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1:25:03

지안 고구려비

마셴촌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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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진위 여부4. 여담

1. 개요

集安高句麗碑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 마셴향 마셴촌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석. 학계에 발견되기 전에는 농민들에 의해 빨래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 당시에 제작했다고 추정한다. # 이 때문에 언론들이 제2의 광개토대왕릉비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사실 '제2'라고 하기에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비해 스케일이 턱없이 작지만, 사실 그만큼 고구려비가 드물기 때문이다.

지안 고구려비라는 명칭은 지안에서 발견된 혹은 발견될 다른 고구려비들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을 이름이다. 지안 고구려비를 포함할 경우 비교적 온전히 발견된 고구려 비석은 광개토대왕릉비(지안), 충주 고구려비(충주), 지안 고구려비(지안)로 현재까지 3개 뿐인데,[1] 이중 2개가 지안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광개토대왕릉비의 경우 지안 고구려비보다 먼저 발견되었다. 게다가 지안은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고구려의 비석이 발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걸 신라로 치면 '경주 신라비' 같은 작명인데 경주에 신라 비석이 얼마나 많은 지를 감안하면 해당 명칭은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해당 명칭은 비석에서 아직까지 별 특색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붙인 이름으로 학계의 연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이름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서는 발견한 마을 이름을 따 마셴촌비라 부르는 모양인데 차라리 이쪽이 더 정확해보인다.

2. 내용

비문의 내용은, 아직 판독도 완전히 되지 않아 완전한 내용의 파악이 어렵지만 대강 파악된 바로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수묘인 규정 부분을 그대로 다루고 있는 모양새이다. 제작 시기는 4~5세기로 파악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수묘인 규정에서 역대 왕들의 묘에 수묘인 규정에 관한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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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의 해석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왕비와 쌍벽을 이루는 고구려 비석-우리역사넷

3. 진위 여부

위작이라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과거에 고구려 비석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는데 죄다 위작으로 판명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천왕 비문.

지안 고구려비가 위작이란 의심을 받는 이유는 내용 자체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수묘인 부분을 그대로 다루고 있으며 문장도 평이한데다 서체도 고구려의 다른 비문과 달리 요상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문의 보존 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좋다. 해당 비석은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했는데 저 정도의 문장 판독이 가능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며 보존해오던 충주 고구려비는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하다. 그리고 발견 경위도 매우 뜬금없다. 무엇보다 중국이 발해 순목황후 묘지명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이건 칼같이 공개하는 태도도 이상하다.[2]

그런데 이 비석은 중국의 위작이라기엔 특별히 동북공정에 유리한 내용도 없다. 당대 사료를 무시하고 < 요사> 지리지 같은 정확성이 바닥을 치는 사료를 들고 난리치는 유사역사학계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면 지안이 고구려 수도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3] 지안에서 새로운 비석이 나왔다고 그 위치가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다. 중국 측에서는 비문의 문구 일부가 중국 고전과 비슷한 점을 들어 중국 고대 비석이라고 강조한다.

4. 여담

  •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도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쪽은 확실히 루머로 오히려 마을 주민들이 비석을 신성하게 여기며 보존해왔다고 한다.


[1] 그 외에 고구려가 제작한 비석은 아니지만 고구려와 관련 있는 관구검 기공비의 파편이 발견된 것도 지안이다. [2] 물론 여러 사족이 붙으면 위에서 열거한 부분들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령 비석의 재질에 따라, 빨래판으로 사용한 기간에 따라 마모도는 충분히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발해의 묘지명에 비해 금방 공개한 것은 지안 고구려비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 없이 평이하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런 사족을 붙여야 설명이 된다는 점이 석연치 않은 부분이긴 하다. [3]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으로 지칭한다. 이 중 '국강상(國岡上)'은 '수도(國) 인근의 언덕(岡) 위(上)'에 매장되었음을 말한다. 국(國)이 나라 전체가 아닌 수도를 가리키는 용법은 '국인이 객성(혜성)을 보았다'같은 예가 있다. 이때 국인은 나라 전체가 아닌 도성 안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곧 국강상은 광개토대왕이 매장된 곳이 고구려의 수도임을 말하는데, 알다시피 광개토대왕릉비가 위치한 곳은 지안이다. <요사> 지리지처럼 사료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사료를 들며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A급의 당대 사료를 무시하며 지안이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일본인들이 몰래 반출하려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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