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3 19:10:58

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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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 레나도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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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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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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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a]: 현재는 한국과 프랑스의 복수국적이지만 교구장 재임 당시에는 프랑스 국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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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천주교 안동교구
두봉 레나도[1]
杜峰 | Renatus Dupont
파일:두봉 레나도주교.jpg
본명 René Marie Albert Dupont (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2]
두봉 (杜峰, Du Bong)
출생 1929년 9월 2일 ([age(1929-09-02)]세)
프랑스 상트르발드루아르 루아레 오를레앙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 복수국적)
사제 수품일 1953년 6월 29일 ([age(1953-06-29)]주년)
재임기간 안동교구 1969년 7월 25일 ~ 1990년 10월 30일
거주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문화마을

1. 개요2. 생애
2.1. 한국 생활 이전2.2. 초대 안동교구장으로2.3. 근황
3. 기타

[clearfix]

1. 개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했고, 2019년에 한국 특별 국적을 받아 한국인[3]이 되었다. 2012년부터 이어진 한국 특별 국적 수여자 12인 중 최고 연장자[4]이다.

현재는 정년을[5] 맞이했기 때문에 일선에서 은퇴하고 원로 사목사제로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2.1. 한국 생활 이전

파일:external/dongmun.csj.ac.kr/12433273860.jpg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엄청 가난했으며,[6] 10~20대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을 겪는 등 꽤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고향 오를레앙은 2차 대전 중 독일 점령 지역이었다. 문제는 오를레앙이 철도 요충지였기 때문에, 연합군 폭격기사령부의 주된 타격 대상[7] 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두봉 주교가 유퀴즈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 경험 때문에 한국에 입국했을 때 한국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이후 1950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953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인 1954년에 해외 선교를 나가기로 결심했고, 6.25 전쟁으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에 파견되었다. 프랑스에서 한국까지 무려 2달간 배를 타는 강행군 끝에 도착했다고 한다. 1950년대 당시의 한국은 식민지였다가 독립이 된 가난한 시절이라 지금처럼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었고 비행기도 한국으로 가는 직행 노선도 없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는 신학교 시절 노동사제가 되고자 생각했다. 당시에는 " 신부들은 해로운 존재들이다. 부르주아다.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남의 돈을 갖는다" 라는 식의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활동이 활발했다. 이에 대하여 몇몇 신부들이 "교우들에게서 왜 생활비를 받아야 되느냐? 스스로 노동자처럼 살면 되지 않느냐?" 라는 생각으로 평일에는 노동하고 토ㆍ일요일에는 본당에서 사목하는 노동사제의 조직을 만들었다.

두봉 신학생 역시 이 문제로 지도 신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결국 " 계급투쟁 등 공산당의 주장에 알게 모르게 젖어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노동사제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대신 그는 선교사제가 되기로 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였던 한국에 파견된 것을 매우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2.2.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2달 반 동안 화물선을 타고 인천항을 통해 전쟁으로 참화가 된 한국에 입국한 그는 천주교 대전교구 대흥동성당 보좌신부,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등을 역임한 후, 1969년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외국인 선교사는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 10년 간 교구 자립기반만 닦고 물러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였다.[8]

유교적 전통이 깊은 지역에서 대화와 상호존중을 통해 선교활동에 전력했고,[9] 특히 관할 구역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라 농촌문제와 농민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하고 농민회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상지전문대학(現 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자중학교, 상지여자고등학교 등의 학교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 등을 설립하였다.

약속한 10년이 거의 다 채워져가고 이미 사임서를 제출해 두었던 무렵인 1978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10]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았던 두봉 주교에 대한 사임ㆍ추방 압력이 거세졌다. 그러나 두봉 주교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교구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놓는 것과 이런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 라며 맞섰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와 함께 바티칸으로 날아가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나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에 교황이 '지금 두봉 주교를 사임시키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주교 추방에 협력하는 셈이 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어 두봉 주교의 사임을 철회하였고, 이 사건 이후에도 10여 년을 더 재직하다가 1990년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2.3. 근황

그는 언제나 가난의 영성을 강조해 왔으며, 주교직을 상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11] 은퇴 후, 행여 후임 교구장에게 부담이 될까봐 안동교구를 떠나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 공소에서 14년간 피정 지도 등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달라는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제의에 따라, 2004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손수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이를 인근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이외에 전국의 성당이나 수도원 등에서 피정과 강의를 요청하는 일이 많은데다 한국 천주교 원로 성직자인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후배 성직자들이 많아 항상 바쁘다고한다.
[vimeo(34198850)]
2011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KBS에서는 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기쁘고 떳떳하게"[12]가 방송되었다. 그 외에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미션" 에도 출연하였다.

저서는 아니지만 2011년도 사순 시기 명동성당에서 했던 강론들을 모아 만든 강론집으로 내었다. 제목은 "가장 멋진 삶".

198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나폴레옹 훈장을 수훈받았으며, 2012년 제16회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9년에는 대통령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과 백남인권봉사상을 수상했다.

2019년 12월 말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에 직접 출연하고[13] 제작과정에서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이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곳이라 촬영허가 받는게 무척 힘들었는데, 지역 교구[14]의 원로인 두봉 주교가 직접 수사들을 만나고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냈다고 한다.

2019년 12월 12일, 드디어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기사 오랫동안 대한민국 국적법은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프랑스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스스로 한국인이라 여기면서도 프랑스 국적 역시 하느님이 정해주신 것이기에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2011년 국적법 개정을 계기로 복수국적이 허용됨에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면서도 프랑스 국적을 유지하는 복수국적자가 되었다.


2022년 1월 26일 방송된 유 퀴즈 온 더 블럭 139화에 출연했다. 초대 안동교구장을 역임한 만큼 한국에서 70년 가까이 오랜 기간 동안 사목 활동을 했고 능숙한 한국어로 과거에 직접 겪었던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조세호와 유재석은 옆에서 두봉 주교가 한국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두봉 주교님은 우리보다도 한국에서 쌀밥 김치 된장을 더 많이 드신 분이다.", "듣고 보니, 우리들보다 한국에 더 오래 계셨네요." 라고 놀라워 하기도 했다. 실제로 두봉 주교가 한국에 정착한지는 무려 70년 가량 되었으며, 방영 당시 각각 유재석 조세호의 나이가 각각 49세, 39세였음을 떠올리면 이 말의 의미가 실감될 것이다.

2022년 9월 10일 가톨릭평화방송의 전례 프로그램인, TV 매일미사 한가위 미사를 집전했다.

3. 기타



[1] 올바른 세례명 표기는 레나토(Renatus). ' 르네'는 레나토의 프랑스식 변형이다. [2]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프랑스에서는 유효한 성명이다. [3] 두봉은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때, 한국 시골 신자들이 "뒤퐁" 혹은 "듀퐁"이라는 진짜 이름이나, "레나토"라는 세례명이나 다 익숙하지 않아 하는 것 때문에 그냥 한국식 발음에 가깝게 두봉이라고 불러달라고 해서 두봉을 쓰게 되었는데,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먼 훗날 한국 국적을 받게 될때도 그냥 한국인들이 부르는게 내 이름이라며 한국이름을 두봉으로 정하였다. [4] 2번째 연장자가 지정환. [5] 일반 사제는 70세 / 주교급 사제는 75세. [6]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신장과 양팔을 벌린 길이가 엇비슷 해야 하는데, 두봉 주교는 성장기에 밥을 제대로 못먹어 양팔 길이만 엄청 길다고 한다. 성장기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두봉 주교의 고향 오를레앙은 독일령이 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집안이 가난하기도 했지만 전쟁의 참화를 겪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7] 특히 1944년 5월 19일과 23일의 폭격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8]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에 주력하고, 현지 교회가 자립할 여건을 갖추면 미련없이 물러나는 것은 두봉 주교가 소속되어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9] 그의 신학석사 학위논문 주제가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었을 정도로, 그는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다. 그는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다. 천주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다.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고 말한다. [10] 2012년에 일어난 살인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다. 요약하자면 군청에서 보급한 불량 씨 감자에 항의하던 농민 오원춘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모진 고문 끝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11] 현재는 이게 불가능하다. 1983년 교회법이 개정되면서 주교의 문장 사용이 의무화됐기 때문. 두봉 주교의 경우는 문장 사용이 의무화되기 이전에 서품된 주교이기 때문에, 본인 의사에 따라 문장 및 사목표어를 갖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이 있어서 가능했다. [12] 사목표어를 따로 내세우지 않는 그가 마음에 담아두는 표어라고 한다. [13] 2부 초반에 수도자들과 토론을 위해 수도원까지 손수 운전해서 온다. [14] 카르투시오회 봉쇄수도원은 안동교구 관할인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다. [15] 1940년에 나치는 프랑스 본토를 정복한 뒤, 알자스 로렌 주는 통째로 병합, 이탈리아 국경지대 일부는 동맹이었던 파시스트 이탈리아에게 넘기고, 오를레앙을 포함한 북부는 프랑스 군정청 설치, 남부는 괴뢰국 비시 프랑스를 세웠다가 44년에 군정청에 강제병합시켰다. 형식상 주권 국가 영토였던 비시 프랑스나 이탈리아 병합 지역은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나치의 직접 지배를 받은 곳은 나치의 직접적인 전쟁범죄에 노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