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1 00:56:44

광주무등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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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사적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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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설
2.1. 주경기장(재건축)2.2. 야구장2.3. 실내 체육관(철거)2.4. 실내 수영장2.5. 태권도장(철거)2.6. 승마장(철거)2.7. 양궁장(철거)2.8. 국민체육센터(예정)2.9. 사회인 풋살장(예정)2.10. 다목적 경기장(예정)2.11. 클라이밍장(예정)
3.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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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주광역시 소재의 종합 운동장이다. 지금은 무등 야구장만 남아 있다.

2. 시설

2.1. 주경기장(재건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재건축 이후의 역사 자세한 내용은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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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udeungstadium.png
<colbgcolor=#ef4123> 1990년대에 촬영한 무등경기장 항공 사진[1]
최초 개장 1965년 9월 30일
개축 후 재개장 2014년 2월 28일 (일부 철거 후 야구장으로 개축)
부지 면적 10,491㎡
경기장 규격 103m×68m
경기장 면적 240m×170m
수용 인원 30,000명
입주 구단 국민은행 까치 (1983~1984)
KIA 타이거즈 (2014~ )
시설 스탠드: 21~34단, 조명탑: 4기(1,400㏓)

무등경기장의 주경기장으로 1965년부터 2011년까지는 육상 트랙과 축구장을 갖춘 종합 운동장이었고 2014년부터는 야구장으로 리모델링됐다. 이곳에서 1965년, 1977년, 1987년, 1993년 등 총 네 차례의 전국체육대회가 열렸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축구 예선경기 일부를 개최했다.[2]

광주광역시의 성장을 지켜본 지역 역사의 산 증인이자 무등 야구장과 더불어 광주시민들의 애환을 풀 수 있었던 곳이었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이곳을 시민군의 집결 장소로 활용된 적이 있었기에 5.18 사적지 목록 중 하나로 지정했고 야구장으로 경기장이 개축되는 과정에서도 경기장 정문을 그대로 보존했다. 항쟁 3일째였던 1980년 5월 20일 광주지역 택시기사들의 차량시위를 위해 무등경기장 정문 앞에 모였고 집결한 기사들은 금남로를 따라 전남도청 앞으로 행진했다. 광주지역에서는 이를 기념해 매년 5월 20일을 '민주 기사의 날'로 기리고 있다.

5.18 이후 4년이 지난 1984년 5월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차 방한 때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참고로 이 미사는 교황이 한국 땅을 밟은 이후 처음으로 수행한 일정이었는데 당시 교황은 5.18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를 돌며 카퍼레이드를 한 뒤 무등경기장으로 들어왔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교황의 금남로 카퍼레이드가 4년 전 대학살의 기억을 가진 광주시민들을 자극할 것으로 우려해 반대 의사를 표했으나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청이 금남로 카퍼레이드를 관철했다고 한다. 훗날 챔피언스 필드 건설 이후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이 확정되어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자 천주교 광주대교구 측의 요청으로 야구장 외야 쪽에 교황 광주 방문 기념비를 세웠다.

1980년대 프로 스포츠가 한국에 탄생하면서 무등경기장에서도 프로 스포츠 경기가 열렸는데 한국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홈경기가 줄곧 열렸던 바로 옆 무등 야구장과 달리 이 경기장은 한국프로축구와의 인연이 그다지 깊지 못했다. 프로축구 원년 참가팀 중 하나인 국민은행 까치가 호남 전체를 광역 연고지로 삼고 전주종합경기장과 무등경기장을 홈경기장으로 삼았다. 실제로 무등경기장에서 국민은행의 홈경기도 몇 차례 열렸다.

다만 이 당시 프로축구의 연고지는 그저 명목상의 연고지에 불과했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 아닌 전국 순회방식으로 열렸기에 오롯이 광주 연고팀의 프로축구 경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984년 시즌 후 국민은행이 실업축구리그로 빠진 이후에는 명목상으로라도 호남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 없었다. 1987년부터 K리그의 홈 앤드 어웨이 제도가 정착된 이후 탄생한 최초의 호남 연고 축구팀은 광주·전남이 아닌 전북에 생겼는데 1994년 창단한 전북 버팔로였다. 물론 이듬해인 1994년 전남 드래곤즈가 호남의 두 번째 K리그 팀이자 전남 연고의 프로축구단으로 창단됐지만 광양축구전용구장에서만 경기를 치렀을 뿐 광주에서는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광주가 축구의 불모지로 전락함과 동시에 무등경기장도 세월이 지날수록 시설 노후화로 인해 관리가 소홀해졌고 부지 협소 문제로 더이상 대형 체육 행사를 유치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때문에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개최하여 광주에 경기장을 유치했을 때 노후화된 무등 경기장을 대체하기 위해 광주월드컵경기장 종합 운동장으로 설계했다.[3] 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서면서 무등경기장에서 진행하는 행사의 규모는 조금씩 축소되었고 일부 소규모 체육 동호인들의 체육 행사 대여나 시민의 조깅 코스 정도로만 활용하면서 사실상 광주를 대표하는 체육 공간으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결국 2010년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이 주경기장 자리에 새 야구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2011년 10월부터 철거에 들어가면서 종합운동장으로서의 역할이 개장 46년 만에 끝나게 됐다.

2.2. 야구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무등 야구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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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실내 체육관(철거)

염주종합체육관 건설로 2011년 이전에 철거했다.

2.4. 실내 수영장

2008년에 철거후 2023년, 무등야구장 리모델링과 함께 재개장 하였다.

2.5. 태권도장(철거)

2011년 이전에 철거했다.

2.6. 승마장(철거)

2011년 이전에 철거했다.

2.7. 양궁장(철거)

광주국제양궁장 건설로 2011년 이전에 철거했다.

2.8. 국민체육센터(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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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회인 풋살장(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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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다목적 경기장(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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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클라이밍장(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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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재

1965년에 완공 50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노후화된 건물이었다. 이로 인해 안전 평가에서도 보수가 시급하다는 결과를 받는 등 점차적으로 해당 시설의 유지, 보수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했다. 무등 경기장의 경우에는 야구 시즌마다 배수 문제와 관중 동원 문제, 안전 문제와 관중들의 편의 시설 미비 문제 등으로 신축 구장의 필요성이 절실했으며 주경기장은 광주월드컵경기장에 기능을 내어준 채 일부 소규모 체육 행사를 제외하면 사실상 방치 상태로 전락해 버린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 시설물의 활용에 대해 십여 년간[4] 논의가 있었고, 강운태 전 시장 때에 와서야 비로소 주경기장 철거, 경기장 부지에 야구장 신축으로 결론이 났다.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야구 종목을 추가하면서 이때까지는 무등 야구장을 활용해야 했기 때문에 무등 야구장을 보존하고 주경기장 부지에 신축 야구장을 건설해서 임동 무등 경기장 일대를 야구 타운으로 조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무등 경기장은 40여년 동안 종합 체육 시설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만 야구장 신축을 위한 재원 마련의 이유[5]와 광주 근현대 역사 사적지로서의 무등 경기장의 상징성을 두기 위해서[6] 야구장과 주경기장 성화대와 스탠드 일부, 그리고 무등 경기장 정문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래도 서울보다는 낫다. 다만 법적으로 해석할 시에는 신축한 야구장이 주경기장이 되는 셈이다.

파일:external/photo.jtbc.joins.com/20140308070200214.jpg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 보존하고 있는 주경기장 성화대와 북쪽 스탠드 일부


[1] 주경기장과 야구장 사이의 하늘색 지붕 건물이 무등수영장이다. [2] 전국체전 개최 기념비와 서울 올림픽 예선 경기 유치 기념비 등이 구 무등경기장 뒤편 보도에 역사 공원 형식으로 조성했다. 무등경기장 공사로 본래 주경기장 인근에 있던 기념비 등을 보행로 쪽으로 옮긴 것이다. [3] 다만 월드컵이 치러질 당시에는 그라운드 쪽으로 좌석을 조금 더 빼서 축구전용구장처럼 활용했다. 월드컵경기장에 트랙이 만들어진 것은 월드컵이 끝난 이후다. [4] 9·10대 광주시장이었던 박광태 전 시장은 야구장 문제를 놓고 신축 야구장을 짓겠다고 매년 공약을 내세웠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09년 프로야구 올스타전 때에는 무려 돔 경기장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5] 무등 경기장 정문과 성화대, 북쪽 스탠드 일부를 보존함으로써 신축이 아닌 구조 변경으로 처리되어 국고를 지원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하여 광주광역시 예산 300억, 현대자동차그룹 지원금 300억, 국비(스포츠토토 지원금) 300억을 합쳐 현재의 챔피언스필드가 탄생한 것이다. 이같은 방식은 마산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었던 창원 NC 파크를 건립할 때도 활용했다. [6] 무등 경기장 정문은 그냥 하찮은 경기장 정문이 아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운전기사들이 차량 시위를 시작한 5.18 사적지다. 주경기장이 철거됐어도 정문만큼은 계속 보존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