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03:07:35

마이클 영

마이클 영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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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허프 자니 오츠 놀란 라이언 짐 선드버그 버디 벨
퍼기 젠킨스 톰 반더그리프 마크 홀츠 존 웨틀랜드 러스티 그리어
토비 하라 루벤 시에라 톰 그리브 케니 로저스 에릭 나델
이반 로드리게스 톰 셰퍼 후안 곤잘레스 제프 러셀 마이클 영
조시 해밀턴 리차드 그린 아드리안 벨트레 척 모건 이안 킨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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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테하다
( 볼티모어 오리올스)
마이클 영
( 텍사스 레인저스)
스즈키 이치로
( 시애틀 매리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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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이치로
(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클 영
( 텍사스 레인저스)
조 마우어
( 미네소타 트윈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안타왕
스즈키 이치로
(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클 영
( 텍사스 레인저스)
스즈키 이치로
( 시애틀 매리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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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이치로
(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클 영
( 텍사스 레인저스)

아드리안 곤잘레스
( 보스턴 레드삭스)
데릭 지터
( 뉴욕 양키스)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2번
제이슨 맥도널드
(2000)
마이클 영
(2000~2001)
칼 에버렛
(2002~2003)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10번
루이스 알리세아
(1998~2000)
마이클 영
(2002~2012)
영구결번
{{{#ffffff [[필라델피아 필리스|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10번}}}
후안 피에르
(2012)
마이클 영
(2013)
래리 보와
(2014~201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10번
토니 그윈 주니어
(2011~2012)
마이클 영
(2013)
저스틴 터너
(2014~2022)
}}} ||
파일:usp-mlb_-chicago-white-sox-at-texas-rangers-16_9.jpg
<colbgcolor=#003279><colcolor=#ffffff> 텍사스 레인저스 No. 10
마이클 브라이언 영
Michael Brian Young
출생 1976년 10월 19일 ([age(1976-10-19)]세)
캘리포니아 주 코비나
학력 비숍 아마트 메모리얼 고등학교 - UC 산타바바라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 91kg
포지션 내야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149번 ( TOR)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 (2000~2012)
필라델피아 필리스 (201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3)
지도자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보조 타격코치 (2023~)

1. 개요2. 경력
2.1. 텍사스 레인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시절
2.1.1. 2011 시즌2.1.2. 2012 시즌
2.2. 필리스와 다저스에서의 2013 시즌
3. 은퇴
3.1. 지도자
4. 플레이 스타일5. 연도별 성적6. 이모저모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YJPKEPNER-jumbo.jp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야구선수. 1990년대 말 잠깐의 전성기를 끝내고 다시 암흑기로 접어든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팀을 위해 묵묵히 뛰면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준 2000년대 접어들어 몇 안 남은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한 명이었으나 2012년 12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고 2013년 8월 고향팀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그해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레인저스 프랜차이즈 기록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단일 시즌 최다 멀티 히트 기록(70회, 2004년), 최다 안타 기록(221개, 2005년), 2루타 기록(52개, 2006년)과 통산 최다 기록도 게임 출장, 안타, 2루타, 3루타, 득점에서 1위이다.

2. 경력

2.1. 텍사스 레인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시절

파일:external/daddycatchersrealm.files.wordpress.com/michael-young-rangers-20090805_zaf_i88_010.jpg

1994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의해 지명되지만, 이 때는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한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3년간 뛴 후, 199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의해 지명받아 프로 무대로 뛰어들게 되었다. 토론토 마이너 시스템에서 꾸준히 활약하다가 2000년 5할 승률을 기록하면서 한 번 포스트시즌도 노려보던 팀 사정에 의해 선발투수 에스테반 로아이자와 교환되어 텍사스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와 함께 건너간 투수가 다윈 쿠비얀[1]이다.

2000년 텍사스 소속으로 처음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이후, 마침내 2루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팀에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행크 블레이락, 마크 테세이라 같은 거물급 선수 및 유망주들이 득실거리던 시기였지만, 마이클 영은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2루수 주전 경쟁에서 승리했고, 그 뒤로 텍사스 내야의 축으로서 활약했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지만, 당시 A-ROD가 있던 시절이라 2루로 컨버젼했고, 그 뒤 A-ROD ↔ 알폰소 소리아노 트레이드가 일어나자 팀의 요구에 따라 유격수로 활약했다가, 다시 마크 테셰이라의 유산 엘비스 앤드루스[2]의 유격수 자리 보장을 위해 3루로 갔다가[3] 2011년 아드리안 벨트레 영입 후에는 1루수와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다

수비는 2루수였던 시절에는 작은 기복은 있어도 그럭저럭 해 준다는 평가였으나, 유격수로 전환한 후 2년 동안은 거의 바닥을 기는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4] 그래도 그 이후에는 곧 죽어도 수비 잘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매해 기복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리그 평균의 수비 정도는 해 주었다. [5] 하지만 커리어 말기의 3루수 전환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유격수로 전환할 때와 달리 영은 3루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 것이 벨트레 영입의 단초가 되었다. 2루수로서의 수비력은 리그 평균 수준이며 유격수로서도 전환 후 삽질한 두 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봐 줄 만 하다.

오히려 공격력이 좋은 타자인데, 2003년 2루수로 뛰면서 첫 3할 타자가 된 이후, 2004년부터 유격수로 뛰면서 6년 연속 타격빨로 올스타에 뽑혔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의 풀타임 메이저리거 생활동안 3할을 총 6회 달성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방망이 실력을 자랑했다. 전성기 내내 큰 부상도 거의 없어서 2003년부터 5년 연속 200안타를 넘겼다. 파워 히터는 아니지만, 네 차례나 20홈런을 넘겼고 40개 내외의 2-3루타를 쳐낼 정도로 갭파워도 좋다. 전성기 그의 안타 생산 능력은 스즈키 이치로에 근접한 정도.[6] 2005년이 최고의 커리어 하이였는데, 당시 팀을 떠난 A-Rod 못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면서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2010년에도 익숙하지 않은 3루에서 21홈런을 치면서 팀을 사상 첫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다.(다만 전체적인 성적은 다소 하락) 물론 주역은 클리프 리 조시 해밀턴이기는 했지만, 마이클 영의 공로, 특히 팀을 위해 모든 수비 위치를 가리지 않고 뛴 것은 높게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2010년의 부진으로 인해 팀에서 그의 나이와 연봉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앞서 말했지만 3루수로서의 수비 실력은 아주 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타격으로 그를 메꾸는 모습이었는데, 2010년엔 타격이 생각보다 부진하며 7년만에 올스타에 탈락하는 부진을 겪었으며, 그의 연봉은 2013년까지 1,600만 달러였다. [7]

결국 벨트레의 영입으로 자리가 애매해지고 앤젤스의 버논 웰스 트레이드에서 토론토로 간 포수/1루수/DH 마이크 나폴리를 데려오자 마이클 영은 골드글러브를 딴 바로 다음 해에 3루로 옮긴 09년 이후 참아온 서운함이 폭발하였다. 결국 팀에 트레이드를 요구[8]했는데, 이에 대한 세살배기 꼬마팬의 반응이 걸작이다.

엄마 : 마이클 영은 이제 레인저스 10번이 아니야
개빈 : 5번이야?
엄마 : 아니. 팀 떠난대.
개빈 : 2번?
엄마 : 아무 번호도 아니야. 이젠 레인저가 아니야.
개빈 : (...)

이 영상을 본 일반인들, 특히 여성들은 귀여웤ㅋㅋㅋㅋㅋㅋㅋ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텍빠들은 모자를 벗어던지고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이 영상이 유명세를 타며 마이클 영에게도 알려지자, 영은 스프링 트레이닝을 떠나기 전에 개빈과 만나 하룻동안 놀아주며 야구용품을 선물해줬다고 한다. 그 이후로 몇 달간 엄마한테 맨날맨날 마이클 영의 트레이드 소식을 물어보며 전전긍긍했지만, 막상 지명타자 롤을 받아들인 영이 맹활약하자 그런 걱정은 쏙 들어갔다는 듯.

2.1.1. 2011 시즌

결국 트레이드는 아무리 연봉보조를 해줘도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영은 2011년 팀에 남았다. 그리고 개빈을 비롯한 수많은 레인저스 팬들을 위해 DH/유틸리티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만약 그를 정말 팔았다면, 레인저스는 망할 뻔했다. 상반기까지 0.323의 타율에 59타점을 기록하고, 수비 면에서도 평소엔 지명타자로 나오면서도 1루수( 미치 모어랜드, 마이크 나폴리)와 2루수( 이안 킨슬러), 3루수( 아드리안 벨트레)까지 모두 커버해주면서 주전들의 휴식일을 보장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그리고 상반기의 페이스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0.338 11홈런 106타점을 기록했고, 213안타로 최다안타 1위를 차지했다. 선수 개인 통산 두 번째 최다 안타 1위이자, 6번째 200안타 시즌, 두 번째 100타점 시즌을 기록하며 커리어에 길이 남을만한 시즌을 보냈다.

2011년 현지 시각으로 8월 7일에는 클리블랜드 전에서 4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포스트시즌에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였고 5차전까지 3승 2패로 우승 가능성이 높았으나 내리 2패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준우승이라는 안타까운 기록을 썼다.

2.1.2. 2012 시즌

2012 시즌이 시작되었고 텍사스 팬들은 지난해와 같은 활약을 해주기를 바라는 중이다.

그러나 컨택과 장타력, 클러치 능력 등 거의 모든 타격 부문 성적이 크게 하락하는 등 노쇠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럴만한게 76년생으로 35살이다.

결국 올스타 브레이크까지도 해결되지 않았고 후반기에도 그저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어 팬들의 안타까움을 받고 있다. 그나마 해밀턴과 벨트레가 잘해서 망정이다.

결국 2012년에는 출루율도 폭망, 장타력도 폭망한 개인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비율스탯이 .277 .312 .370에 불과하고 156경기에 붙박이 중심타선에 배치되고도 8홈런 67타점에 그쳤다. 때문에 마이클 영을 주구장창 중심타선에 기용한 론 워싱턴 감독과 함께 텍사스 지구제패 실패의 원흉[9]으로 꼽혔고, 레인저스 현지 팬덤에서는 성적 때문에 허구헌날 프랜차이즈 스타 대접을 할것이냐 말것이냐로 키배가 벌어졌다.

거기다 특급 유망주들인 주릭슨 프로파, 마이크 올트의 기용문제까지 겹쳐 존 대니얼스 단장은 2012년 오프시즌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마이클 영의 트레이드를 또다시 논의했다. 설령 트레이드가 성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입지는 예년에 비해 많이 축소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영이 트레이드 거부권을 포기하면서 필라델피아로의 트레이드가 확정[10]되었고 개빈의 가슴은 무너져내렸다.

2.2. 필리스와 다저스에서의 2013 시즌

필리스에서는 주전 3루수로 뛰면서 베테랑으로서 젊은 선수들의 멘토 역할을 수행하며, 본인도 연봉에 비하면 좀 아쉽긴 하지만 그럭저럭 봐줄만한 활약을 펼쳤다. 다만 WAR로 보면 전년도에 이어 여전히 마이너스. 그래도 스프링 트레이닝 때부터 영의 튜터링을 받은 도모닉 브라운이 거포의 면모를 보여줬으니 조금이나마 역할을 한 셈...일까? 어쨌든 텍사스 레인저스 팬들도 인터리그에서 만날 기회가 없는게 아쉽다며 조시 해밀턴에게 끔찍한 야유를 보낸 것과 상반되게 꽤 흐뭇해한 듯. 필리스에서 126경기 동안 .276 .336 .395 8홈런 42타점으로 연봉에 비하면 당연히 실망스럽지만 어떻게 관록으로 숨이 끊어지지 않고 붙어있던 와중에 8월 31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때 마이클 영의 트레이드 상대가 린드블럼 보니야로, 두 선수 모두 KBO 리그 외국인 선수로 뛰었다.

다저스에서는 레인저스나 필리스에서와 다르게 주전으로 뛰진 못했다. 12시즌과 13시즌 마이클 영의 타석에서의 성적은 다저스의 주전 2루수 마크 엘리스보다는 근소하게 좋지만 3루수 후안 유리베와 떨어진다. 그에 반해 저 두 선수는 마이클 영에 비해 월등한 수비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후안 유리베는 현지에서 골드글러브 후보 이야기가 솔솔 나왔을 정도. 영은 다저스에서 그 동안 제리 헤어스톤 주니어가 해 왔던 내야 유틸 및 대타의 역할을 맏게 되었다.

아무리 실력이 쇠퇴했어도 같은 시즌 필리스에서는 주전으로 뛰었던 걸 생각하면, 그리고 영의 전성기 텍사스에서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고작 헤어스톤머릿돌 주니어의 상위 호환 취급을 받는 게 서러울 수도 있으나, 영은 이런 대접을 감수하고 월드 시리즈 반지를 위해 다저스로 왔다. 콜로라도 원정 경기에서 다저스 선수단에 합류했는데, 스킵 슈마커가 2011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영 얼굴에 들이밀며 환영해 줬다고. [11] (...)

다저스 저지를 입은 데뷔는 콜로라도 로키스 전에 대타로 출전으로 했다. 폭삼을 당하며 체면을 좀 구기긴 했지만. (...) 이적 초기에는 아직 적응을 못 했는지 좀 지지부진한 면을 보여줬지만, 이후에는 베테랑의 위용을 보여주며 대타와 백업 멤버로서 활약하며 21경기에서 .314의 타율로 다저스가 기대하던 바로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NLCS 1차전 9회에 대주자로 교체되느라 빠진 아드리안 곤잘레스를 대신해 4번 타자와 1루수를 맡았다. 하지만 이는 결국 다저스의 시리즈 1차전을 내주는 원인이 되었다. 카디널스는 득점권 기회 때마다 라미레즈를 의도적으로 두 번이나 걸렀고, 마이클 영은 계산대로 두 번이나 더블플레이를 하며 득점 기회를 신나게 말아먹었다.[12] 많은 연봉을 부담하며 영을 데려온 이유가 바로 결정적인 상황에서 베테랑 대타로 활약해주는 것이었는데, 진작에 끝낼 수 있는 찬스에서 대타랍시고 어정쩡한 타격으로 결정적인 병살을 2개나 치니 다저스팬들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차전에도 7회초 잘던지던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를 대신하여 대타로 나왔지만 범타로 물러났다. 마이클 영은 이틀 연속 네이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결국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진출 실패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며 그의 염원인 반지 획득은 또 나중을 기약해야만 하게 됐는데, 문제는 마이클 영이 다저스에 와서 도움이 된 것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민폐만 끼쳐서 다저스에서 입지가 어중간했던 그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졌다. 팀의 온갖 무리한 요구에도 묵묵히 팀이 요구하는 역할을 하고자 최선을 다하며 텍사스 레인저스의 10년을 책임진 프랜차이즈 스타가 급격히 찾아온 노쇠화와 유망주 러시를 이겨내지 못하고 팽당해서(물론 자신이 못한 것도 있지만 프런트가 유망주 키운답시고 푸대접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모습에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했다.

3. 은퇴

2014년 1월 기준, 4군데 정도 팀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 중 확실하게 알려진 팀은 그를 내야 백업 멤버로 영입하려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다만 마이클 영은 현역 생활 연장과 은퇴의 기로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은퇴를 해서 가족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강하다고 밝혔다. 거기에 영의 커리어를 보면 선수로서 몸도 마음도 모두 지칠 수 밖에 없는 커리어다. 백업 멤버라는 역할 역시 2011년에도 .338 이라는 고타율과 2013년 전반기까기 주전으로 뛴 영의 자존심을 매우 상하게 하는 일인데다가 커리어 통산 3할 타율이라는 금자탑 역시 깨질 확률이 높았다. 2013시즌까지 영의 통산 타율은 정확히 3할. 2012년, 2013년의 폼으로 보아 현역 생활은 연장한다면 커리어 3할은 필히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

결국 고민 끝에 은퇴로 결정을 내리면서 그의 선수 경력은 쓸쓸하게 끝난다. 은퇴 인터뷰에서 비록 씁쓸하게 팽 당했지만 자신은 영원히 레인저스 선수라며 존 대니얼스 단장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해 레인저스에 악감정은 없다고 언급했다.

텍사스는 그와 1일 계약을 맺어 레인저스의 홈구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은퇴식을 치를 수 있게 해줬다.

파일:external/pbs.twimg.com/BfV-oo6CYAAJIgh.jpg
2014년 1월 31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가족들, 존 대니얼스 단장, 론 워싱턴 감독과 함께.

론 워싱턴 감독은 언젠간 영을 특별 코치로라도 영입하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워싱턴은 14시즌 끝나고 짤렸다.

2019년 6월 18일 등번호 영구결번이 정해졌고 9월 1일 영구결번식을 치뤘다.

3.1. 지도자

2023 WBC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보조 타격코치를 맡게 된다. 타격코치인 켄 그리피 주니어를 보좌하며 대표팀 타자들의 코칭을 맡을 예정이다. MLB 사이트 기준 보직 이름은 Batting Practice Pitcher.

4. 플레이 스타일

매년 10~20홈런과 40개 안팎의 2루타를 기대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고타율 갭히터 스타일. 이치로만큼 배드볼 히터 기질이 강한 편이라 높은 출루능력을 기대할 수 있진 않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꾸준히 멀티포지션을 돌면서도 부상없이 150경기 이상 소화할 수 있는 강철체력과 패스트볼 킬러로 유명했다. 여기에 클러치 능력까지.

다만 포지션 이동과는 관계없이 수비 자체는 평균 이하였고 주력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여기에 타고투저 약물시대를 관통했다는 점과 극단적으로 타자친화구장이었던 알링턴에서 선수생활을 대부분 보냈기 때문에 구단과 시대의 온갖 디버프를 겪으면서 세이버 스탯으로는 클래식 스탯에 비해 높은 수치를 기록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마이클 영이 선수로서 가진 장점은 내구력과 훌륭한 컨택능력을 활용한 꾸준한 안타 생산 능력.[13] 대약물시대 전후의 투고타저 시대였다면 통산 타율이 3할을 넘어가는 위대한 타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테지만 현실은 단장 밑에서 안그래도 수비도 약한데 멀티포지션을 구르면서 푸대접을 받았고 문제는 세이버 스탯이든 올드스쿨 스탯이든 수비가 평균이하였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커리어 말년 3루수로서 디펜스 수치를 너무 깎아먹었던것도 문제[14]. 여기에 홈보이 기질까지 있는 편[15]

수비를 크게 요하지 않는 코너 외야수/1루수 혹은 지명타자로써 활동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를 선수였으나 대니얼스 단장의 역대급 뻘판단으로 선수 자체의 저평가까지 야기한 아쉬운 선수 중 하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메이저리그 칼럼에서 그를 두고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위대한 선수' 라는 평을 내린 적이 있다.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것 만큼은 다들 동의한다. 2010년대 들어서 거품이 벗겨진 얼치기 세이버메트리션 단장 존 대니얼스 밑에서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그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선수 생활을 해야 했다. 인간적인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가 마이클 영에게 팀을 운영하며 한 대접을 보면 곧 죽어도 존 대니얼스가 마이클 영을 선수로써 높게 평가했다고 보긴 힘들다. 아니, 오히려 뛰어난 선수였던 영을 마구잡이로 굴려서 망가트리고 그 좋아하는 세이버메트리스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선수였던 이안 킨슬러를 내친 장본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5.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마이클 영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0 TEX 2 2 0 0 0 0 0 0 0 0 1 .000 .000 .000 .000 0.0 -0.1
2001 106 429 96 18 4 11 57 49 3 26 91 .249 .298 .402 .699 0.0 0.5
2002 156 633 150 26 8 9 77 62 6 41 112 .262 .308 .382 .690 1.0 2.0
2003 160 713 204 33 9 14 106 72 13 36 103 .306 .339 .446 .785 2.7 2.8
2004 160 739 216 33 9 22 114 99 12 44 89 .313 .353 .483 .836 2.7 1.9
2005 159 732 221 40 5 24 114 91 5 58 91 .331 .385 .513 .899 4.1 3.2
2006 162 748 217 52 3 14 93 103 7 48 96 .314 .356 .459 .814 3.4 3.8
2007 156 692 201 37 1 9 80 94 13 47 107 .315 .366 .418 .783 2.1 3.2
2008 155 708 183 36 2 12 102 82 10 55 109 .284 .339 .402 .741 2.4 3.1
2009 135 593 174 36 2 22 76 68 8 47 90 .322 .374 .518 .892 2.6 2.8
2010 157 718 186 36 3 21 99 91 4 50 115 .284 .330 444 .774 2.5 1.9
2011 159 689 213 41 6 11 88 106 6 47 78 .333 .380 .474 .854 3.2 2.7
2012 156 651 169 27 3 8 79 67 2 33 70 .277 .312 .370 .682 -1.5 -1.7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13 PHI/ LAD 147 565 145 26 5 8 52 46 1 43 83 .279 .335 .395 .730 0.2 -1.2
MLB 통산
(14시즌)
1970 8612 2375 441 60 185 1137 1030 90 575 1235 .300 .346 .441 .787 25.3 24.7

6. 이모저모

  •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랐고 주변 사람들은 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응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영 본인은 어메이징 뉴욕 메츠를 응원했다고 한다. 다저스와 메츠는 브루클린 다저스와 역사적인 접점이 있는 팀이니 아주 이상한 것까진 아닐듯. 메츠도 영이 어릴 적에는 어메이징 메츠로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알까기에 힘입어 우승을 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 팀을 위해 포지션을 세 번이나 옮기고도 팽당하는 그의 모습은 텍사스 팬과 선수진에 꽤나 큰 충격을 던졌다. 그의 뒤를 이어 차기 레인저스의 리더로 여겨지던 이안 킨슬러도 JD에게 포지션 이동을 요구받았지만 영의 사례를 똑똑히 본 킨슬러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디트로이트로 트레이드 당한다.
  • 부인과 함께 지역사회에 다양한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다.
  • 약물러들을 싫어한다. 영은 2020년 11월 18일 자신의 SNS를 통해 학생 야구선수들에게 금지 약물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는 이날 경기력 향상 약물의 일종인 스타노조롤 복용 사실이 적발돼 162경기 정지 징계를 받은 로빈슨 카노를 염두에 둔 말로 보인다.[16] "얘들아,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지 말고 경쟁해. 가짜 성공보다는 모험의 느낌을 훨씬 더 좋아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것도 벌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약물로 만들어 낸 성공은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

7. 관련 문서



[1] SK 와이번스 팬이라면 잠깐 왔다가 간 투수라고 기억할 것이다. [2] 당시 FA가 1년 반 남아있어서 07년 데드라인에 애틀랜타에 팔았던 테셰이라 트레이드는 당시에는 무지무지 욕을 먹었지만 현재는 "철저하게 처절하게 흠많무스럽게 사기친" 트레이드로 꼽힌다. 이 당시 테셰이라와 좌완 릴리프 하나 내주고 얻어온 유망주들이, 엘비스 앤드루스 + 네프탈리 펠리즈 + 맷 해리슨 + 제로드 살탈라마키아(...) 참고로 앤드루스는 2009 RoY 2위, 펠리즈는 2010 RoY 1위이고, 그간 가끔씩만 나오던 맷 해리슨이 2011년 3점대 ERA에다 14승을 찍었다. 이건 뭐(...) 뭐 잘 쓰고 있던 살탈라마키아를 보스턴에 사기당한 것 정도야 그냥 무시해도 될 수준. 텍사스에서 살탈라마키아가 워낙 부진하기도 했다. [3] 그런데 이게 텍사스 팬들에게도 욕을 먹은 것이, 영이 2008년 유격수 골드글러브 위너인데 바로 다음 해에 루키한테 그 자릴 내주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과 앤드루스의 수비부문 기여도인 dWAR심형래 감독의 영화가 아니다에서 측정한 점수에서는 영이 5년간 평균 -1.0인 반면 앤드루스는 평균 0.4를 찍고 있어서 지금 보면 수긍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할 수 있다. [4] 더불어 그의 키스톤 파트너였던 알폰소 소리아노도 리그 굴지의 돌글러브 2루수였으니... [5] 물론 절대 탑 수비수는 아니어서, 2008년 골드글러브 수상 당시에도 좀 말이 있었다. 골드글러브는 투표로 이루어지기에, 국내의 몇몇 사람들은 공로상으로 받은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6] 데릭 지터, 스즈키 이치로와 함께 2000년대를 대표하던 안타 제조기였지만, 결정적으로 위의 두 선수와 WAR상에선 생각 외로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 영은 초창기부터 수비력이나 베이스 러닝이 뛰어난 선수는 아닌 데다가 대표적 타자 구장인 레인저스 볼파크를 쓴 선수치고는 실질적인 생산력이 두드러진 타자는 아니었다.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으로 2001~2010시즌까지 영의 WAR는 25.2승, 지터의 WAR는 41.2승, 이치로의 WAR는 54.6승. 물론 영이 팀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포지션을 옮기며 고생하느라 한 포지션에서의 전문성을 기르지는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하지만 공격력 하나만 보았을때는, 마이클 영의 oWAR는 34.8승, 이치로는 44.9승, 지터는 54.9승으로 리그 최고는 아니지만 최상위급의 공격력을 자랑하였다. 결정적으로, 마이클 영은 이치로의 연봉의 3분의 1, 지터의 연봉에는 5분의 1급의 연봉을 받고 낸 성적이라 연봉값을 훨씬 웃도는 활약을 하였다. [7] 다만 마이클 영은 커리어 하이를 찍기 전에 팀과 저렴한 장기계약노예계약을 맺어서 2009년 이후 그의 연봉이 높아진 후에도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8] 더욱 슬픈 것은, 그렇게 트레이드를 요구하면서도 1루 미트를 구입했다는 것이다. 팬들은 아예 포수 장비랑 외야 글러브까지 사라고 할 정도(...) [9] 물론 조시 해밀턴 히 드랍 더 볼이 크지만 말이다(...) [10] 텍사스가 필라델피아에게 기존 1600만불 잔여연봉 중 1000만불에 달하는 연봉보조를 한다. 필리스는 주세 제도의 차이로 인한 손실액 보상 차원에서 필리스가 지급하는 120만불의 보너스까지 포함 720만불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영을 1년간 쓰게 되었다. [11] 2011년 월드시리즈는 텍사스 레인저스가 우승까지 스트라이크 하나를 남기고 두 번이나 블론세이브를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 슈마커는 텍사스 상대로 우승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이었다. 니가 가진 그 반지 그 반지가 내것이었어야 해 [12] 첫 번째는 짧은 외야 플라이에 3루 주자 마크 엘리스가 무리하게 홈대쉬를 하다가 아웃당한 거라 병살타를 친 건 아니다. 두 번째는 깔끔한 6-4-3 병살타. [13] 통산 Contact% = 83.3% [14] 'Past A Diving Michael Young' (마이클 영이 몸을 던지지만 타구를 잡지 못합니다)라는 중계멘트를 줄인 'PADMY'라는 은어가 이 시절 마이클 영의 수비력을 상징한다. 결국 이 서글픈 수비를 보다 못한 레인저스는 벨트레를 FA로 지른다. [15] 알링턴 OPS = .842, 어웨이 OPS = .734, Total wrc+ = 104 [16] 약물 2회 적발에 스타노조롤 직접적발로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 카노에 의해 전성기 가장 위상에 피해를 입었던 동년배 S급 2루수 중 대표적인 선수가 영의 팀 동료이자 후배였던 킨슬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