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20:39:02

베토벤의 여인들

1. 개요2. 베토벤의 여인들
2.1. 엘레오노레 폰 브로이닝2.2. 줄리에타 귀차르디2.3.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2.4.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2.5. 베티나 폰 아르님2.6. 테레제 말파티2.7. 안토니 브렌타노2.8. 안나 마리 폰 에르되디2.9. 아말리 제발트

1. 개요

루트비히 판 베토벤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이나, 생전에 많은 여인들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었다.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 약속을 한 적도 있고, 심지어 사생아로 낳은 딸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특히 그의 사후 그의 비밀서랍에서 발견된, 익명의 여인을 향해 썼으나 발송되지 않은 채 숨겨두었던 편지, 일명 불멸의 연인은 너무나 유명해서 누가 불멸의 연인의 수신인인지를 두고 아직까지도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이 불멸의 연인 덕분에 베토벤의 연애사는 학자들 뿐만 아니라 세인들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연애사는 자신의 음악에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 상당수가 자신의 연인들에게 헌정되었다. 그리고 많은 연인들이 자신의 피아노 제자였는데, 피아노를 가르치다가 눈이 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카사노바마냥 모든 여제자와 애정행각을 벌인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자.

사실 그가 평생 결혼하지 못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눈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이다. 그가 깊게 사귄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과 신분이 다른 귀족이었거나 남의 아내 또는 자기보다 열 몇 살 이상 어린 조카뻘 여자였다. 기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베토벤은 음악에 대한 이해가 없는 교양 없는 여자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래서 여염집 여자들과는 진지하게 사귀지 않았다. 의외로 매춘은 즐겼지만. 게다가 귓병으로 잘 들리지도 않고 돈도 별로 없는 주제에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고 성격은 전설적인 괴팍함을 자랑했으니, 예비 장인, 장모가 될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당연지사. 여자들 입장에서도 처음에는 그의 천재성과 순수함에 이끌렸지만 혼담이 오가는 상황에서 나이 차와 경제력, 성격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에 결혼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후술되는 여성들의 이름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서양에서는 여성이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라 개명하기 때문에 베토벤과 연애를 시작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여자가 미혼일 때에는 본명을 썼고 기혼일 때에는 결혼 후 이름을 사용했다.

2. 베토벤의 여인들

소시적에 잠깐 사귀었던 엘레오노레를 제외하면, 베토벤의 연애사는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까지 약 10년 정도에 집중되어 있다. 안토니 브렌타노와 결국 맺어지지 못한 이후에는 더 이상 진지한 연애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엘레오노레 이전에도 사춘기 소년의 감성으로 좋아하거나 가깝게 지낸 여성(이라기보다는 소녀)들이 있었다. 베토벤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어렸을 때 소꿉친구들까지 다 파헤쳐지는 중.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정보가 많지 않고 대부분 소문이나 간접적인 증언 정도만 남아 있는데다, 나이를 감안했을 때 사춘기 이하의 소녀들까지 본격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한다.

40대 중반 이후, 베토벤은 신붓감을 구하는 대신 조카 카를 판 베토벤의 친권을 획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그에게 거의 편집증적으로 집착하였다. 이 시절부터 베토벤은 연애를 포기해서 여자에게 잘보일 필요가 없어진 탓인지, 카를에게 정신을 쏟느라 개인사에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인지, 돈은 꽤 벌었지만 옷차림도 더이상 꾸미지 않았고 하숙집을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습관도 버리지 않았다. 이 덕에 베토벤이 비인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는 도시전설이 탄생하였다. 그는 돈이 없었던 게 아니라 단지 쓰지 않았던 것뿐이다.

2.1. 엘레오노레 폰 브로이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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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레 폰 브로이닝(Eleonore von Breuning 1771 - 1841)

베토벤이 16세였을 때 당시 의대생이었던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2]가 그를 브로이닝가(von Breuning)에 소개해 주었다. 알코올 의존증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가정생활이 무척 힘들었던 베토벤은, 자신의 집안보다 훨씬 편안하고 교양있는 브로우닝 집안에서 자주 머물렀으며 소년 베토벤은 여기서 문학과 교양을 익혔다.

공식적으로 베토벤은 브로이닝 집안의 피아노 선생이었으며, 이 집안의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브로이닝 집안의 장녀였던 엘레오노레와 썸을 타기 시작했는데, 엘레오노레는 베토벤의 사실상 첫사랑으로, 베토벤보다 1살 아래였으며 이 항목에 언급된 베토벤의 여인 중에 제일 나이가 많다. 두 사람이 썸탈 당시 베토벤의 나이는 19세.

둘은 얼마 동안은 진심으로 사귄 듯하지만, 아직 두 사람 모두 어린 나이인데다 신분의 차이도 있고 해서 결혼까지 가지는 않았다. 연인관계가 끝난 후에도 친구로서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는데, 1792년 베토벤이 으로 떠날 당시 엘레오노레는 우정을 상징하는 시집을 선물하기도 했으며, 빈으로 떠난 후 얼마동안 편지를 교환하기도 했다. 다만 떠나기 직전에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크게 싸웠는데, 이듬해 화해하기 위해 베토벤이 보낸 사과편지에는 그녀가 준 스카프 등의 선물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이후 베토벤은 그녀에게 피가로의 결혼 주제에 의한 변주곡(피아노와 바이올린 2중주곡, WoO 40), 피아노 론도(WoO 41), 피아노 소나타(WoO 51) 등을 헌정했다. 아무래도 인생 초반에 사귄 사람이기 때문에 헌정된 곡들도 모두 초기 작품에 해당된다.

이후 엘레오노레는 1802년에 브로이닝 집안에 베토벤을 소개해준 의사 프란츠 베겔러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남편을 따라 코블렌츠로 떠나 평생 거기서 살았다. 베토벤이 빈으로 떠난 이후 엘레오노레와 베토벤은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으며, 베토벤이 죽기 2년 전 베겔러가 베토벤에게 보내는 편지에 엘레오노레가 자필로 '한번 만납시다'라는 추신을 써서 보내기도 했는데, 결국 두 사람의 재회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베토벤이 죽기 1년 전인 1826년에는 베겔러에게 "당신의 아내 로르헨(엘레오노레의 애칭)의 추억(실루엣)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네. 젊은 날 나를 사로잡았던 모든 것이 여전히 나에게 가장 소중하다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풋내기 시절 허무하게 끝나버린 첫사랑이었지만, (엘레오노레의 남편인 베겔러가 베토벤과 평생지기였다보니)베토벤의 여인 가운데 그가 죽을 때까지 인연이 닿았던 거의 유일한 여인이기도 했다.

2.2. 줄리에타 귀차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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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에타 귀차르디(Giulietta Guicciardi, 1782-1856

오스트리아 백작 가문의 딸로서, 19세인 1801년에 베토벤의 제자가 되었다. 그녀의 집안은 후술할 브룬스비크 집안과 친분이 있어서 요제피네와 테레제와도 친한 사이었다. 요제피네가 베토벤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다임 백작과 결혼한 이후 베토벤이 대타로 이 귀차르디에게 열띤 구애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차르디와 베토벤이 주고받은 편지를 분석한 베토벤 연구자들에 의하면, 귀차르디와도 요제피네와의 그것 못지않게 깊은 관계여서 한때 결혼 이야기까지 오갔다고 한다. 또 자칭 베토벤의 비서였던 안톤 신들러에 의하면 베토벤이 말년에 줄리에타와 정말 진지하게 사랑을 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예비 장인장모가 될 분들의 허락을 받지 못해서 결국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 것도 요제피네의 경우와 똑같다.

당시 귀차르디는 베토벤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베토벤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즐겼으며, 또 이걸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녀가 진심으로 베토벤을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냥 데리고 논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래 내용에서 보듯 평범한 여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여튼 귀차르디는 집안의 반대로 베토벤과의 연애관계가 끝나자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작곡가인 벤첼 폰 갈렌베르크(Wenzel von Gallenberg)[3] 백작과 결혼하였다. 베토벤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결혼에 당연히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베토벤은 이 시기 청각장애가 심해지면서 상당히 고통을 받고 있었고 1802년에는 자살할 생각으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기도 했는데, 이런 배경에는 귀차르디와의 연애가 난항을 겪는 것에 대한 좌절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당시 유서나 베토벤이 남긴 편지에는 딱히 이런 충격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귀차르디의 결혼 바로 다음 해에 요세피네가 미망인이 되었기 때문에 베토벤에게는 금세 다른 목표(?)가 생겼다. 따라서 의외로 귀차르디와의 결별의 충격이 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여튼 귀차르디 부부는 결혼 후 큰 풍파 없이 지냈으며 결혼 3년차인 1806년에 남편이 당시 서유럽을 장악하고 있던 나폴레옹 정권으로부터 나폴리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부부가 같이 나폴리로 이주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년 후인 1821년 남편이 빈의 왕립 오페라 극장의 부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부부는 다시 빈에 돌아온다. 빈으로 복귀한 후 귀차르디와 베토벤이 다시 만났는지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딱히 두 사람이 만났다는 정황은 없다. 일설에 의하면 귀차르디가 빈으로 복귀한 후 베토벤을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베토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베토벤은 말년에 귀차르디에 대해 종종 언급했으며 특히 그가 사망한 후 유품에서 귀차르디의 초상화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4] 비서 안톤 신들러는 이에 근거하여 불멸의 연인의 주인공이 귀차르디라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나올 당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으며 오늘날 베토벤 전문가 중에 그녀가 불멸의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편 귀차르디는 결혼 후 자식을 낳기는 했는데, 문제는 갈렌베르크 백작이 성불능자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을 낳았다! 아이의 진짜 부친(들)이 누구인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남편은 이를 별로 문제 삼지 않고 아내가 낳아온 사생아들을 자기 자식처럼 키웠다. 그녀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생존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갈렌베르크 백작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베토벤과의 연애사와 별도로 음악사적으로 그녀가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14번(일명 월광 소나타, op 27-2)을 헌정받은 주인공이 바로 줄리에타 귀차르디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월광소나타는 그녀를 위해 쓴 작품이 아니었지만, 당시 귀차르디에게 연정을 품었던 베토벤이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헌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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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Josephine von Brunswick, 애칭은 페피(Pepi), 1779-1821)

브룬스비크 가문은 당시 헝가리 왕국의 귀족(백작)가문이었으며, 후술하는 테레제와는 자매이다. 이 가문에는 음악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요제피네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다. 요제피네가 만 20살 때(언니 테레제는 24살 때) 그녀의 부모가 두 자매를 빈으로 데려와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의뢰하는데, 이 의뢰는 이후 벌어질 두 자매와 베토벤 간의 처절하고 슬픈 연애관계의 서막이 된다.

이 요제피네는 베토벤의 여인들 중에 베토벤과 가장 각별했으며 또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여인이다. 또한 베토벤의 여인들 가운데 베토벤보다 일찍 사망한 유일한 사람이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베토벤과 관련된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이 요세피네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요제피네는 불멸의 연인 편지가 발견되었던 당시부터 당연히 '불멸의 연인' 수신인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이후 반증이 많이 나와서 후보에서 밀려났는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유력한 불멸의 여인 후보로 부각된다.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불멸의 여인 논란에서도 파란만장한 여인.

각설하고, 베토벤은 1799년 5월 3일부터 테레제와 요제피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보통 오후 12시부터 1시까지 1시간 동안 가르쳐야 될 것을, 4~5시까지 추가 돈을 안 받고 시간을 초과해서 이들을 매일 빠짐없이 16일 동안 가르쳤다. 심지어 무료 레슨을 진행한 적도 많았다. 이렇게 피아노를 가르치다가 요제피네에게 빠져든 베토벤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데, 문제는 요제피네가 피아노를 배울 당시에 이미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요제피네는 자신보다 무려 27살이나 많은 요제프 그라프 폰 다임(Joseph Graf von Deym)과 일종의 정략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브룬스비크 가문은 재정적인 문제로 딸들을 무조건 부잣집에 시집보내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어울리지 않는 결혼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요제피네도 베토벤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지만, 그녀는 결국 집안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다임 백작과 결혼하게 된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요제피네는 남편과 그럭저럭 잘 지내면서 모두 4명의 자녀(빅투아르(애칭은 비키), 프리드리히(애칭은 프리츠), 칼, 요제피네(애칭은 세피네))를 낳았는데, 다임 백작은 요제피네가 넷째를 임신하고 있던 1804년 폐렴에 걸려 급사하고 만다.

다임 백작의 사망 후, 요제피네와 베토벤은 다시 본격적으로 연애하게 된다. 베토벤은 자주 미망인의 집을 방문했으며 열렬한 연애편지도 여러 차례 써서 보낸다. 피아노곡 Andante favori(WoO 57)도 이 시기에 헌정했다. 이 안단테 파보리는 원래 유명한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2악장이었다.

애초에 베토벤을 좋아했던 요제피네는 베토벤의 구애에 결국 결혼 약속까지 하게 되는데, 이는 베토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약혼이었다. 하지만 이 약혼은 브룬스비크 가문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친데다, 요제피네 스스로도 베토벤이 자기 자식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으로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흘러간다. 기사

원래 남녀 간 혼사라는 것이 제때 딱 성사되지 않으면 그대로 물 건너 가는 법. 사랑과 집안 분위기 사이에서 번민하던 요제피네는 결국 베토벤과의 결혼을 단념하고, 1808년 프리드리히와 칼의 교육 관련으로 테레제와 함께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를 만나러 갔다가 에스토니아의 하급 귀족 크리스토프 폰 슈타켈베르크(Christoph von Stackelberg)[5] 남작을 만나 브룬스비크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요제피네가 먼 길을 여행했기 때문인지 제네바에서 병에 걸렸고, 이렇게 몸이 약해졌을 때 슈타켈베르크에게 의지하다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1809년 초 브룬스비크 가문에 도착했을 때에는 나중에 마리아 라우라로 이름짓게 되는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이 연애 역시 슈타켈베르크가 하급 귀족이고 가톨릭을 믿는 브룬스비크 가문과는 달리 개신교인이라 그들의 반대에 부딪쳐 난항을 겪다가, 두 사람의 속도위반 사실이 확인되는 바람에 베토벤은 왜 이 방법을 몰랐을까? 1810년 2월 13일 급하게 결혼이 성사된다. 문제는 이 결혼이 두 사람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의 연속이었다는 것. 슈타켈베르크 부부는 결혼 초부터 성격차이로 삐걱댔으며, 요제피네는 딸 둘(마리아 라우라, 테오필레)을 낳은 이후 다시 병에 걸려 건강 문제 때문이라며 아예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하고 별거에 들어간다. 또한 슈타켈베르크는 다임 백작 사이에서 나온 자녀들을 교육하기 않으려는 문제도 있었다. 또한 동년 5월 22일 Witschapp과 모라비아의 Lessonitz에서 대규모 부동산을 구입했지만 7월 1일 구매 가격 전체를 조달하지 못하게 되면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손실과 토지 소유자들을 상대로 재판을 했으나 패소하면서 파산하고 만다. 슈타켈베르크는 1810년부터 에스토니아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1812년 1월과 10월 단 두 번만 요제피네의 집에 방문했다.

결국 결혼 4년 만인 1812년 6월 슈타켈베르크가 떠나면서 둘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탄이 나게 되는데, 웬일인지 정식 이혼에 이르지는 않았다. 남편 없이 있던 요제피네는 일기에 따르면 이때 프라하로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이때부터 2개월간 테레제의 일기와 격차가 생기게 되는데 그 6월부터 8월까지의 일기는 남아있지 않다. 이후 "가위로 4장을 깔끔하게 오려냈다"라는 기록이 있어 누군가가 그 동안의 일기를 잘라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 공백의 기간 동안 7월 3일 프라하로 여행한 베토벤과 잠깐 만났고 이후 베토벤은 보헤미아의 테플리츠(Teplitz, 현 체코 테플리체·Teplice)로 갔다는 설이 있고, 이후 7월 테플리츠에서 베토벤은 불멸의 연인 편지를 남긴다. 특히 동년 말 요제피네와 베토벤은 테플리츠에서 확실히 만나 다시금 잠깐 동안 연애를 한 적이 있다. 별거 후 홀로 자식들을 키우느라 생활고에 시달렸던 요제피네는 남편이 재산을 회복한 1812년 말 다시 재결합을 원했으며 슈타켈베르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재결합이 이루어진다. 재결합할 때 슈타켈베르크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요제피네를 떠날 수 있으며 이때 자녀들 양육권도 자신이 갖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심신이 모두 지쳐있던 요제피네는 이런 가혹한 조건을 모두 승낙했다. 그런데 이듬해( 1813년) 4월 8일 언니 테레제의 도움으로 셋째 딸 미노나가 태어난 직후 슈타켈베르크는 갑자기 요제피네의 곁을 떠나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슈타켈베르크가 미노나가 자기 딸이 아니라는 의심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링크. 이 미노나는 슈타켈베르크의 딸이 아니라 요제피네와 베토벤 사생아라는 주장[6]이 설득력을 얻으며, 1812년 베토벤과 요제피네는 실제로 테플리츠에서 만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브룬스비크 가문에서는 요제피네의 명예 때문에 베토벤과 미노나의 연관성 사이를 부인하고, 어차피 미노나의 무덤을 파헤친다 해도 유해에는 어머니 요제피네로부터 물려받은 미토콘드리아만 있을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과의 DNA가 일치한 지 알아보기 힘들다. 링크(오스트리아의 음악학자 미하엘 로렌츠(Michael Lorenz)의 블로그(영어)), 링크 2(헝가리어) 당시 요제피네의 정신이 멀쩡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기는 하나, 이렇게 추측에 불과함에도 이 설은 흥미롭기 때문에 음악학자들 사이에선 거의 기정사실로 취급하고, 사실인지 아닌지와 관련 없이 음악학자들이 많이 연구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이 사생아 건에 대해서는 이 부분에 자세히 나와 있다. 1812년 이후에도 베토벤과 요제피네가 가끔 만났고 1816년에도 이들이 바덴에서 만났다는 게 입증[7]되었다.

요제피네는 미노나를 낳았지만 당시 산후우울증 때문인지 제정신인 상태가 아니라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않아 테레제 등의 주위 사람들이 미노나를 농부에게 염소를 빌려 염소젖을 먹이면서 키웠다. 이후 1813년 5월 슈타켈베르크가 요제피네에게 에스토니아로 가자고 하나 요제피네가 거부하자 1814년 5월 갑자기 나타나 경찰에 고발하고 미노나를 포함한, 재혼한 남편에게 낳은 자녀들(마리 폰 슈타켈베르크, 테오필 폰 슈타켈베르크)의 양육권을 남편과의 알력으로 빼앗겼다. 링크, 기사

이후 홀로 첫 남편의 소생인 네 자녀들을 키우면서 생활고와 실의에 빠져 있다가 성격마저 비뚤어져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이 와중에 카를 에두아르트 폰 안드레한-베르부르크(Karl Eduard von Andrehan-Werburg, 보통 안드리안(Andrian)으로 알려짐)라는 수학교사에게 빠져서 1815년 9월 16일 오두막에서 몰래 사생아인 에밀리에(Emilie)를 낳기도 했다. 안드리안은 당시 관습에 따라 슈타켈베르크가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다보니 쫓겨나 에밀리에를 데려가 혼자 키웠지만 에밀리에는 홍역에 걸려 생후 2년 만에 사망했다. 이 에밀리에에 관해서는 2007년에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에 이 이전 연구에서는 미노나가 요제피네의 막내딸일 것이라는 언급이 많으나 이후에는 사장되었다.

1819년에 슈타켈베르크가 자신의 세 아이를 빈으로 잠깐 데리고 왔을 때 미노나는 당시 6살이었는데, 이 시기 쯤의 테레제의 일기에는 미노나가 요제피네의 아이들과는 달라보였다고 생각했는지 " 아이가 이상하게 발달했어요. 그녀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강인하고 언니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녀를 가정교사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자매들 중에서 가장 천재적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라고 썼고, 비슷한 시기 때의 베토벤의 대화수첩에서 누군가가 베토벤에게 "당신은 그 여자(요제피네)의 남편이 그의 아이들 중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이가 당신의 아이라고 의심할 정도로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 있다.

이후에도 그녀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생애 말기에는 장성한 첫 남편의 자식들이 떠나버리고, 심지어 그 첫 남편의 자식들 중 아들들은 군대에 입대해 당시 전쟁 공포 때문에 충격에 빠뜨렸고, 슈타켈베르크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도 그가 데려가버렸고, 그녀를 돌봐주던 언니 테레제도 떠나 버렸으며, 브룬스비크 집안에서도 버림받은 채, 가난 고독 속에 1821년 3월 31일 오후 5시 30분에 42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쓸쓸하게 죽는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떠나게 된 건 무엇보다 그녀가 성격파탄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속물근성에 찌든 브룬스비크 집안에서는 집안의 돈벌이에 기여하지 못한 그녀에게 제대로 원조를 해주지도 않았고, 요제피네의 계속된 불행은 그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떠넘겼다. 그나마 위안이 될 만한 것은 이렇게 버린 브룬스비크 가문이 도와줘서 제대로 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 때에는 요제피네가 워낙 기구하게 살아서 그런지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무덤을 표시하는 묘비나 비문이 없다는 설이 돌기도 했는데 2017년 오스트리아의 음악학자 미하엘 로렌츠(Michael Lorenz)가 블로그의 로 반박했다. 이외에도 요제피네의 첫째 딸 빅투아르가 1823년 2월 2일 성홍열에 걸려 23살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이때 성 스테판의 지하실에서 산채로 묻혀서 그 지하실에서 다시 목격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것도 빅투아르는 성 스테판의 지하실에서 묻힌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다수의 베토벤 연구가들은 요제피네가 죽을 당시 쓰인 베토벤의 마지막 두 소나타(31, 32번)를 요세피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송곡으로 본다. 이 두 소나타의 주제에서 일전에 요세피네에게 헌정했던 안단테 파보리의 주제, 일명 '요제피네 테마'가 연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맞는지 여부와 별도로 요제피네가 죽을 당시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이미 먼 옛날 일이 된 지 오래. 요제피네의 사망 당시 베토벤은 어렵게 양육권을 획득한 카를의 교육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데다가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불멸의 연인의 실제 수신인이 누구이던간에 베토벤의 인생에서 '진정한' 불멸의 연인을 딱 한 명 꼽는다면 바로 이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일 것이다. 요제피네야말로 베토벤이 가장 오랫동안, 또 가장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2.4.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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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제 폰 브룬스비크(Thérèse von Brunswick, 1775-1861)

요제피네의 친언니. 전술했다시피 테레제의 여동생 요제피네가 미망인이 된 후 베토벤과 요제피네가 본격 연애를 하다가 브룬스비크 집안의 반대로 두 사람의 결혼이 물 건너가는 분위기가 될 즈음, 테레제와 베토벤이 갑자기 가까워진다. 뭔가 막장 드라마 삘이 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애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헤어진 이유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베토벤은 요제피네와 이루어지지 못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후 위안 차원에서 그 언니와 잠시 사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도 베토벤은 나중에 테레제에게 피아노 소나타 24번(op. 78)을 헌정했으며, 그 덕분에 이 소나타에는 '테레제'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테레제의 지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늘그막의 테레제가 당시 베토벤과 자신이 몇 년간 몰래 사귀었으며 아무도 몰래 비밀약혼도 했고 둘 외에는 오직 자신의 남동생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하지만 테레제와 연애를 시작한 시점에서 1년쯤 지난 1807년부터 베토벤은 안나 마리 에르되디 백작부인과 본격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으며 안나 마리의 별장에서 상당기간 머무르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테레제와 몇 년씩 사귀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령 약혼을 했다고 한들 결혼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약혼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여동생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말년에 성격이 나빠지기 전 온화한 성격을 지녔던 요제피네와 달리, 언니 테레제는 씩씩한 여장부 스타일이었으며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해서 1826년에는 모국인 헝가리에 최초의 보육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불행한 결혼으로 험한 인생을 살다간 여동생과 달리, 테레제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으며 자신이 세운 보육원에서 평생 봉사하면서 평온하게 살았다.

테레제가 남긴 일기와 서간은 베토벤 연구자들에게 대단히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는데, 베토벤과 브룬스비크 가문의 처절한관계 및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연애사가 굉장히 자세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요제피네에 대해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언니 테레제의 기록 덕분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과 베토벤의 연애관계는 그리 자세하게 써놓지 않아서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를 알기가 어렵다.

1846년에 테레제가 쓴 일기에서는 "왜 요제피네가 첫 남편과 사별한 후 베토벤을 남편으로 맞이하지 않았을까? 슈타켈베르크보다는 베토벤과 결혼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였을 텐데..." 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 요제피네가 언니처럼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가 억지로 베토벤과 결혼해서 인생이 더 행복해졌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베토벤도 성질이 장난이 아니라서

이 테레제는 요제피네가 불멸의 연인 유력후보에서 탈락한 후 대타로 유력한 후보에 올라 있었는데 다시 입지가 많이 흔들리고 있다. 한편 베토벤과 테레제 사이에 아들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주장은 앞서 미노나의 경우와는 달리 증거나 정황이 없기 때문에 그냥 헛소리라고 보면 된다.

2.5. 베티나 폰 아르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베티나 폰 아르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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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테레제 말파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rese_Malfatti_Anonymus.jpg 파일:external/cmuse01.cmuseltd.netdna-cdn.com/Tereza-Malfatti-the-likely-dedicatee-of-F%C3%BCr-Elise-with-Elise-being-a-misreading-of-the-name-Therese-.jpg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 1792-1851) 테레제 말파티(중년 시절의 초상화)

테레제 말파티는 빈의 거상이었던 야코프 말파티의 딸로 빈 토박이었다. 그의 삼촌 요한 말파티는 유명한 내과 의사이자 베토벤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베토벤에게 테플리츠 휴양을 권한 사람이 바로 이 요한 말파티이다. 테레제 말파티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로도 유명했는데, 테레제와 여동생 안나는 당시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매로 알려져 있었다. 안나가 동생이긴 한데 태어난 해는 똑같이 1792년이기 때문에 연초에 첫째가 태어나고 연말에 둘째가 태어나는, 아일랜드 쌍둥이(Irish Twins)라는 동갑 쌍둥이 개념에 포함된다.

베토벤이 귓병과 각종 질병 때문에 괴로워하던 1809년, 아름다운 소녀 테레제 말파티가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면서 둘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테레제는 17살이었고 베토벤은 40살이었다. 23살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180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와 그보다 더 심각한 나이 차이, 그리고 베토벤의 귓병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이 반대했다. 항상 여자 쪽 가족들은 이 남자와 결혼을 반대한다. 근데 그럴 만하긴 하다

베토벤은 테레제를 만나지 못하게 되자 괴로워하고 결국 이듬해 5월 테레제에게 청혼했지만, 테레제는 오스트리아 귀족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1816년이 돼서야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헝가리의 귀족인 빌헬름 폰 드뢰스디크(Johann Wilhelm von Drosdick) 백작과 결혼한다. 베토벤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한 핑계였을 수도 있지만, 혼담이 오가다가 깨지는 게 빈번했던 사교계 세태상 오스트리아 귀족과의 혼담도 무산되고 새 남자를 찾았을 수도 있다.

그 후 1810년 4월 27일에 테레제에게 곡 하나를 헌정하는데, 이 곡이 바로 엘리제를 위하여[8]다. 테레제의 결혼식장에 베토벤은 마지막으로 줄 선물이 있다며 한 곡을 주고 결혼을 축하했다는 설이 있으나, 테레제는 1816년에 결혼하기 때문에 시간대가 맞지 않다.

베토벤이 테레제와 잠시나마 깊게 사귀기는 했지만, 실제로 청혼까지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베토벤은 1810년 4,5월경에 테레제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이제 안녕히 계시오 테레제, 항상 좋고 아름다운 일만 생기길 바라며 나를 기억해주기 바라오. 나보다 더 당신이 밝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거요 - 비록 그대가 신경쓰지 않을지라도.'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상 이별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베토벤이 청혼을 했는지 여부와는 별도로, 사귄 지 몇 달 만에 이와 같은 서신을 보낸 것을 보면 베토벤 스스로도 나이도 많고 병에 시달리는 자신의 처지가 어린 테레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2.7. 안토니 브렌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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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 - 1869) 안토니 브렌타노와 딸 막시밀리안

요제피네 다음으로 베토벤과 각별한 관계였으며, '불멸의 연인'의 강력한 후보인 인물.

본명은 '요한나 안토니 요제파 에들레 폰 비르켄슈타크(Johanna Antonie Josefa Edle von Birkenstock)'. 아버지는 합스부르크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서였으며 외교관이자 미술품 수집가로도 활동하였다. 형제가 둘 있었으나 영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라 모두 어렸을 때 사망하여 사실상 외동딸로 자랐다. 8살때는 어머니까지 전염병으로 잃고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위를 이용해서 먹고 사는 한량 귀족이 아니라 바쁘게 왕실과 국가의 임무를 맡아보는 실무관료였기 때문에 딸을 돌보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결국 결혼시키는 것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듯 하다. 그래서 안토니는 비교적 어린 나이인 18세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본인보다 15살 위였던 부유한 상인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와 결혼하여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다. 이 부부는 평생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이 중 첫째 딸은 1년만에 사망했다. 안토니 브렌타노는 굉장히 장수해서 89살까지 살았는데 사망 당시까지 남아있던 혈육은 4녀 요제파가 유일했다.

이 부부와 베토벤의 인연은 1810년 베토벤 나이 40살에 이루어진다. 안토니 부친의 사망후 그의 유품, 특히 그가 생전에 수집했던 미술품을 정리하기 위해 빈으로 이사온 브렌타노 부부는 이 지역의 명사였던 베토벤과 인연을 맺고 금세 친해졌다. 어렸을 때 엄마를 잃고 일찍 나이 많은 남편을 만나 30살이 될 때까지 뜨거운 사랑을 느껴볼 기회가 없던 안토니였는데 베토벤이라는 남자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이다. 베토벤도 나이는 많은데 당시 안토니는 일찍 죽은 첫째를 제외하고 4자녀의 엄마였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도 베토벤에게 과감하게 청혼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 1812년 테플리츠에 머물던 베토벤은 프라하에서 브렌타노와 단 둘이 만날 수 있었다. 한편 안토니 브렌타노는 테플리츠에 머무를 당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도 인연을 맺었다. 물론 연애관계는 아니었다. 베토벤도 괴테와 만나긴 했는데 자세한 것은 여기 참고. 이 때도 두 사람은 신나게 밀회를 즐겼다. 아이러니한 것은, 베토벤이 테플리츠에 머물던 기간에 선술했듯이 자신의 필생의 연인이었던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도 만났으며, 그것도 모자라 아말리 제발트라는 베를린 출신 소프라노 가수까지 헌팅해서 사귀기도 했다는 것. 난봉꾼 베토벤

하지만 아이 넷이 딸린 유부녀와 노총각이 맺어지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베토벤은 남편 프란츠 브렌타노와 친한 사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친구의 아내를 빼앗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의 한계에 부닥친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고, 얼마 후 브렌타노 부부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버리면서 두 사람의 연애관계는 끝나버린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하지 못했다.

안토니 브렌타노는 음악적으로도 베토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러브 어페어가 끝난 후에도 베토벤은 피아노 변주곡의 끝판왕 디아벨리 변주곡(op. 120)을 안토니 브렌타노에게 헌정했으며, 브렌타노 부부의 딸 막시밀리안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30번(op. 109)과 피아노 삼중주곡에서 피아노 부분을 쉽게 편곡한 알레그레토 악장(WoO 39)를 헌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베토벤 학자들은 연가곡 멀리있는 연인에게(An die ferne Geliebte op. 98)의 주인공 '멀리 있는 연인'을 안토니 브렌타노로 추정한다.

미국 태생의 베토벤 연구가 메이너드 솔로몬(Maynard Solomon)은 불멸의 연인이 안토니 브렌타노라고 주장한 논문을 발표했다. 나름 세심한 연구와 추론을 통해 결론을 내렸던 메이너드의 노력 덕분에 한동안 안토니 브렌타노가 불멸의 여인의 주인공으로 굳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골드슈미트(Goldschmidt)를 비롯한 다른 베토벤 전문가들의 반박이 이어지면서 불멸의 연인은 안토니 브렌타노에서 다시 미지의 여인으로 복귀한 듯한 분위기. 애초에 솔로몬도 정황증거 이상의 결정적인 단서는 제시하지 못했는데, 어차피 베토벤이 되살아나서 편지에 대해 직접 증언을 하지 않는 한 정황증거 이상의 단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 현실.

어쨌건 베토벤은 브렌타노 집안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고 있었으므로 안토니가 사랑을 선언한 결정적 순간에 그의 고통은 어떠했을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안토니 브렌타노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간 후 남편이 프랑크푸르트의 시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자선단체를 세우고 기금을 마련하여 도시의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써서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라는 경칭을 얻었다. 또한 사교활동도 활발히 하여 자신의 집에 괴테나 그림 형제 등의 명사를 초청하여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안토니는 기본적으로 프랑스 혁명기에 유행했던 계몽주의에 심취해 있던 여성으로서, 베토벤이 딱 좋아할만한 사상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전술한 그녀의 자선활동도 바로 이런 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토니와 베토벤은 단순한 연인관계를 넘어 철학과 사상을 공유하는 이념적 동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베토벤이 그녀와 헤어진 지 한참 지난 후에도 그녀를 향한 연(戀)가곡을 작곡하고 디아벨리 변주곡같은 대작을 헌정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베토벤(뮤지컬)에서는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불멸의 연인은 여러 명의 후보가 있지만 아무래도 유부녀와 괴팍한 작곡가의 비극적이고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라는 점이 극적인 요소에 잘 맞아서 안토니를 불멸의 연인으로 선택한 듯 하다.

2.8. 안나 마리 폰 에르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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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마리 폰 에르되디(Anna Marie von Erdődy, 1779-1837)

안나 마리 에르되디는 아랏(Arad, 현 루마니아의 지방)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18살에 페테르 폰 에르되디(Péter von Erdödy)백작과 결혼 후 첫 아이를 낳다가 마비증세를 일으켜 사망 위기까지 갔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 마비증세의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소유하고 있어서 전문 연주자로도 손색이 없는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름 작곡도 했다고 한다.

또한 에르되디 부부는 빈 교외의 예들레제(Jedlesee)에 큰 부동산을 갖고 있는 재력가이도 했다. 베토벤도 이 예들레제 저택에 종종 초대받아서 머무른 적이 있다. 베토벤이 머물렀던 곳이 다 그렇듯이 에르되디 부부의 저택도 현대에는 베토벤 기념관이 되었다.

1803년에 안나 마리는 줄리에타 귀차르디와 헤어지고 실의에 빠져 있던 베토벤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녀는 곧 베토벤의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최고의 관객이자 그에게 진지한 음악적 조언을 해주는 최고의 매니저가 되었다.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던 베토벤 역시 그녀에게 많은 정신적 도움을 받았으며 그녀에게 보낸 편지마다 '내 영혼의 고해 사제'와 같은 찬사를 적어 보냈고 어떤 편지에는 아예 "liebe, liebe, liebe, liebe, liebe"(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라는 격정적인 문구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측면을 종합해보면 안나 마리는 음악적 재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지성과 인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한편 안나 마리는 베토벤이 평생 빈에 머무르게 하는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08년 당시 베토벤은 공공연히 빈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신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1807년부터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은 것이 가장 컸다. 이 때 베토벤에게 나폴레옹의 남동생이자 나폴레옹에 의해 급조된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 제롬 보나파르트가 고액의 연봉을 받는 궁정악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자 베토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이 소식이 들려오자 안나 마리는 베토벤의 열성팬이었던 롭코비츠 보헤미아 공작(Prince Lobkowitz), 킨스키 공작(Prince Kinsk) , 그리고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이기도 했던 루돌프 대공(Archduke Rudolph), 이 세 부자귀족을 설득하여 베토벤이 빈에 계속 머무를 경우 연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후원약속을 얻어냈다. 그 덕분에 베토벤은 궁정악장 자리를 포기하고 평생 빈에 머물렀다. 이 후원 약속이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었고 후원자 셋 중 루돌프 대공이 4000플로린의 지불을 모두 떠맡았다. 또 전쟁 때문에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편으로 베스트팔렌 왕국은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1814년에 사실상 망했기 때문에 베토벤이 이 왕국의 악장으로 갔어도 큰 돈을 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안나 마리 에르되디가 베토벤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소울메이트를 넘어 얼마나 깊은 육체관계였는지는 현재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데, 베토벤과 그녀의 관계를 알려줄 수 있는 자료가 의외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안나 마리는 베토벤의 여인들 중에게서도 가장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아 있다. 아시다시피 베토벤은 여자들에게 보낸 편지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사(戀辭)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서 편지에 나오는 몇몇 문구만 가지고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정짓기는 어렵다.

다만 1807년, 안나 마리의 남편 페테르가 사업상의 이유로 빈을 떠나 1812년에야 빈으로 돌아오는데, 이 동안 살판 난 베토벤과 안나 마리가 단순한 친분을 넘어 깊은 관계로 지냈을 가능성은 있다. 게다가 1807년은 브룬스비크 자매(요세피네, 테레제)와 모두 결별한 시기이기도 했으니. 베토벤은 안나 마리의 남편이 떠나 있는 동안 그녀에게 두 곡의 삼중주곡(op70-1,2, 일명 유령 삼중주)과 두 곡의 첼로 소나타(op 102-1,2)를 헌정했으며 특히 1808년에는 그녀의 저택에 머무르면서 일종의 음악모임(또는 사교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수의 연구가들은 이 안나 마리와 친하게 지냈던 기간을 베토벤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런데 1810년에는 베토벤에게 테레제 말파티와 이어 또 한 명의 운명의 여인인 안토니 브렌타노가 나타났다. 그리고 1812년에는 안나 마리의 남편이 돌아온다. 테레제 말파티나 안토니 브렌타노가 나타난 이후에도 안나 마리가 베토벤과 계속 친분을 유지했는지 여부는 자료가 별로 없는 관계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810년 베토벤 나이 40살을 기점으로 베토벤에게 안나 마리의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으며, 적어도 남편이 돌아온 이후에는 더 이상 두 사람이 연락했다는 기록이 없다.

1823년, 안나 마리의 남편 페테르 에르되디가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단속령에 걸려 빈에서 추방명령을 받으면서 에르되디 부부는 빈을 떠나 뮌헨으로 갔으며 여생을 거기서 보냈다.

2.9. 아말리 제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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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리 제발트(Amalie Sebald, 1787-1846)

이 사람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직업은 소프라노 가수였고 베를린에서 나름 유명세를 탔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가 상당히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애인이 아니라 가수로서.

아말리 제발트는 베토벤이 테플리츠 온천에 머무르고 있던 시기, 1811년에 테플리츠에서 인연을 맺는다. 테플리츠에서 베토벤과 제발트는 금세 친해졌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서신을 보면 단순한 친분이나 호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사귀는 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이 빈으로 돌아오면서 일단 헤어진 후, 이듬해 베토벤은 다시 테플리츠를 방문하여 아말리 제발트와 재회한다. 이 때 베토벤은 어떤 병에 걸려 크게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직접 수프와 음식을 들고 와서 극진히 간호했다. 아픈 와중에도 베토벤이 아말리와 농담조의 글을 써서 주고받기도 한 것을 보면 꾀병일지도 그녀와의 만남이 꽤 즐거웠던 것 같다. 이 시기의 베토벤은 귀가 거의 안 들려 필담을 주고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둘은 사이가 벌어졌는지 특별히 미래에 대한 기약이 없이 다시 빈과 베를린으로 돌아갔으며 두 사람의 관계도 그대로 종료되었다. 이후 아말리 제발트는 1815년 베를린의 공무원이었던 루트비히 크라우제(Ludwig Krause)와 결혼한다.

테플리츠에서의 짧지만 강렬한 인연 때문에 한 때 아말리 제발트가 불멸의 연인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두 사람은 진지하게 동반자로서 인생을 같이 설계하려고 했던 사이라기 보다는 그냥 휴양지에서 잠시 친해졌던 수준. 어차피 나이 차이도 17살이나 되고 당시의 베토벤은 안토니 브렌타노와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연애정확하게는 엔조이 상대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현재 아말리 제발트를 불멸의 여인으로 보는 연구가는 거의 없다. 베토벤이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에 연애편지식 표현을 즐겨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휴양지에서 헌팅한 여자에게 대뜸 '불멸의 연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정도로 값싸게 헌사를 남발하는 수준은 아니다.


[1] 15세때 그려진 것이다. [2] 친구지만 나이는 베겔러가 베토벤보다 5살 많다. 베겔러는 베토벤과 평생 친구로 지냈으며, 베토벤이 죽을 때까지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다만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3] 작곡가로서 갈렌베르크의 수준은 거의 아마추어급. 하지만 귀족이었던 덕에 나폴레옹의 남동생이자 당시 나폴리 왕이었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후원을 받아 50곡이 넘는 발레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4] 위에 있는 귀차르디의 초상화가 바로 베토벤의 유품에서 발견된 것이다. [5] 요제피네의 아이들을 강탈해서 폭군 아버지로 여겨지긴 하지만 스위스 교육자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에게서 영감을 받은 정치 개혁가로 농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에스토니아어를 홍보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역사에서 국가 학교 시스템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링크 [6] 2018년 5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부분에 대해 다뤘다. [7] 마리-엘리자베스 텔렌바흐(Marie-Elisabeth Tellenbach), 베토벤과 그의 "불멸의 사랑"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그들의 운명과 베토벤의 작품에 미친 영향(Beethoven und seine „Unsterbliche Geliebte" Josephine Brunswick. Ihr Schicksal und der Einfluß auf Beethovens Werk), 취리히: 아틀란티스, 1983, 142쪽 리타 스테블린(Rita Steblin), Auf diese Art mit A geht alles zu Grunde: A New Look at Beethoven’s Diary Entry and the “Immortal Beloved,” in, Bonner Beethoven-Studien 6, 2007, 147-180쪽 [8] 악필로 이름이 바뀐 엘리제를 위하여의 제목이 본래는 '테레제를 위하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 있다. 이 곡은 한 때 엘리자베트 뢰켈에게 바쳐졌다는 설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의 음악학자 미하엘 로렌츠(Michael Lorenz)가 루트비히 놀이 1851년에 루돌프 샤흐너(Rudolf Schachner) 에게 베토벤의 자필 악보를 인계하면서 악보가 테레제 남작 부인으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 밝혀진 후 이 설이 정설이 되었다. 이 악보에 1810년 4월 27일이라는 헌정날짜가 적혀 있다. 이 부분은 2015년 4월 2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