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3:10:36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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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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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1.jp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보물 제1292호

1. 개요

東海 三和寺 鐵造盧舍那佛坐像. 현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에 위치한 신라시대 고찰 삼화사에 봉안되어 있는 9세기~10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의 철조 불상. 현재 삼화사(강원도 동해시 무릉로 584)에 소재 중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파일: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3.jpg

불상 높이 104cm.

동해 삼화사의 적광전(寂光殿)에 모셔져 있는 철조 노사나불상으로, 여기서 노사나불이란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인 비로자나(毗盧遮那)의 다른 이름으로 사실상 비로자나불과 동일시되는 존재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노사나불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똑같은 부처는 아니다.

초기 대승불교 3대 경전으로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이 꼽히는데 이중 비로자나불은 법화경에서 처음 언급된다. 일시적으로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그 원형이 되는 부처가 존재했다며 이를 비로자나부처라고 부른 것이다.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는 ‘골고루 비추는 빛’을 뜻하는데, 비로자나불이 태양이나 에 비견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를 의역한 한자어가 ‘위대한 빛(태양)의 여래’라는 뜻을 가진 대일여래(大日如來)다.

노사나불의 경우 화엄경에서 불법을 설파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이 화엄경을 노사나경으로도 부르는 이유다. 이 경우 ‘노사나불=비로자나불’ 설정은 모순에 직면한다. 비로자나불은 거대한 침묵에 잠긴 존재라 설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사나불은 그런 비로자나불을 대신해 그 가르침을 설파하는 존재다. 한국 월인천강지곡의 비유를 빌리자면 ‘부처가 백억세계(百億世界)에 화신(化身)하시어 교화(敎化)하심이 달이 일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를 노래하는데, 여기서 하늘에 뜬 달이 법신으로서 비로자나불이고 강에 비친 달의 형상이 화신으로서 석가모니, 그 형상화를 중재하는 달빛이 보신으로서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한다.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 세 부처 이야기( 주간동아) 그렇기 때문에 대웅전의 본존불이 석가불일 경우 보통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 협시불상으로 등장하는 것의 변형으로, 대적광전의 본존불이 비로자나불일 때 그 좌우 협시불상이 석가불과 노사나불로 나온다.

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은 학계에 처음 보고될 당시 불상의 머리와 상반신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철저히 파괴되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순조 23년(1823년)과 고종 43년(1906년)에 두 차례에 걸쳐 유학자들에 의해 거대한 방화와 파괴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불상 또한 크게 파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복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07년에 항일 의병들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또다시 삼화사에 방화가 발생하여 추가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로 보는 우리 역사 89.] 1,400년 역사만큼 수난 겪어 머리·상반신 빼고 크게 훼손.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강원일보)

광배, 대좌, 하반신은 산산히 조각났고, 훼손이 매우 심한 머리와 상반신을 시멘트로 접착시킨 후 흉물스럽게 파괴된 상태로 방치 중이던 이 불상이 복원된 것은 1997년에 이르러서이다. 이 때 대한민국 정부와 문화재청은 불상의 원래 모습을 되찾고자 본 불상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63호)을 모델링해 이를 토대로 불상의 하반신 및 파괴 부위와 대좌 등을 복원했다.

파일: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2.jpg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의 상반신에 남아있는 통일신라 시대 명문. 사진 출처 : 불교신문 -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0> 통일신라불상⑪ 법신불상의 조성과 말법사상

정밀 복원이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996년에는 불상 뒷면에 좌우가 뒤집혀 주조된 명문이 발견됐다. 이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있고 140자 정도가 판독이 가능했다. 명문의 내용에 따르면 삼화사 철불은 당시 신라 국왕의 승인 아래 결언(決言) 대덕이 주도하고 승려 승거(乘炬)와 청묵(聽黙), 사방에서 모인 단월(후원자, 시주자)에 의해 석가 말법 300여 년에 조성된 것이다. 불상 조성의 목적은 노사나불상의 대원력(大願力)에 힘입어 미륵불이 미래에 이곳(삼화사)에 하생(下生)하여 중생들을 교화할 때, 화엄경을 강설하기를 바라서였는데, 즉 철조노사나불좌상이 조성된 말법 시기(9세기 중엽)가 끝나고 도솔천(兜率天)에 계시던 미륵보살이 여덟 번째 부처님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깨달음을 이루어 미륵불이 되어 삼화사에서 중생들을 위하여 화엄경을 설법해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비록 신라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고는 하나 명문에 국왕을 위해 불상을 조성한다는 내용은 없어서 왕실 발원이 아니라 지방민들의 독자적인 불사(佛事)로 확인되고 있다.

이 명문들은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춰 배열한 것으로 통일신라 당시의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100~1,2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철조 불상으로, 신라시대 강원도 동해 지역의 철조공예술과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에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1차 지정되었고, 이후 1998년 12월 18일에 대한민국 보물 제129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1292호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