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로 제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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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董卓聯合
1. 개요
후한말 190년 역적 동탁을 토벌하고 한실을 지킨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일어선 제후들의 연합이다. 일반적으로 '반동탁 연합'이란 명칭을 가장 많이 쓰며, 함곡관의 동쪽 지방인 관동에서 일어나 관동군(關東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18로 제후는 삼국지연의에서 나온 단어로 정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2] 굳이 18명인 것은 나관중이 소열제에게서 소열제의 직계 조상인 한고제를 연상시키는 전략의 일환으로서 초한쟁패기에 존재했던 18왕과 동수(同數)를 부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18로 제후라고는 하지만 이 18명 중에서 진짜 제후는 오정후 손견 하나뿐이다. 나머지 17명은 한나라의 관리이지 제후는 아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대부분의 제후들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전국구 유명인사들의 총집합이었다.
구성원 대부분이 이 18로 제후 시절 타이틀을 죽는 순간까지 가지고 가기 때문인지, 조승상, 유황숙처럼 이 당시의 직위가 이름과 함께 세트메뉴처럼 잘 외워지는 편이다.
2. 연의의 18로 제후(十八路諸侯)
가정본에서는 제후들마다 거창한 수식어가 달렸으나, 모종강본에서는 전부 삭제했다.- 1군: 남양태수, 후장군 원술 - 가정본의 수식어는 交遊豪俊,結納英雄 영웅호걸들과 사귄다.
- 2군: 기주목 한복 - 가정본의 수식어는 貫通諸子,博覽九經. 제자백가의 경서와 9경을 통달.
- 3군: 예주자사 공주 - 가정본의 수식어는 闊論高談,知今博古. 담론의 수준이 높고 옛날과 지금의 일들에 밝다.
- 4군: 연주자사 유대 - 가정본의 수식어는 孝悌仁慈,屈己待士.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애가 깊고 인자하며, 자신을 낮추어 선비를 대접한다.
- 5군: 하내태수 왕광 - 가정본의 수식어는 仗義疏財,揮金似土.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경시하여 돈 쓰기를 아끼지 않는다.
- 6군: 진류태수 장막 - 가정본의 수식어는 賑窮救急,誌大心高. 가난하고 급한 사람들을 도우며 포부가 크다.
- 7군: 동군태수 교모 - 가정본의 수식어는 恩惠及人,聰敏有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총명하며 학식이 있다.
- 8군: 산양태수 원유 - 가정본의 수식어는 忠直元亮,秀氣文華. 충직하고 문장에 재주가 있다.
- 9군: 제북상 포신 - 가정본의 수식어는 有謀多智,善武能文. 지혜와 꾀가 많고 문무에 능하다.
- 10군: 북해상 공융 - 가정본의 수식어는 聖人宗派,好客禮賢. 성인의 후손으로 손님 대접이 융숭하고 어진 사람들에게 예우를 갖춘다.
- 11군: 광릉태수 장초 - 가정본의 수식어는 武藝超群,威儀出眾. 무예가 뛰어나고 위엄이 출중하다.
- 12군: 서주자사 도겸 - 가정본의 수식어는 仁人君子,德厚溫良. 인덕을 갖춘 군자로 성품이 온화하고 착하다.
- 13군: 서량태수 마등 - 가정본의 수식어는 名鎮羌胡,聲聞夷夏. 이름이 강족에게 알려져 있으며 명성은 중원과 변방에 퍼졌다.
- 14군: 북평태수 공손찬 - 가정본의 수식어는 聲如巨鐘,豐姿英偉. 목소리는 큰 종처럼 울리며 모습은 영준하고 장대하다.
- 15군: 상당태수 장양 - 가정본의 수식어는 隨機應變,臨事勇為. 임기응변에 능하고 매사에 과단성 있다.
- 16군: 장사태수, 오정후 손견 - 가정본의 수식어는 英雄冠世,剛勇絕倫. 영웅됨이 으뜸이요, 강직하고 용맹함이 절륜하다.
- 17군: 발해태수 원소 - 가정본의 수식어는 四世三公,門多故吏. 4대째 삼공을 지낸 가문으로, 옛 부하들이 많다.
- 18군: 전군교위 조조 - 가정본의 수식어는 없다. 사실 가정본이나 모종강본 모두 조조가 격문을 보내 다른 제후들을 끌어모은 거라 제18군은 조조라는 식의 언급이 없이 17군 제후인 원소까지만 언급되기 때문이다.
3. 실제 연합군 목록
정사에서도 반동탁 연합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연의의 명단과는 좀 차이가 있다. 연의에 등장하지 않은 군벌들도 많으며 또 전군이 연합해서 싸운 것도 아니고 정작 직접적으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 건 왕광, 포신, 손견, 조조 4명뿐이다. 그래서 연의와 달리 실제 대다수 군벌들은 하진의 중앙군을 그대로 흡수한 동탁군과의 싸움을 두려워해 서로 눈치만 보았고 원소는 한복이 군량 공급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었다.또한 동탁뿐만 아니라 동탁이 멋대로 옹립한 황제인 헌제를 인정하느냐에 대해서도 입장이 갈렸다. 대표적으로 원소가 부정파, 원술이 긍정파였다.
〈실제 정사에서 참전한 군벌〉
- 원술, 한복, 공주, 유대, 왕광, 원소, 장막, 교모, 원유, 포신, 조조: 후한서 원소열전[3], 무제기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 장초: 장홍전과 후한서 원소열전에 형 장막과 함께 참여한 기록이 있다.
- 손견: 실제로는 독립 군벌로서가 아닌 원술의 수하로 싸웠지만 연의에서는 동등한 위치로 격을 높였다.
- 유비: 선주전 주석 영웅기에 조조와 함께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의에서는 공손찬 휘하 객장으로 참가하지만 정사에서 공손찬은 연합에 참가하지 않았다. 적에게 격파된 후 공손찬에게로 도주한다.
- 이민, 이연: 서영에게 사로잡혀 동탁에게 죽는다. 둘 다 연의에선 미등장.
- 왕예: 손견의 핍박으로 자살했다. 연의에선 미등장.
- 장자: 손견에게 살해당했다. 역시 연의에선 미등장.
- 장홍: 반동탁 연합군 중 산조에서 모인 관리들인 유대, 공주, 장막 형제, 교모 등을 대표해 이 지역의 맹주가 되었다. 역시 연의에선 미등장.
- 유표: 유표전에 따르면 유표는 정사에서 반동탁 연합에 참가했지만 연의에서는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변경되었다. 다만 이쪽은 정사에서도 정말 참가를 한 것인지 논란이 있다.
- 장연: 본인의 부하들을 이끌고 동탁에게 반발해 일어난 군벌들과 연합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의에선 미등장.
- 초화: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었다고 한다. 연의에선 미등장.
- 진온, 주흔: 조조에게 협력하여 병력을 주었다.
- 유총: 다른 군벌들이 동탁을 토벌하러 모이자 본인도 양하에 주둔하여 전황을 관망했다고 한다.
〈실제 정사에서는 참여하지 않은 군벌〉
- 공융, 도겸: 직접 참가하진 않았지만 장안 천도 후 낙양에 남아 연합군과 내응한 주준을 맹주로 받들며 지원했다. 이때는 동탁이 이미 사망하고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잡고 있는 때였다.
- 공손찬: 원소가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하자 즉각 이를 반대하고 공격했다.
- 마등: 동탁에게 반란죄를 사면받고 한수와 함께 동탁군에 합류하려고 했으나 도착 전에 동탁이 암살당해서 무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량태수라는 관직은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관직이었다. 서량은 양주(凉州)의 별칭[4]이기에 양주자사라는 직함이 붙여져야 한다.
- 장양: 처음엔 어부라와 함께 원소에게 협력했지만 얼마 안 가 배반하여 제대로 참가하지 않았다. 배반 자체는 장양의 본의가 아니고 어부라의 협박 때문이긴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원소를 적대했다.
4. 행적
자세한 내용은 동탁 토벌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다만
일본제국군
관동군과 혼동의 여지가 있으므로 잘 쓰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관동군 하면 보통 이 쪽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고.
[2]
다만 정사에서도 연합군을 후방에서 지지한 공융과 도겸, 연의에서는 잘렸지만 실제로는 참전한 유표와 아예 산조 방면 대표였던 장홍, 그리고 독자적 군대는 아니지만 어쨌든 (각각 조조와 원술군 소속으로) 참전한 유비와 손견까지 합치면 딱 18명이긴 하다.
[3]
다만 후한서 원소열전에는 이 중에서 조조만 참전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조조는 '기타 쩌리' 라인에 포함되어 있었던 듯. 자사나 태수도 아니고 잡호장군인 분무장군 대행에 다른 사람들은 각각 수만씩 이끌고 오는데 몇천의 의병만 데려왔으니 당연할지도.
[4]
한국으로 치자면 전라도를 호남으로, 경상도를 영남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