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14:48:25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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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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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0호 한양도성
광희문
光熙門 | Gwanghuimun
<colbgcolor=#bf1400><colcolor=#fff>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344
(광희동2가 105-32)
건축시기 1396년 (창건)
1711년 (재건)
1975년 (복원)
시설 1동
이칭 남소문(南小門)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568501_image2_1.jpg
파일:광희문.jpg
<colbgcolor=#bf1400> 광희문[1]
1. 개요2. 역사3. 창작물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한양도성의 4소문 중 남문. '남소문(南小門)'이라고도 부른다.[2]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2가 105-30에 있다. 지하철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로 나가는 것이 가장 가깝다.

2. 역사

1396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세워지면서 '광희문'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지어졌다. 1422년 세종 때 개축되었고 1719년 숙종 때 문루가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1928년에 일부가 훼손되고 광희문 문루를 보수할 돈이 없다는 구실로 혜화문과 함께 문루도 철거해 사라졌다. 1975년에는 도로 확장을 명목으로 홍예까지 철거했다.

조선시대 그림과 구한말 흑백사진에 담긴 《광희문》 모습

현재의 광희문은 홍예를 남쪽으로 12m를 옮겨가 문루와 함께 다시 쌓은 모습이다. 지금도 광희문 자체는 원위치로 가지 못했으며 성벽도 한쪽은 끊어져 있다.

별칭으로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軀門)'이 있다. 전자는 인접한 청계천의 오간수문에서 이어지는 물길 중 하나가 이쪽으로 빠져나갔다는 이유에서 광희문 건축 당시부터 불려왔고, 후자는 조선 시대에 한성부 내에서 사망한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 통과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광희문을 따라 내려가면 당시 묘지가 많았던 수철리(현 금호동)[3]가 나왔기 때문. 시신의 운구가 이루어진 문이기 때문에 자주 곡소리가 들렸으며 일반 백성들도 지나가기 꺼리는 관문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빛(光)처럼 빛나다(熙)'는 이름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가 짙은 '통곡문(痛哭門)' 또는 '시신문(屍身門)'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문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위해,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위로했다.

죽어 가는 환자들 또한 이곳에 많이 모였다. 이 시대에도 물론 의사가 있었지만, 무당이 의사 역할을 하기도 하여 병환이 있는 이들이 무당을 찾아가 치유 의식을 치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광희문 바로 앞에 자연스럽게 신당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이후 이곳에 신당이 많다 하여 '신당동(神堂洞)'으로 불렸다. 이후 갑오개혁 때부터는 한자어가 ' 신당동(新堂洞)'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천주교 순교성지 중 한 곳으로, 인근에 순교기념관이 있다. 즉, 남소문, 서소문 모두 순교성지이다.

이괄의 난 당시 한양도성을 점령했다가 이틀 만에 도주한 이괄과 그 잔당이 이 문을 통과하여 도망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이괄은 부하 장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 의해 살해당한다. 정말로 시체가 됐다.

1880년대에 한양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 한양도성 내에 살던 많은 아이들이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어 갔는데, 이 병든 아이들 대부분은 광희문 밖으로 버려져 방치되었다.

1907년에는 한국통감부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에 반대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광희문 앞에다 놓기도 했었다.
파일:광희문 안쪽의 전경.jpg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광희문 안쪽 전경[4]
한양도성이 허물어진 후에는 문 주변에 울타리를 쳐놓고 보호하느라 인파들이 가까이 접할 수 없었던 관문이었다. 그 당시 울타리를 넘을 경우 벌금 또는 훈방조치 경고가 있었으나 2014년 2월 17일에 서울시 훈령에 따라 개방되어 앞으로는 인파들이 광희문을 가까이 보거나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문 주변에 있던 울타리는 철거되었다.

수도권 전철 5호선 서울 지하철 6호선 환승역인 청구역은 초창기에 광희문의 이름을 본떠서 광희문역이라고 명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광화문역과의 혼동이 우려되고, 광희문은 청구역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당시 동대문운동장역)에 더 가까우며, 과거 시체를 반출하던 문으로써 인식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어 관할 지자체인 서울 중구와 함께 역명 변경을 요청했고 결국 현재 역명으로 변경했다.

3. 창작물에서

  • 대장금〉 44화에서 영로가 (숙원마마가 된) 연생에게 '내시들이 장금이를 시구문 밖으로 끌고간 것만 보았다'고 전하자 장금이 죽은 것으로 알고 연생이 크게 놀란다. 자막으로 깔린 설명에는 시구문에 대해 '지금의 광화문'이라고 오타를 냈다.
  • 영화 〈 살어리랏다〉에서도 내레이션을 통해서 언급되었는데 광희문이 아닌 비공식 명칭인 시구문으로 나온다.
  • 장군의 아들〉에서는 집단 시구문파라는 이름을 통해서 나온 적이 있다. 〈 야인시대〉에도 시구문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 첫 번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엄밀히 말하자면 세조 때 진짜 남소문을 9번째 문으로서 정남쪽에 훨씬 가까운 위치에 지었다가 예종 때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영 좋지 않다는 결정을 내려 폐문했다고 한다. 현재 남산 동쪽의 남소문터가 바로 그 곳이다. [3] 김광균 시인의 시 '수철리'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4]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