 3월 20일 사망.[23]

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뉴턴의 묘비명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을 칭송한 글귀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 And all was light.)[24]이다.[25]

3. 업적

우주의 위대한 설계에 대한 그의 과학적 탐구는 고대의 가설들을 뒤엎었습니다.
His scientific search for a grand design in the universe overturned ancient assumptions.
타임지, 1999년 송별호에서 각 세기의 인물 선정 중 17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아이작 뉴턴을 꼽으며. 기사 원문
일반적인 인간은 평생 동안 한 가지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도 힘들지만, 뉴턴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과 같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뉴턴의 천재성이 정점에 달한 1665년에서 1667년까지의 기간 동안 그가 성취한 업적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독보적인 수준으로, 이 중에서도 특출난 1666년을 한 명의 사람이 기적을 일으킨 해라고 해서 '기적의 해'[26]라고 부른다. 뉴턴의 이론, 특히 미분 [math(displaystyle F=G frac{m_{1}m_{2}}{r^{2}} )], [math(displaystyle F=ma)] 등은 인류 문명 전체를 완전히 뒤바꾼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이론과 공식들은 현대 물리학은 물론 일상생활 전반에 사용되고 있다. 뉴턴이 후대 문명에 끼친 영향은 너무 광대하기 때문에, 만약 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3.1. 고전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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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의 운동법칙
, 만유인력의 법칙
,
,
,

3.1.1. 만유인력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중력을 수학적으로 서술하고 정의를 내린 뉴턴의 법칙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

[math(\displaystyle F=G \frac{m_{1}m_{2}}{r^{2}} )]

사실,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고 알려진 만유인력의 존재 자체를 뉴턴이 발견한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서 측정되는 중력과 천체운동에 필요한 구심력이 같은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은 당시 학자들도 다들 알고 있었으며, 문제는 그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가 얼마이며, 그것이 행성 운동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였다. 행성의 공전 주기니 궤도니 하는 것은 이미 전에 요하네스 케플러 등에 의해 관측되어 케플러의 3대 법칙으로 정립되었는데[27], 뉴턴이 한 것은 이를 갈릴레이 역학으로부터 발전시킨 뉴턴 역학( 뉴턴의 운동법칙)과 미적분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만유인력을 수학적 표현으로 정립해낸 것이다.

얼핏 보면 공식 하나로 요약되는 이 업적이 결과적으로는 인류 지성사를 새로 쓰게 만든 것이다. 그만큼 물리학에 수학을 넣고 법칙이란 개념을 확실하게 세운 것은 위대한 혁명과도 같았다. 서양 전통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관에서 천계는 지상계와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케플러 등은 이러한 생각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의구심만 던져놓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한방에 정리한 것이 뉴턴의 역학이다. 캐플러의 법칙(천상계의 원리)과 갈릴레이의 역학(지상계의 원리)이 완벽히 동일한 수식을 통해 작동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천계와 지계의 원리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고 증명해낸 것이다! 장장 2천 년 가까이 인류를 지배해오던 우주관을, 뉴턴은 수학이라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반박한 셈이다. 이후의 모든 과학자는 "수학으로 과학을 증명"함으로써 뉴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수학적 계량을 도입해 연금술을 현대 화학으로 발전시킨 앙투안 라부아지에 역시 뉴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3.1.2. 케플러의 법칙 기여 및 증명

케플러의 법칙을 뉴턴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뉴턴이 수학적인 정의를 최초로 올바르게 제시하였다.

16세기 잉글랜드의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 모양으로 돈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학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 계산이 맞지 않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었다. 그러다 에드먼드 핼리, 크리스토퍼 렌[28], 그리고 아이작 뉴턴의 최악의 라이벌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 계산을 정확히 해내나 내기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핼리는 같은 왕립협회 회원이던 아이작 뉴턴을 캠브리지 대학에서 만난 자리에서 우연치 않게 이 문제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뉴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계산해 봤더니 타원이 나오던데?[29]"

온 물리학자가 덤벼들고도 해결 못한 문제를 20년 전에 이미 풀어놓고 그동안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뉴턴의 행동에 말 그대로 핼리는 정줄을 놨고, 뉴턴에게 이걸 왜 발표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왕립 협회에서 로버트 훅과 크게 다툰 이후로 침묵하게 됐다는 것.[30] 결국 핼리의 권유로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발표한다. [31]

3.1.3. 뉴턴의 운동법칙

아이작 뉴턴의 상징과도 같은 법칙으로, 고전역학의 꽃이라 평가받기도 하다.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자면,

1. 관성의 법칙: [math(\displaystyle F = 0 \Leftrightarrow \dot{v}= 0)]

2. 가속도의 법칙: [math(\displaystyle F = \frac{\text{d}{p}}{\text{d}t} = ma)][32]

3. 작용 반작용의 법칙: [math(\displaystyle F_{\text{AB}} = -F_{\text{BA}} )]

정도가 뉴턴 역학의 기본 체제이다.

거두절미하고 이론의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면, 뉴턴은 물체의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연구결과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구심력을 정의했으며, 행성의 궤도가 원뿔곡선이고 태양이 초점 중 하나에 있으며, 궤도에서 케플러 제3법칙이 성립하면 중력은 거리의 역제곱꼴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도출해냈다. 그렇게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친 고전 물리학은 뉴턴에서 집대성되었다.

이 법칙들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역학의 기초인 고전역학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힘, 질량, 가속도, 속도 등과 같은 기본적인 물리량들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를 주었으며, 물리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의 시초 격이자 모범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가속도의 법칙 [math(\ F = \frac{\text{d}{p}}{\text{d}t})]는 여전히 고전역학 뿐만 아니라 모든 역학에 완벽히 적용될 정도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법칙이며, 이것의 보다 간단하고 직관적인 형태인 운동 방정식 [math(\ F = ma)]의 경우 매우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공로 때문에 지금까지도 뉴턴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맥스웰과 함께 물리학의 3대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리학의 1/3( 고전역학, 광학)은 뉴턴이, 1/3( 전자기학, 통계물리학)은 맥스웰이, 1/3(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완성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33]

3.1.4. 구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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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광학

3.2.1. 뉴턴식 망원경

기존의 볼록렌즈 두 개를 합쳐 증폭시키는 방식과 다른, 반사경을 이용한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지금도 반사경을 이용한 망원경을 뉴턴식 망원경이라 부른다.

뉴턴이 반사망원경을 실제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학 분야의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기 때문. 실제로 반사 망원경은 뉴턴식 이전에 그레고리식 반사 망원경이 설계 개념으로 먼저 나와 있었는데, 당시 광학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곡면거울을 요구했기 때문에 뉴턴은 당시의 기술로 만들수 있는 방식을 계산, 제시한 것이다.[34]

당대 '빛은 순수한 백색이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을 때, 그는 프리즘 연구를 통해 다양한 색의 빛의 굴절과 반사 등을 실험해보았고, 다른 색의 빛은 다른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굴절 망원경이 색수차가 발생한다는 것을 예측했다.[35] 하지만 반사는 이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색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반사 망원경을 발명하게 된다. 상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36]과 같은 구경의 굴절 망원경보다 상이 어둡다는 점[37]을 제외하고는 제작하기도 훨씬 쉽고 싸다는 장점이 있다.[38]

망원경 중앙에 반사용 평면거울, 즉 반사경이 있어 상을 가릴 것 같은데, 반사경이 상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사경이 "가리는" 빛의 구간이 확대되기 이전의 부분, 즉 빛을 모으는 부분이기 때문. 개구면의 일부를 가린다 해도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통해 들어온 빛만 모아 상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반사용 평면경이 개구면의 일부를 가리더라도 상의 전체적인 밝기가 줄어들 뿐, 상의 일부가 가려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단, 반사 망원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의 상 흐려짐 현상이 도넛 모양이 되는 특성이 있다. 소위 '도넛 보케[39]'라고 하며, '보케'가 개구면의 형상대로 형성되는 광학적 원리 때문에 생긴다.

3.2.2. 구멍-반점 이론

뉴턴은 빛의 부분 반사에 관한 이론 중 하나인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구멍-반점 이론이란, 유리나 물 등의 물체에서 빛이 일부는 투과되고 일부는 반사되는 부분반사현상을 구멍에서 빛이 통과되고 반점에서 빛이 반사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뉴턴은 "어떤 유리라도 깨끗하게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는데, 이는 뉴턴이 유리를 '닦는다'라는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리를 닦는다는 것은 미세한 가루들을 문질러 유리면을 긁어내는 것으로 미세한 흠집이 생기는데, 이 미세한 흠집을 빛이 통과한다는 것은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3.2.3. 의 입자성 발견

뉴턴은 빛이 직진한다는 점을 근거로 빛이 입자의 형태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빛의 입자성 주장은 데카르트의 주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후 과학이 발전하면서 빛에는 파동의 성격도 있음이 밝혀지고 이로 인해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에 대한 논의가 수백년간 이뤄졌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빛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발표하여서 빛이 입자와 파동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여 종결한다.

3.3. 유체역학

3.3.1. 뉴턴 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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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역학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 전단응력과 전단변형률의 관계가 선형적인 관계이며, 그 관계 곡선이 원점을 지나는 유체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이작 뉴턴의 이름을 딴 용어이다.

3.3.2. 뉴턴의 점성법칙

뉴턴의 점성 법칙(또는 뉴턴의 점도 법칙)은 유체 역학에서 뉴턴이 제시한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이다. 뉴턴의 점성 법칙은 유체의 점성(stress)과 변형률(strain)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며, 이는 뉴턴 유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다음은 이 법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지식들이다.
  • 점성 (Stress): 점성은 유체 내부에서 인력이나 외부 힘에 의해 발생하는 내부 응력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점성은 힘에 대한 단위 면적당의 힘으로 정의된다.
  • 변형률 (Strain): 변형률은 유체가 얼마나 형태를 변형시키는지를 나타낸다. 이는 일반적으로 변형률 텐서를 사용하여 설명되며, 변형률은 유체 내의 입자 간의 상대적인 움직임을 나타낸다.

이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 유체 내부에서의 점성을 생각해보자. 만약 힘이 유체에 적용되면, 그 유체는 힘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며, 이 때의 점성은 힘에 대한 면적당의 응력이 된다. 뉴턴의 점성 법칙에 따르면, 이 응력은 유체의 형태 변형률에 비례하는 것이다.

뉴턴의 점성 법칙은 일반적으로 상술한 뉴턴 유체에 적용되며, 뉴턴 유체는 형태가 변형될 때에만 점성이 발생하며, 일정한 온도와 압력에서는 점성이 일정하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이 실제로 많은 액체와 가스에 대해 잘 적용되기 때문에 유체역학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법칙이다.

3.4. 미적분학

3.4.1. 미적분의 기본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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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의 기본정리는 17세기 미적분학의 창시자인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따로 발견한 기본정리이다.[40] 이 정리의 위상을 표현하자면 물리학에서의 뉴턴의 운동법칙과 최소 작용의 원리와 동등할 정도로 미적분학의 기반이자 제일 중요한 정리이다.

3.4.2. 라이프니츠와의 미분 논쟁

미분[41]을 누가 먼저 발명했나 하는 문제로 라이프니츠와 크게 싸웠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를 잉글랜드 왕립과학협회에 제소하여 공정한 판결을 받고자 했다. 회장 권한이 있었던 뉴턴은 이 문제를 '공정한 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사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독일 출신 위원은 의견 개진 기회를 받지 못했다. 위원회 최종보고서는 뉴턴이 직접 쓰게되었으며, 이 보고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익명으로 왕립과학협회 회보에 실었다.

뉴턴이 여러 외압을 넣은 결과와 동일하게, 실제로도 뉴턴 쪽이 라이프니츠보다 명백하게 먼저 발명했다. 그가 미분을 발명한 것은 1665–1666년으로, 1676년에 발명한 라이프니츠보다 10년이나 빠르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주거나 연구에 사용하기만 했으며, 1671년 작성한 미분에 대한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논문이 정식으로 발표된 것은 60년 후였는데, 이때는 이미 뉴턴이 사망하고도 10년이 지난 후였다.

사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분쟁에는 매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미분 자체를 발표하기 전에 서로에게 자기 결과를 자랑했다는 점. 두 명 모두 미분을 발명했지만 서로 그것을 모르던 상태에서 먼저 뉴턴이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분의 기본 개념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막연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본 라이프니츠는 답장에서 뉴턴에게 자신의 미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편지를 보냈다. 따라서 누가 미분을 발명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기 지도를 받아서 미분을 재구성한 주제에 자기가 먼저 미분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했고, 라이프니츠는 기껏 존경하는 과학자에게 자기 결과를 설명했더니 그걸 싹 빼앗아가고는 오히려 자기를 악당으로 모는 파렴치하고 권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히 누가 진정한 발명자인가를 넘어선 깊은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츠도 뉴턴의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미분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지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서 불완전한 상태이던 미분을 완성했을 수도 있기는 하다. 뉴턴도 이때까지 미분을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라이프니츠의 연구 결과를 보고 자신의 미분을 다소 손질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뉴턴이 먼저 발표를 냈고 그 뒤로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발견한 미분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뉴턴이 먼저 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미분과 뉴턴의 미분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후에 어느 잉글랜드 수학자가 '이것은 뉴턴의 표절이다'라는 의견을 내며 일이 커졌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저 둘은 가만히 있었는데 제3자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소리. 저 의혹이 생기기 전까지는 둘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표절 의혹으로 잉글랜드 학계와 독일 학계는 대판 싸움이 났다.

추가로, 뉴턴이 단순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당대의 대학자라서 라이프니츠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욕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 이전에 흔히 라이프니츠는 라이프니츠 급수[42]라고 불리는 식을 1674년에 발견했는데, 문제는 이미 제임스 그레고리라는 당대의 영국 수학자가 1671년에 발견했던 식이었기 때문에[43] 라이프니츠가 이 식을 독자적으로 발견했음에도 이때 잉글랜드인들의 뇌리에는 '라이프니츠=표절범'이라는 의심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뒷배경과 뉴턴의 언플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당시의 잉글랜드인들에게 라이프니츠는 표절이나 일삼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사실, 이미 madhava라는 인도의 수학자가 약 200년쯤 전에 아크탄젠트 급수를 먼저 발견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촉발된 논쟁은 예상치 못하게 큰 여파를 불러일으켰는데, 잉글랜드 학회와 독일 학회의 싸움으로 인해 양국간의 학문적 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수학계는 얼마간[44] 대륙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었다고.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표절 문제를 명확히 한 현대의 논문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45]

미분의 발명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해석에서는 다소 의견이 갈린다. 뉴턴이 먼저 발명하기는 했지만, 많은 수학자들의 견해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발명했으니 두 사람 모두 발명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분법이 완전히 무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페르마가 접선의 기울기를 구하는 불완전한 방법을 연구한 적이 있고, 뉴턴의 스승인 아이작 배로는 '미적분학의 기본정리'의 일반만된 형태를 증명했다. 당대에 나름 싹이 틀 만한 토양이 갖춰져 있던 셈이며, 따라서 두 사람이 각자 독립적으로 개발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현대의 미분은 거의 라이프니츠의 기호 방식을 따르고 있다. 뉴턴은 물리학자답게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연구하다가, 라이프니츠는 기하학에서 접선을 연구하다가 각각 미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dy/dx 방식이 바로 라이프니츠 방식이고, 뉴턴의 방식은 [math(\dot y)]처럼 함수(변수) 위에 점을 쓰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dot notation. 다만 f(x)라는 기호를 처음 쓴 것은 오일러이므로, 뉴턴이 현대처럼 f'(x)라고 썼을 리는 없다.[46] 고등학교에서 미분을 배워 본 학생이라면 합성함수의 미분[47]을 할 때 라이프니츠와 라그랑주 방식이 얼마나 편리한지 알수있을것이다.

일반적으로 뉴턴 방식으로 쓴 공식을 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외국, 특히 영국에서 쓴 미적분 책에는 간혹 나오고, 물리학을 한다면 시간에 대해 미분한 양으로 다른 양을 미분해야 하는 경우[48]처럼 역학 문제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이 잔뜩 들어 있는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할 때 쓰는 양을 줄이려고 쓴다.

3.4.3. 변분법과 최속강하곡선

미분과 관련한 뉴턴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변분법이다.[49] 짧게 요약하자면, 방정식이 조건을 만족하는 변수를 구한다면, 변분법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를 구한다. 좋은 예시가 바로 최속강하곡선( 사이클로이드) 문제로, "어느 고정된 두 지점을 연결된 궤도 위를 물체가 중력 가속도에 의해 이동할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달하는 궤도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문제다. 쉽게 설명하자면,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을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착하는 미끄럼틀 모양을 구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뉴턴은 이 문제를 스넬의 법칙과 논증 기하학을 이용하여 답을 구했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뉴턴과 미적분학 관련 논쟁이 있었고 요한 베르누이는 뉴턴을 시험해보기 위할 겸 이 문제를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답을 구하라고 한 것이다.[50] 그러나 뉴턴은 이런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미적분학으로 풀지 않고 기하학적 기법으로 답을 구하였다.[51]

이때 뉴턴은 익명으로 답을 제출했지만, 풀이가 워낙 뛰어나고 독창적이라 이름이 저절로 밝혀졌다. 베르누이는 해답을 보자 “발톱 자국을 보아하니 사자가 한 일이다.”라고 평했을 정도.

변분법은 라그랑주 역학으로 이어지게 되며, 라그랑주 역학은 해밀턴 역학을 거쳐 슈뢰딩거 방정식, 양자역학까지 이어지게 된다.

3.4.4. 뉴턴-랩슨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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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랩슨 방법이란 미적분학에서 함수의 근삿값을 쉽게 구하는 방법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3.4.5. 유율법

뉴턴이 고안한 미분법으로, 수학사에서 뉴턴이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이다.

유율법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모든 그래프에서 완벽한 기울기를 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유율법을 통해 모든 그래프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계산 방법이 나옴으로써 미적분학도 시작되기 된다.

다만 유율법이 완벽하지만은 않았는데, 제일 큰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수학적이지 않은 표현이다. 0으로 간주되진 않지만 때에 따라 무시할 수 있고 정확한 값은 모르지만 0에 한없이 가까운 정도의 표현이 매우 자주 쓰이는데, 정의 자체가 매우 애매할 뿐더러 수학적이지도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극한의 개념은 뉴턴이 터를 닦은 근대 수학에서 뉴턴 사후 수백년은 지나야 엄밀하게 정의된다.) 때문에 비판을 피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유율법이 등장한 덕에 미적분학의 기본 토대가 충실히 쌓여졌으며, 현대에 다다르면서 미분 적분을 매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즉, 유율법의 등장은 미적분학의 탄생에 제일 큰 영향을 줬다고 봐도 무방하다.

3.5. 논리학

3.5.1. 오컴의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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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선 가장 단순한 설명이 제일 좋은 선택지라는 철학이다.
3.5.1.1. 뉴턴의 불타는 광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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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기타

3.6.1. 벤틀리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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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뉴턴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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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이 고안한 온도 체계로, 역사상 최초의 온도 체계이다. 다만 당대에는 다른 온도 체계들에 밀려 거의 알려지지 못한 비운의 온도 체계이기도 하다.

4. 초상화

아래의 두 초상화는 두 점 모두 초상화가 갓프리 넬러 (Sir Godfrey Kneller) 경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이며, 각각 포츠머스에스테이트 신탁 회사와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소장중이다.

연구에만 전념하였던 젊은 시절 때와는 다르게, 그는 말년에 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odfreyKneller-IsaacNewton-1689.jpg 파일:external/images3.wikia.nocookie.net/481px-Isaac_Newton.jpg
1689년.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 46세때의 모습이다. 1702년.[52]


1689년작 초상화는 뉴턴의 천재적 이미지를 극대화한 모습 덕분에 그의 사후에 아이작 뉴턴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 되었다. 뉴턴은 그가 죽을 때 까지 이 초상화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후에 그의 질녀인 캐서린 바턴과, 그녀의 남편 존 콘듀잇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출처 뉴턴이 장수한 인물임에도 이 초상화로 인해 젊은 모습이 더 각인된다. 젊은 시절에 상대성 이론을 정립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노년에 사진을 주로 찍은 까닭에 늙은 모습으로 각인되는것과 대조된다.

1980년대 초반의 금성사 위인전기는 1702년작 초상화를 표지로 사용하여 뉴턴하면 이 초상화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파일:external/www.1st-art-gallery.com/Portrait-Of-Sir-Isaac-Newton-1642-1727-C.1710.jpg 파일:external/www.1st-art-gallery.com/Portrait-Of-Sir-Isaac-Newton-1646-1727-1726.jpg
1712년. 1726년.[53]

5. 기타

  • 뉴턴은 그의 프린키피아에서 중력의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 책에서 중력이 생기는 원인은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그 힘이 어떠한 원인에 의해 생기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을 바탕으로는 중력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한 아무런 가설도 세우지 않았다.

    (중략)

    중력이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가 설명한 법칙들에 따라 작용하며, 천체들의 모든 움직임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뉴턴이 남긴 이 서술은 그가 과학자로서 스스로를 치켜세우거나 근거없는 가설을 세우지 않고, 본인의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구들을 기준삼아 활동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업적이 위대한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참된 과학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54]
  • 여러모로 독특한 행동으로도 유명한데, 학생 시절 돈이 없어서 부유층 자제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동전 몇 닢을 모아 생활했다든가[55] 유약하고 소심했다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학창시절에 자신을 괴롭혔던 동급생을 물리적으로 제압해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하는 강인한 면모도 있었고, 근육 사이를 탐험한답시고 바늘로 눈구멍과 눈알 사이를 깊숙이 찔렀다든가,[56] 평생 연금술에 심취해 있었다는 일화까지 정말 특이한 일화가 많다.
  • 크롬웰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풍이 잉글랜드를 덮쳐서 큰 피해가 난 적이 있는데[57], 고향에 있던 10대 후반 뉴턴이 살던 곳에서도 폭풍우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뉴턴은 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나와 널뛰기를 하면서 바람의 강도를 측정했다고. 이웃 사람들은 "바람이 마구 부는데 홀로 널뛰기나 하고 미쳤나?"라며 어이없어 했던 일화도 있다.
  • 밤하늘을 관측하려고 연에 등불을 달아 올렸다가 난데없이 밤중에 혜성이 떨어지네 뭐네 이웃들이 놀라[58] 난리를 피웠다가, 자세히 보고 혜성이 아니라 누가 에 등불을 매달아 올린 곳임을 알아차려 연을 날린 뉴턴은 호되게 혼난 적도 있다.
  • 평생 동정이었다. 뉴턴의 임종을 지켰던 주치의 리처드 미드 (Richard Mead)가 후에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그가 자신의 임종 때에, 자신은 동정이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고 밝혔다.[59] 1693년경 뉴턴이 그의 친구, 철학자 존 로크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선생님께서 여자들과 그 밖의 수단으로 자신을 곤란한 일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생각에 그만 마음이 상했다" 라고 밝힌 바 있다.[60]
  • 물리학보다 연금술 성경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는 후대에 소위 이단으로 여겨지던 학자였다. 고대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톨릭이 전부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연금술과 성경 연구로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깊이 연구했다. 실제로 그의 연구 노트 90%는 연금술과 성경이 주제였다고 한다.[61] 그래서 친구인 핼리가 뉴턴의 관심을 물리학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사실 연금술을 연구하고도 장수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연금술에서는 수은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절에 물질의 특성을 확인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냄새를 맡거나 직접 먹어보는 방식이었다. 뉴턴은 특별한 부작용은 겪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년에 우울증에 걸린 것이 수은 중독 탓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시기는 사실상 연금술이 유행한 마지막 시기로,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찰스 2세도 열심히 연구하다가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말이 있다.
  • 명예혁명 직후(1688) 대학 대표로 국회의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62] 투표에는 빠짐없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당시 속기록에 딱 하나만 있다고 한다. "거, 바람 들어오니 창문 좀 닫아주시오."
  •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그는 고양이를 길렀는데, 지나다니기 쉬우라고 문아래 작은 여닫이문을 하나 달아 놓았다. 그런데 새끼를 낳으니까 옆에 작은 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걸 본 친구가 "어미가 문 연 거 그대로 따라가게 하면 되잖아."라고 하니까 당황했다는 일화.
  • 그 밖에 연구에 열중하는데 배가 고파 간식으로 달걀을 삶아서 먹으려고 주섬주섬 책상을 손으로 더듬어보다 손에 잡힌 대충 둥근 걸 펄펄 끊는 냄비에 넣고, 나중에 달걀이 다 삶아졌나 하여 꺼내 보니 달걀은 온데간데없고 책상에 두었던 회중시계가 냄비에서 나오더라는 이야기도 있다.[63]
  • 페스트 치료를 연구하려고 두꺼비를 이용해서 약으로 만들려는 기록이 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가이드에 의하면 뉴턴의 방 창문 밖의 토양을 검사해본 결과, 수은을 비롯한 화학 물질의 농도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고 한다. 뉴턴이 장기간 꾸준히 미처리 화학 물질을 창 밖으로 투척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예상되는 원인은 게으름이라고 한다. 물론 현대에 이러면 안된다.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 좀 잔인한 일화로 조폐국장 재임시절, 화폐 위조범을 교수대에 매다는게 취미였고, 윌리엄 첼로너라는 위폐범은 아예 사형 후 시체를 해부해서 전시했다고 한다. 중력을 발견한 물리학자로서 중력으로 사형수를 죽이는 교수대는 훌륭한 연구대상이었을 것이다
  • 양아버지를 싫어해 그를 죽이는 상상을 했고 양아버지가 죽자 기뻐했다는 말이 있다.

5.1. 사과에 관한 일화

페스트 런던에 퍼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피난하던 시기 (1664년 ~ 1666년)의 산책 중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66]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여기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프린키피아 원문에 사과나무 언급이 있고 인생 말년에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뉴턴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론적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갈릴레오나 케플러 등의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접한 것이 중력의 발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게 통설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시기에는 오히려 케임브리지의 도서관을 이용하지 못해 중력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도 사과나무 언급이 프린키피아 원문에도 실려있고 사과나무 이야기를 뉴턴이 직접 말한 것도 사실이기도 해서,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뉴턴의 전기 작가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윌리엄 스터클리는 1726년 4월 15일에 뉴턴이 사과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뉴턴에 대한 그의 전기에 썼다. 또한 1727년에 뉴턴이 왕립학회장이었을 당시 부원장이었고, 후에 원장이 된 마틴 포커스(Martin Folkes)가 후에 전한 말을 토대로하여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이라는 사람은 이에 대해 상당히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67]

역사적으로 보면 볼테르가 사과 이야기로 뉴턴을 칭송한 것이 널리 퍼지면서 일종의 전설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볼테르가 영국 유학을 갔을 때 뉴턴의 질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사과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볼테르는 당대 가장 유명한 계몽사상가이자 작가였는데, 볼테르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책에 거듭 소개함으로써, 사과 일화는 순식간에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뉴턴을 대표하는 일화로 등극했던 것.[68] 드래곤 사쿠라에서는 '구체적인 사고가 위대한 발견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근거로서 인용했다. 뉴턴의 운동법칙 귀납논증으로 일궈낸 만큼, 계기야 어떻든 위대한 착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문서 상단의 뉴턴의 생애에서 제기됐던 정신분열증 문제와 엮어서 보면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천재라 할 수는 없지만 천재들은 대체로 정신분열증 환자(=굉장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였다'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과 이야기가 진짜 사실이든 아니면 뉴턴이 말년에 창작해낸 이야기든 간에, 만유인력과 사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이제는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긴 했다. 심지어 그의 모친의 자택에 있던 사과나무를 여러 번 옮겨 심은 사과나무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기증받아 심어져 있다. 국내에만 11곳 이상에 심겨졌으며[69] 접목이므로 종자는 원본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원본이 된 나무는 지금도 살아 있다. 링크[70]

5.2. 신학자로서의 뉴턴

뉴턴은 과학 분야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의 신학 관련 문헌을 남겼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문 신학자로 간주될 정도로 신학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상가들과 신학이나 종교에 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뉴턴은 표상과 이데아 사이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이것은 고전 ~ 중세 신학의 연구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일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본인이 종교에 대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부정하였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현대 사학자들은 뉴턴을 아리우스파였다고 추정한다. 삼위일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후 요한 1서 5장 8절에 의도적으로 첨가된 구절도 뉴턴이 증명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이는 성공회의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당시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행위는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갇히거나 까딱하다가는 사형까지 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뉴턴은 자신이 공들여 쓴 '삼위일체 반박 논문'의 출판을 생이 끝날 때까지 주저하였다.[71]
그러나 뉴턴의 신론을 이슬람교나 이단과 비슷하다고 단정하는 오해가 있는데 뉴턴은 당연히 예수를 구세주로 삼는 기독교인이다. 케인즈 문서에서 뉴턴 자신의 발언을 참고하면 알수있는데 삼위일체론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신학 내부 이견차이일 뿐이지 외부에서 볼때는 구별하기도 힘든 기독교 교리이다.

결국 그가 죽은 후에 방대한 종교 문헌 중 4가지만 사후에 출판되었고, 나머지 원고는 20세기 들어 경매를 통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72] 경매 이후 뉴턴의 신학과 종교, 연금술에 관한 원고는 전 세계에 분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측정과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뉴턴이 남긴 기록을 단어 수로 본다면 과학과 수학에 관해서는 100만 단어, 연금술에 관해서는 55만 단어, 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140만 단어로 추정된다. 양으로만 따지면 과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라 불러야 할 수준. 뉴턴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서 과학, 신학뿐 아니라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73]

성경에 근거해 종말을 계산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의 종말이 2060년에 일어난다고 보았는데, 당시 온갖 종말론자들이 이런 저런 소리를 하는지라 성경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는 게 통탄스러워 직접 나섰다고. 이하는 그의 추론.
1. 다니엘서 7:25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근거함.

2. "한 때"를 1년, 즉 12개월로 보면 '한 때 + 두 때 + 반 때 = 12개월 + 24개월 + 6개월 = 42개월'임.

3. 42개월은 요한 묵시록 11:2의 "마흔두 달"과 요한 묵시록 11:3의 "천이백육십 일"과 도 일치함.

4.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면 1260년이 흐른 후 종말이 옴.

5. 기산 연도를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 자리를 받은 서기 800년으로 잡음.[74]

6. 800+1260=2060년

사실 뉴턴의 진의는 2060년이 되기 전까지는 종말 같은 거 안 오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자는 것에 가까웠고, 엄밀히는 종말이 아니라 성경에 일렀듯 새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다. 사실 기독교적 입장에서만 본다고 한들 예수부터가 마태오 복음서 25장에서 마지막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한 바 있으니, 괜히 호들갑 떨거나 흑화하지 말고 그냥 뉴턴이 이런 것도 연구했구나 정도로만 보자. #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1646년 ~ 1716년)는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명했느냐를 놓고서 뉴턴과 다툼을 벌인 인물이다. 그는 뉴턴의 ‘숨은 인력적 속성’이 ‘진정한 철학의 여러 원리들과 어긋날’ 뿐 아니라 ‘무지의 낡은 도피처’로 되돌아가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뉴턴 옹호자들은 중력은 단지 물질의 근본적인 성질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서, 뉴턴 자신은 정말로 중력의 원인을 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한 그의 방법을 본다면, 뉴턴은 17세기에 우연히 태어난 ‘근대과학자’가 아님이 드러난다. 뉴턴은 평소답지 않은 겸손한 태도로 자신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재발견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법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뉴턴은 프리스카 사피엔티아(prisca sapientia)를 믿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개념은 ‘고대의 지혜’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락했다고 여겼다. 뉴턴은 그리스신화, 성경 구절, 그리고 『헤르메티카』를 해석하여, 그 속에 자신의 중력 법칙을 포함한 세계의 숨겨진 구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음을 밝혀내려고 애썼다. 뉴턴의 생각으로는, 중력이란 신이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여해서 생긴 결과였다(그리고 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으리라고 뉴턴은 믿었다). 신의 기하학적 청사진을 밝혀냈다고 여긴 케플러처럼 뉴턴도 자신을 (단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고대의 지식을 복구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고 여겼다.
Lawrence M. Principe[75], 『과학혁명』 THE SCIENTIFIC REVOLU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노태복(역)
물론 뉴턴에게 신학적 동기가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와 달리 신학사의 관점에서 뉴턴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신학사의 관점에선 동시대의 라이프니츠가 훨씬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신학적 동기가 새삼스럽게 주목 받는 이유는, 오늘날의 과학자 이미지를 과학혁명의 시대로 소급하여 "현대 과학자도 이러하니 옛날 과학자도 이러할 것이다"라고 넘겨짚는 오류를 정정하는 가장 강력한 예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근세까지 전문 과학자, 혹은 수학자 라는 개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스의 자연과학은 세계와 인간을 탐구하는 자연 철학의 갈래이자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받아들여졌으며 중세 이후에는 이들 모두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학에 수용되었다. 뉴턴의 묘비명에서 보듯 하늘과 땅의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나 성경 속 신의 말을 탐구하는 것이나 방법만 다를 뿐 목적은 같은 사학의 갈래 라는건이 근세까지의 당연한 인식이었다. 뉴턴 뿐 아니라 라이프니츠, 케플러 등 당대의 과학자는 물론 교회와 맞서 싸웠다는[76] 인식이 있는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들도 모두 자신의 신앙심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신의 영향을 찾으려 했다. 따라서 뉴턴에게 근대이후의 인식을 대입하여 그는 과학자라기보다 신학자였다는 등의 논평은 큰 의미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뉴턴의 발견과 방법론이 너무 뛰어나고 영향력이 컸던 탓에 과학의 영역이 급격하게 늘어나 비로서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과학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케인스가 평한 마지막 르네상스인 이라는 말이 더욱 와닿을 것이다.

가령,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은 인간, 신, 그리고 자연계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확신했으며, 이로써 신학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 사이에 상호관련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따라서 당시에 논의된 주제들은 과학과 신학/종교가 뒤섞인 복잡한 성격을 띠었다.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77]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길 바라는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둘째, 근대 초기의 경우 기독교 교리는 의견이나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다. 당시의 기독교 교리는 자연계의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에 맞먹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신학적 이론이나 예배 관행의 고차원적인 지점을 놓고서는 교파 간에 분명 이견이 존재했다. 마치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중력의 실재성이나 원자의 존재 또는 과학적 연구의 타당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면서 아주 미세한 지점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결코 ‘개인적 믿음’의 지위로 전락한 적은 결코 없었다. 오늘날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신학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들의 요체이자 존재에 관한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탐구 행위였다. 그렇다보니 신학적 교의들은 근대 초기 자연철학자들이 연구 자료로 쓴 데이터 집합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신학적 사상들은 과학 연구와 추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지 과학 연구의 바깥에서 얼마간의 ‘영향력’을 미친 정도가 아니라, 신학적 사상은 자연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세계의 필수적이고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Principe, 같은 책

5.3. 연금술사로서의 뉴턴

아이작 뉴턴이 살던 17세기는, 이제 막 근대적 과학이 태동하던 시기로, 화학 연금술의 경계가 명확히 구분지어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아이작 뉴턴의 화학, 연금술적 관심의 기저에는, 분명히 그가 그랜섬에서 문법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보았던 책들[78]과, 그때 하숙하였던 클라크 씨의 약재상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최초로 화학에 대한 내용들을 메모하기 시작한 것은 1666년 경, 이 즈음 쓰여진 초기 뉴턴의 화학 지식들은, 그의 화학에 대한 관심이 로버트 보일의 저서와 연구들에 기반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기에 그는 주로 보일에 기초하여 화학 용어 해설집을 정리하였는데, 이 때에, 뉴턴이 정리한 모든 내용이 순수하고 "합리적인" 화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보일이 자신의 연구에서 그러했듯, 보일의 영향을 받은 초기 뉴턴의 화학 연구도, 연금술과 연관될 수 있는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화학에 대한 관심은, 곧이어 조지 스타키(George Starkey)[79]와 같은 연금술사들의 연구와 저서들로 향한다.

우리는 뉴턴이 연금술에 빠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여러 다양한 정황들이 가르키는 바로는, 1669년경부터 연금술에 대한 항목들을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하였다고 짐작한다. 뉴턴의 연금술에 대해서 연구하였던 돕스 (Betty Jo Teeter Dobbs) 여사는, 뉴턴이 "그 전이나 그 이후에도 유례가 없을 만큼 이전 시대 (17세기 이전)의 방대한 연금술 문헌을 모두, 그리고 면말히 조사했다."다고 주장한다.

이런 연금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정은, 적어도 그의 말년, 1690년대 조폐국장직 수행을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의 연구 인생에서 중요한 한 파트를 차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4. 조폐국 감사, 국장으로서의 뉴턴

1696년 조폐국 감사 자리를 시작으로[80] 1699년부터 조폐국장의 자리를 25년이나 맡았는데, 임기 중에 금속 비율 등을 바꾸어 화폐를 개혁하기도 했다. 특히 동전의 테두리를 깎아 팔아먹거나 동전을 하나 더 만드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81] 동전에 테두리와 톱니를 만들어 넣은 것은 이 사람의 업적.[82] 또한 조폐국장이 되고 2년 뒤인 1701년에 아마인유를 이용한 아날로그 온도계를 개발하여 역사상 최초의 온도 체계를 고안하기도 했으나, 순금속( 주석, , 비스무트 등)과 간단한 합금의 녹는점을 측정한 값이 포함되어있는 등 조폐국의 업무와 관련이 있을 법한 내용의 특성상 본인의 안위를 걱정해서인지[83] 익명으로 연구를 발표[84]하여 이 온도 체계는 생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뉴턴이 조폐국장을 맡은 일화 또한 흥미롭다. 원래 뉴턴과 친분이 있던 재무대신 찰스 몬태규가 월급 많이 주는 대신 할 일 별로 없는 명목상의 자리로 조폐국 감사 자리를 하나 줬는데, 그가 조폐국 감사 자리에 엄청난 열의를 보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예 거처를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옮기고는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조폐국 업무에 몰두했다고 한다. 당시 유명했던 화폐 위조범 윌리엄 챌로너를 잡기 위해 정보원을 고용하고, 이러한 정보원과 만나기 위해 변장을 하고 술집에서 접선을 하기도 했다고. 또한 조폐국장이 되고 싶어 이런저런 정치적 뒷공작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전임 조폐국장이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자 후임 조폐국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조폐국장으로서의 업적은 후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당시 영국은 금과 은을 모두 본위금속으로 사용하는 이중본위제였다. 이 경우 금과 은의 법정 교환비가 실제 시장에서의 교환비와 다르면,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된 금속만이 유통되게 된다. 당시 영국은 실제 시세보다 법적으로 을 고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금화가 은화를 구축하여 이후 영국의 화폐 제도가 한참 동안 꼬여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당연히 뉴턴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비율 조정을 시도했지만, 이는 금화를 소유하고 있던 자산가들의 자산 가치를 줄여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사 실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뉴턴은 위조화폐 방지 업무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는 금화만이 유통되게 되었고, 법적으로 저평가된 은화는 외국에서 금화로 바꿔오게 된다. 문제는 금이 그 가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소액화폐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폐 활성화로 해결하기 전까지는 영국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다만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힘든 것이, 역설적으로 지폐 도입을 앞당기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폐를 사용하면서 신용화폐로의 발전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뉴턴 시기에 금을 고평가하여 사실상 금은 이중본위제를 포기하고 금본위제를 채택하였는데, 이중본위제 자체가 유지/관리하기 너무 어려운 체제이다 보니 단일 본위제를 채택한 것이 결국 금융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게 된다. 또한 은본위제를 채택하여 국제 시세보다 은을 고평가하고 있던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촉진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어차피 영국 국내에서는 은이 저평가되는데, 중국에서는 오히려 국제 시세보다 은이 고평가되다 보니, 중국과의 무역이 수지타산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편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중국이 엄청난 규모의 무역을 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시대가 지나 영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무렵이 되면 영국 중심의 금본위제가 세계 금융시장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다.

뉴턴의 조폐국 감사와 국장 시절을 다룬 책인 <뉴턴과 화폐위조범: 천재 과학자, 세기의 대범죄를 뒤쫓다(Newton and the Counterfeiter: The Unknown Detective Career of the World's Greatest Scientist)>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토머스 레벤슨 저, 박유진 역) 링크

5.5. 남해회사 거품 투자 손실

파일:남해거품사태 뉴턴.webp

I can calculate the motion of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people.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다.
남해주식회사 투기 열풍이 한창일 때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던 남해회사의 주가를 보고 뉴턴이 평한 말.[85]

18세기에 뉴턴의 질녀, 캐서린 콘듀잇의 주장에 따르면 뉴턴은 1720년에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버블경제 남해거품사건에서 합계 2만 파운드(약 20억)에 달하는 주식을 투자했다가 거품 붕괴로 엄청난 손실을 보고 실패했다고 전한다.

사실 뉴턴이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뉴턴은 남해회사 주식을 주시하다가 저가 시점 때 적당히 매입했고, 1.5배 이상으로 상당히 오른 시점에서 처분해 꽤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남해회사 주식은 뉴턴의 매도 이후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뉴턴이 매수했던 시점으로 치면 5배, 매도했던 시점으로 치면 2.5배 이상 올랐고, 남해회사 주식을 팔지 않고 존버하고 있던 주변인들이 쾌재를 부르자 배알이 아팠는지 남해회사 주식에 다시금 투자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매수를 시작한 시기는 주가가 피크였던 시점이었고, 이후 거품이 꺼지며 주가가 폭락하여 가진 전 재산을 날려먹었다. 그는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여 주가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음에도 손절매를 하긴 커녕 저점매수를 시도하다 큰 낭패를 보았다. 재산을 몽땅 투자하고도 부족해 대출까지 동원해 자금을 끌어모아, 떨어지고 있는 주식에 물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통상적인 주식이었다면 먹힐 수도 있었을 방법이었지만, 주식의 거품 규모가 워낙 컸던지라 반등은 하지 않았고, 물타기한 자금은 전부 증발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날려먹은 건 사실이지만, 이후 사망하기까지 7년만에 주식 투기 이외의 수단으로 본인의 재산을 원래대로 복구[86]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당시 뉴턴은 굳이 투자 같은거 안 해도 남은 여생동안 놀고먹으면서 유유자적 지내고도 남을 만큼 부자였으나 괜히 욕심부리다가 일을 그르친 것이라 볼 수 있다.

6. 어록

"I do not know what I may appear to the world, but to myself I seem to have been only like a boy playing on the sea-shore, and diverting myself in now and then finding a smoother pebble or a prettier shell than ordinary, whilst the great ocean of truth lay all undiscovered before me."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출처. 상술한 제자들에게 하던 말로서 내가 해낸 업적이라는 건 고작해야 바닷가에서 뛰어노는 아이가 찾은 조개껍질이나 돌 밖에 안된다는 겸손을 담은 명언이다. 오래전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ye[87] sholders of Giants."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88]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훅에게 보내는 1675년 2월 5일자 편지 中. 사실 뉴턴이 최초로 한 말은 아니다.[89]
"I can calculate the motion of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people."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으나, 인간의 광기는 계산하지 못한다."
남해주식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뉴턴이 남긴 어록으로 알려져 있다.
"Amicus Plato, amicus Aristoteles, magis amica veritas."
"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내 친구이지만, 나의 최고의 친구는 진리이다."
아이작 뉴턴이 그의 대학 시절 남겼던 노트의 어귀에 적었던 말이다.[90]
"Truth is ever to be found in simplicity, and not in the multiplicity and confusion of things."
"진리는 항상 단순함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다양성과 혼란에서 발견되어서는 안된다."[91]

7. 평가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주께서 " 뉴턴이 있으라!" 하심에 모든 것이 밝아졌다.
- 알렉산더 포프,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으로 쓴 글.[92]
뉴턴은 광학에 종사하는 동안 거의 전적으로 빵과 포도주와 물을 먹고 살았다.
- 현대 생리학의 창시자인 알브레히트 폰 할러의 증언. 또한 볼테르는 뉴턴의 동물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 [실제로]
Newton was not the first of the age of reason. He was the last of the magicians, the last of the Babylonians and Sumerians, the last great mind which looked out on the visible and intellectual world with the same eyes as those who began to build our intellectual inheritance rather less than 10,000 years ago.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법사,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 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이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94][95]
“그(뉴턴)는 인류 지성사의 전환점이었다. 뉴턴 이전에는 경험 세계의 심오한 특성들을 표현해줄 수 있는 물리적 인과율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서양식의 사유와 연구, 실험방법을 결정해준 사람은 뉴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으며 오직 뉴턴이 그 길을 제시했다. 그는 핵심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이용 가능했던 실험 데이터를 독창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세세한 증명방법에 대해서도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뉴턴의 생애는 과학과 더불어 신학과 연금술이 평생 동안 함께 얽혀 있었다. 오히려 분량으로만 따지면 신학 관련 저술이 더 많다. 오늘날 알려진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보면 신학적 연구를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천문학에 손을 댔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96] 천문학을 위해서 물리학 연구를 했고, 물리학을 위해 수학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진지하게 본업이 뭔지 따지면 오히려 종교와 신학 쪽이 더 맞는 것. 이것은 케인스가 거시경제학 이론을 만들다 여름에 심심해서 뉴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알려지고, 유명해진 내용이다.

역학의 체계를 확립한 근대 과학의 시조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불리며 지금까지 단순 과학자를 넘어 인류를 대표하는 정점급 지능을 가진 천재로 꼽힌다. 물론 이런 식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누군가는 플라톤을 최고로 치고, 어떤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최고로 치는 등 여러 후보가 있겠지만 뉴턴은 수많은 위인들과 비교했을때 결코 부족하지 않은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수학에서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 관성질량, 중력질량 같은 질량이라는 비례상수 개념을 처음으로 제대로 확립하며 후대 과학을 파격적으로 발전시킨 뉴턴 역학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빛의 입자성을 증명하는 '광학'을 발표해 빛의 성질에 대한 전례없는 발전을 이뤘다. 또한 뉴턴식 망원경을 개발해 천문 관측의 패러다임을 바꾸었고,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스스로 창시한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태양중심설에 관한 마지막 의문점을 제거하여 천문학에도 웅장한 업적을 남겼다.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뉴턴 역학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등장 전까지 과학계의 가장 큰 거목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업적으로 고금 3대 수학자 중 한 사람[97]으로도 꼽힌다.

뉴턴의 물리학 체계를 집대성한 명저로 《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98]가 있다. 프린키피아는 현재 물리학을 넘어 기하학 원론과 함께 최고의 과학서로 평가받으며, 물리학 역사의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 철학과는 사뭇 다르고 둘은 분리될 수 있음을 최초로 증명해낸 책이기에 물리학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받는다. 이 책에서 [math(F=ma)]같은 뉴턴의 운동법칙이 등장한다.

혹자는 사후 를 도난당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후두암에 걸려 사망한 오펜하이머에 비해 뉴턴이 장수한데다 자연사했고 존경받았기 때문에 다른 유명 물리학자들에 비해 비교적 편히 별세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뉴턴의 인생에는 긴 수명이나 명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질환이다. 뉴턴은 수십 년에 걸쳐 끔찍한 수준의 정신분열증을 앓았고 자신이 겪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을 문장으로 호소하기도 하였다. 뉴턴이 가졌던 정신분열증은 그가 보여준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이하고 천재적인 상상력에 도움이 되었으나 뉴턴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8. 대중매체에서

  • 영화 《 다빈치 코드》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사과도 같이 등장.
  • 드라마 《 닥터후》에서도 언급이 된다. 거기서 4대 닥터가 그에게 중력을 발견하도록 나무 위로 올라가서 뉴턴의 머리에 사과를 떨어뜨렸는데, 뉴턴은 그걸 보더니 닥터 보고 나무에서 꺼지라고 했고, 결국 같이 저녁 먹으면서 말로 설명해 줬다고 한다. 이후 60주년 스페셜에서 14대 닥터 도나 노블을 만나기도 했다.[99]
  •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의 최종보스인 도른커크의 본명이 아이작이며 지구에 있을 때의 직업은 과학자 겸 철학자만유인력의 법칙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봐서는 아마 이 인물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이작 뉴턴 본인이라거나.
  • 타임보칸 시리즈》에서도 나왔다. 도론죠 일행과 아웅다웅하다가 사과나무를 걷어차는 바람에 우루루 떨어진 사과에 파묻히면서 진리를 깨달았다.
  • NELL의 정규 6집 앨범의 제목이 《Newton's Apple》이다.
  • 천문학자 이강환 박사의 《뉴튼과 뉴튼역학》 오디오강의 PLAY
  • 뉴턴의 연금술사적 면모를 다룬 팩션 웹툰으로 《네우토누스》가 있다. 저스툰 (현 코미코) 과 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웹툰 공모전에서 교양/실용 부문 대상을 타, 2020년에 코미코 오리지널 작품으로 연재를 시작, 현재 완결이 난 상태이다. 현재는 이만배로 옮겨 재연재 중이다. 작가는 KIMYUN. 링크
  • 포켓몬스터 소드 · 실드에 등장하는 포켓몬인 애프룡의 전용기 G의힘도 뉴턴의 사과를 모티프로 만든 기술이다. 높은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떨어지면서 적을 때리는 기술이다. 그리고 중력이 강할 수록 위력이 늘어나는 점도 해당 일화를 참고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 외부 링크


[1] President of The Royal Society, 왕립학회장. [사진] 1689년 그려진 고드프리 넬러 경(Sir Godfrey Kneller, 1646–1723)의 아이작 뉴턴 초상화를, 후에 영국의 화가 토머스 올덤 발로(Thomas Oldham Barlow, 1824–1889)가 1863년 모작한 작품이다. 영국 Science Museum Group Collection 소장. [3] 율리우스력으론 1642년 12월 25일,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12월 25일을 역학절이라고도 부르자는 농담도 있다. [4] 율리우스력으론 1727년 3월 20일. [5] 명예혁명 직후, 케임브리지에서 임시의회에 보낼 대표이자 의원으로서 선출되었다. 정당은 휘그당. [6] 자연철학은 그 당시 자연과학의 다른 이름이며, 뉴턴 사후 1세기가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연과학이 확립된다. [7] 뉴턴의 개신교 신자 여부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뉴턴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핵심 그리스도교 교리들을 부정했으며 성공회 측의 경고에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뉴턴이 신앙 문제로 교회와 갈등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고 당시 성공회가 국교회로서 뉴턴과 같은 국가적인 위인을 안고 가야 하니까 적당히 경고로 넘어간 것이지 가톨릭이나 장로교회였으면 바로 파문당했을 사안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성공회 교인이었던 것은 맞고, 알려진 바로는 과학보다 성경에 몰두했을 정도로 신학연구에도 열정적이었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성경의 창조 교의를 확신할 정도로 독실한 믿음이 있었다. [8] 한편, 일각에서 뉴턴이 이신론자라는 대중의 오해가 있지만, 뉴턴은 이신론자보다는 도리어 이신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신론에 대항하며 자연신학을 고취하기 위해 《프린키피아》를 저술하였다. # [9] 1705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knight)에 서훈되었는데, 이는 과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업적으로 작위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 [10] 역사상 두번째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다. 찰스 배비지, 폴 디랙, 스티븐 호킹, 마이클 그린( 초끈 이론의 대표주자) 등도 거쳐간, 영국 물리학자들에겐 가장 영예로운 직위다. [11] 신학자로서의 뉴턴은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삼위일체론을 부정하고 교회와 마찰을 가지는 등 파격적이고 자율적인 행보를 보였다. [12] Renaissance Man, 지적으로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 [13] 당시 학문의 제1 언어였던 라틴어로 쓰인 프린키피아와 다르게 모국어인 영어로 쓰여졌다. [14] Genealogical memoranda relating to the family of Newton이라는 책에 따르면 Margaret이라고도 부름. [15] 참고로 뉴턴은 이부동생들과 잘 지냈다고 한다. [16] 1665–1667 시즌이 역대 최고의 상태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뉴턴 본인도 "발견에 있어 전성기를 이뤘다"라고 인정한 바 있다. [17] 당시에는 철학은 사고력으로써 연구하는 모든 학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뉴턴 본인이 쓴 저서의 제목조차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다. [18] 프랜시스 홀(Francis Hall)의 라틴어 이름이 리누스(Linus)이다. 그는 영국 예수회 소속으로, 벨기에의 잉글리시칼리지의 교수이자, 1674년부터 올덴버그를 통해 끊임없이 뉴턴의 논문을 비판하였다 [19] 이 여성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고 뉴턴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의 여성이다. [20] 유명한 분열병권 천재로는 뉴턴 외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21] 오히려 그는 어떤 업적도 밝히려 하지 않았다. [22] 현재 기준으로도 오래 산 나이인데 뉴턴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3~4세기 전이다. 현대 의학 기술이 한참 떨어지는 그 시절에 이 만큼 산 것은 정말 장수한 셈. [23] 현대 날짜 기준으론 1643년 1월 4일 출생, 1727년 3월 31일 사망했다. [24] Alexander Pope, Epitaph for Sir Isaac Newton, 1735 [25] 사원 내부의 기념물에 새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26]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특수 상대성 이론,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 등을 정립한 논문들을 출판한 해인 1905년도 '기적의 해'라고도 불린다. [27] 뉴턴 이전에는 이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해 "케플러의 3현상"이라고 불렀다. 법칙으로 불리게 된 것은 뉴턴이 프린키피아로 그 많은 걸 전부다 수식으로 만들어 설명해버린 이후이다. [28] 천문학자인데,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로 더 유명하다. [29] 핼리의 정확한 질문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면 궤도가 어떤 모양을 그릴 것인지였다. 사실, 당시 많은 물리학자들이 만유인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할 것이라는 심증을 갖고 있기는 했다. (거리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면 단순 원운동을 해야 하는데, 궤도는 원이 아닌 타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 미적분학이 나오지 않아서 당대 최고의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조차 아무도 계산과 증명을 하지 못했던 것.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창시해버리는, 둘로 쪼개도 둘 다 명예의 전당 급인 어처구니 없는 업적을 세워버린다. [30] 뉴턴의 광학 연구는 훅의 연구를 일부 참고했으나 뉴턴은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훅의 업적은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무시했으며(1679년 훅은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이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출판하며 이 내용을 참고했지만 훅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이에 훅이 반발한 것이다.), 훅과 뉴턴의 이러한 관계는 당대에도 유명했는데 왕립 협회가 이전할 때 회장이 뉴턴이었는데, 역대 협회장의 초상화 중 로버트 훅의 초상화만 사라지는 일이 있어서 뉴턴이 몰래 치워버렸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 [31] 사실 핼리가 물어봤을 때 계산한 종이를 찾지 못해 그를 집에 돌려보내고 수 개월에 걸쳐 산뜻한 풀이방법을 찾아 보낸 것이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9쪽짜리 논문이고, 이 논문을 출판한 것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즉 프린키피아이다. [32] 이 식은 질량이 보존, 즉 변하지 않는 경우의 결과이다. 질량이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우 간단하면서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우(질량 변화가 없는 경우)를 설명하기 때문에 물리학 방정식 중 독보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질량이 변한다고 가정하게 되면 [math(\displaystyle F = m \frac{\text{d}{v}}{\text{d}t} + v \frac{\text{d}{m}}{\text{d}t})] 꼴로 계산할 수 있다. 질량이 변하는 경우는 대표적으로 로켓, 혹은 상대성 이론의 세계이다. 다만 보통은 질량은 변하지 않고 운동량이 변한다고 보고 계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math(F = ma)]역시 참이다. [33]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이 워낙 유명한 탓에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반대만 한 과학자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광전효과는 물질파로 이어지는 자연의 불연속성 탐구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점을 보아 그의 양자역학에 대한 기여는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에 지지않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아인슈타인이 논쟁한 부분은 양자역학의 수식에 대한 해석이며, 이 부분에서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와 의견차이가 있었다. 이 문제는 아인슈타인의 생전에 해결이 되지않않고 수십년 후에 실험으로서 보어가 맞았음이 증명되었다. [34] 렌즈보다는 반사경을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다. 반사경은 볼록렌즈와 같은 수준의 성능을 얻기 위해 6배는 더 정밀하게 가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결이 이는 연못을 들여다보면 연못에 비친 상은 크게 일그러지지만 연못 바닥은 비교적 잘 보이는 현상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35]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무지개를 만드는 것을 떠올려 보자. 빛이 혼합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실험에서였다. [36] 굴절 망원경과는 달리 개방된 경통 구조를 가지므로, 개방된 공간 내 공기의 대류에 의해 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현상이 있다. 내부가 밀폐, 진공처리된 굴절 망원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이 불안정하다. [37] 이는 당시 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유리 표면에 반사율이 높은 은이나 알루미늄을을 입혀 만든 현대의 반사경도 두 번 반사되면 빛의 양이 처음의 80~90% 정도로 줄어들어서 상이 약간 어두워지는데 그 당시에는 반사율이 낮은 청동거울로 반사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같은 구경의 굴절망원경보다 집광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 같은 문제는 후대에 은을 이용한 유리거울 반사경이 도입되면서 거의 해소될 수 있었다. [38] 어두운 별을 볼 수 있도록 더욱 많은 빛을 모을 수 있는 망원경을 제작하려면 망원경의 구경이 커져야 한다. 그러나 렌즈는 유리를 연마하여 제작하므로, 대구경의 구면을 가공하는 것은 어렵다. 반면 금속 반사경은 그냥 붙이거나 작은 평면거울을 다닥다닥 붙이는 방법으로 크게 만들 수 있다. [39] 일본어이다. [40] # [41] 적분 고대 이집트까지 올라가는, 미분과는 별개로 전혀 상관없는 학문으로 발달한 것이다. 하지만 미적분학의 기본정리가 발견되면서 미분과 적분이라는 학문이 서로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고 서로 연관성이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4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e804b8a1a11e442be93fed1d52205a9.png [43]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고리가 발견한 식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0045c226e7d06865ca4d0302a629c6.png 였는데, [math(z)]에 [math(1)]을 넣으면 라이프니츠 급수가 나오기 때문에 의심받을 만했다. [44] 100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45] 헬 헬먼, '과학사 속의 대논쟁', 이충호 역, 가람기획, 2000, p74-75 [46] 점 대신 y'으로 prime 기호를 넣은 것은 라그랑주 방식이며, 오일러는 미분이 선형변환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Df(x)으로 썼다. 실제 수학을 할 때는 1변수의 경우 라이프니츠와 라그랑주 방식이 선호되고, 고차원을 다루거나(편미분이 필요하니까) 해석적 분석을 할 때는 오일러 식과 [math(\partial)]를 이용한 라이프니츠- 콩도르세 식, [math(nabla)]을 이용한 해밀턴 식을 꽤 섞어 쓰는 편이다. 뉴턴 방식은 수학에서는 보기 힘들고 역학에서 자주 본다. [47] [math(( f ∘ g )′(x) = ( f( g(x) ) )′ = f′ ( g (x) ) g′(x))] [48] 라그랑지안 역학. F= 꼴의 운동방정식을 에너지(정확히는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차이)에 최소작용원리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구하는데, 이 원리의 표현에 변수를 시간에 대해 미분한 값으로 전체를 미분하는 항이 포함된다. [49] 뉴턴만의 업적은 아니다. [50] 라이프니츠와 베르누이의 풀이를 보면 미적분학을 사용하였다. [51] 프린키피아도 스스로 고안한 미적분학 기법보다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나간다. [52] 가발이다. 이 시대 고위층 유럽인들은 전부 가발을 쓰고 다녔다. [53] 사망하기 1년 전의 마지막 초상화이다. [54]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뉴턴이 살았던 17~18세기는 과학 장비들의 수준이 매우 열악했고, 제대로 된 이론도 현대만큼 많지 않았다. 따라서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55] 정말로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뉴턴의 어머니 해나는 뉴턴이 계속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대학 간 아들에게 용돈을 송금하는 것을 아깝게 여겼다고 한다. 해나의 수입은 연간 700 파운드가 넘었지만, 뉴턴이 받은 돈은 일년에 10파운드를 넘지 않았다. 그래서 부잣집 애들의 뒤치다꺼리로 번 돈으로 사채업을 해서 등록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주 고객은 자신처럼 돈이 없는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56] 더러운 바늘로 쑤시는 바람에 감염으로 한동안 앓아누웠지만 기적적으로 눈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57] 그 유명한 올리버 크롬웰의 이름에서 따온 것 맞다. 크롬웰이 집권했을 때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는 공화정이었는데, 그가 죽고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왕정이 부활하자, 이를 원통하게 여긴 크롬웰의 원혼이 잉글랜드에 강력한 폭풍을 일으켰다는 미신이 민중들 사이에서 퍼졌다. [58] 뉴턴이 어릴 적인 17세기만 해도 혜성은 불길한 존재였다. 하물며 작은 시골마을인 고향이라면 더더욱. [59] Iliffe, R. (2007, January 25). Newton: a Very Short Introduction. [60] Newton, I. (1966). The Correspondence of Isaac Newton (H. Turnball,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61] Alan Sokal, 'Fashionable Nonsense: Postmodern Intellectuals' Abuse of Science', picador, 1999.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노트를 연구한 뒤 뉴턴을 중세의 마지막 마법사라고 말했다. [62] 제임스 2세 통치 시기 꽤나 살벌하던 제임스 2세에게 직언을 자주 해 꽤나 인기가 높았다. [63] 당시 시계는 꽤 비싼 물건. 배터리가 아니라 태엽을 사용해서 전부 수제품인지라 싼 것도 지금으로 치면 수십만원이 넘어갔다. [64] 정확히는 0.98N [65] 당시 영국은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썼다. 헨리 8세가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했는데다가 가톨릭 신자를 엘리자베스 1세 때 탄압했던 역사를 가진 영국은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교황이 만든 달력으로 바꾼다는 것은... 영국도 그레고리력으로 바뀐 것은 18세기. [66] 더 나아가서 왜 달은 사과와 달리 안 떨어질까를 생각했다고도 한다. [67] Westfall, Richard S. “Chapter 5, Anni Mirabiles.” Never at Rest: A Biography of Isaac Newt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10. [68] "그는 아마 이 이야기를 뉴턴의 질녀에게서 들은 듯한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것이 중력에 대한 뉴턴의 설명이 지닌 명쾌한 단순성을 표현하기에 완벽한 소재라는 점을 깨달았다. 볼테르는 이 이야기를 1727년 『고찰』에 처음 썼고 『편지』에 다시 삽입했다."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58) [69] 다만 일부는 고사했다. [70] 다만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고, 1820년에 한 번 쓰러졌다가 남은 뿌리에서 다시 자란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한다. [71] 하지만 성공회 측도 뉴턴의 신학 이론이 자신들의 견해와 불일치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전에 존경받던 대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의 총애를 받다가 단 한 번 교회의 견해와 반대되는 저작을 썼다는 이유로 한 번에 매장된 일이 워낙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자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고 자국이 낳은 걸출한 천재를 자기들 스스로 매장해버리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으려고 그에게 경고만 주고 눈감아줬을 뿐이다. [72] 이때 산 사람이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73] 이와 비슷한 사례로 경제학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도덕 철학자였던 아담 스미스가 있다. [74] 이때를 기해 유럽에서의 교황권이 막강해졌다. [75] 존스 홉킨스 대학의 과학기술사학과 및 화학과 교수. 주요 연구 분야는 중세 말 ~ 근대 초 과학사이다. [76] 단 당시 교황청이 지동설에 대해 보인 태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77] (발췌자 주석) AD 1500-1700년의 과학사상가들. [78] 대표적으로, John Bate가 저술한 The Mysteryes of Nature and Art 같은 책들을 소년시절에 탐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79] 연금술사들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진명은 에이라네우스 필라레테스(Eirenaeus Philalethes)라고 짐작된다. [80] 이 직위는 정부에서 발행한 통화를 감독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조화폐를 통해 경제를 혼란케 하는 위조범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형사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감사 직위를 얻은 까닭에 뉴턴의 경력에 탐정이 추가되었고, 당대 최강의 화폐 위조범이었던 윌리엄 찰로너(William Chaloner, 1650~1699.3.22.)라는 사람은 이 당시 뉴턴과 치열한 추격전과 법정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던지라 결과는 뉴턴의 압승으로 끝났으며 찰로너는 감옥에 갇힌 뒤 1699년 3월 22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여기에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81] 이른바 클리핑(clipping)이라고 한다. 여기서 클립은 종이 클립이 아니라 손톱깎이(nail clipper)의 그 클립이다. 동전의 테두리를 조금씩 깎아 이득을 취하는 방법으로, 실제 옛날에는 동전을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만들었고, 이런 금속들은 상대적으로 무른 종류였기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이 외에도 동전을 자루에 넣고 흔들어 떨어져 나오는 금속 부스러기들만 긁어모으는 스웨팅(sweating. 땀을 흘린다는 뜻이 있다.) 등의 수법이 성행했다. 관련 내용은 이곳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82] 다만 전한 먼저 했다. [83] 한편으론 뉴턴의 온도계는 고온에서 오차가 커지는 문제가 있어 금속의 녹는점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데 쓰기엔 부적합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84] 영국 왕립학회의 학술지 '왕립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에 발표했을 때 본인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훗날 뉴턴 사후 그의 업적을 모아 편찬한 서적이 발간되면서 해당 논문이 그의 것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85] 조셉 스펜스가 Anecdotes, observations, and characters of books and men. 에서 래드너 경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래드너 경이 뉴턴 경에게 솟구치는 남해주식회사의 주가에 대하여 묻자, "그가 인간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고 하였다고 한다.(https://archive.org/details/spencesanecdotes00spen/page/70/mode/2up) 뉴턴 연구자 리처드.S.웨스트폴에 따르면, 이 말을 하였을 때 그는 후회하는 심정으로 반성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86] 뉴턴은 말년에 고정적인 수입원이 많았다. 먼저 물려받은 토지 자체가 많았다. 뉴턴은 부계한테 쓸만한 장원과 농장을 많이 물려받았다. 게다가 양부 바너바스 스미스 사망 이후 뉴턴의 어머니 해나 에이스코는 현대의 추산에 따르면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가장 많이 보유한 1,500명 안에 들었다. 해나 사후 대부분은 스미스의 아들 벤자민에게 돌아갔으나 워낙 땅이 많았다보니 뉴턴에게도 상당량의 토지가 돌아갔다. 출판물 인세도 워낙 많았다. 프린키피아는 당시에도 엄청난 평가를 받았으며 다른 책들도 잘 팔렸다. 조폐국장으로서 찍어난 주화에 비례해 받는 성과급도 어마어마했다. [87] the [88] 편지 내용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거인은 훅과 데카르트다. 뉴턴 서간집 1권 154번 편지 참조 일각에서는 꼽추였던 훅을 우회적으로 비꼬려고 이렇게 적었다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사실 뉴턴은 이때까지 훅과 사이가 좋았다. [89] "거인의 목말을 탄 난쟁이"(nani gigantium humeris insidentes)는 중세의 스콜라학자들이 선학들을 의식하여 존경과 겸손을 담아서 하던 말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12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샤르트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de Chartres)가 처음이다. 정확히는 잉글랜드의 철학자인 솔즈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이 그의 저서에서 샤르트르의 베르나르두스가 한 말이라고 소개한 것이 원조다. 이것도 베르나르두스의 기록이 지금 남은 가장 오래된 사료일뿐 어쩌면 더 옛날부터 있던 말일 수도 있다. 뉴턴은 유명한 문구를 편지에 인용한 것뿐. [90] 이 또한 뉴턴이 최초로 한 말은 아니다. 참조에서 보이듯이 더 흔히는 "플라톤은 내 친구이지만 진리는 더 나은 친구이다"라는 형태로 쓰였다. [91] 뉴턴은 중력 법칙, 운동 법칙 및 광학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이루어냈으며, 그의 연구 방법은 관찰, 실험, 수학적 모델링 및 추론을 결합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복잡한 현상 단순한 원칙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로 사후 [age(1727-03-31)]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학의 발전과 현대 물리학 및 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92] "It did not last: the Devil howling 'Ho, Let Einstein be,' restored the status quo.” (그러나 ‘호!’하고 소리치며 악마가 말하길, " 아인슈타인이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으니.)라는 존 콜링즈 스콰이어 (John Collings Squire)의 패러디 시가 있다. [실제로] 휘스턴의 증언에 따르면, 뉴턴은 교살한 동물 (토끼)의 고기는 윤리적 이유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동물에게 잔인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을, 이웃 사랑과 거의 동등한 도덕적 명령으로 간주했을것이다 [94] 경제학자로서 가장 유명하지만 아이작 뉴턴 재조명의 선두 주자이기도 하다. 그는 경매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미출간 저작을 구매하여 읽을 정도로 뉴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검토한 끝에 케인스가 내린 평가가 바로 이것. [95] 이 말은 케인즈가 강연자로 초대되었던 뉴턴 탄생 300주년 기념 행사 강연 내용의 한 단락으로서, 케인즈가 뉴턴에 대해 한 말로 유명하다. 그러나, 뉴턴의 탄생 기념 행사가 예정되어있었던 1942년,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행사가 미뤄지고, 케인즈는 결국 이 강연을 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에 따라,후에 열린 뉴턴 탄생 기념 행사에서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형제었던 제프리 케인스(Geoffrey Keynes)가 대신해서 강연을 한다. [96]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 이전에는 점성술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뉴턴이 관심을 가진 이 시기의 점성술은 윌리엄 릴리로 상징되는 고전 르네상스 점성술로, 현대의 별자리 점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복잡한 수학적 기법이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없어서 점을 칠 때마다 밤하늘의 지도를 다 관측, 계산해서 그려야 했다. [97] 나머지 두 명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아르키메데스이다. 가끔 이에 맞먹는 업적을 남긴 레온하르트 오일러까지 넣어 4명을 묶음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98] 원제: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99] 그런데 닥터와 도나가 뉴턴 본인 앞에서 중력(gravity)을 말하고 말았고, 이걸 뉴턴이 잘못 기억하는 바람에 현대에서 중력이 뭉력(mavity)으로 바뀌었다! [100] 마블 코믹스 내에 나오는 위인들은 대체로 스펙이 뛰어난 위인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곤충형 외계 종족인 브루드의 침공을 막아낸 임호텝, 크리 센티널을 거대 로봇으로 조종해 부순 아르키메데스, 셀레스티얼 말빨로 처리한 장형, 소서러 슈프림이었던 장각 등. # # [101] 옥스포드에서 주관하는 뉴턴과 뉴턴에 관련한 저작물들과 서신 등을 모아놓은 아카이브 [102]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뉴턴의 연금술과 화학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