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8:24:36

마하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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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10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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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석굴암 마하가섭.jpg

마하가섭(摩訶迦葉, 산스크리트어: Mahākāśyapa)

1. 개요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십대제자이기도 하고, 석가모니 열반 이후에 불교도들과 제자들을 결집시켜 제1차 결집(오백결집이라고도 함)을 하고 석가모니 사후 혼란이 일어난 불교의 교리를 명확하게 하였다.

석가모니불의 부촉을 받고 인도 보드가야 근처에 있는 계족산(Kukkuṭapādagiri)에 들어갔다고 한다. 마가가섭이 계족산에 들어가자 산이 갈라졌는데, 그가 안에 들어가자 산이 다시 합쳐졌고, 이후로 미륵이 올 때까지 선정에 든 채로 죽지 않고 기다린다고 한다.

이후 중국 선종에서는 마하가섭을 천축국(인도) 28조사 중에서 1대 조사[1]로 보았다.

2. 생애

속세 시절 결혼한 아내가 있었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밧다카필라니'라고 부른다. 줄여서 '밧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하가섭과의 혼인 이야기도 특별한데, 본래 마하가섭은 처음부터 출가하기로 마음먹고 혼인을 하려 하지 않았다. 부모가 간곡하게 혼인을 재촉하자 마하가섭은 황금으로 만든 여인상을 내보이며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밧다의 외모가 그 여인상만큼이나 아름다움을 안 부모가 혼인을 결정한 것.

마하가섭이 먼저 출가한 뒤 밧다도 뒤따라 출가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기름을 짜기 위해 곡식을 말리던 참이었는데, 그 곡식에 있던 벌레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죄책감이 생겨 결국 출가했다고 한다. 다른 일화에서는 밧다 역시 그의 뜻을 존중해서 결혼을 하지 않기로 답변을 보내는데 문제는 하필 각자가 보낸 시종들이 편지를 몰래 읽어보고 좋은 혼살 망치기 싫어 편지를 고치는 바람에 둘은 원치도 않고 예정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서로간의 의사를 존중해 가까이 가지 않았고 가섭의 부모 사후 출가를 하게 된다.

선종 불교에서는 생전 석가모니 부처가 자신의 법을 가섭존자에게 전한 세 가지 일화가 전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첫 번째. 석가모니 부처가 바이살리 서북쪽에 있는 다자탑(多子塔)이라는 곳에서 설법을 하는데 가섭존자가 뒤늦게, 그것도 누더기 차림으로 참석했다. 다른 제자들이 못마땅해하며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그를 쫓아내려 하였으나, 석가모니 부처는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앉은 자리를 잘라서 가섭존자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라는 고사이다.
두 번째.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와중에 연꽃 한 송이를 들어서 제자들에게 보였는데, 다른 제자들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와중에 가섭존자 혼자서 그 의미를 헤아리고 빙긋 웃었다는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로, 흔히 염화미소(拈華微笑) 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사자성어로 알려졌다. 이쪽이 삼처전심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다.[2]

세 번째.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었을 때, 가섭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이한 꽃을 들고 지나가는 사문들을 보고 '그 꽃은 어디서 났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문들은 '석가모니 부처께서 석 달 전에 열반에 드시어 하늘에서 내린 꽃비'라고 대답했고, 마하가섭은 그제서야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었음을 알고 놀라서 얼른 쿠시나가라로 달려갔지만, 이미 석가모니 부처의 시신은 입관되어 장례를 치르려는 중이었다. 마하가섭은 석가모니 부처의 관 앞에 엎드려서 자신이 너무 늦게 달려왔음을 사죄했는데 순간 석가모니 부처의 관 아랫부분이 뜯어지면서 석가모니의 발이 드러나 마하가섭에게 보였다고 한다. 이 일화를 한자어로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 줄여서 곽시쌍부(槨示雙趺)라고 부른다.

삼처전심의 일화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말이나 글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선종 불교의 입장을 나타낸다. 경전의 가르침과는 다른 형태로도 석가모니의 법이 존재할 수 있고, 언어로 구술 혹은 문자로 기록된 경전에 절대적 가치나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다만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마하가섭의 삼처전심 이야기의 성립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중국 당대 중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중국에 선불교가 전래된 뒤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3] 이를 주장한 학자들 중에는 조선의 금석학자이자 고증학자로도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있다.[4]

3. 같이 보기



[1] 불교에서 큰 스님이자 불교도를 지도하고 불교를 총괄하는 불교계의 교황~ 대주교급 스님 [2]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염화미소의 일화를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이심전심의 해석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가 들고 있는 연꽃 그 자체를 보면서, 타자의 마음으로 헤아리지도 못할 석가모니의 진심을 추측하는 데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오롯이 주인된 마음으로 연꽃의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강조하는 맥락의 일화로 풀이하기도 한다. 무문관 해설영상 [3] 이제는 꽤 알려진 사실이긴 하나, 인도에서 발원한 초기 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전승이나 이론에 여러 가지 살이 붙고 도가적인 색채가 섞이게 된다. 즉, 불교 또한 (기독교처럼) 폭넓게 불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매우 다양한 분파들이 발전하고 분파되면서 석가모니가 처음 주창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론이나 사상을 띄게 되기도 한다. [4] 추사는 만년에 정치적 불운에 시달리면서 불교에 뜻을 두어, 반나절은 책 읽고 반나절은 참선하는 생활을 하는 등 스스로가 스님처럼 살았고, 죽기 전엔 지금 서울 강남의 봉은사에서 삭발수계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