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84대 황제
미하일 1세 랑가베스 Μιχαὴλ Ῥαγγαβ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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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미하일 랑가베스 Μιχαὴλ Ῥαγγαβέ[1] |
출생 | 770년 |
동로마 제국 | |
사망 | 844년 1월 11일 (향년 73세) |
동로마 제국 프로테 섬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811년 10월 2일 ~ 813년 7월 13일 (2년) | |
전임자 | 스타브라키오스 |
후임자 | 레온 5세 |
부모 | 아버지 : 테오필라크토스 랑가베스 |
배우자 | 프로코피아 |
자녀 | 테오필락토스, 이그나티오스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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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초의 성을 가진[2] 로마 제국의 84-1대 황제이자 니키포로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자진 퇴위한 몇 안되는 로마 황제다.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미하일 1세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최초이자 최후의 유대인 혈통의 황제였다는 이야기가 한국 웹에 퍼져있는데 영어권에선 관련 자료를 신빙성을 불문하고 전혀 찾을 수 없다. 랑가베스 가문은 그리스 출신이었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이름 '미하일( 미카엘)'을 두고 '처음으로 (라틴/그리스식이 아닌) 히브리 이름을 가진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라고 서술한 것이 오독된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그는 에게 해의 함대 사령관이었던 테오필라크토스 랑가베스의 아들로서, 장군 니키포로스의 신임을 받아 그의 딸 프로코피아와 결혼하였다. (790년대) 802년, 장인이 니키포로스 1세로 황제에 즉위하자 미하일은 황제의 부마로서 Kouropalates 라는 직함을 받아 궁정 대신이 되었다.811년, 니키포로스 1세는 대군을 이끌고 당시 제국을 괴롭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크룸과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로마군은 대패하였고 니키포로스마저 전사하는 등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크룸이 황제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든 이야기는 유명하다.
2.2. 즉위 과정
니키포로스 사후 그의 아들 스타브라키오스가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그 역시 전투에서 척추가 골절되고 다리가 마비되는 중상을 입어 황제 직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다.[3]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 사이에서 국가 비상 사태를 극복할 적임자로 전 황제의 사위인 미하일 랑가베스를 추대하려는 기류가 형성되었다.미하일의 아내 프로코피아가 남동생인 황제를 설득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이에 원로대신들이 강하게 권유하여 결국 스타브라키오스는 퇴위한 후 수도원으로 은퇴하였고, 미하일 1세는 811년 10월 2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또한 두 아들 테오필락토스와 스타브라키오스 역시 811년 12월 25일에 공동 황제로 등극했다. 한편, 퇴위한 스타우라키오스는 부상이 악화되어 이듬해 1월 11일에 사망하며 미하일 1세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2.3. 세금 정책과 프랑크 문제
미하일 1세는 전임 화제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제정된 과중한 세금 제도를 폐지하고 감세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그는 군대, 관료, 그리고 교회에 돈을 관대하게 나눠줬고, 정교회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 성상 파괴론자들을 열심히 탄압했다. 한편, 미하일은 로마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여 카롤루스 대제를 바실레우스, 즉 황제로 인정하여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던 로마 - 프랑크 전쟁을 종식시켰다. 다만 로마인의 황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고 카롤루스는 서방 황제, 즉 프랑크인의 황제로 인정하였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카롤루스는 베네치아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귀속을 인정하고 군대를 후퇴시켰다.2.4. 대 불가르 전쟁 패배와 퇴위
미하일 1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크룸이 제의한 평화 조약을 거절하고[4] 고토 회복을 위해 거병하였다.양측 군대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에서 마주쳤다. (813년 6월) 오랜 대치 끝에 동로마군이 먼저 돌격하였고 좌익의 요안니스가 불가르군의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출신의 레온이 이끌던 우익이 독단적으로 도주하여 동로마 진영이 무너졌고, 불가르 군대가 반격하자 패배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론 악화를 직감한 미하일은 레온에게 양위한 후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레온 5세).
2.5. 퇴위 이후
이는 자의로 퇴위한 몇 안되는 사례로, 그는 퇴위한 황제치고는 유례가 드물게도 무사히 장수하였다. 풍운아 미하일은 향년 만 73살의 나이로 프로테우스 섬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하지만 미하일 1세의 아들들은 모두 거세되었다. 후에 레온 5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들 또한 미하일 1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두 거세된다. 재미있는 점은 미하일 1세의 차남 이그나티오스는 9세기 후반에 세계 총대주교가 되는데(1차 재임 847년 ~ 858년, 2차 재임 867년 ~ 877년) 비슷하게 레온 5세의 아들인 그리고리오스는 시라쿠사 대주교가 된다(844 ~ 853년과 858 ~ 867년, 877 ~ 878년[5]). 그리고 이그나티오스가 867년에 그리고리오스를 해임했었단 것도 재미있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