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8:03:27

베른하르트 크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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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친위대 돌격대지도자
베른하르트 크뤼거
Bernhard Krüger
파일:베른하르트 크뤼거.jpg
출생 1904년 11월 26일
독일 제국 리자, 작센 왕국
사망 1989년 1월 3일 (향년 84세)
서독 함부르크
복무 슈츠슈타펠, SD (1931~1942)
소속 친위대 국가보안본부 (RSHA) - 해외 정보국 VI F 4a 부서
국적 독일국 -> 서독
정당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최종 계급 친위대 돌격대지도자 (소령)

1. 개요2. 상세3. 베른하르트 프로젝트4. 종전 이후
4.1. 무죄 선고의 이유?
5. 여담

[CLEARFIX]

1. 개요

베른하르트 작전을 주도한 나치 독일 친위대 소령(돌격대지도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친위대의 고위 장교였다.

2. 상세

1904년 11월 26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28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SS에서 빠르게 진급하면서 돌격대지도자( 독일 국방군 소령에 대응하는 친위대 계급) 계급에 도달했는데 위조 분야의 전문가였으며 영국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목적으로 위조 영국 지폐를 생산하는 비밀 작전인 유명한 "베른하르트 작전"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용소의 유대인들 중 위조, 그래픽 디자인, 경제나 은행 관련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을 모아 위조 지폐를 생산해냈다. 아돌프 브루거의 증언을 토대로 2007년 개봉한 오스트리아의 영화 카운터페이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3. 베른하르트 프로젝트

"베른하르트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실행했던 비밀 작전으로 영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위조 영국 지폐인 파운드화를 생산하는 작전이었다.

작전의 이름은 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작전은 그가 위조 지폐 제조를 담당하는 유대인들을 감독하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1944년까지 수행되었다.

위조 파운드 지폐는 고품질이었으며 영국 경제를 약화시키고 파운드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영국 경제 곳곳에 스며들 예정이었다. 나치는 이것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영국의 경제에 피해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조지폐는 진짜 영국 지폐와 매우 흡사하게 만들어졌다. 베른하르트 작전 중에 약 1억 3천만~3억 파운드에 달하는 위조지폐가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치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운드화의 위조 성공 이후 미국의 달러를 위조하던 프로젝트를 이어나갔지만 결국 베른하르트 작전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동쪽에서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간 소련군이 몰려오고 있었고 남서쪽에서는 아프리카 전역을 정리한 후 순차적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영국군 미군이 상륙하면서 또다시 제대로 양면전선이 열려 헬게이트가 시작된 독일의 미래는 그저 암울하기만 했다. 결국 프로젝트는 중단되었고 1945년 수감자들은 오스트리아(당시 나치 독일 오스트마르크주)에 위치한 에벤제 강제 수요소로 이송되었다. 위조지폐 중 일부는 이탈리아 영국으로 유통되어 흩어지거나 손실되었고 전쟁 말기에 친위대원의 급여로 지급되기도 했으며 나머지는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에 의해 압수되었고 오스트리아에서도 남은 물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위조 파운드화가 얼마나 정교했던지 유입되었던 영국에는 1980년대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역사상 가장 큰 위조 작업 중 하나로 간주되는 베른하르트 작전은 많은 국가에서 지폐의 보안 기능에도 영향을 미쳐 그러한 위조가 얼마나 위험하고 효과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4. 종전 이후

파일:베른하르트.png
전후 베른하르트 크뤼거의 머그샷
전쟁 말기에 그와 그의 가족은 독일 중부에 위치한 다셀로 이주했다. 1946년에 종전 후 그는 그곳에서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2년간의 구금 후 프랑스로 이송되어 1년간 문서를 위조하는 일을 맡았다. 1948년에는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왔으며, 주요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인으로 등재되지 않았고 서독 정부가 수립된 1950년대에 탈나치화 법원에서도 그가 감독했던 유대인들의 증언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석방 후 그는 자신이 주도했던 위조 작전을 위해 지폐용 종이를 공급하던 하네뮐레 사(Hahnemühle)에서 계속 근무했으며 1989년 1월 3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향년 8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4.1. 무죄 선고의 이유?

당시 그가 주도한 위조지폐 제작은 전시에는 다른 국가들도 하던 짓거리(...)라서 전쟁범죄라고 보긴 어려웠으며 그는 지폐 제작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서 작업에 참여하는 유대인들에겐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해 주었고 이 때문에 당사자들도 그에게 우호적으로 증언을 해 주어서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친위대 소속으로 수용소에서 근무했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도 유대인 수감자들을 사살했다고 하니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 1970년대까지 서독의 주요 정치, 행정, 군사 등 국가 전반을 재건한 인물 상당수가 나치 시대의 능력 있던 공직자, 군인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과거 청산에 미적지근했던 것이 유대인들의 증언과 더불어 그가 무죄를 선고받았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5. 여담

그의 나치당 회원 번호는 528,739번이고 SS 번호는 15,249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