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0:17:34

루치오 풀치

Lucio Fulci

(1927~1996)

1. 개요2. 생애
2.1. 청년기2.2. 호러장르 거장으로2.3. 몰락2.4. 말년
3. 그 외에4. 작품목록

1. 개요

이탈리아 영화 감독.

1970~80년대 사이에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감독 중 한 사람이다. 마리오 바바, 다리오 아르젠토 등과 함께 이탈리아 호러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1][2] 일명 "눈알 조지기"로 대표되는 과격하고 적나라한 고어 씬을 자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여 "고어의 대부(The Godfather Of Gore)"라는 별명도 붙었다.

대표작으로는 이른바 지옥문 3부작으로 불리는 《시티 오브 리빙데드》, 《 비욘드》, 《세미트리》가 있다. 그 외에도 좀비 영화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 좀비 2》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2. 생애

2.1. 청년기

1927년 6월 17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루치아로 본래 시칠리아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촌과 사랑에 빠졌다가 집안에서 그 관계를 반대하자 함께 로마로 도망쳐왔다. 그러나 풀치가 태어나기도 전에 루치아는 사촌과 결별했고, 결국 루시아는 홀로 풀치를 낳고 키워야 했다. 루치오 풀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도로 자랐지만 한편으로는 어릴적부터 강한 반골정신을 지니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루치오 풀치는 한동안 베네치아에서 해군학교에 다니기도 했지만,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줄리오 체자레 고등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공산당 지식인 모임에 참석했다. 그 과정에서 루치오 풀치는 미술과 음악 및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에 진학했는데, 처음에는 어머니의 소망에 따라 의과대학을 다녔지만 본래 자신이 원했던 공부가 아니었던지라 결국 철학과로 전과하여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루치오 풀치는 화가 렌초 베스피냐니가 설립한 예술인 모임에 가입하여 예술 평론을 잡지에 기고하기도 하였으나 그 문제로 어머니와 갈등이 생기자 한동안 베스피냐니와 함께 살게 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국립영화연구소(CSC)에 입학하여 영화를 공부했다. 이 즈음인 1948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거물 정치인인 팔미로 톨리아티가 반공주의자의 테러를 받아 피습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가 체포당해 보호관찰 및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루치오 풀치는 얼마동안 로마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다.

2.2. 호러장르 거장으로

1950년, 루치오 풀치는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의 제작에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1959년에 감독 데뷔작인 《도둑들》을 선보였으며 이후 주로 코메디 장르에서 활동했으나 1966년에 프랑코 네로 주연의 《학살의 시간》을 감독한 이후부터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영화도 감독하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장르를 감독하였는데 현대를 배경으로 한 수사첩보물에서 총으로 쏘면 머리가 반터지는 등 그 당시 부터 루치오 풀치의 연출은 상당히 수위 높은 폭력씬으로 화제를 끌어모았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루치오 풀치는 지알로 계통의 호러 영화를 감독하면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여자의 피부를 한 도마뱀》(1971), 《새끼 오리를 고문하지 마라》(1972)[3] 등은 특수효과를 이용한 높은 수위의 폭력씬과 사회비판적인 내용으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싸이킥》(1977) 또한 그의 대표적인 지알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서부영화나 전연령 영화도 감독했다.1973년에는 잭 런던 원작소설인 화이트 팽을 1973년 감독하여 속편이 나올 정도로 히트시켰다. 원작과 달리 미국 원주민 소년 미샤가 나와 늑대개 화이트 팽과 우정을 쌓는다는 줄거리를 새롭게 넣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어서 스튜디오 딘에서 만들고 1982년에 방영한 70분짜리 TV 특별 방영 일본 애니메이션 '화이트 팽 스토리' 등 이 영화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4]

1978년에 그가 감독한 서부영화 은빛안장 Silver Saddle (이탈리아 제목: Sella d'argento)은 1989년 7월 8일 주말의 명화로 우리말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1979년, 루치오 풀치는 전설적인 좀비 영화인 《 좀비 2》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본래 루치오 풀치가 오래전부터 작업해오던 작품이었으나, 마침 다리오 아르젠토 조지 로메로의 《 시체들의 새벽》을 재편집하여 개봉한 《좀비》가 이탈리아에서 대히트를 치자 제작사와 배급사의 농간으로 인해 마치 아르젠토 편집작의 속편인 것처럼 속여서 개봉된 것이었다.[5] 이런 추잡한 뒷사정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충격적인 특수효과와 고어씬을 선보이며 좀비물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무엇보다 조지 로메로의 영화에서 보여줬던 것 보다도 훨씬 정교한 특수분장을 활용해 좀비를 정말로 잔뜩 부패한 시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는 본래 조지 로메로의 영화에서 좀비 분장을 담당하던 전설적인 특수효과 전문가인 톰 새비니도 역으로 그 묘사를 보고 한 수 배웠다고 언급할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후 루치오 풀치는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티 오브 더 리빙데드》(1980), 《 비욘드》(1981), 《세미트리》(1981) 등 악명높은 지옥문 3부작을 연달아 선보이며 고어 장르에서 맹활약을 떨쳐 당시 이탈리아 호러계의 큰 손이었던 다리오 아르젠토의 라이벌로 부상했다. 다리오 아르젠토가 주로 독특한 분위기의 미장센을 주무기로 삼았다면, 루치오 풀치는 이전의 이탈리아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극단적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고어 묘사를 주무기로 삼았다. 특히 이른바 "눈알 조지기"로 불리는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안구 훼손씬은 루치오 풀치의 전매특허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호러 영화만 만든건 또 아니라서 1980년에 수사 첩보영화인 Contraband (1980)를 감독해 어느 정도 흥행도 성공했다. 이 영화 또한 총격전에서 사람 얼굴이 터지는 고어장면으로 나름 호러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1981년 영화 검은 고양이나 맨해튼 베이비는 흥행에 실패했다.

한국에선 80년대 후반에 바로 동양비디오에서 풀치 영화들이나 지알로 호러를 무더기로 출시했지만 잔인한 장면은 싸그리 자르고 출시해서 국내 비디오만 보면 앞뒤연결도 안돼 욕만 하기 일쑤였다... 머더락(Murder Rock/Murderock uccide a passo di danza )은 악몽이란 제목으로 88년에 오아시스 비디오에서 역시 삭제를 일부분하고 출시했다. 검은 고양이는 1985년 라이프 비디오에서 역시 소리소문없이 출시했었다.

2.3. 몰락

루치오 풀치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탈리아 호러영화 산업 자체가 사양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루치오 풀치의 건강도 크게 나빠졌는데, 본래 앓던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는가 하면 1984년에 《머더락》을 제작한 후에는 간경화까지 앓게 되었다. 이후 10여년 동안 루치오 풀치는 최악의 슬럼프를 겪으며 몰락하기 시작했다. 늘어난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온갖 저예산 호러영화를 가리지 않고 다작했으나, 이미 몸상태가 나빴고 제작여건도 매우 열악해져서 작품의 질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89년에 소개된 소돔의 유령(Sodoma's Ghost)만 해도, '대체 이게 풀치가 감독한 영화가 맞냐?'라고 의심할 정도로 완성도가 저예산 TV 영화 수준이었고 여자 누드와 나치 유령들을 빼면 미성년자들이 봐도 괜찮을 정도로 풀치 영화의 전매특허인 잔인함도 사라졌다. 물론 영화는 처절하게 망했다.

여기에 더하여 루치오 풀치의 비극적인 가정사도 그를 심리적으로 괴롭혔다. 1969년에는 그의 아내가 자살했고,[6] 그와 비슷한 시기에 딸이 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7] 아내와 딸에게 닥친 비극은 루치오 풀치를 죽기 직전까지 괴롭혔다고 할 정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

1988년에 개봉한 《좀비 3》의 경우에는 본래 루치오 풀치가 직접 6주간 필리핀에서 촬영을 진행하였으나 제작자와의 마찰로 인해 끝을 맺지 못한채 중도하차해야 했고, 다른 감독들이 투입되어 부랴부랴 완성되었으나 엉성한 편집으로 인해 누더기와도 같은 상태로 개봉되었으며 좋은 평도 받지 못했다. 해당 영화는 한국에서 살인마 쟘비라는 제목으로 소리소문없이 개봉하고 사라졌다.

1990년에 개봉한 《나이트메어 콘서트》[8]의 경우에는 이른바 호러영화판 8과 1/2이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스타일의 연출을 선보였다. 바로 루치오 풀치 그 자신이 내면의 폭력적인 자아로 인해 고통받는 동명의 영화감독 역할을 연기한 것이다.

2.4. 말년

1994년, 루치오 풀치는 로마 판타페스티벌에 참석했다가 다리오 아르젠토와 마주치게 되었다. 다리오 아르젠토는 본래 루치오 풀치와는 라이벌이자 앙숙지간이었지만 병마에 시달리며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진 풀치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곧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아르젠토는 루치오 풀치의 영화계 복귀를 도와주었고, 그의 딸이 영화계에서 일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기도 했다.

1996년 1월, 루치오 풀치는 목발을 짚은 상태로 뉴욕에서 열린 판고리아 호러 컨벤션에 참석하였다. 루치오 풀치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몰려 온 많은 팬들을 보곤 감격에 차서 "내 영화가 이탈리아 밖에서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로부터 2달 후인 3월 13일 오후 2시 경, 루치오 풀치는 자신이 살던 로마 시내의 아파트에서 잠을 자다가 향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루치오 풀치는 경제적으로 몰락해 자신이 살던 집을 내놓고 비좁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큰 낙담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루치오 풀치가 일부러 혈당 조절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확실치 않다.[9] 다리오 아르젠토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장례식 비용을 지불했다.

그 해에 루치오 풀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도움으로 옛 동료인 다니엘레 스트로파와 함께 《왁스 마스크》의 각본을 집필하였는데, 그것이 루치오 풀치의 유작이 되었다. 본래 루치오 풀치가 그 영화의 감독까지 맡을 예정이었으나 그 이전에 풀치가 예상치 못하게 급사하면서 다른 감독이 대타로 나서야 했다.

3. 그 외에

  • 본문에서 언급하였듯이, 다리오 아르젠토와는 오랜 세월동안 라이벌이었으나 말년에는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다리오 아르젠토는 비극적인 가정사와 질병으로 몰락해가던 루치오 풀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풀치가 죽은 후에는 그의 장례 비용을 지불해주기까지 했다. 루치오 풀치가 사망한 후에 다리오 아르젠토가 남긴 인터뷰 영상을 보면 비극적인 풀치의 사생활에 대한 안타까움을 절절히 토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링크
  • 생전의 루치오 풀치는 자신의 작품들 가운데 《베아트리체 첸치》(1969)와 《새끼오리를 고문하지 마라》(1972)를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 외에 《한 사람 위의 다른 사람》(1969)과 《싸이킥》(1977)도 좋아했다.
  • 젊은 시절의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으며, 나이가 든 후에도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 주의자를 자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남들에게 설파하거나 그와 관련해서 글을 쓰지는 않았다.
  • 루치오 풀치가 이탈리아 국립영화연구소에서 공부했을 당시, 최종 시험을 치르던 중 루키노 비스콘티의 작품인 《강박관념》[10]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건 장 르누아르의 모방에 불과하다"라며 정면비판한 일이 있었다. 놀랍게도 당시 시험을 주관하던 심사관이 바로 비스콘티 본인이었는데, 이 답변을 들은 비스콘티는 "영화인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없는 자세가 필요하다"라 칭찬하며 루치오 풀치를 합격시켰다고 한다.
  • 1971년, 《여자의 피부를 한 도마뱀》이 개봉했을 당시 루치오 풀치는 동물학대 혐의로 기소되는 등의 곤혹을 치른 일이 있었다. 그 영화에서는 개들이 시험관에 묶인 채 산채로 장기를 드러낸 채 생체실험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그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특수효과 전문가인 카를로 람발디가 제작한 정교한 모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11]
  • 1972년, 《새끼오리를 고문하지 마라》이 개봉했을 당시 루치오 풀치는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여배우가 아역 배우 앞에서 나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루치오 풀치는 노출씬에서는 아역 배우 대신에 분장한 왜소증환자 배우에게 연기를 시켰다고 해명했다.
  • 1982년, 루치오 풀치는 젊은 여성을 골라 면도칼로 살해하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뉴욕 리퍼》를 제작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여배우들을 이용해 찍은 고어씬의 잔혹성이 논란이 되었는데, 결국 분노가 폭발한 여성단체 회원들이 극장 앞으로 몰려와 보이콧 시위를 벌이는 한편 루치오 풀치에게 살해협박까지 가했다고 한다. 우습게도 풀치가 죽은 해에 개봉한 한국 스릴러 영화 피아노맨은 이 영화에 나온 면도날을 여자 눈알에 박아 가르는 장면을 표절했지만 당시 검열로 인하여 개봉 당시 삭제되었다.
  • 이탈리아의 거장 호러영화 감독들이 그렇듯이 일본에서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대표작인 《좀비 2》 또한 유독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좀비 2》라는 제목 대신에 자체적으로 《산궤리아》라는 신조어 제목을 붙여서 배급하기도 했다.[12]
  •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의 팬으로 유명하다. 타란티노가 본래 호러영화 매니아인데다가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유혈장면 연출에 도가 텄음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타란티노는 특히 그의 영화 가운데 《비욘드》를 좋아해서 1998년, 자신이 운영하던 롤링 영화사를 통해 이 작품을 미국에서 재개봉시키기도 했다.

4. 작품목록

여자의 피부를 한 도마뱀 1971
새끼 오리를 고문하지 마라 1972
좀비 2 1979
콘트라밴드 1980
시티 오브 더 리빙 데드 1980
검은 고양이 1981
비욘드 1981
하우스 바이 세미트리 1981
뉴욕 리퍼 1982
맨하탄 베이비 1982
뉴 글래디에이터 1984
머더록 1984
애욕의 세실리아 1986
좀비 3 1988
애니그마 1988
나이트메어 콘서트 1990



[1] 다만 이런 호칭은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주로 일본 및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 통용된다. [2] 영미권이나 이탈리아에서는 '3대 감독' 운운하는 표현은 잘 안 쓰지만, 바바, 아르젠토, 풀치 3인방이 이탈리아 호러를 대표하는 명감독이었다는 건 대체적으로 인정한다. # 이탈리아 호러 감독 중 명성이나 호러판에 끼친 영향에서 저 셋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평가라 하겠다. [3] Don't Torture a Duckling/Non si sevizia un paperino. 한국 비디오 제목은 악마의 딸이란 제목으로 삭제가 되어 출시한 바 있다. 카니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영화음악을 맡은 리즈 오토라니가 음악을 맡았다. [4] 화이트 팽 스토리는 제목도 비슷하지만 영화와 똑같이 원주민 아이 미샤가 어린 화이트 팽을 돌보면서 우정을 가지는 이야기이다.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다. [5] 이 작품에서 좀비는 바이러스가 아닌 부두교 주술로 탄생한 존재로 언급된다. [6] 루치오 풀치의 아내는 자신이 고칠 수 없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자 오븐 가스로 자살했다. 더욱 가슴아픈 사실은 후에 그 암 진단이 오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7] 루치오 풀치 및 그 유족들은 이에 대해 함구했으나, 동료 배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딸이 낙마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8] 원제는 《A Cat in the brain》 [9] 대부분 계획적으로 자살한 사람들은 유서를 남기거나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는 행동을 보이기 마련인데 풀치는 딱히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미국의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원작으로 하는 비스콘티의 데뷔작이었다. [11] 카를로 람발디는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거장으로 후에 E.T의 모형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12] 피를 뜻하는 영단어인 Sangue를 이탈리아어 느낌이 나는 Sangueria로 고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