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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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니시오 스에히로 |
제2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
제3대 카스가 잇코 |
제4대 사사키 료사쿠 |
제5대 츠카모토 사부로 |
제6대 나가스에 에이이치 |
제7대 오우치 게이고 |
제8대 요네자와 다카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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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당 당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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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민사당 제2대 중앙집행위원장 니시무라 에이이치 西村栄一 | Nishimura Eiic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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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0000><colcolor=white> 출생 | 1904년 3월 8일 |
일본 제국
나라현 고이도촌 (현 나라현 카시바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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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1년 4월 27일 (향년 67세) |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지케이카이 의과 대학 부속병원 | |
학력 | 상하이 프랑스 국민고등학교 (졸업) |
의원 선수 | 11 (중) |
의원 대수 |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중) |
지역구 | (구) 오사카부 제5구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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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대동아과학경제연구회 회장 경제안정정무차관 ( 아시다 내각) 민사당 제2대 집행부서기장 민사당 제2대 중앙집행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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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2. 생애
1904년 3월 8일 일본 제국 나라현 키타카츠라기군 고이도촌 (현 카시바시)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이치가 6살이 되었을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의 가게가 파산했고, 그는 어린 나이에 홀로 도쿄의 친척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후 우에노의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못한 채 목수 일을 하게 되었다.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소학교도 졸업 할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고, 학업과 잡일들을 병행하며 돈을 번 끝에 상하이의 프랑스 프랑스국민고등학교에 유학, 졸업했다. 이후 오사카로 귀향해 보험회사 식당의 웨이터일을 맡았다. 1928년 사회민정당에 입당해 정계에 발을 들였고, 이후 사회대중당과 전국대중당 등의 무산정당에 소속되었다. 1931년 7월 전국노농대중당으로 이적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932년 사회대중당 사카이시지부를 결성한 뒤 지부장에 취임했으며, 1933년 1월 사카이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37년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구 오사카부 제6구에 출마했지만 9,527표를 얻으며 초라한 성적으로 낙선했고, 이후 사회대중당 오사카지부연합회 총무위원장이 된다.
1939년 대동아과학경제연구회를 설립했으며 1941년 그때까지 일하던 보험회사 (일본생명)에서 퇴사했다. 1944년 후처인 도기 히데코와 재혼한뒤 도쿄로 이주했으나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자신의 집이 불에 타버려 전소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1945년 일본사회당이 결성되자 이에 참가하였다. 이후 사회당의 분열로 좌파와 우파가 갈라지자 그는 우파사회당에 소속되었다. 1953년 2월 2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질문 과정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니시무라를 향해 바카야로라고 작게 말한것이 문제가 되어 요시다는 내각 총 사퇴 위기에 몰리게 되는 궁지에 빠지게 된다. 다음은 당시 회의록의 일부이다.[1]
니시무라 : "총리대신이 어제 시정연설에서 언급한, 국제정세는 낙관해야 한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습니까?"
요시다 : "나는 국제정세를 낙관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고, 전쟁의 위험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영국 총리대신 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사자도 말한 생각입니다만, 영미 정상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나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중략)"
니시무라 : "나는 일본국 총리대신에게 국제정세 전망을 묻고 있는 것이지, 영국 총리대신의 통역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중략) 영국 총리대신의 낙관론 또는 외국 총리대신의 낙관론 없이, (중략) 그렇다면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국제정세 전망과 대책을 언급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요시다 : "지금의 내 답변은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답변을 드린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입니다."
니시무라 : "총리대신은 흥분하지 않는 것이 좋소. 별로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요시다 : 무례한 말 하지 마라!
니시무라 : "뭐가 무례한가!"
요시다 : 무례하지 않은가!
니시무라 : "질문을 하고 있는데 뭐가 무례인가. 당신이야말로 무례다. (중략) 통역한 단어를 언급치 아니하고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답변하라는 것이 무슨 무례인가! 답변할 수 없는 것인가, 당신은……"
요시다 : (작은 목소리로) 바카야로...
니시무라 "뭐가 바카야로인가! 바카야로가 무엇인가!! 취소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물을 것이다. (중략) 취소하라. 나는 지금 조용히 담론을 묻고 있을 뿐이다. 내 말에 흥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요시다 : "내 말에 욕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 발언은) 분명히 취소합니다."
니시무라 : "나이 일흔이 넘었고 일국의 총리대신인 분이 이 발언을 취소까지 했으니 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요시다 : "나는 국제정세를 낙관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고, 전쟁의 위험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영국 총리대신 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사자도 말한 생각입니다만, 영미 정상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나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중략)"
니시무라 : "나는 일본국 총리대신에게 국제정세 전망을 묻고 있는 것이지, 영국 총리대신의 통역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중략) 영국 총리대신의 낙관론 또는 외국 총리대신의 낙관론 없이, (중략) 그렇다면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국제정세 전망과 대책을 언급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요시다 : "지금의 내 답변은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답변을 드린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입니다."
니시무라 : "총리대신은 흥분하지 않는 것이 좋소. 별로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요시다 : 무례한 말 하지 마라!
니시무라 : "뭐가 무례한가!"
요시다 : 무례하지 않은가!
니시무라 : "질문을 하고 있는데 뭐가 무례인가. 당신이야말로 무례다. (중략) 통역한 단어를 언급치 아니하고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답변하라는 것이 무슨 무례인가! 답변할 수 없는 것인가, 당신은……"
요시다 : (작은 목소리로) 바카야로...
니시무라 "뭐가 바카야로인가! 바카야로가 무엇인가!! 취소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물을 것이다. (중략) 취소하라. 나는 지금 조용히 담론을 묻고 있을 뿐이다. 내 말에 흥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요시다 : "내 말에 욕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 발언은) 분명히 취소합니다."
니시무라 : "나이 일흔이 넘었고 일국의 총리대신인 분이 이 발언을 취소까지 했으니 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이후 요시다는 해당 발언을 철회함과 동시에 니시무라에게 사과의 뜻을 표했지만, 정작 자유당 내의 비주류파인 미키 부키치와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 사건에 불만을 품고 야당 의원들과 손잡아 요시다 내각에 대한 불신임의안을 통과시켰고, 그 직후 국회가 해산되었다. 이는 훗날 "바카야로 해산"이라 불리며 일본 정치사를 논할때 빠지지 않는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1960년 우파사회당 대다수 인원들이 사회당을 탈당해 민사당을 창당할때 니시무라도 이 이당에 합류했다. 이후 민사당에서 집행부서기장을 역임했고, 1967년 니시오 스에히로의 뒤를 이어 제2대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직에 올랐다.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재직 중인 1971년 4월 27일 도쿄 미나토구의 병원에서 뇌출혈 투병 중 사망했다. 향년 63세, 사후 정3위와 욱일대수장이 수여되었다.
3. 소속정당
<rowcolor=white> 소속 | 기간 | 비고 |
1928 |
입당 정계 입문 |
|
1928 - 1930 | 합당[2] | |
1930 - 1931 | 합당[3] | |
1931 - 1932 | 당명변경 | |
[[사회대중당(일본)| 사회대중당 ]]
|
1932 - 1940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0 - 1945 | 정당해산 |
|
1945 - 1950 | 창당 |
|
1950 - 1955 | 분당 |
|
1955 - 1960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0 | 신당 창당을 위해 탈당 |
|
1960 - 1969 | 창당 |
|
1969 - 1971 |
당명 변경 사망 |
4. 선거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오사카 2구 |
|
48,513 (-%) | 당선 (11위) | 초선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舊 오사카 5구 | 48,568 (22.5%) | 당선 (2위) | 재선 |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0,405 (16.1%) | 당선 (3위) | 3선 | ||
1950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75,581 (27.4%) | 당선 (2위) | 4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1,053 (16.8%) | 당선 (1위) | 5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9,743 (22.3%) | 당선 (3위) | 6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7,253 (27.2%) | 당선 (2위) | 7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7,155 (19.8%) | 8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2,218 (28.1%) | 9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1,448 (21.2%) | 10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800 (21.1%) | 당선 (1위) | 11선[4] |
5. 여담
- 그의 장남은 민주당 소속으로 자민당 극우파 의원들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혐한, 극우적 망언으로 논란을 빚었던 니시무라 신고 (西村眞悟, 1948.7.7.~)이다. 사실 장남 신고의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은 에이이치로부터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는데, 에이이치는 중도파 사회주의자 성향을 띄면서도 동시에 일본의 재무장론을 지지한 경우가 몇번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