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20 23:06:57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

파일: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 1장.jpg

1. 개요2. 내용3. 기타4. 외부 링크5. 보물 제1768호

1. 개요

白磁 靑畵 興寧府大夫人 墓誌 및 石函. 조선 세조 2년인 1456년에 당시 왕이었던 세조의 명으로 장모인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의 묘지에 묻은 청화백자 묘지석.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768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조선시대 세조의 장모인 인천이씨를 위해 제작한 백자청화 묘지(墓誌) 및 석함으로, 청화백자에 흥녕부대부인묘지명(興寧府大夫人墓誌銘)’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여 ‘경태칠년병자동시월 일근지(景泰七年丙子冬十月 日謹誌)’라고 끝을 맺고 있어 1456년(세조 2)에 제작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당시 세조가 자신의 장모이자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년)의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녀의 명복을 빌며 직접 제작하여 함께 묻어준 것으로, 총 6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당 가로 72cm, 세로 54cm, 높이 48cm의 크기이다. 내용은 크게 인천이씨의 장례 경위와 가계, 성품, 덕행, 이력(정경부인→순화군대부인→흥녕부대부인으로 책봉된 이력), 자손 관련 내용과 함께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시도 한 편 실려 있다

현재 한국 학계에 알려진 청화백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 세조 시기부터 청화백자가 만들어졌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실물 자료 중 하나이다. 크기 면에서는 조선시대 백자 묘지 중 가장 커서 후대의 묘지들에 비해 가로, 세로가 약 10cm 이상 크다. 대부분의 백자 묘지와 다르게 눕히지 않고 측면에 가는 모래를 받친 뒤 세워서 구웠고 유약은 앞·뒷면에 모두 발랐다. 또, 원형의 백자 함에 담아 묻던 후대의 묘지와 달리 석함에 담아 묻었으며 묘지의 형태가 반듯하지 않고 비뚤어져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청화백자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 백자 묘지의 초기 제작 양상과 매장법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물로, 학술적·도자사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 묘지문 내용은 조선 전기 생활사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기타


2014년 9월, 조선 세조 시기부터 조선말까지 만들어진 한국의 청화백자 500여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때 이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도 함께 전시되었다.

4. 외부 링크

5. 보물 제1768호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일대의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자 지석 6장이 석함에 담긴 채로, 2001년 5월 18일에 묘역을 사초하던 중 윤번(尹., 1384~1448)의 부인인 인천 이씨(仁川李氏, 1383~1456)의 묘 앞(호석과 상석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석함은 동제(銅製) 끈으로 묶여 있었으며, 석함을 열자 물기가 촉촉이 젖은 상태로 지석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석함은 장방형으로 통석의 내면을 고운 정 다듬으로 치석했는데, 백자 지석의 크기를 고려하여 딱 맞게 제작되었다. 백자 지석 6장 중, 맨 앞과 뒷장의 지석은 순백자로 나머지 4장의 지석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 사이의 4장의 지석에는 앞면에는 청화(靑畵)로 지문(誌文)을 적고 있다. 이 4장의 지석 뒷면에는 순서를 1장(一張)~4장(四張)이라고 청화로 적어두었다.

묘지의 주인공인 인천 이씨는, 세조의 장모이며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년)의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이며, 묘지에는 경태(景泰) 7년 병자년(丙子年)인 1456년 7월 14일에 대부인이 졸하여 10월 8일에 예를 갖춰 매장하였다는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 및 후손들의 현황 등을 기록하였다. 경태 7년(景泰七年)은 1456년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청화백자의 제작시기 중 가장 이른 시기로, 청화백자의 개시 시기와 청화백자 편년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는 후대에 제작된 백자지석들에 비해 크기가 크고, 뉘어서 번조하던 양식과는 다르게 세워서 번조한 것으로 여겨져, 제작 기술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백자 개합에 담아 매장하던 후대의 백자 지석과 다르게 석함에 담아 매납하여, 백자 지석의 초기 제작 양상과 매납법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