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0:28:54

마이클 오언

마이클 오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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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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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8 · 19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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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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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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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지네딘 지단 마이클 오언 로베르 피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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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 of the Year 1998
수상
지네딘 지단
2위
마이클 오언
3위
호나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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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오언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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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그 통산 득점 순위 To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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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선수 국적 득점
1 앨런 시어러 파일:UEFA ENG.png 260
2 해리 케인 파일:UEFA ENG.png 213
3 웨인 루니 파일:UEFA ENG.png 208
4 앤디 콜 파일:UEFA ENG.png 187
5 세르히오 아구에로 파일:UEFA ARG.png 184
6 프랭크 램파드 파일:UEFA ENG.png 177
7 티에리 앙리 파일:UEFA FRA.png 175
8 로비 파울러 파일:UEFA ENG.png 163
9 저메인 데포 파일:UEFA ENG.png 162
10 모하메드 살라 파일:UEFA EGY.png 154
11 마이클 오언 파일:UEFA ENG.png 150
12 레스 퍼디난드 파일:UEFA ENG.png 149
13 테디 셰링엄 파일:UEFA ENG.png 146
14 로빈 반페르시 파일:UEFA NED.png 144
15 제이미 바디 파일:UEFA ENG.png 136
16 지미 하셀바잉크 파일:UEFA NED.png 127
17 로비 킨 파일:UEFA IRL.png 126
18 니콜라 아넬카 파일:UEFA FRA.png 125
19 드와이트 요크 파일:트리니다드 토바고 국기.svg 123
20 로멜루 루카쿠 파일:UEFA BEL.png 121
20 라힘 스털링 파일:UEFA ENG.png 121
22 스티븐 제라드 파일:UEFA ENG.png 120
23 손흥민 파일:UEFA KOR.png 118
24 이안 라이트 파일:UEFA ENG.png 113
25 디온 더블린 파일:UEFA ENG.png 111
사디오 마네 파일:UEFA SEN.png 111
27 에밀 헤스키 파일:UEFA ENG.png 110
28 라이언 긱스 파일:UEFA WAL.png 109
29 피터 크라우치 파일:UEFA ENG.png 108
30 폴 스콜스 파일:UEFA ENG.png 107 }}}}}}}}}}}}}}}
리버풀 FC 앰버서더
Liverpool Football Club
파일:0_Premier-League-Asia-Trophy.jpg
마이클 오언
Michael Owen
본명 마이클 제임스 오언[1]
Michael James Owen
출생 1979년 12월 14일 ([age(1979-12-14)]세)
잉글랜드 체셔주 체스터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2], 체중 67kg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윙어 / 은퇴)
축구 해설자
소속 유스 리버풀 FC (1991~1996)
선수 리버풀 FC (1996~2004)
레알 마드리드 CF (2004~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9~2012)
스토크 시티 FC (2012~2013)
국가대표 89경기 40골[3] ( 잉글랜드 / 1998~2008)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개인 기록5.4. 출전 기록
6. 논란
6.1. 할리우드 액션6.2. 대한민국의 개고기 문화 반대6.3. 방송인 성희롱
7. 여담
7.1. 가족7.2. 외모
8. 오언에 대한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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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현재까지 리버풀 소속 선수 최초이자 마지막, 그리고 잉글랜드 국적 선수의 마지막 발롱도르 수상자로 남아있으며[4] 지금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대 발롱도르 수상자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말년을 보낸 축에 속한다.[5][6]

2. 클럽 경력

2.1. 리버풀 FC

1996-97 시즌 막바지인 1997년 5월 6일 윔블던 전에서 리버풀 소속으로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골을 기록했다.

2년차 시즌인 1997-98 시즌에는 부상을 입은 로비 파울러를 대체하기 위해 주전 공격수로 나섰다가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풀타임 플레이어가 되었으며, 결국 이 시즌에 리그 36경기 18골, 총 44경기 23골이라는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18세 나이에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PFA 올해의 신인상과 PL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에서는 4위에 이름을 올렸다.

1998-99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4월에 시즌을 조기 마감했지만, 리그에서 30경기 18골을 기록하며 직전 시즌에 이어 EPL 득점왕을 차지했다.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40경기 23골을 기록하며 직전 시즌과 동일한 득점을 기록했다. 이렇듯 오언은 풀타임 첫 2시즌 연속으로 EPL 득점왕을 차지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셈이다. 심지어 이때 오언의 나이는 18, 19세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치면 엘링 홀란드, 제이든 산초 등을 보는 돌풍이었는데 스텟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득점왕을 2회 연속 차지한 데뷔 2~3년차 선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기대감은 엄청났다.

1999-00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결장이 많았고, 계속되는 부상으로 경기력도 많이 떨어지면서 이전 시즌들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성적은 리그 27경기 11골, 총 30경기 12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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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시즌에는 리그 28경기 16골, 총 46경기 24골을 기록하며 리버풀의 3관왕[7]의 주인공 역할을 쏠쏠히 해내었다. 특히 FA컵 결승에서는 아스날 FC를 상대로 1-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83분과 88분에 골을 몰아넣으며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면서 해당 시즌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8]

그 후 2003-04 시즌까지 리버풀에서 뛰면서 매 시즌 2경기당 1골 이상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으로 활약했지만, 정작 리그나 챔스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어서 그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2004-05 시즌 8백만이라는 헐값에 레알 마드리드로 홀연히 이적해 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9]

2.2. 레알 마드리드 CF

2004년 8월 13일, 8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11번을 배정받았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나우두 라울 곤살레스 같은 선수들 때문에 출장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간간히 조커로 출장하며, 출장 시간 대비에서는 꽤 골을 넣었다. 그러나 호나우두, 라울이라는 기존의 스타들을 밀어낼 만한 활약은 전혀 보이지 못하였으며, 결국 벤치멤버로 전락하게 되었다. 레알에서의 기록은 36경기 출장에 13골.

이후 주전 출장을 계속 요구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신이 가장 바라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러 왔지만 하필 그가 레알로 이적한 시즌에 친정 팀인 리버풀 2004-05 챔스에서 깜짝 우승을 해버렸다! 참고로 레알 마드리드는 01-02 시즌을 끝으로 다시 빅 이어를 들어올리기까지 12년이 걸렸다.

결국 입단한 지 고작 1년 만에 바로 뉴캐슬로 약 18m파운드의 이적료로 이적.(...) 뉴캐슬 유나이티드 FC가 종전에 가지고 있던 클럽 이적료 기록인 앨런 시어러의 16m 파운드를 뛰어넘었고, 주급도 무려 2억 가까이 수령하게 되었다. 이때 오언 본인도 리버풀로의 복귀를 바라고 있었지만 리버풀은 불과 1년 전에 떠난 선수를 재영입하는데 보낸 이적료의 2배를 지불하고 다시 데려온다는 것을 꺼렸고 결국 영입하지 않았다. 또 이때 오언의 팬으로 유명했던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 또한 복권을 긁어볼 계획이 있었지만, 당시 이미 박지성을 영입한 상황이라 오언을 이어서 영입할 계획은 없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하지만 뉴캐슬 시절 첫 시즌에는 굉장한 연속골을 넣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귀신같이 부상을 당한 후 계속해서 부상을 달고 살아 4시즌 동안 71경기 밖에 못 나왔다[10]. 그리고 뉴캐슬이 강등당한 뒤 FA 신분으로 풀리게 된다. 당시 오언은 장기간의 부상으로 인한 기량하락으로 인하여 새로운 팀을 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본인을 홍보하는 브로셔(일종의 안내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했었다고 하니 얼마나 접촉했던 팀이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긴 해도 떠나서 홀가분하다는 게 뉴캐슬 팬들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속쓰린 부상과 재활도 모자라 더럽게 받아먹던 주급도 그렇거니와, 뉴캐슬의 모 선수는 인터뷰에서 높은 주급을 받던 한 슈퍼스타가 팀을 떠난 후 라커룸 분위기가 너무나 편해졌다, 그는 너무나 슈퍼스타라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태도를 취했기에 라커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하여, 유튜브에 훈련모습을 올리는 등의 이적할 팀을 구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하였다. 주변에서 비록 자업자득이란 소리를 들어도 '원더보이'라 불리며 선풍을 일으켰던 그의 처지에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였으며, 그리스 리그로 간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하다가 반전이 일어났다!

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오언에게 계약 제의를 한 것이다!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해서 거기서 계약제의가 있었던 듯. 결국 그 어느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맨유로 깜짝 이적에 성공했다. 소문에 따르면 퍼거슨 감독이 리버풀 시절부터 오언을 높이 평가해서 데려오고 싶어했다고. 2009년도 맨유 방한 당시 우연찮게 데이비드 길 단장과 와인 바에서 대화를 하게 된 한 맨유 팬의 증언에 따르면 길 단장은(당시 시점으로) 몇 년 전부터 마이클 오언을 데려오라는 퍼거슨 감독의 등쌀에 시달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언을 자유이적으로 데려오고 여러 설이 나도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그를 출전시키면서 2011년도 여름에 계약 연장까지 한 걸 보면 퍼거슨 감독의 오언 팬설은 사실인듯. 오언 본인도 맨유에서 염원해마지 않던 리그 우승컵을 포함해 몇 개의 우승컵을 챙길 수 있었으니 서로 이득이 된 셈이다.

하지만 리버풀 입장에서는 하필 최대 라이벌인 맨유로의 이적이라는 최악의 경우였다. 리버풀 팬들도 헤어질 때의 모습은 덮어두고 그래도 우리 새끼라고 원더보이가 늘그막에 고향 팀에서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마감하길 바랐고, 실제로 FA로 풀리기 직전 2009년 봄에 뉴캐슬이 안필드 원정을 왔을 때 교체 투입되던 오언에게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몇 달 만에 통수를 맞았다. 사실 오언은 이때도 리버풀 이적을 원했고 스티븐 제라드 페르난도 토레스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에게 오언의 영입을 요청했으나 베니테즈 감독은 이번에도 영입을 거절했다.[11] 그리고 위에 언급한 대로 퍼거슨이 계약을 제의하자 덥석 물었다.

예전에는 엄청난 순간 가속력과 주력, 드리블을 주 무기로 삼는 전형적인 돌파형 스트라이커였지만, 잦은 부상으로 스피드가 많이 죽어 이탈리아 필리포 인자기처럼 오프사이드 라인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을 이용한 공간 침투와 문전에서의 센스로 골을 넣는 타겟 스트라이커로 변화했지만[12] 오언 특유의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스피드 및 개인기의 효과도 많이 떨어졌으며, 팀 동료에게 가는 부담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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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입단 후 2009-10 시즌엔 팀내 서드 스트라이커로서 주로 조커로 많이 활용되었다. 역시 그 지긋지긋한 부상 때문에 자주 발목을 잡히긴 했지만 맨체스터 더비에서의 결승골과 챔스 볼프스부르크전 해트트릭을 비롯한 중요한 골을 몇 골 뽑아내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는 중이다. 다만 칼링컵 결승 이후 또 부상으로 시즌아웃을 당해서 2010 남아공 월드컵 출전의 꿈을 접어야 했다.[13]

2010-11 시즌엔 새로 영입된 치차리토에게도 밀려 4순위 자원으로 밀려났다. 치차리토가 전성기 오언을 연상시키는 빠른 발과 위치 선정, 골 결정력에 특화된 선수라서 스타일마저 겹쳐버린 것이 큰 듯. 덕분에 맨유에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7번을 달고 있는 선수면서도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어졌다. 이 시즌 뉴캐슬 원정경기에서는 현지팬들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 개장 이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야유소리라고 평가할 정도로 극심한 야유를 받고, 교체투입 이후 수 분 동안 모든 홈 팬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There's Only One Greedy Bastard를 연호했다. 심지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흔드는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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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지막 블랙풀 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맨유의 19번째 리그 우승이자 자신의 첫 리그 우승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2010-11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를 밀어내고 깜짝 교체 명단에 포함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퍼거슨에게 베르바토프 대신 오언을 벤치에 앉힌 이유를 묻자 퍼거슨은 "경기 막판에 정말 골이 필요하거나, 무에서 유를 창조할만한 선수가 필요하다면 마이클 오언보다 나은 선수가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며 오언을 추켜세워줬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훗날 축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스쿼드 중 하나였다고 일컬어지는 FC 바르셀로나에게 철저히 밀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오언의 출전 기회는 없었다. 이 날 치차리토 박지성의 좋은 패스를[14] 어이없는 터치로 날려먹는 등 상당히 부진했는데 차라리 오언이 선발로 출장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충성심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철저하게 프로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선수고, 언론 관리에 상당히 냉철한 선수였었다. 절대 인터뷰로 기자들에게 이적에 관련해 떡밥을 던져주지 않았고, 자신의 옛 소속팀에 대한 허술한 인터뷰로 기자들에게 떡밥을 제공해주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몸담았던 팀들에 대한 인터뷰 태도가 변했다.

생애 첫 PL 우승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라는 속담을 말해 리버풀 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덕분에 그 이후 별명이 합류왕이 됐다. 또한, 2011년 6월 2일 경에 자신의 트위터"매 경기 수준 낮은 팀에서 뛰는 것보다 최고의 팀에서 종종 뛰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때는 즐겁지 않았거든요."라는 글을 올려 전 소속팀인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를 까내렸다. 당연히 가뜩이나 고액 연봉에, 매 시즌 부상을 달고 다니던 선수를 4년이나 품어왔던 뉴캐슬 팬들은 분노했다.

비록 지금은 몰락의 아이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유리몸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의 골잡이로서의 능력은 무시할 수준은 아니며, 실제로 그가 저번 시즌 맨유를 구한 골을 넣은 것을 생각하면 역시 클래스는 있다. 각주에 서술된 최대 장점인 침착함과 슈팅기술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다.이 양날의 검이 시즌 초에 부상당하지 않고 잘 쓰여진 것을 보면 맨유의 뽑기 운이 좋다고 해야고 봐야한다.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맨유1년 재계약을 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그를 웨인 루니 치차리토에 뒤이은 세번째 옵션으로 쓸 생각이다. 덕분에 원기옥 모으는 2010-11 시즌 PL 득점왕은 어디론가 떠나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2011-12 시즌에는 잦은 부상으로 입지가 워낙 줄어들어서 결국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당시 새 팀을 찾고자 했으나, 계약 제의는커녕 언론에 제대로 된 링크 하나 안떴다.

알 샤바브와 잠시 링크가 떴으나, 알 샤밥의 칼리드 부 후마이드 부사장이 직접 나서 "내리막인 선수는 필요없다"라고 영국 언론에 밝히면서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2.5. 스토크 시티 FC

그래도 이적시장이 닫히기 전에 스토크 시티로 이적하는데 성공했다. 2013년 1월 20일 23라운드 경기에서는 숱한 장신 수비수들 사이에서 헤딩골을 넣기도 했지만 이 골이 스토크 시티 선수로서 오언이 기록한 처음이자 마지막 골이었다. 최종 성적은 리그 8경기 1골, 컵 대회 1경기 0골. 그리고 2013년 3월 20일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밝혔고,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오언은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선언 기점으로 아직 만 33세라서 아깝다는 반응과 폼 저하의 상징이나 다름없어서 올 게 왔다라는 반응이 교차하고 있다.

3. 국가대표 경력

오언은 어렸을 때부터 특출난 수준이었다. 이미 U-17, U-19 등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기에 스티븐 제라드보다도 이른 나이에 성인 무대에 데뷔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오언은 글렌 호들이 이끄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해 튀니지와의 1차전에 교체로 출전해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최연소 출전 선수가 되었다.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오언은 또다시 교체로 출장했으며 동점골을 넣어 18세 190일로 잉글랜드의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15] 하지만 팀은 2:1로 패해 빛이 바랬다. 루마니아전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오언은 잉글랜드가 콜롬비아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을 치를 때 선발로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경기에서 승리했고, 오언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도 선발로 나섰다.

아르헨티나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6분 선제골로 앞서나간 와중에 오언은 페널티 구역에서 로베르토 아얄라에 걸려넘어졌고,[16] 앨런 시어러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서 동점골을 기록했다. 16분, 오언은 개인기로 전진 쇄도해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며[17] 잉글랜드를 하드 캐리했다. 물론 잉글랜드는 연장 접전 끝에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패해 대회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오언은 역전골의 임팩트로 원더 보이라는 별명까지 얻었고, 세상은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뒤를 이은 축구천재의 등장이라고 들썩였다. 또한 이 골로 오언은 축구팬들에게 본인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오언은 UEFA 유로 2000 예선전 초반에 잉글랜드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잉글랜드는 예선전 기간 동안 부진했고, 호들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케빈 키건이 감독이 되었다. 1999년 9월 4일, 오언은 6-0으로 이긴 룩셈부르크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웸블리 첫 골을 기록했다. 대회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 세 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골을 넣는데 그쳤으며[18]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일찍 떨어졌다.[19]

앨런 시어러가 은퇴하고, 스벤예란 에릭손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오언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그는 뮌헨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독일과의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6골을 넣었고, 잉글랜드는 예선전에서 조 1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2002년 4월, 그는 파라과이와의 친선전에서 부상으로 빠진 주장 데이비드 베컴을 대신해 잉글랜드의 주장 완장을 찼다. 오언은 1963년의 바비 무어 이래 최연소 주장이었고, 이후에는 베컴이 부재할 경우 주장을 찰 부주장으로 정식 활약했다. 제주도 에서 열린 대한민국 경기서 선제골로 앞서 갔으나 박지성의 헤더 동점골로 1:1로 무승부에 만족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에서 무득점으로 침묵했다. 스웨덴과 첫경기 캠벨 헤더 선제골로 앞서가더니 알렉산드르손의 동점골로 비겼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걸려 넘어지는 할리우드 액션을 보여서 페널티 킥을 유도했고 베컴 페널티 킥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20] 이렇게 졸전을 벌인 끝에 겨우 16강에 올라가긴 했지만 오언은 덴마크와의 16강전에서 기어이 첫 골을 넣었으며, 브라질과의 8강전에서 잉글랜드의 선제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보여[21] 본인의 실력을 다시금 입증했다.

이후 UEFA 유로 2004 예선전에서 5골을 기록했지만 대회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에서 또다시 골을 신고하지 못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3분만에 골을 기록해 잉글랜드 최초로 4번의 주요 대회 본선에서 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했다.

오언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5골을 넣었다. 2005년 5월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콜롬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팀 경기 두 번째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2005년 11월, 오언은 숙적 아르헨티나와 치른 친선경기에서 막판에 2골을 추가해 잉글랜드에게 3-2 승리를 선사했다. 2006년 5월 25일, 오언은 벨라루스와의 친선경기에서 경기를 치러 2006년 독일 월드컵과 현장 복귀를 앞두고 몸상태 점검을 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주장을 맡아 61분을 뛴 후 교체되어 나갔다.

오언은 2006년 독일 월드컵 파라과이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1, 2차전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선발로 출전했지만,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개인 80번째 출전 경기이자 스웨덴과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 출전한 오언은 전반 1분경 오른쪽 무릎이 틀어지는 중상으로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나갔다. 6월 21일에 진행한 부상 진단을 통해 오언 무릎의 전방 십자 인대가 파열된 것으로 밝혀졌고, 조기 귀가 조치가 내려져 대회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경기가 오언이 뛴 메이저 대회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후 오언은 알바니아와의 경기에 복귀한 후, 신축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릴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와 에스토니아와의 UEFA 유로 2008 예선전을 앞두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복귀했고 “저는 예리해진 것 같고, 기회를 잡았을 때 문전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라고 감정을 드러냈다. 오언은 두 경기에 모두 출전해 에스토니아전에서 득점을 올렸고, 게리 리네커가 종전에 세웠던 잉글랜드의 역대 최다 공식대회 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2007년 9월 12일, 오언은 3-0으로 이긴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2골을 추가해 구 웸블리 경기장과 신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올린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유로 2008 본선진출에 실패하면서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경질되었고 파비오 카펠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오언은 파비오 카펠로 부임 후 2008년 3월의 프랑스와 치른 친선경기에 한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는데 그쳤고 더이상 삼사자 군단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2009년 3월, 오언은 자신이 자주 부상을 당하는 이유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의 부상 때문이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상에서 재활하는 와중에 조급히 현장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었다고 인정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플레이 스타일은 스피드스터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주력부터가 최고 수준이며 볼을 가지고 움직일 때 쓸데없는 움직임이나 리스크 없이 효율적으로 볼을 운반하기 때문에 현란한 발동작 없이도 수비수 한둘쯤은 무리없이 제치고[22],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침착하게 슈팅해 강한 킥력 없이도 최고의 골 결정력을 보여줬다. 위치 선정이 뛰어나서 작은 키로도 헤더골을 많이 넣었다.

그러나 오언은 잦은 부상으로 악명이 높았고[23] 그 때문에 2006년 월드컵에서 당한 십자인대 부상 이후 본인의 장기이던 속도를 잃어버렸고 잦은 부상의 여파로 30대를 넘어서자 급격한 기량 저하를 보이고 만다.[24]

은퇴하기 전 마지막 약 6년 동안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머리에서는 '지금 스프린트를 해서 공간 침투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동시에 본인의 몸상태를 잘 알기 때문에 머리의 다른 한쪽에서는 뛰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고... 결국 이처럼 머리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면서도 부상 위험 때문에 그러한 플레이를 하지 못하여[25] 점점 폼이 떨어졌고 나중에는 뛰어들어가면 되는 포지션 자체를 안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개인 기록

5.4.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6/97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 1 0 0 0 0 0 0
1997/98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36 18 0 0 4 4 4 1
1998/99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30 18 2 2 2 1 6 2
1999/00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7 11 1 0 2 1 0 0
2000/01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8 16 5 3 2 1 11 4
2001/02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9 19 2 2 0 0 10 5
2002/03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35 19 2 0 4 2 12 7
2003/04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9 16 3 1 0 0 6 2
2004/05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36 13 4 2 - - 5 1
2005/06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1 7 0 0 0 0 0 0
2006/07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3 0 0 0 0 0 0 0
2007/08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29 11 3 1 1 1 0 0
2008/09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28 8 2 0 2 2 0 0
2009/1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9 3 1 0 4 2 6 4
2010/1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1 2 2 1 1 2 2 0
2011/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 0 0 0 2 3 1 0
2012/13 스토크 시티 프리미어 리그 8 1 1 0 0 0 - -

[A] 진한 부분은 리그 최고 득점 기록이다.

6. 논란

6.1. 할리우드 액션

1998년 2002년 아르헨티나 수비진을 상대로 시뮬레이션 액션을 해서 페널티킥을 얻어내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에는 아르헨티나에 패배를 안겨주며 아르헨티나의 조별 예선 탈락에 크게 일조했다. 1998년에는 로베르토 아얄라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얻어내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부당하게 페널티 킥을 얻는 바람에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비난 받았다. 2002년의 행동은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꼽혀서 KFA 홈페이지의 경기규칙강좌에서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 사례로 사진이 실려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후 오언은 1998년과 2002년의 시뮬레이션 액션을 모두 스스로 인정했다.

사실, 마이클 오언의 페널티 킥이 잘못 되었다면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가 따지려다가 말았고,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들도 항의를 하지 않았다. 오언의 연기가 워낙 좋기도 했지만, 당시의 심판이 명심판으로 유명한 피에를루이지 콜리나였기 때문에 콜리나 심판이라면 제대로 봤겠지? 하고 믿은 선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또 이 당시 VAR만 있었어도 시뮬레이션 액션이 잡힐 수도 있겠지? 라는 이야기도 나왔을 수도 있었다.

6.2. 대한민국의 개고기 문화 반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 개고기 문화에 반대한다며 오언은 잉글랜드 대표팀과 소속팀 리버풀의 동료인 에밀 헤스키, 제이미 레드냅이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반대와 압력을 넣는 서명에 참여했고, 이어서 프랑스 대표팀이자 첼시 FC 소속의 에마뉘엘 프티도 이 서명에 동참했다. 당시 기사[27]

6.3. 방송인 성희롱

영국 축구선수중에 사생활이 막장인 선수가 많지만, 오언은 결혼 후 별다른 스캔들이나 추문이 없이 조강지처와 4자녀를 두는 등,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왔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21년 6월, 방송 출연중 알게 된 리얼리티쇼 여성 진행자 레베카 제인에게 계속 누드사진을 요구하는 문자를 보냈다고 보도되어 # 망신을 당했다.

7. 여담

  • 11-12 시즌에는 리버풀 자선경기와 개리 네빌의 은퇴 경기를 모두 뛰었다. 또한 제이미 캐러거의 은퇴 경기도 뛰었다. 제라드도 집에 트로피와 유니폼 장식장에 오언의 레알 마드리드 CF 셔츠가 가운데에 장식되어있는 것 등을 보아[29]후에 제라드의 은퇴 경기에도 출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원래 같은 시기 유스생활을 보냈고 서로 친해서 오언의 이적 후에도 여전히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30]
  • 축구 외에도 경마, 사업, 부동산, 주식 등의 재테크를 하고 있고, 스타성이 굉장하기 때문에[31] 이로 인해 데이비드 베컴에 이어 영국 출신 현역 축구 선수 중 재산 2위를 자랑 중이다. 특히 손꼽히는 경마 매니아이며, 부인 또한 경마 관련 직종에 종사한다고 한다. 모 인터뷰에서 그가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 무엇인지 묻자 "경마 소식지"라고 답했던 적도 있다. 퍼거슨 감독도 경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둘이서 경마 이야기를 하는 때도 있다. 말 타는 걸 심하게 좋아하는데 돈까지 많다보니 마을의 일정 구역을 사들여서 말타고논다.
  • 2013년 트위터에서 자신의 긴 부상경력을 조롱하며 퇴물이라고 야유하는 것에 분개해 나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하지만 너는 뭐였냐?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받아쳤으나 상대편에서 니가 6년 동안 부상에서 신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나는 니 나라를 지켰다고 응수하자 조용히 잠수를 탔다. 본인 말론 19살 이후 몸이 100%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32]
  • 은퇴 이후로는 경기 중계, 해설을 맡고 있는데 워낙 안티팬이 많아 쉴 새 없이 까이고 있는 중이다.[33]
  • 2002 월드컵 때 한국에서의 우스갯소리로는 차두리와의 비교가 있었다. 당시 월드컵 참가 선수 중에 가장 스피드가 빨랐던 게 오언과 차두리였는데 둘의 차이점은 '오언은 공을 드리블하며 달리지만, 차두리는 공보다 빠른 나머지 공 없이 혼자 뛴다'는 점이라고 한다.
  • 2015년, 피파 온라인 3에 06년 월드컵 버전으로 재등장하였다. 높은 골 결정력, 빠른 발 등 리버풀에서의 전성기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그런데 깨알같이 특성이 유리몸이다. 피파 온라인 4에도 국가대표 버전으로 등장하였다. 전작보다 실제 축구 구현률이 높아져 스트라이커중에서도 돋보이는 속력과 스트라이커 치고는 낮은 슛 파워, 높은 골 결정력 등. 다만 유리몸 특성은 사라졌다.[34]
  • 초창기 대표팀 시절, 베컴의 롱패스+오언의 스피드 조합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고질적인 왼발 트래핑 문제로 수비수들에게 롱패스 받는 패턴을 읽히면서 철저히 마크당해 큰 재미를 보지못했다. 마치 지단+앙리의 프랑스처럼 말이다.
  • 2016년에는 리버풀 국제 앰배서더로 선정되었는데, 데뷔 초기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걸 제외하면 그 뒤로는 끝없는 나락만을 보여주고 구단도 저버린 선수한테 앰배서더 줬다고 까이고 있다. 한편 리버풀 앰버서더 임에도 불구하고 레알 마드리드 행사에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등과 참여 하기도 했다.
  • 맨유에서 뛰었고 은퇴 후에도 맨유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리버풀 팬들에게는 그다지 평가나 대우가 좋지 못하다.
  • 2017년에는 이런 헛소리를 했다. 뭔 말이냐면... " 카림 벤제마가 맨유로 안 가고 레알로 간 덕에 내가 맨유 갈 수 있었다. 벤제마 고마워^^"라는 사실상의 불꽃 패드립. 사실 본인이 벤제마의 대체품이었다는 발언이기 때문에 셀프 디스에 가깝다. 게다가 당시 친정팀 리버풀에서도 안받아줬기 때문에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는 사실 역시 알려져 있으니. 물론 아무리 셀프 디스여도, 리버풀 앰버서더가 된 상태에서 할 말은 아니다.
  • 펠레가 좋아했던 선수였다. 2000년대 초반 맨유를 방문했던 펠레가 가장 좋아하는 맨유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실수로 "넘버 10. 오언"이라고 답을 했을 정도였다. 펠레의 저주 ON2004년 펠레가 꼽은 세계 축구 스타 125인에 당당히 뽑혔고 리스트에 오른 선수 중에서는 4번째로 어렸다.
  • "6~7년 동안 축구를 싫어하게 됐다. 공이 내게 오지 않도록 숨었었다"라고 하였다. # 축구 선수로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

7.1. 가족

아버지 테리 오언은 1949년생 축구선수였고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1966년 에버튼 FC에서 축구를 시작해 19년동안 저니맨 생활을 했다. 형제사항으로는 4명의 형제자매가 있다.

10대 시절부터 친구였던 루이스 본셜과 성인이 된 후 연인으로 발전해 오래 연애하고 2005년에 결혼했다. 자녀로는 2003년생인 젬마 , 2006년생 아들 제임스 , 2007년생 에밀리 , 2010년생 제시카가 있다.

이중 큰딸인 젬마는 18세에 자신의 수영복 브랜드를 런칭했고 직접 모델 역할을 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2022년 5월에는 누군가가 그녀를 다른 비키니모델과 헷갈려서 불륜이라는 가짜뉴스가 나기도 했다. 젬마는 러브 아일랜드에 출연하여 큰 화제가 되었는데,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와의 인터뷰에서 딸의 방송을 보기에 부끄럽긴 하다고 밝혔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9금 예능 프로그램이다. #

7.2. 외모

파일:마이클 오언1.jpg

파일:마이클 오언2.jpg

파일:마이클 오언3.jpg

사진에서 보이듯 심각한 머리스타일을 고수하는데 그걸 청순함으로 커버해버리는 꽃미남 축구선수였으나, 시대를 지날수록 심각한 머리스타일이 발목을 잡아 아저씨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년미는 보여주는 중이다.

8. 오언에 대한 헌사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축구선수가 누구였냐고요? 마이클 오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 오언은 최고의 선수였거든요.”
케빈 더 브라위너
“어렸을 때 오언 때문에 리버풀을 좋아했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할 때도 오언처럼 하고자 했다.“
세르히오 아구에로


[1] /ˈmaɪkᵊl dʒeɪmz ˈoʊᵻn/ [2] 프리미어 리그 공식 프로필 [3]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6위. [4] 리버풀 기준으로는 오언의 수상 이후 2005년 스티븐 제라드, 2008년 페르난도 토레스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모두 3위에 그치고, 2019년 버질 반 다이크와 2022년 사디오 마네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모두 2위에 그쳤다. 잉글랜드 국적 기준으로는 2005년 프랭크 램파드 스티븐 제라드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각각 2위와 3위에 그쳤다. [5] 어린 시절 리버풀에서의 짦은 전성기를 끝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때부터 내리막이 시작되었고, 이후 뉴캐슬, 맨유, 스토크 시티 등을 떠돌면서 그저 그런 커리어로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현역시절때도 문제가 있었지만 은퇴 후에도 잇따른 실언으로 빈축을 사는 등 스스로의 행실 문제가 좀 있다. [6]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까지 포함하면 그나마 호마리우의 말년이 오언과 마찬가지로 바르사에서의 전성기 이후 불성실한 모습으로 지나치게 저니맨 행보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호마리우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친정팀 CR 바스쿠 다 가마에서 2000년 리그 득점 2위, 브라질 역사상 한 시즌 최다 득점 신기록을 세우고, 2001년에는 브라질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브라질 국대에서도 1997 코파 아메리카에서 대회 3골을 기록하면서 조국의 우승에 크게 일조해서 오언의 말년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초라하다고 평가받는다. [7] 흔히 알고있는 트레블이라고는 할 수 없다. UEFA컵 + FA컵 + 칼링컵 석권. 일반적으로 트레블이라고 하면 리그+ FA컵+ UEFA 챔피언스 리그을 뜻한다. [8] 호나우두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세 번째가 리오넬 메시. 다만 이 시즌 발롱도르는 인기투표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일 정도로 FIFA 올해의 선수와 통합되기 이전까지 2004년의 안드리 셰브첸코와 함께 가장 논란이 많은 발롱도르 수상으로 평가받는다. 오웬보다는 레알 마드리드 라울 곤살레스 바이에른 뮌헨 올리버 칸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지금도 오가는 떡밥이다. 사실 3관왕이라는 포장지를 벗기면 결국 리그도 챔스도 못 들고 위상 낮은 컵대회 좀 우승한 수준인 오웬에 비해 라울은 라리가 우승을 했고 리그 득점왕과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동시에 기록했다. 또한 칸은 골키퍼지만 분데스리가와 챔스 더블을 기록했고 특히 챔스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세 번이나 선방을 해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결승전 Man of the Match에 선정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당시 득표수 차이 자체가 오언이 제법 여유있게 1위였고, 더욱이 1위표를 보면 라울(5표)은 오히려 칸(11표)과 베컴(9표)보다도 낮은 표를 받았었다. 오언은 19표로 압도적 1위. 또한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 역시 오언이 차지했다. 즉 당시에는 딱히 논란이 없는 수상자였으나 시간이 한참 지나서 논란이 생긴 케이스인데, 이는 오언의 향후 커리어가 안풀리며 위상이 추락한 면과 스스로의 행보로 인해 어느 곳에서도 자기를 지지해주는 팬덤이 없고 축구계에 배신자, 비호감 이미지가 박힌것이 작용했다고 봐야한다. [9] 이 사건을 팬들은 유다 신드롬(Judas Syndrome)이라고 부르고 오언은 유다라고 까였다. # 이후 나중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도 오언과 마찬가지로 구단 유스 출신이던 마리오 괴체 바이에른 뮌헨으로의 이적 과정에서 잡음을 일으키면서 유다라고 까였다. [10] 그나마도 교체 출장이 많다. [11] 그리고 다비드 은고그를 취했다. [12] 사실 전성기 때도 오언의 최대 장점은 돌파보다는 결정력이었기에 돌파형이라 여겨지던 시절에도 타겟 스트라이커 같은 역할도 수행하는데 능했다. 사실 당시에는 감독이었던 울리에가 오언을 타겟으로 쓰는 것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어찌되었든 오언이 타겟 역할을 계속 했던 것도 사실이다. [13] 오언이 없는 사이 맨유가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과의 8강전에서 원정 다득점에서 밀려 떨어지자 독일 킬러였던 오언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웨인 루니가 2차전에 부상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로 출전하기도 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14] 박지성이 누운 상태에서 공을 한 번 컨트롤하고 패스를 찔러 주었다. # [15] 2022년 현재도 오언의 득점 기록은 역대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 부문 4위이다. 오언의 앞에는 펠레와 마누엘 로사스, 가비가 있다. [16] 사실 할리우드 액션이었다. [17] 2013년에 이 골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골 3위에 올랐다. [18] 전반 막판에 골키퍼까지 따돌리고 2:1을 만드는 추가골을 넣었다. 그리고 후반전에 두 골을 먹으며 팀은 2:3으로 패배했다. [19] 첫 경기에서 포르투갈에게 2대 0으로 이기다가 2:3으로 역전패를 당한 것이 패착이었다. 독일을 1:0으로 이기긴했지만 조별리그를 2위로라도 통과하려면 루마니아에 최소한 비겨야했다. [20] 이 패배가 빌미가 되어 아르헨티나는 사기가 꺾였고, 결국 스웨덴을 밀어붙였음에도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3위로 처진다. [21] 다만, 지금도 회자되는 히바우두의 동점골과 호나우지뉴의 프리킥 역전골에 팀은 1:2로 역전패. [22] 가끔은 페인트 동작도 잘 쓴다 [23] 많은 사람들이 오언이 너무 어릴 때부터 많은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유리몸이 되었다고 얘기하는데 오언 본인은 그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겠지만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도 부상을 달고 산 것(축구선수였다고 함)을 보면 자신은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부상이 많았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스피드를 주무기로 삼는 플레이 스타일 상 부상을 워낙 당하기 쉬웠던 면도 한몫했다. [24] 비슷한 시기 1979년생 동년배 선수들인 디에고 밀리토 디에고 포를란이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것을 생각하면 당시 오언의 급격한 기량 저하로 인한 몰락은 상대적으로 큰 아쉬움을 남겼다. 밀리토는 레알 사라고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9/10 시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여 세리에 A 클럽 사상 최초의 트레블에 크게 일조하고, 밀리토 개인으로서도 세리에 A 득점 2위를 포함해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 올해의 공격수상,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 UEFA 챔피언스 리그/2009-10 시즌/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등 각종 개인상을 휩쓸었다. 마찬가지로 포를란도 2007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적 이후 2009-10 시즌 소속팀의 유로파 리그 우승과 조국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2010 남아공 월드컵 4위, 코파 아메리카 2011 우승에 크게 일조하고, 포를란 개인으로서도 2008-09 시즌 생애 두 번째 라리가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 수상, 2009-10 시즌 유로파 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회 골든볼, 베스트팀, 토너먼트의 골 선정, 코파 아메리카 2011 대회 베스트팀 선정, 2009년, 2010년 우루과의 올해의 축구 선수 등을 수상하였다. 반면 오언은 급격한 몰락으로 2009년과 2010년 동시기 이 두 선수와 비교했을 때 활약상이 적은 편이었다. [25] 달리는게 너무나 무서웠다고 한다. [A] [27] 참고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는 이에 대해서 한국의 전통문화일 뿐이라며 개고기 문화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영국은 여우사냥을 왜 그만두지 않냐고 비꼬았다. 그리고 당시 FIFA 회장인 제프 블라터가 반대파인 정몽준을 깎아내리기 위해 개고기를 가지고 트집을 잡도록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 [28] 참고로 이 때 리버풀 유스는 스티븐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 등을 포함해 우수한 선수를 한꺼번에 대거 배출해서 황금세대라고 불린다. [29] 맨유의 셔츠는 절대 걸어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루니의 셔츠도 국가대표팀 셔츠로 장식되어있다.제라드 본인도 맨유와 관련된 것은 자기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 [30] 이와 별개로 오언이 맨유로 간 것은 정말 맘에 들어하지 않는 듯 하다. 제라드의 아스톤 빌라 감독 부임 이후 첫 인터뷰 당시에 오언이 안필드의 분위기는 압도적이며 자기는 안필드 원정을 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하자 제라드가 나도 맨유에서 뛰었으면 안필드 원정 가는게 싫었을거라고 받아쳤다. [31]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받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에도 유니폼 판매량 순위는 항상 상위에 랭크했었다. [32] 여담으로 퍼거슨 감독은 오언이 리버풀 유스일 때부터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아직 어릴 때부터 계속 출장하는 것을 보고 성장이 완료되지 않은 선수를 혹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어린 나이에 혹사를 당하게 되면 부상이 빈발하는 유리몸이 되기 쉽다. [33] "골을 넣는 선수가 필요해요. 그래야 이기죠" "골 포스트를 넘어갔다면 골이 됐을텐데요" 이런걸 말하니 까인다. [34] 다만 유리몸 부분은 피지컬이 절망적으로 낮게 책정되어서 없어도 부상을 잘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