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22:13:51

선우대영

선우대영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2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29번}}}
팀 창단 선우대영
(1982~1983)
김형석
(1985~1987)
}}} ||
파일:external/29.seoulgo.net/3621-sun%5B1%5D.jpg
현역 시절의 모습.
선우대영
鮮于大泳 | Sen-Yu-Dae-Yeong
출생 1957년 9월 12일 ([age(1957-09-12)]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성남중 - 서울고 - 중앙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OB 베어스 (1982~1983)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OB 베어스
3. 은퇴 후 근황4. 여담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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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B 베어스의 전 투수. 프로야구의 원년멤버이다. 프로야구 최초의 복성으로 등록된 선수.[1]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서울고 시절 봉황대기 대회와 부산 화랑대기 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하며 유망주로 떠올랐고 중앙대학교를 거쳐 OB의 지명을 받아서 입단하였다.

2.2. OB 베어스

프로 원년이자 데뷔 첫 해에는 27경기에 출장, 6완투 1완봉승을 거두며 138이닝 7승 6패 ERA 3.39를 기록하며 팀내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다.[2]

1982년 한국시리즈 1차전, 3차전, 5차전에 출장하였고, 그 중 3차전에서는 선발투수로 출장하여 승리를 따냈다.

1983년 시즌 중반부터 계속된 출장과 연투로 인해 어깨뼈 힘줄이 끊어졌다는 선고를 받았지만 무리하게 계속 투구를 했고, 결국 부상 때문에 2년밖에 뛰지 못하고 은퇴하였다.

2년간의 짧고 굵은 프로 생활을 경험하면서 11승 12패, 평균자책점 3.61을 기록했다.

3. 은퇴 후 근황

은퇴를 한 뒤 1986년 미국 애틀랜타로 이민을 갔다. 처음에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파는 장사를 할 정도로 힘들었으나, 경비보안장치 업체를 차린 뒤 대박이 났다고 한다.[3] 애틀랜타 교민들 사이에서 '선우대영'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까지 들려 올 정도로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서의 사업이 안정궤도에 접어든 그는 강남 세곡동에 아파트까지 마련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한국을 틈틈히 방문하며 상가와 오피스텔, 레지던트 등 부동산 관련 재테크에 관심이 많으며 서울에 왔을 때 타고다닐 포르쉐 카레라 GT도 미국에서 한 대 가져왔다고 한다.

2015년 플레이오프에는 NC 다이노스의 감독인 김경문의 초대로 잠실 야구장에서 경기를 직관하기도 했다.[4]

4. 여담

  • 선우대영 이후로 좌완 선발 명맥이 끊겼다는 평가를 받았던 두산 베어스였는데, 그가 은퇴한지 26년 뒤에 공교롭게 같은 중앙대를 나오고 좌투수에 등번호도 29번으로 똑같은 유희관이 등장하면서 베어스의 좌완 선발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 선우대영은 KBO리그 최초의 복성 등록 선수이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OB 27 138 7 6 0 0.538 3.39 139 8 35 65 64 52 1.23
1983 17 96⅔ 4 6 1 0.400 3.91 97 13 34 38 45 42 1.29
KBO 통산
(2시즌)
44 234⅔ 11 12 1 0.478 3.61 236 21 69 103 109 94 1.26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승
1982년 6완투 1완봉승
1983년 5완투 1완봉승
KBO 통산 11완투 2완봉

6. 관련 문서


[1] 이외에 황목치승 사공엽이 있으나 모두 희귀성씨이다. [2] 지금 기준에서 보면 무슨 7승 가지고 팀내 에이스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프로 원년은 80경기밖에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1982년 스탯티즈 기준 WAR은 3.60이다. [3] 미국은 개인이 총기를 휴대할 수 있어서 불안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점을 잘 파고든 것. [4] 김경문과 선우대영은 현역 시절에 배터리 호흡을 자주 맞춰서 친분이 각별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