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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빌리 스콰이어 Billy Squ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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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윌리엄 헤이슬립 스콰이어 William Haislip Squier |
출생 | 1950년 5월 12일 ([age(1950-05-12)]세)[1] |
미국 매사추세츠 웰슬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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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
학력 |
웰슬리 고등학교 (졸업) 버클리 음악대학 (중퇴) |
장르 | 블루스 록, 아레나 록, 하드 록, 팝 록, 파워 팝 |
사용 악기 | 보컬, 기타 |
활동 기간 | 1968년 – 현재 |
레이블 | 캐피톨 레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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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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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곡인 Everybody Wants You |
미국의 음악가.
2. 생애
2.1. 어릴적
1960년대 우연히 에릭 클랩튼, 정확히는 당시 그가 속해 있던 ' 존 메이올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스'라는 블루스 록 밴드의 음악을 듣고 블루스 록 음악에 매료되었다. 14살때 처음으로 아마추어 록밴드를 만들었고 18살때 웰슬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가 처음으로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봤던 사이키델릭 슈퍼마켓이라는 클럽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하며 약간의 인지도를 얻었다. 동시에 버클리 음악대학에도 재적하며 음악 선생님과 전문 뮤지션의 진로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끝내 대학교를 중퇴하고 전문 락커가 되기로 결정한다.2.2. 초창기 커리어
대학교를 중퇴한 이후에는 뉴욕 맨해튼으로 건너가, 사이드 와인더스라는 작은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재적하였다. 2년 이후 그는 밴드를 탈퇴해 원맨 밴드 파이퍼를 조직했다. 파이퍼는 2장의 음반을 냈고 보컬에 기타까지 빌리 스콰이어가 다 했었다. 하지만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멤버들이 줄지어 파이퍼를 탈퇴하자 결국 빌리 스콰이어도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1979년,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솔로 1집인 The Tale of the Tape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평론가들에게서는 좋은 평을 얻었으나 당시 인기를 끌던 팝 스타일이 아닌, 에릭 클랩튼과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등에게서 영향을 받은 정통 블루스 로큰롤 스타일의 음반이었던 탓에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 음악가들에게는 어느정도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1980년 그는 앨리스 쿠퍼와 합동 투어를 할 기회를 얻었다. 빌리 스콰이어의 음악적 가능성을 눈여겨본 앨리스 쿠퍼는 퀸의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브라이언 메이에게 빌리 스콰이어의 음악 프로듀서가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메이는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퀸과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엔지니어였던 엔터 맥이 브라이언 메이의 요청으로 빌리 스콰이어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2.3. 전성기
맥과 함께한 첫 음반이자, 솔로 2집인 Don't Say No는 그의 첫 히트작이다. 대표곡으로는 The Stroke와 Lonely Is the Night라는 곡이 있고, 존 레논의 추모곡인 Nobody Knows도 인기를 끌었다. 음반은 빌보드 200에서 5위까지 올랐다. 3집인 Emotions in Motion도 굉장히 성공했으며 그의 최대 히트작으로 불린다. 빌보드 200 성적은 5위였고, 6주간 메인스트림 록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싱글 Everybody Wants You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었다.Signs of Life도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흔히 그의 인기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이 앨범 역시 RIAA에서 100만장이 팔린 것을 뜻하는 플래티넘 인증 기록을 달성하여, 그는 3연속 플래티넘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퀸과의 Hot Space 합동 투어, 그리고 당시 떠오르던 글램 메탈 밴드 데프 레파드의 지원도 큰 힘이 되었다.
2.4. 쇠퇴기와 현재
하지만 안타깝게도 빌리 스콰이어의 전성기는 딱 여기까지. 이후로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Signs of Life의 뮤직 비디오가 그야말로 망작으로 꼽히는데 MTV에서는 훗날 이 뮤직 비디오를 "MTV 사상 최악의 뮤직 비디오"라고 정의내린 적이 있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반대로 시대의 흐름이었던 "보는 음악"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캐피톨 레코드사와의 갈등 역시 시작되었고 피로가 쌓여 음악적으로 슬럼프를 겪게 되었다. 4집에는 프레디 머큐리까지 백보컬로 참여하면서 퀸을 비롯한 친분 있는 뮤지션들이 빌리 스콰이어를 도왔지만 흥행 실패를 막을 수 없었다.[2]정규 8집인 Tell the Truth는 빌리 스콰이어의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빌보드 200 안에 들지 못한 음반이다. 비슷한 시기 절친한 친구였던 프레디 머큐리도 사망했고, 캐피톨 레코드도 빌리 스콰이어를 압박하자 견디지 못한 그는 음악계를 은퇴하였다. 1998년 어쿠스틱 음반 한장을 발매했고 프레디 머큐리를 기리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것을 제외하면 20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은 사실상 은둔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음악 원로가 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이에 따라 빌리 스콰이어도 간간히 다시 기타에 손을 대고 콘서트를 여는 등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나름 원로로서 대접받고 있다.
3. 음악적 특징과 평가
글램 메탈의 광풍 시기에 블루스 록을 기반에 둔 절제된 하드 록 음악과 AOR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평론가들에게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을 얻었다. 그의 기타 스타일은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즈, 그리고 에릭 클랩튼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한때 "제2의 에릭 클랩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가사 면에서 고평가받는 훌륭한 송라이터이기도 하다. 사랑, 열정과 같은 주제를 꾸밈 없이 솔직하게 표현한 가사 때문에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뮤지션이었다.
4. 대표곡
* The Stroke
* Everybody Wants You
* In the Dark
* Lonely Is the Night
* My Kinda Love
5. 디스코그래피
- The Tale of the Tape (1980)
- Don't Say No (1981)
- Emotions in Motion (1982)
- Signs of Life (1984)
- Enough Is Enough (1986)
- Hear & Now (1989)
- Creatures of Habit (1991)
- Tell the Truth (1993)
- Happy Blue (1998)
5.1. 싱글
5.1.1.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The Stroke (1981, 17위)
- Rock Me Tonite (1984, 15위)
6. 여담
- 출생지는 매사추세츠이지만 음악 활동을 하면서 현재까지 뉴욕 맨해튼에서 쭉 살고 있다. 2002년 독일 출신의 여자 축구 선수인 니콜레 쇤(Nicole Schoen)과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다. 스콰이어의 집은 샌트럴파크 바로 옆쪽에 있는데 취미 삼아서 샌트럴 파크의 자원 봉사자로도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이며 공화당의 지지자로 알려져있다. 2008년 대선 당시 매케인 후보를 후원한 사람중 하나였다.
- 퀸의 멤버들과는 엄청난 절친 사이다. 퀸이 빌리 스콰이어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도왔기 때문에 빌리 스콰이어 입장에서는 거의 은인이나 다름 없는 신세. 게다가 몇몇 음반과 곡에서는 프레디 머큐리,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가 세션으로 참여한 적도 있고 상술했다시피 브라이언 메이는 일정 사정만 아니었으면 그의 프로듀서가 될 뻔 했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 이후 빌리 스콰이어는 프레디의 추모 다큐에 나와서 그와의 일화 몇개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 외에 데프 레파드, 링고 스타 등과 친분이 있으며, 링고 스타와는 1998년부터 링고 스타 앤 히스 올 스타 밴드라는 밴드에 소속되어 투어도 가끔 같이 도는 사이다.
[1]
스티비 원더와 생일이 딱 하루 차이난다.
[2]
그나마
Love Is The Hero는 프레디 머큐리의 이름값으로 어느정도 히트치긴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