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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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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직무
2.1. 침투2.2. 파괴2.3. 해상
3. 내국인을 선발하는 경우4. 훈련5. 무기·장비 체계6. 침투, 탈출 방식7. 보상, 처벌8. 북파 공작원
8.1. 북파공작부대
9. 북한 공작원(남파 공작원)
9.1. 남파 공작 사건
10. 현지인을 선발하는 경우

1. 개요

工作員, 공작관(Agent handler)의 지시를 받아 현장에서 공작(Operation) 활동하는 정보기관 협력자이다.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쫄쫄이 옷을 입고 적국에 침투하여 암살, 파괴공작을 벌이는 스파이, 첩보원은 대부분 공작원에 더 가깝다.

2. 직무

1960~1970년대 당시에는 단독수집조(침투)와 특수공작조(파괴)라고도 했다. 이런 공작원의 활동은 7~10여명으로 구성되는 특수부대의 활동과는 확연히 다르다.

2.1. 침투

단독수집조, 또는 장거리 침투 공작원이라 할 만한 이들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 고정 간첩에게 공작금, 간첩용 장비를 전달하고 기밀문서, 마이크로필름, 중요 샘플 등을 전달받는다. 통신상으로 전달하기 곤란한 정보 및 지령을 주고받는다.
    • 고정간첩의 탈출을 돕고, 여의치 않은 경우 사살한다. 적에게 고정간첩 1명이 체포되는 것은 100명의 공작원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동식이 이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다.
    • 고정간첩에게 위장 복장, 정보 등을 전달받은 후 현지에서 위험한 임무를 대신 수행한다. 고정간첩을 잠입시키기는 매우 어렵지만 공작원을 훈련시키기는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 무인 포스트 (드보크)에 무기 등의 간첩용 장비를 숨겨놓는다. 이렇게 해 놓으면 다른 간첩이 무기 없이 입국심사를 통과한 뒤 무인 포스트에서 무기를 찾아서 간첩 활동을 할 수 있다.
  • 위성, 사진 촬영만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시설에 직접 무장하고 잠입해 첩보를 수집한다. 1970년대 북한군이 DMZ에 콘크리트 수로 방어벽을 세우자, 북파공작원이 직접 방어벽에 들어가서 수로의 깊이와 폭을 줄자로 재어 오고 방어벽 콘크리트를 일부 샘플로 떼어 와서 분석했다. 또는 70년대 인민재판 동영상을 찍어와서 정훈교육용으로 활용했다. 2000년대에는 핵실험장 근처에 침투해 흙/물 샘플을 담아와 분석하거나 사진을 찍어왔다.
  • 이런 부대의 교관들 중 정보분석장교들은 대규모 간첩 침투 사건이 발생하면 적군의 이동경로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짠다. [1]

단독수집조는 먼 거리를 침투해야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잠을 자야 했고, 그래서 비트(은신처) 구축에 드는 노력이 컸다.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과 은신 도구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무장이 약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발각되면 대부분 죽게 되었으므로 전투를 피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위기상황에는 전국 어디로 탈출해야 할 지 모르므로 적국 전 지역의 지도를 익혀야만 했다.

2.2. 파괴

반면 국경선(=휴전선) 근처(50km 이내)의 적 시설물을 정찰, 확인, 폭파하기 위한 특수공작조의 활동도 있었다. 전쟁처럼 헬리콥터나 중화기의 지원을 받으며 해당 지역을 다 때려부수고 나오는 '특수부대식 작전'은 후방지원이 빵빵하지도 않고 전시가 아니기 때문에[2]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하루~이틀 거리를 비밀리에 잠입해 이러한 활동을 한다. 국경선 근처에서는 탄약고, 유류탱크, 심리전 스피커 등이 파괴의 목표물이다. 그리고 적군의 사기 저하를 위해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했다. 옥수수 수거 작업을 하는 적군이 자리를 비운 틈에 옥수수단에 부비트랩을 설치한다면, 적군이 옥수수단을 트럭에 싣기 위해 들어올리는 순간 폭발할 것이다. 침투조가 3명이었던 데 비해 파괴공작은 5명으로 이루어졌다.

특수공작조는 자신이 깽판치고 나올 지역에 대해서만 자세히 알면 되기 때문에 모형지도로 그 지역에 대해 샅샅이 훈련은 시키지만 지역의 진짜 지명은 가르쳐 주지 않고 거짓 암호를 썼다. 침투할 때도 시야를 차단하고 이동시켰다.

2.3. 해상

북한 잠수함의 경우 잠수함 승조원, 작전조를 육지까지 상륙시키는 안내원, 현지에서 침투나 파괴를 하는 작전조로 나뉜다. 잠수함 승조원은 침투 훈련을 거의 받지 못 하기 때문에 적지에 고립되면 단체로 자살한다. 안내원은 해상 침투 훈련은 받지만 작전조에 비해서는 침투 능력이 떨어진다. 작전조는 한국군의 단독수집조 (장거리 침투)와 비견되는 자들로 매우 위험하다.

코스모스를 도입할 당시 이탈리아 잠수정 (비둘기급 잠수정) 기술자와 교관들도 한국에 같이 들어왔다. 북파요원인 일명 '비둘기요원'들에게 폭탄조작, 수중운반, 폭파 등 잠수정 운영법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다. 당시 비둘기요원들이 받았던 훈련은 'U1'이라고 불렸으며 28주 과정이었다. 훈련내용은 잠수훈련, 항해기법, 기술정비, 폭약설치 등 다양했다. 또 정기적으로 무귀환 훈련, 유사지역침투훈련, 탈출훈련을 받았다.

3. 내국인을 선발하는 경우

공작원은 내국인을 쓰는 경우가 드물다. 괜히 잡혔다가 뭘 불어버릴 지 알 수도 없고, 모국의 개입을 부정할 수 없어서 외교관계가 경색되기 때문이다. 또 자기나라 사람은 아무리 훈련시켜도 적국 민간인처럼 보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공작원은 주로 해당 공작원이 활동하는 지역의 사람들과 최대한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 위주로 선발한다. 그래야 신분을 최대한 숨길 수 있다.

하지만 (1950년대~1980년대의) 남북관계처럼 대단히 특수한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북한 입장에서는 월북하거나 중공을 여행하는 남한 민간인이 없어서 도저히 포섭을 통해 간첩으로 훈련시켜 남한 사회에 잠입시킬 만한 인원이 없다. 나빠질 외교관계도 애초에 없다(...) 이 때문에 현지화/현지언어 훈련이 부족하더라도 무장공비를 파견해 간첩활동을 돕게 했다.
  • 남한 입장에서도 탈북자가 없으니 포섭할만한 대상이 없으며 중공도 수교가 없어 조선족을 포섭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북파공작원을 보내 간첩활동을 돕게 했다.
이렇게 내국인을 선발할 경우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은 자를 뽑아야 한다. 조금만 충성심이 흔들려도 붙잡히면 적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전향하며, 더 흔들리면 아예 자수해버릴 수 있다. 따라서 매우 강한 신원조회를 시행하여 적국과 전혀 연고가 없는 사람 중 매우 충성심이 강한 자만 선발한다.

내국인을 선발할 경우 현지인과 외모/체구가 비슷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북파공작원의 경우 북한 남자 평균 신장 158cm를 고려해 키가 작은 사람으로 뽑는다. 북한 사회에 숨어 지내면서 키가 크면 주목받기 쉽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한 무장공비의 경우 한국 남자 평균 신장 173cm를 고려해 최대한 키가 사람으로 뽑는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사태 당시 공작조(전투원)는 170cm 정도 (164~175cm)였고 1998년 7월 발견된 무장공비 사체는 키 168cm 가량이었다.

침투 공작원의 경우 체구가 작으면 유리하다. 비트를 구축할 때 은신이 쉽고, 식량이 적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자 중에서 몇 가지 조건이 추가된다.
  • 첫째, 인내심이 극히 강한 자여야 한다.
    적에게 쫓길 경우 수풀 틈에서 12시간 동안 똥오줌을 싸 가면서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경우조차 있으며, 비트를 구축할 때는 야삽은 커녕 모종삽으로 3시간동안 꾸역꾸역 구덩이를 파고 흔적을 처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낙엽 위를 걸을 때 낙엽을 한 손으로 치우고 한 발자국을 내딛고, 다시 그 자리에 낙엽을 위장해 자국을 없애는 방식까지도 동원되는 형편이다.
  • 둘째, 암기력이 매우 우수해야 하며, 지능도 평균 이상이어야 한다.
    이들은 지도, 접선 장소나 귀환 방법이 적힌 쪽지, 사전, 언어나 문화에 대한 주의사항이 적힌 쪽지 같은 것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만일 기록해서 가지고 있다면 해당 공작원이 붙잡힐 때 다른 공작원이나 고정간첩들까지 붙잡힐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신분을 증명할 때, 또는 탈출시 도움을 주기 위해 본국에서 보내는 방송에 암호가 사용된다. 이걸 해독하지 못하면 무조건 적국에서 죽기 때문에, 반드시 암호를 해독할 최소한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셋째, 매우 민첩하고 운동을 잘 하는 자여야 한다. 간첩이라면 현지 사회에 동화되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당당하게 출입하겠지만, 오래달리기만이 유일한 침투방법이라면 산악 달리기를 매우 잘해야 한다.
  • 넷째, 성격은 과격해도 안 되고, 우유부단해도 안 된다. 즉 냉철해야 한다.

4. 훈련

침투 공작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은신술이다. 위에 기술했듯 모종삽과 작은 자루만으로 비트(두더지굴)를 구축하는데, 비트 하나당 1㎥ 정도 파내야 하므로 숙달된 사람에게도 3시간 정도 걸린다. 오래 걸리는 이유는 흙을 갖다 버리고 위장용 덮개를 만들기 위한 나뭇가지를 구해오고 발자국을 숨기는 시간까지 합쳐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 간첩 김동식씨는 대학교 4년동안 100여개의 비트를 파봤다고 한다.
얼굴에는 진흙을 바른다. 침투 기간 동안에는 치약이나 비누를 사용하지 않아서 야생동물에게 냄새로 들키지 않게 해야 한다. 필요할 때는 흔적과 발자국을 없애야 하는데, 심할 경우 한 걸음 이동할 때마다 낙엽을 움직여서 위장하고 다시 한 걸음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은신 상태가 안전하지 않다 싶으면 대소변도 누운 채로 해결한 뒤 땅에 파묻어야 한다. 대소변 때문에 비트 밖으로 기어나가거나 하면 발각되어 죽게 될 수 있다. 주변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 마음놓고 잠자지 못 한다. 1시간 정도씩 교대로 잠자면서 서로를 깨워야 한다.
발각될 경우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먹지도 잠자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은신하는데, 산지의 경우 20m 거리에서도 육안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북파공작원에게는 오래달리기, 무장공비에게는 사상적 측면이다. 남한에서는 훈련의 시작은 항상 오래달리기부터 시켰다. 오래달리기를 시키는 과정에서 중도 포기한다고 해서 훈련 과정의 비밀이 누출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포기한 사람들은 감시를 받거나 군에게 보복을 당하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정식 훈련 과정으로 들어간 뒤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들은 기밀 유출 문제 때문에 평생 감시를 받는 경우가 많았고 심한 경우 부대를 그만두지 못 하고 배신자라고 맞아죽기도 했다.
오래달리기가 중요한 까닭은, 낮에는 숨어 지내야 하고 밤에도 비트를 구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한정되기 때문이다. 비트 구축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어두워진 다음부터 새벽 3시 정도까지만 뛰는데 이렇다 해도 매일 밤 50~60km 정도나 뛰게 된다. 실전에서 이만큼 많이 뛰어도 정상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하려면 훈련은 그 이상 수준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온 몸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모래조끼를 입고 산지를 뛰는 훈련을 한다. 1997년 남한에서는 기초훈련 100일간 매일 12km를 달렸으며, 반복되는 구보에 열외는 없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정상 근처나 계곡 근처같이 눈에 잘 띄는 곳을 달리면 안 되고 7,8부 능선만 골라서 다녀야 한다. 걷거나 뛸 때 소리가 나도 안 된다. 달리기 중에는 산악지역에서 개를 풀어 추격시키기도 했는데 적에게 들켰을 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훈련을 했다. 처음에는 1시간에 5km도 뛰기 힘들어하지만 계속 훈련을 시키면 30kg 완전군장을 메고 12km의 산악로를 급속행군으로 55분에 주파하거나 (국경선 근처 침투) 25kg 군장을 메고 하루 60km를 평균 시속 10km로 주파하는 것 (적지 깊숙한 곳까지 침투)이 가능해지게 된다. 하지만 30kg에 가까운 모래주머니나 배낭을 메고 반복되는 구보를 하게 되면 나중에는 무릎에 이상이 생기게 된다.

남한 사회는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북한 간첩에게는 오래달리기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공비의 경우 장비를 은닉한 뒤 사복으로 환복하고 민간인 코스프레를 하면 검문검색하지 않는 이상 발각하기가 매우 어렵다.(실제로 김신조 일당이 침투했을 때 가지고 온 물품중에 신사복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서울까지 내려온 뒤 취객으로 변장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사격, 총기 분해 및 조립, 수류탄, 크레모아 폭파, 폭약제조 및 산출법, 적 화기 운용에 대해서도 배운다. 1970년대의 북파공작원들은 M1 카빈을 사용하였다. 가볍고 휴대가 편리하며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고장이 적다는 이유였다. AK-47은 북한의 제식 소총이기는 하지만 공작원은 필사적으로 숨어서 도망다니므로 위장하는 의미가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다. AK-47은 M1 카빈보다 더 무겁다는 단점이 컸다. 인터넷에 가끔 떠도는 1990년대 정보사 요원들 사진을 보면 AK-74 Vz.61 등으로 주 무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60년대 김신조 일당이 침투했을 때는 가볍고 속사가 가능한 PPS-43을 들고 왔고, 1996년 당시의 무장공비들은 M16 RPG-7 등을 사용하였다.

통신, 음어, 모스 부호 수신 훈련을 한다. 현지 고정간첩과 접선했을 때 자신이 본국에서 보낸 공작원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자기 편의 손에 죽기 때문에 암호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북한 무장공비의 남파가 이루어졌던 90년대까지는 난수방송이나 암호 전달용 라디오방송을 통해 지령이나 탈출 방법을 암호로 송출했다.[3] 이런 암호를 해독해내지 못하면 현지에서 죽는다. 이 때문에 공작원에게 소형 라디오를 갖고 가게 했다.
다만 통신을 배우는 것이 반드시 공작원의 무전기 발신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탐전 기술이 발달한 결과 발신을 하던 북한 간첩들이 60년대에도 체포/사살당했다. 그러다 보니 남한에서는 1970년대부터 무전기를 이용한 발신을 포기하고 라디오를 이용한 수신만 했다. 반면 북한에서는 발신 시간을 매우 짧게 하면 탐전을 당해도 체포를 피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접근해 1990년대 중반 고속 메모리식 무전기를 개발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사건에서도 탐전을 한 기록이 있다.

게릴라 전술을 배운다. 가령 1996년 무장공비 사태에서는 무장공비가 장교인 척 하고 초병을 속여넘긴 뒤 초병이 방심했을 때 살해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리고 적에게 발각되어 도주중일 때는 아무리 안전하게 최단거리로 갈 수 있더라도 일부러 반대방향으로 간 뒤 빙빙 둘러서 간다든지, 일부러 지그재그로 반복적인 회피 경로를 잡아서 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적의 포위망을 피한다. 이런 게릴라 전술은 일반적인 군인은 (특수부대라 해도) 알 수 없다. [4] 따라서 북한군이 북파공작원을 포위할 때는 자신들의 공작원의 조언을 받아 대처하게 했다.

적 언어 및 문화, 관습, 상식 등에 대해서도 배운다. 주로 적국의 전향자를 교관으로 활용하나, 북한의 경우 일본인을 납치해 교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97년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에서는 북한 간첩이 버스요금 잔돈을 받는 방법을 몰라 당황한 적이 있었고, 메밀소바를 먹으러 가서는 소스를 국수에 붓는 바람에 바지를 더럽히고 황급히 도망나온 적이 있었다. 이때 여간첩은 생리대와 아기기저귀를 구분하지 못해 두 번이나 아기 기저귀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상하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이 실수들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북한 간첩 김동식씨는 서울 토박이 출신의 남한말 강사와 1년간 합숙 훈련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아예 건물을 지어서 훈련시키고 있는데, 1980년대 말 김동식씨가 겪은 훈련장에는 슈퍼, 여관, 이발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침투, 지뢰 제거, 수영, 잠수, 자물쇠 따기 (해건), 담장 넘기등의 지형지물 극복 훈련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휴전선을 실전에서 돌파할 때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리내지 않고 유리창을 깨는 법 (유리창 파지법)도 배운다.
수영 훈련의 경우 수영장이 아니라 해상에서 실시한다. 잠수 실력의 경우 2~3분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북한 간첩 김동식씨는 20일간 하루 8시간씩 수영 잠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60년대에는 나뭇가지 장애물, 모래 장애물, 실 장애물 등을 설치해놓고 건드리면 소리가 나거나 흔적이 남게 한다. 이 과정에서 적의 침투 사실을 파악하거나 소리를 듣고 사격 대상으로 잡는다. 모래 장애물은 비를 맞아서 모래가 단단해게 굳은 구역을 손바닥으로 두드려보면서 찾은 후 배낭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가는 방법으로 흔적을 최대한 덜 남길 수 있다. 나머지 흔적은 나뭇가지를 꺾어와서 지운다. 이 꺾어오는 나뭇가지 역시 의심을 사지 않도록 먼 곳에서 꺾어 와야 한다. 실 장애물을 끊었을 때는 짐승의 소행으로 위장하도록 근처의 실을 모두 끊어 놓는다.
요즘도 남아 있는 장애물 중 위협적인 것으로는 철조망, 지뢰밭, 고압선과 콘크리트 수조 장애물을 들 수 있다. 철조망, 지뢰밭, 고압선은 60년대에는 이미 설치가 완료되어 있었다. 철조망은 넘어서기 좋은 곳을 골라 간단히 우회 통과하면 된다. 안내 전문가는 지뢰밭 개척 훈련을 많이 받은 결과 지형만 보고도 지뢰가 어디 묻혀 있을지 판별하여 제거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고압선을 통과할 때는 1m쯤 되는 호스 두 개를 사용한다. 호스를 갈라 아래 위쪽의 고압선에 덮어 씌운 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사람이 통과할 만큼 들어올리면 감전되지 않고 고압선을 통과할 수가 있다. 70년대가 되면서 북한은 5m 높이의 콘크리트 수조[5]를 깔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량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침투 공작원의 경우 많은 양을 가지고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식량은 약간 부족하게 가져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해결한다. 즉 산나물을 구별해서 먹거나 적의 민가에서 표시나지 않게 식량을 훔치는 것[6], 또는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 등이다. 저기 보세요.(중략) 그러나 지금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죠. 70년대 훈련 중에는 개미를 핥아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먹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그 외 무성무기의 사용도 있는데, 나이프 투척 훈련도 시킨다. 1997년 남한에서는 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대원을 묶어놓고 그의 머리 위를 표적으로 투검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7] 북파공작원 관련 영상에서 젓가락이나 드라이버를 던져 30m 거리에서 꽂아버리는 묘기가 자주 나오는 까닭은 이것 때문이다. K7 소음기관단총이나 독총 등의 무성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1970년대에는 나이프 투척과 소음권총이 유일한 무성무기였다. 1970년대에 소음권총은 평균 3인 1정 수준으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돌을 넣고 모래를 채운 양말, 신발끈 등의 급조 무기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배웠다.

얼음물 극복 훈련도 시켰다. 눈 내린 계곡에 3시간씩 사람을 넣어 놓는 것이다. 1997년의 사례에서는 훈련받던 대원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소리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비술도 배웠다. 태권도나 유도 등의 맨손격투 무술도 배웠으며, 나무와 돌 등 별것 아닌 자연물을 위험한 무기로 사용하는 훈련도 받았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면 사람이 쉽게 죽는지도 배웠다. 이런 과정에서 남북한 모두 사람이 실제로 죽어나갈 정도의 가혹한 훈련을 시행했다.

각종 탈것, 기관차, 경비행기, 소형 선박의 운전법을 배운다. 북한 공작원들의 경우 200t 이하의 배는 누구나 조종할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이 파업했을 당시 특전사가 투입되어 지하철을 운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도법이 있다. 원래 독도법이란 지도를 읽어서 지형과 위치를 파악하는 기술이지만, 지도를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축소 입체모형과 지도를 이용해 훈련해서 적국 전역의 지도를 외워서 갔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1/15,000 항공사진을 이용했다.

면도칼만으로 이발하는 기술도 배운다.[8] 그것도 없을 때를 대비해서 유리병으로 이발하는 기술도 배운다. 이건 칼로 써먹기 좋게 유리병을 깨는 방법과 같이 배운다. 민가 근처를 지나가야 할 때 민간인들에게 수상하게 보이면 안 되기 때문.

잡힐 것 같으면 자살하도록 배운다. 청산가리 등의 독약 캡슐이나 자폭용 수류탄이 사용된다. 북한 공작원들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훈련을 받고 나면 자폭을 옆집에 물 길러 갔다 오는 정도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훈련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한겨울의 산에서 생존주의 훈련을 한다. 민간인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산속에서 먹고 자는 것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군 부대 침투훈련을 시킨다. 첩보부대의 사장실(지휘관실)에 미리 침투를 예고하고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오거나 침투의 증거로 쪽지를 남겨놓고 나오는 것이다. 침투 예고가 되어 있는데다 기간병이 실탄 장전하고 경비중이므로 죽을 수도 있지만 시킨다. 이런 훈련은 북한 공작원들도 동일하게 시행한다. 파주시 광탄면에서 훈련하던 사람은 광탄에 있던 미8군 노무단부대 (KSC)에 침투해 서류를 절취하는 훈련을 7차례 이상 시도해 모두 성공했다. 서류 절취에 성공하면 경계가 허술했다는 이유로 책임자가 문책을 받고 경계를 강화했지만, 반복해서 침투했다. 능욕

그 외에도 자신의 주특기에 조금씩 따라 다르다. 안내·사진 촬영·흔적 제거 등이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가 영화사 촬영기사를 스카웃해서 1년간 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사진 교육을 실시한 적이 있다.

단기공작원들의 경우는 위와 약간 다른데, 이들은 전투를 전문으로 했기 때문이다.
통신, 음어, 독도법, 관찰, 촬영, 북방한계선지대침투, 사격, 수영, 유격, 공수, 잠수, 해건(자물쇠 따기), 무술, 생존, 구보 30kg배낭-12km산악-55분대 주파, 각종 총기류 분해 및 조립특성, 폭약제조 및 산출법, 북한언어-행동-제식, 게릴라전술

이렇게 1년 정도 훈련을 받으면 실제 침투가 가능할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이런 훈련은 사람을 종종 죽거나 크게 다치게 만들고, 육체적으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정신까지 병들게 만든다. 이 때문에 조현병이 온 경우도 있으며, 소송 끝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경우도 있다.

5. 무기·장비 체계

  • 1.21사태 당시의 북한 공작원들은 박정희 암살을 목표로 다음과 같이 무장하였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습[9],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벌[10],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 찹쌀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 PPS-43과 실탄 300발),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TT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 김신조의 회고 중
위 목록 외에도 조선노동당 당원증이 두어 개 노획되었다.
  • 1970년대 북파공작원 중 장거리 침투를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무장했다.
소음권총 3인1조에 하나, M1 카빈 소총 1인 1정, 실탄 100발, 수류탄 2~4알, 단도, 청산가리 캡슐(자살용), 응급약(아스피린, 진통제 등의 구급약 종류를 포함. 붕대와 실, 바늘로 어지간한 상처는 혼자서 꿰매버린다.), 만능열쇠, 지도, 운동화[11], 나침반, 머리빗, 면도칼, 펜치, 라이터, 수통, 숨쉬기빨대, 바닥 밋밋한 농구화. 속옷과 양말 하나씩 여벌, 아대[12], 3단식 삽자루(모종삽과 야전삽 중간 크기), 낙하산 줄( 파라코드. 밧줄 대용), 소형 망원경, 배낭(뭐든지 안에다 하나씩 넣고 묶게 되어 있는 소형), 식량[13], 수신 전용 소형 라디오(조장만), 올림푸스 망원카메라(촬영 전문가만)
이들의 목적은 현지 고정간첩에게 장비와 돈을 공급하거나 서류를 받아오고 중요 시설물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었다.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무장이 매우 빈약하다. 일단 발각되면 이들 중 대다수는 잡혀 죽게 되었으므로 발각되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이 목적으로 3단식 삽자루, 바닥 밋밋한 농구화, 숨쉬기 빨대, 삽자루 같은 은폐용 도구가 사용되었다. 최소한의 자위용으로 총을 준 것이라 최대한 가벼운 M1 카빈 소총 (2.6kg)[14]을 주었으며 실탄도 매우 적게 주었다. 실탄이 적기 때문에 교전 시에는 무조건 단발로 조준사격해야 했다. 사람이 20kg의 군장을 메고 하루 60km 뛰면 전투 불능 상태까지 체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무게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가 위와 같다.
  • 1970년대 휴전선 근처에서 북한 초소 테러를 하던 파괴공작조는 크레모아 등 강력한 화기를 사용했다.
RPG-7의 중국 파생형 '692 대전차로켓'(1문+포탄 5발. 중국제.), RPG-43 대전차수류탄 (북한제), Mk.2 수류탄 (미국제), AK 소총(4정.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음.), M16 짝퉁 소총(2정), 권총(6정)[16], 수류탄 등 각종 화기
남한 민간인 사복 (남방, 청바지 등), 한국군 위장복, 전투모, 방수모, 방수낭, 수중단도, 군용 해안 도척, 복면, 구명조끼, '해당화' 껌, 수첩 (북한제)
워키토키, 라디오, 이어폰 (일본제)
호흡기 (regulator), 수경, 오리발, 산소통, 잠수벨트 (일본제)
후지 야간투시경 (200m까지 관측 가능.), 캐논 500mm 망원렌즈 카메라, 캠코더, 쌍안경 (일본제)
스쿠버용 태그호이어 손목시계 (스위스제)[17]
수중잠수경 카메라 (러시아제)
스패너 및 공구 (독일제)
망사팬티, 양말, 성냥, 러닝셔츠 (한국산)
사건 당시의 투항 유도 전단 같은 걸 보면 이 때 북한 공작원들의 인상착의는 대부분 위장복이 아니라 국방색(OD#7) 항공점퍼나 남방 등의 상의에 청바지 같은 사복이었는데[18], 함장 정용구는 밤색 바지, 러닝셔츠(관 속에 들어간 사체가 잠시 나오므로 주의) 등을 입고 있었으며 핵심 멤버인 정찰총국 요원은 처음에는 국군 위장복을 흉내낸 위장복을 입었으나 국군 위장복과 실제로는 너무 차이가 나서 버리고, 대신 국군 병사를 습격해 살해하고 국군 군복을 탈취하여 입었다.
M-16 짝퉁 소총은 1992년 철원 무장공비 사태~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북한에서 무장공비가 내려올 때마다 발견되었다. 총번, 제조국 표시, 제조연월일 등의 표식이 전혀 없다. 26명 중 사살하거나 생포한 22명으로부터 실탄 353발을 노획했다.
정찰장비, 통신장비, 잠수장비는 대개 일본제였다.
이외에도 사살한 공비에게서 민가에서 훔친 것으로 보이는 구운 옥수수, 성냥, 담배 등이 발견되었다.
  • 1998년 7월 발견된 북한 간첩 사체에서는 잠수장비, Vz.61 기관단총과 탄창 2개, 길이 20cm 가량의 대검, 식량 (미숫가루, 초코렛 등)이 발견되었다.[19]

6. 침투, 탈출 방식

공작원은 전투 이외의 목적으로 침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전투를 최대한 피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흔적 없이 침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탈출할 때에도 최대한 흔적 없이 적의 추격을 피해서 탈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따라서, 공작원의 침투·탈출은 은신에 초점이 맞춰진다.

육로로 침투할 경우, 해당 지역의 수색대(pathfinder)가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공작원들을 안내한다. 이 때 도착하자마자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며칠 가까이 수색대와 함께 움직이면서 이상징후를 노출시키지 않게 노력한다. 그 과정에 망원경을 통해 근처를 관찰하기도 한다. 그러다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침투를 하게 된다. 이후 각종 장애물을 극복하고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것이다. 휴전선이 위험한데 육로 침투가 가능하냐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지만 노크 귀순과 같은 원리로 가능하다. 1970년대까지 양측에서 휴전선을 넘어 수천번의 침투가 있었다.

1950~1960년대의 해상 침투는 직접 헤엄을 치거나 고무보트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모선 (Q보트)에서 자선(VP)를 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4년 한국군은 최초로 잠수정을 도입했다. 침투 목적으로 이탈리아 코스모스사에서 70여t의 코스모스급을 도입한 것이다. 10여명 탑승 가능. 하지만 너무 작아서 한국 기지에서 바로 북한 해안으로 잠입할 수는 없었다. 모선(母船)이 북한 인근 공해를 항해할 때 써야 했다. 해로로 침투하는 것은 소형 잠수정을 이용해 고정간첩과 미리 약속해 놓은 시간에 접선하는 방식이었다. 위험하니까 1분이라도 약속 시간과 틀어지면 침투는 무산되고 각자 되돌아가게 된다. 70년대에는 '비둘기'급이라고 불렀고 2000년대에는 '갈매기'급이라고 불렀다. 비둘기급을 이용한 침투공작은 해군 첩보부대 502기지 (신성기업 마산지사)의 것으로, 중앙정보부의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1997년 최정남-강연정 침투사건까지만 해도 미국의 첩보위성이나 한국의 해군 레이더로 북한의 잠수정을 찾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다만, 침투 과정에서 들키면 간첩선과 잠수정이 모두 교전 끝에 격침당하곤 했다.

1980년대에는 150t의 돌고래급 잠수정이 건조되었다. 코리아타코마라는 회사가 독일 기술을 도입해 건조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한국의 대북 침투가 급격히 줄어든 시기라 많이 쓰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침투는 육상, 해상으로만 이루어졌다. HALO 강하로 고고도에서 침투하거나 An-2, 허큘리스 프로펠러 수송기 등으로 저공 침투하여 낙하산 강습[20]하는 것들을 구상 했지만 한국전쟁 휴전 이후 실제로 시행된 적은 없다.

침투하는 인원은 일반적으로 3명이다. 독도법, 라디오 암호해독, 지뢰제거 등에서 뛰어난 '조장'이 맨 앞에서 뛰고,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원이 중간에서 뛰고, 흔적 제거에 가장 뛰어난 대원이 끝에서 뛰는 것이다.

중요한 임무의 경우 안기부의 정보요원이나 영관급 정보 장교를 중간에 넣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요원 중에는 여자도 꽤 있었지만 침투시키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7. 보상, 처벌

북한 공작원들에게는 가족의 평양 거주[21], 자녀의 엘리트 교육, 상당한 레벨의 경제적 생활수준 보장[22] 등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 보상은 공작원이 필요할 경우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공작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했을 때에 한정한 보상이다. 공작원이 자수하여 귀화하거나 검거되었는데 즉시 자살하지 않았을 경우, 북한에 남은 가족들은 최소 수용소행 최대 처형의 가혹한 보복을 받게 된다. 보복이 적용되는 범위는 공작원의 중요도나 죄질에 따라 달라서 가깝게는 직계가족부터 얼굴도 잘 모르는 먼 친척까지 수용소로 끌려갈 수 있다.

남한의 경우 물색조들은 아파트 여러 채를 살 엄청난 금액을 보상해준다느니 6~7급 공무원[23]으로 채용하고 월급 3만원을 주고 대통령 직속 특수부대에 보내준다느니 하는 거짓 약속을 하고 모집을 했지만 모두 순 거짓말이었고, 정작 그만둘 때는 아무 보상을 하지 않았다. 맞아죽지 않고 조용히 그만두게 해 주는 것, 군대 두 번 가기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최대의 보상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만둔 뒤 거주지에 살인 사건이 생기면 경찰들이 최우선 용의자로 몰아 권총 들고 조사하는 경우가 잦았다.

8. 북파 공작원

대한민국의 현존 북파공작부대
육군 HID 해군 UDU 공군 28전대


과거에는 북한만 무장공비를 보낸 것이 아니고 국군에서도 북파공작원을 여러 차례 파견했다. 대표적으로 1940년대 후반에 활약했던 호림부대. # 호림부대 재판장면#

1950년대에 각 군별로 첩보부대들을 만들었는데, 육군 첩보부대는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 첩보부대는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 첩보부대는 AISU(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이다.[24] 이들을 통틀어 북파공작 부대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우리 북파공작원들을 간첩, 무장간첩 등으로 부르고 미국 정보기관 산하에 있던 북파공작원은 고용간첩이라 불렀다.[25]

처음에는 북한 피난민을 활용하려 했으나, 북한이 싫어서 도망나온 사람들이기에 지원하기를 꺼렸다. 50년대에는 사형수, 무기수, 고아를 선발해 보냈는데 남한으로 돌아와봤자 얻을 게 없다 보니 북한 당국에 자수하여 훈련 내용을 누출하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60년대부터는 물색조를 통해 모집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20대 초반의 건달들 중 영리한 사람들이 주 타겟이었다. 70년대에는 '양친이 살아있는 중졸 이상 학력자'였고 학력 기준은 점점 높아져 2000년대에는 고졸까지 높아졌다.

휴전 후에도 남북 양국은 많은 수의 무장 간첩을 파견하였다. 한국에서는 북한측의 만행만 강조되었지만, 60년대 남측이 보낸 공작원들의 행동도 북한에서 이와 별로 다를바 없었다. 60년대의 남북의 공작원 파병의 주목적은 정보수집보다는 상대방 내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으므로.

대한민국 정부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로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모두 7,726명으로, 이중에서 사망 300명, 부상 203명, 북한에 체포 130명, 행방불명 4,849명, 기타 2,244명이다. 실종자 중 상당수는 자수자나 투항자로 간주하고 있다. 과거에는 북파공작원들의 존재조차 부정되었으나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들고 일어난 끝에 2002년에 북파공작원을 인정하는 판결이 최초로 나왔으며 북파공작원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안인 특수임무수행자 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위의 상설 첩보부대들 외에도, 1968년에 북한의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했던 1.21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 각각 보복 임무부대들을 만들게 된다. 이 중 공군 소속의 보복부대가 바로 실미도(영화)로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진 684부대로서, 김일성 암살 임무를 맡았던 부대이다. 이들 보복부대들은 보복임무를 위한 훈련을 마치고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 남북간의 정치관계가 화해모드로 바뀌면서 당초의 보복계획이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은 사실상 취소되었고, 그에 따라 존재목적이 없어진 이 보복부대들은 제대로 지원과 관리도 받지 못한채 그저 방치되었고 곧 해체될 운명이었다. 그러자 공군의 684부대원들은 이에 반발하여 1971년 8월 23일 기간요원들을 살해하고 육지로 와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했지만 결국 대부분 사살되고 생존자들도 사형에 처해지면서 부대가 비극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각군의 나머지 보복부대(육군 선갑도부대, 해병대 MIU)들도 차례로 해체되고, 예전부터 있었던 상설 특수부대인 육군 HID와 해군 UDU, 공군 AISU만 계속 남게 된다.

정보사에 따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작원 파견은 하지 않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이후로 신호정보(SIGINT) 체계가 발달하면서 공식적으로 장거리 공작원과 고정간첩을 파견하는 일은 없으며, 정보사 특수부사관만을 계속 양성하고 있다. 1990년대에 중국에 있던 많은 수의 남한측 간첩도 수효가 크게 줄어들었다.

2012년 5월 29일, 주한미군 특수전사령관이 한미 연합 특수부대가 북한에 HALO 강하로 침투, 땅굴이나 공군기지 등 여러 지하시설물의 정보를 직접 탐지하고 왔다는 발언을 했다는 해외 언론 보도가 나와 국내외 언론이 발칵 뒤집혔으나 하루만에 한미 국방부 당국에서 공식 부인한 사건이 있었다. 언론 보도

1990년대 후반에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다가 가혹행위를 당한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서 승소했다. 관련 내용을 보면 그냥 훈련만 해도 굉장히 가혹한데 빠따질, 빵빠레 등 쌍팔년도 군대의 전유물로 유명한 가혹행위까지 겹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실미도 사건 이후로 좀 잠잠해졌다는 얘기가 있는데 적어도 1990년대까지 그런식의 지옥훈련이 계속된걸로 보인다.[26]

북파 공작원이 된 아버지를 찾아 부대를 찾았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6살에 아버지와 같은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게 된 어처구니 없는 실화가 보도됐다. 북한군에 잡힌 아버지는 역으로 남파된 후 바로 당국에 자수했지만 불법 구금 후 사형되었고 아들은 59년만에야 법원으로부터 아버지의 무죄판결을 받아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게 됐다고 한다. 관련보도 대체 무슨 약을 빨면 6살짜리를 공작원으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되는걸까[27] 배상금은 겨우 3억.. 사람을 사법살인 시킨 것도 문제지만, 일단 6살 꼬맹이를 불법 구금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다.

탈북자들이 저술한 서적을 보면 간혹 북파공작원들이 적발되서 공개처형 당한 것을 보았다고한다. 북조선에 몇 명이나 침투해 있냐는 질문에 도로의 전봇대 만큼 많다는 말만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부대원들은 군번과 계급이 없다. 적발되었을 경우 공작원의 정체를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군번과 계급을 부여하지 않는다. 임무해제(전역) 후 계급과 군번이 부여된다. 1970년대에는 아예 계급이 없었던 것 같고, 1990년대 초에는 하사, 2000년대 초 이후에는 중사이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과거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북파공작원 출신들의 폭력시위가 몇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시위가 2002년 설악산 동지회(HID 출신)가 벌인 폭력시위인데 웬만한 운동권 폭력시위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소화기로도 끄지 못하는 LPG 가스통 화염방사기부터 시작해 손도끼, 쇠파이프, 공기총 등 민간차원에서 동원 가능한 생활무기가 전부 동원되었다. 전경들이 탈탈 털리자 경찰특공대까지 투입되었고 '타협' 수준으로 겨우 진압되었다.

8.1. 북파공작부대

  • HID
    1951년 육군 첩보부대로 창설되어, 1961년 AIU로, 1972년 AIC로 개편되었다.
    HID(설악개발단)은 68년 3월 창설되어 1994년 폐쇄되었다. 전방군단 5곳의 특수공작대로 파견된 것으로 추측되며, 파괴공작, 응징보복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최대 480명 규모였으나 단계적으로 축소되었다. 표어는 잔인한 응징, 처절한 보복. HID 전역자 중 한 명이 캄보디아 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해군 첩보부대는 UDU(만포개발단), 공군 첩보부대는 OSIAISU로 불리었다.
    1990년 육해공의 첩보부대가 국군정보사령부(DIC)로 통합된다.
  • XX 회사 / OO 상사 / xx 공사
    북파공작원들은 회사나 상사, 공사 등의 회사원으로 위장한다. 교관들도 과장, 부장, 전무 등의 회사원으로 위장하며, 현직 군인인 교관들의 경우 회사원 명칭을 사용하며 군복을 벗고 출입한다. 이것은 보안 유지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북파공작원이 발각될 경우에 너희 민간인 중 불순분자의 소요로 일축하기 위해서이다.[28] 따라서 여기에 소속되면 군번도, 계급도 없다.
지상대 대령, 지구대 중령 사장
소령, 지상대 중령 전무
대위 과장
중위/소위 계장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록에서 북한 측 주장에 따르면 '동북산업사' (강화도 교육대), '대한축산협회' (광주 교육대) 등의 위장명칭으로 사람을 모집했다. 이는 동북산업사(서울 양평동)에서 모집된 뒤 경기도 파주에서 훈련받은 사람, 동북산업사에서 모집된 뒤 대한축산연구소 (경기도 판교)에서 교육받은 사람 등에 의해 교차증명된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69년 8월에서 1972년 5월까지 33개월 동안 42명을 생포했으며 39명을 사살했다.
  • 판교 광주교육대, 공작원 중앙양성소, 809대, 판교목장
    현장에서 교육중인 인원을 돼지라고 불렀다. 돼지니 목장이니 하고 부른 이유는 대한축산연구소라는 위장명칭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부대 간판이 목장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돼지들' 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악마산은 그 일대에 있는 청계산이다. 1967년에서 1971년까지 실제 교육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북한측 주장을 통해 교차검증 가능하다. 여기서 4개월 정도의 기초훈련을 거치고 춘천, 파주 등으로 파견하여 8개월 정도 훈련받은 뒤 북파를 하였다. 1975년 활동을 중단하였다.
  • 684부대( AISU 파견대)
    1.21사태 직후 실미도 사건의 주역으로 김일성 암살을 위해 창설되었다. 중앙정보부와 공군의 요원들이 민간인들 중 자원한 인력들을 모아 무인도에 몰아넣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1월 23일에 미군의 푸에블로호를 나포해 승무원들을 인질로 잡아 보복을 막았다.
    승무원들을 석방하면서 남북 간에 화해 무드가 조성된 이후에는 이들을 북파할 이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작전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이 상황에서 복지에 대한 배려가 계속 줄어들고 목적없는 훈련이 반복되자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기간요원들을 살해하고 무작정 서울 시내로 돌입하다가 교통사고로 인해 수류탄이 폭발해 대다수가 사망하고, 생존자들도 사형당했다.
  • 특수정보부사관
    2002년 이후 국군정보사령부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북파공작원 부대이지만 실제로 북파를 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확인해주지 않는다. 정식 명칭은 KSMAT.[29] 대한민국 국군 가운데 가장 지독한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무성무기체계가 매우 뛰어나다. 여기는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만 입대할 수 있다. 입대하면 하사 계급을 받고 양성교육기간을 제외하고 4년간 복무한 후 전역시 1억 4천만원 가량의 보상금을 받는다. 사실 이 1억 4천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라 복무 중에는 휴가 외에는 돈을 쓸 일이 없어서 급여를 가지고 정기적금을 들고 전역시 이자와 함께 수령하는 것이다. 복무기간 동안 영내 거주하며, 원칙적으로는 4년간 일반적인 외출 외박은 없고 분기당 1회 1박2일 외박이 실시되며 휴가는 원래 없었는데 2003년부터 1년에 1주일씩 주어진다고 한다. 2012년부터는 완전 비공개 모집으로 전환되었다.

9. 북한 공작원(남파 공작원)

북한에서는 연락군관,[30] 남한에서는 무장공비라고 부른다. 공비는 공산 비적의 줄임말이다.

북한 공작원들은 장비 전달과 사진 촬영을 주 임무로 하는 북파공작원과 달리 실제적인 암살, 테러, 납치를 실행하거나 전쟁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북파공작원은 먹을 것이 많고 침투하기 쉬운 여름철에 침투하지만, 북한 공작원은 북한이 자랑하는 기갑사단이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겨울철에 침투한다.

로동당 3호 청사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을 모아놓은 곳으로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조선로동당 작전부, 조선로동당 대외연락부가 있다. 이들 기관 모두 공작원을 양성했다. (예: 작전부 산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대외연락부 산하 225국) 그 외에도 제8군단,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산하 35호실 등에서 보낸 무장공비가 확인된다.

2011년경 기밀해제된 문건에 따르면, 정치인 이진삼 의원이 현역 군인(당시 대위)이던 1960년대 후반에 방첩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예하 609특공부대에서, 대남 도발에 대한 보복 작전을 위한 인원을 추릴 때 전향한 전직 북한 공작원들을 데려다 쓰기도 했다고 한다.

1998년까지는 무장공비가 잡힌 기록이 있으나, 2000년대 이후 잡히는 간첩은 무장 공작원보다는 신분을 위장한 쪽이 많이 잡힌다. 2012~2016년 체포된 북한의 남파 간첩은 13명이었는데 이 중 12명이 탈북자였다.

9.1. 남파 공작 사건

자세한 정보는 국가정보원 과거 자료를 참조.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일반적 수준의 군사정보도 당연히 공개되기 마련이다. 대간첩작전도 언론에 의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어, 라디오만 있으면 적 정규군의 배치를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한국군이 매우 애를 먹은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책 '공수부대 이야기'의 저자가 작중에서 한 평가는 시X 내가 간첩이면 라디오부터 뽀리겠다라며 그 정도로 정확했다고 한다.[31]

10. 현지인을 선발하는 경우

1990년대부터 남한에서는 내국인의 직접 잠입을 포기했다. 한중 수교 이후 정보사령부 공작관 신분의 장교는 총 들고 북한으로 잠입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3성에서 양복 차림으로 사무실을 차려놓고 공작망을 관리한다. 책임자가 직접 들어갔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외교적 문제는 물론이고 많은 것을 자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접 북한에 들어가 첩보를 수집하는 것은 탈북자, 중국인, 조선족 등 현지에서 포섭한 내통자이다.

1997년 한국이 북한의 미사일 기지에 접근해 정보를 캐냈던 실제 사례를 보자. 기지 근처에서 복무하다 탈북한 북한군 출신 2명을 모아서 기지에 침투시키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오게 했다. 이들은 접근하는 경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명은 탈출 과정에서 사살당했다.

2006년 가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중국 내 한국 블랙요원의 지시를 받은 탈북자 출신 공작원 2명이 함경북도 길주군의 한 야산에 잠입했다. 한 명은 바닥의 흙을 긁어냈고, 다른 한 명은 그 과정을 소형 캠코더로 촬영했다. 이들이 채취한 흙과 물은 며칠 뒤 북-중 국경을 넘어 남한 요원에게 전달되었으며, 캠코더로 현장을 찍은 동영상 파일은 핵실험 현장 주변에서 가져왔다는 근거가 되었다. 그 해 10월 9일 북한은 핵실험 사실을 공식 발표했으며, 얼마 뒤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정원장은 "북한 핵실험의 규모와 핵 물질 성분을 분석했다, 핵 실험장 근처 시료를 우리 휴민트가 직접 가져와 분석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에서도 1997년까지는 잠수정을 통해 내국인 무장간첩을 잠입시킨 것이 확인된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그런 예이다. 2000년대 이후로도 1년에 간첩 10여명, 협조자 3~5명씩은 꼬박꼬박 잡힌다. 협조자의 예를 들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된 대북 사업가가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이산가족 명단, DMZ 부근 지역의 지형이 자세히 기재된 'DMZ 평화공원 개발계획' 자료 같은 것들을 팔아 넘기고 심지어 카이샷까지 팔아 먹으려다가 잡혔다.


[1] 예시 [2] 사실 한국전쟁도 휴전만 된 것이고 종전 선언이 없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도 전시에 해당한다. 다만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실상 평시로 간주된다. [3] 논문에 따르면, 2000년 A3 난수방송이 중단되면서 인터넷, 데이터통신 등의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4] 96년 강릉 무장공비 사태 당시 위험지대 한복판에 특전사가 헬기 레펠을 하던 중 무장공비의 총격에 머리를 맞고 즉사한 사건이 있다. [5] 전기철조망 앞에 있어서 감전될 확률을 높이고, 넘어가는 순간에 잠복호의 사격 대상이 된다 [6] 민가에서 간첩신고를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많이 훔칠 수 있을때도 표시나지 않게 조금만 훔친다. 부대 근처 민가를 대상으로 훈련을 하고, 훈련을 마치면 대위(과장)가 찾아다니며 돈으로 배상해준다. [7] 이 대원은 나이프 투척 훈련에서는 무사했지만, 선배들에게 물고문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사망했다. [8] 듣기엔 쉬워보이지만.. 따라 할 생각은 하지 말자. 셰이빙 크림을 써도 아차하면 베인다. 면도기라는 문명의 은혜에 감사하자. [9] 이들은 서울에 들어와서 검문에 발각될 때까지 훈련 중인 방첩대로 위장하였다. [10] 당시 계획상 서울로 진입한 후에는 취객으로 위장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11] 많이 뛰어야 하기 때문에 [12] '손목보호대, 무릎보호대' 같은 보호대를 말한다.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양말에 끼워넣기 위해 사용한다. [13] 비상식량 찐쌀이나 육포 같은 종류였다. 보존성과 휴대 용이성을 위해 마른 걸로만 가져간다. 무게 때문에 날짜 계산하여 부족하게 가져가고 부족한 식량은 훔쳐먹고 잡아먹는 식으로 구한다. [14] M1 카빈은 70년대에도 이미 구식이었다. 하지만 M16이나 AK에 비해 가볍다는 장점이 있다. AK 소총을 이용하면 현지에서 탄약을 조달할 수 있어 유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투가 벌어지면 숫자가 모자라 탄약을 빼앗을 힘도 없기 때문에 전혀 AK가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M1카빈을 지급한 것이다. [15] 이들의 구성은 잠수함 승조원, 안내원, 육상 전투원으로 나뉘었다. 잠수함 승조원들도 공작원으로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만, 자기들 힘으로는 탈출할 능력이 안 된다고 보아 집단 자살하였다. 안내원들은 상륙하였으나 생포되거나 사살당했다. 육상으로 탈출한 공작원들은 육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보겠다는 자신이 있을 만큼 대담하고 위험한 자들이었으며 거의 최후까지 살아남아서 도피했다. [16] 66식 권총 등. [17] 신문기사 [18]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옷 말고도 운동복과 반코트를 버려 두고는 민가에서 다른 운동복으로 훔쳐 입기도 했다. 이 무장공비들의 사복에 대한 내용은 1997년 6월 25일 국방부에서 발행한 서적 "누가 이들을 나약한 신세대라 부르겠는가" 에서도 나온다. [19] 당시 뉴스 [20] 실미도 부대의 예정 침투법 [21] 평양 등 몇 개 도시 외에는 아비규환이나 다름없는 북한에서 평양 거주는 그 자체만으로 특권이다 [22] 물론 북한에서 상당한 수준의 생활수준이라고 해도 남한의 평범한 가정 생활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굶거나 생필품이 부족하지는 않는 정도에서 더도 덜도 아니라고 보면 된다. [23] 구 4급 공무원 [24] OSI의 명성이 커지다 보니 OSI를 공군의 대북정보부대로 잘못 안 사람이 많아졌다 [25] 북한어 사전: 제국주의자들에게 매수되어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간첩 [26] 관련 내용은 그것이 알고 싶다 886화에서 다뤘다. 충격적인 내용이 많으므로 시청시 주의를 요한다. 2000년도 에도 가혹행위가 계속 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27] 당시 관계자의 증언으론 히틀러 유겐트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했다고 하는데 히틀러 유겐트도 정치적 색채가 진할지언정 원칙적으로 유소년 단체였고 전쟁 막바지에서야 투입됐을 뿐이다. 하물며 저정도 어린애를 훈련시킨 건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 [28]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북파한 호림부대의 경우에도 당시 군은 청년들이 북한 인민군과 보안군 등의 억압을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나서 발생한 의거라고 발표했다. [29] Korea Special Mission Action Team. [30] 북한에서 공작원은 장교이다. [31] 다만 강릉 사건은 군과 언론의 협력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국군의 경우 공개해도 무방한 정보는 (특히 인사정보) 보안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정작 공개하면 안 되는 정보는 그냥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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